민치구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민치구는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음서로 관직에 올라 연경 사절단의 수행원을 지냈다. 철종 때 연안부사를 거쳐 고종 즉위 후 공조 판서에 이르렀으며, 고종의 외척으로 국정에도 관여했다. 1866년 고종과 명성황후의 가례를 주관하고, 익종의 옥책문 제작에 참여했다. 1874년 아들 민승호가 사망한 충격으로 병사했으며, 사후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철종 때 연안부사를 지냈다.[1] 그 뒤 1857년(철종 8년) 인천 부사와 청주 목사를 거쳐 1863년 첨지중추부사가 되었다. 그해 12월 외손자인 고종이 즉위하자 공조 참의가 되었다. 1864년(고종 1년) 5월 종2품으로 승진하여 동지돈령부사, 동지의금부사를 거쳐 9월 한성부좌윤으로 나갔다가 그해 12월 말 공조판서에 특진되었다.
2. 생애
1865년 1월 초 광주부 유수로 나갔다가 그해 7월 광주부유수로 재직 중 숭정대부로 특별 승진했다. 1866년 고종과 명성황후의 가례 때 가례 정사(嘉禮正使) 이경재(李景在)와 함께 가례부사(嘉禮副使)로 가례를 주관했다. 1866년 2월에는 익종의 옥책문 제작에 금보 전문 서사관으로 참여하고, 그해 3월 숭록대부로 가자되었다. 그해 보국숭록대부로 승진, 1868년 판의금부사, 행 지중추부사, 판돈령 부사를 역임하고 궤장을 하사받았다. 1869년 공조 판서가 되었다.
1874년 폭탄 테러로 아들 민승호와 손자가 사망하자 그 충격으로 병을 얻어 몸져 누었고 12월 14일 병사했다. 사후 바로 증 의정부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효헌(孝獻)이다.
2. 1. 초기 생애
음서로 관직에 올라 연경에 파견되는 사절단의 수행원으로 다녀온 뒤 금부도사, 사과 등을 거쳐 정선군수를 지냈다. 덕흥대원군의 후손 이옥(李𪸛)의 딸 전주 이씨와 결혼, 여흥부대부인 민씨 등의 자녀를 두었다. 한편 사위가 되는 이하응은 그의 처가와 먼 친족간이 된다.
2. 2. 관직 생활
음서로 관직에 올라 연경에 파견되는 사절단의 수행원으로 다녀온 뒤 금부도사, 사과 등을 거쳐 정선군수를 지냈다. 덕흥대원군의 후손 이옥(李𪸛)의 딸 전주이씨와 결혼, 여흥부대부인 민씨 등의 자녀를 두었다. 한편 사위가 되는 이하응은 그의 처가와 먼 친족간이 된다.
철종 때 연안부사를 지냈다.[1] 그 뒤 1857년(철종 8년) 인천 부사와 청주 목사를 거쳐 1863년 첨지중추부사가 되었다. 그해 12월 외손자인 고종이 즉위하자 공조 참의가 되었다가, 1864년(고종 1년) 5월 종2품으로 승진하여 동지돈령부사(同知敦寧府事), 동지의금부사를 거쳐 9월 한성부좌윤으로 나갔다가 그해 12월 말 공조 판서(工曹判書)에 특진되었다.
1865년 1월 초 광주부유수로 나갔다가 그해 7월 광주부유수로 재직 중 숭정대부(崇政大夫)로 특별 승진했으며, 1866년 고종과 명성황후의 가례 때는 가례 정사(嘉禮正使) 이경재(李景在)와 함께 가례를 주관하는 가례부사(嘉禮副使)에 임명되었다. 1866년 2월에는 익종의 옥책문 제작에 금보 전문 서사관으로 참여하고, 그해 3월 숭록대부로 가자되었다. 다시 그해 보국숭록대부로 승진, 1868년 판의금부사, 행 지중추부사, 판돈령 부사를 역임하고 궤장을 하사받았다. 1869년 공조판서가 되었다. 아들이 없이 일찍 죽은 10촌 동생뻘 되는 민치록에게 자신의 아들 민승호를 양자로 입양보냈다. 이로서 민승호는 고종의 외숙에서 처남이 되었다.
1874년 폭탄 테러로 아들 민승호와 손자가 사망하자 그 충격으로 병을 얻어 몸져 누었고 12월 14일 병사했다. 사후 바로 증 의정부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효헌(孝獻)이다.
2. 3. 왕실과의 관계 강화
음서로 관직에 올라 연경에 파견되는 사절단의 수행원으로 다녀온 뒤 금부도사, 사과 등을 거쳐 정선군수를 지냈다. 덕흥대원군의 후손 이옥(李𪸛)의 딸 전주 이씨와 결혼, 여흥부대부인 민씨 등의 자녀를 두었다. 한편 사위가 되는 이하응은 그의 처가와 먼 친족간이 된다.
1863년 외손자인 고종이 즉위하자 1864년 5월 종2품으로 승진, 9월 한성부좌윤으로 나갔다가 그해 12월 말 공조판서에 특진되었다. 1866년 고종과 명성황후의 가례 때는 가례 정사(嘉禮正使) 이경재(李景在)와 함께 가례를 주관하는 가례부사(嘉禮副使)에 임명되었다. 아들이 없이 일찍 죽은 10촌 동생뻘 되는 민치록에게 자신의 아들 민승호를 양자로 입양보냈다. 이로서 민승호는 고종의 외숙에서 처남이 되었다.
2. 4. 사망
閔致久|민치구중국어는 1874년 폭탄 테러로 아들 민승호와 손자가 사망하자 그 충격으로 병을 얻어 몸져 누웠고, 그해 12월 14일 병사했다. 사후 바로 영의정에 증 추증되었고 시호는 효헌(孝獻)이다.[1]
3. 가족 관계
관계 이름 비고 고조부 민진영(閔鎭永) 민진후, 민진원의 이복 동생 증조부 민악수(閔樂洙) 할아버지 민백술(閔百述) 아버지 민단현(閔端顯) 첨지중추부사 역임 부인 정경부인 전주이씨(全州李氏) 1873년 11월 17일 사망, 통덕랑 이옥(李𪸛)의 딸, 경원군 이하전의 고모 장녀 여흥부대부인 민씨(驪興府大夫人 閔氏) 1818년 - 1898년, 흥선대원군의 아내 사위 흥선대원군 이하응(興宣大院君 李昰應) 1820년 ~ 1898년 외손자 고종 이희(高宗 李熙) 외손자 흥친왕 이재면(興親王 李載冕) 장남 민태호(閔泰鎬) 민태호(閔台鎬)와는 동명이인 차남 민승호(閔升鎬) 1830년 - 1874년, 민치록에게 입적 삼남 민겸호(閔謙鎬) 1838년 - 1882년 손자 민영환(閔泳煥) 1861년 - 1905년, 민겸호의 장남 차녀 여흥민씨 1859년 - 1942년 사위 주용선 대광보국승록대부 우의정 겸 이조판서 신안주씨, (1853년 - 1925년) 외손자 주양규 신안주씨 승록대부 행 이조참판, (1904년 - 1999년)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