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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식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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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왕식렴은 왕평달의 아들로, 고려 태조 왕건의 사촌이자 개국공신이다. 평양 도호부사로 임명되어 서경을 수호하고 왕건의 즉위에 기여했으며, 정종의 명으로 함규의 반란을 진압했다. 혜종 사후 왕위 계승 투쟁에서 정종, 광종과 함께 왕규를 제거하는 데 기여했고, 정종 즉위 후 광국익찬공신에 서훈되었다. 949년 사망했으며, 시호는 위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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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식렴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왕식렴
원래 이름왕식렴(王式廉)
별명미상
출생일생년 미상
출생지개성특별시 개성
사망일949년 2월 7일 (음력 1월 7일)
사망지황해도 서경
가족 관계
아버지왕평달
어머니미상
배우자미상
자녀왕함윤
왕함순
왕풍
관직 및 직위
재위 기간918년 ~ 949년 2월 7일 (음력 1월 7일)
주군고려 태조
고려 혜종
정종
주요 관직문신
총관
집정
개국공
지휘서경 총관
기타 정보
가문개성
묘호미상
시호위정공(威靜公)
종교불교

2. 생애

왕식렴은 왕평달의 아들로, 918년에 평양 대도호부사(大都護府使)로 임명되었고, 이후 좌승(佐丞)으로 승진하였다.[1]

사촌인 태조 왕건이 사망한 후, 왕식렴은 조카인 왕요, 왕소와 손을 잡고 왕위 계승 투쟁에 참여했다. 945년, 태조와 혜종의 장인인 왕규가 자신의 외손자인 광주원군을 옹립하려 하자,[2] 왕식렴이 지휘하는 평양 군대가 왕규를 제거했다.[3]

949년 2월 7일에 사망했으며,[4] 시호는 위청(渭淸)이다.

2. 1. 개국공신과 고려 초기

왕식렴은 작제건의 아들이자 세조 왕륭의 동생인 삼중대광 왕평달의 아들이며, 태조 왕건의 사촌동생이다.[5] 918년 태조 왕건의 고려 건국을 도운 공로로 개국공신에 녹훈되었다.

군부서사(軍部書史)로 관직을 시작해 여러 직책을 역임했다. 태조가 서경(평양)을 중요시하여 서경이 황폐한 것을 보고 왕식렴을 진장(鎭將)으로 임명하니, 그는 백성을 서경에 이주시켜 채우게 하고 서경 개척에 노력하였다. 안수진, 흥덕진 등에 성을 쌓는 공을 세웠으며 여러 번 승진하여 좌승(左丞)이 되었다.[5] 평양 도호부에 임명된 후, 안수령(현재의 평안남도 개천시)이나 흥덕진(현재의 평안남도 순천시) 등에 성을 쌓아 오랫동안 서경을 수호했고, 군대를 이끌고 입경하여 왕건의 즉위에 협력했다.

사촌인 태조 왕건이 죽은 후, 왕식렴은 조카인 왕요와 왕소와 손을 잡고 왕위 계승을 위한 투쟁에 참여했다. 945년, 태조와 당시 재위 중이던 혜종의 장인인 왕규는 자신의 외손자인 광주원군을 옹립하려 시도했다.[2] 왕식렴이 지휘하는 평양의 군대는 왕규를 막고 제거할 수 있었다.[3] 같은 해 정종의 명에 따라 함규의 반란을 진압했다. 이로 인해 개국 공신에 이름을 올렸다.

949년 2월 7일에 사망했으며[4] 사후 위청(渭淸)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2. 2. 왕규의 난 진압

혜종이 병석에 눕자 태조의 서자들 간에 왕위를 놓고 경합이 벌어졌을 때, 왕식렴은 요(후에 정종으로 즉위)를 지지하였다. 왕규가 자신의 외손자를 왕위에 앉히려는 음모를 꾸미는 사이, 정종은 비밀리에 서경에 있던 왕식렴을 불러들여 대책을 세우고 있었다.[6]

혜종이 죽자 정종은 왕식렴의 세력을 등에 업고 왕위에 오르고자 했다. 왕식렴은 태조의 종친으로, 오랜 기간 서경에 있으면서 강력한 세력 기반을 쌓고 있었다. 자신의 힘만으로는 왕위 계승이 힘들다고 판단한 정종은[6] 왕식렴의 세력을 끌어들이고자 서경에 있는 왕식렴을 개경으로 불러들였다.[7] 왕식렴이 군대를 거느리고 개경에 들어오자 왕규는 힘을 쓰지 못하였다.[7]

945년 정종 즉위 후, 왕식렴은 반란 진압의 공을 인정받아 광국익찬공신(匡國翊贊功臣)에 서훈되었으며,[8] 대승(大丞)의 벼슬을 받았다.

왕식렴은 평양 도호부에 임명된 후, 안수령(현재의 평안남도 개천시)이나 흥덕진(현재의 평안남도 순천시) 등에 성을 쌓아 오랫동안 서경을 수호했고, 군대를 이끌고 입경하여 왕건의 즉위에 협력했다. 945년에는 정종의 명에 따라 함규의 반란을 진압했다.

2. 3. 생애 후반

949년 2월 7일(음력 1월 7일) 사망했다. 시호는 위정(威靜)이며, 호기위태사삼중대광개국공(虎騎尉太師三重大匡開國公)에 추서되었다.[5] 그의 사후 서경은 왕씨(王氏) 세력권에서 이탈하게 된다.

왕식렴은 군부서사(軍部書史)를 시작으로 여러 관직을 역임했다. 평양 도호부에 임명된 후, 안수령(현재의 평안남도 개천시)이나 흥덕진(현재의 평안남도 순천시) 등에 성을 쌓아 오랫동안 서경을 수호했다. 또한 군대를 이끌고 입경하여 왕건의 즉위에 협력했으며, 945년에는 정종의 명에 따라 함규의 반란을 진압하여 개국 공신에 이름을 올렸다.

3. 가계

관계이름비고
아버지왕평달고려 건국 후 삼중대광 역임
어머니미상
부인미상
아들왕함윤(王含允)
아들왕함순(王含順)
아들왕풍(王風)
백휘(白揮)에게 출가
동생왕신? ~926
동생왕육
친척왕제건태조 왕건의 숙부
사촌태조 왕건


4. 왕식렴이 등장한 작품

참조

[1] 웹사이트 왕식렴(王式廉) https://encykorea.ak[...] 2023-11-12
[2] 논문 The First Succession Struggle of Koryŏ, in 945: A Reinterpretation https://www.cambridg[...] 1977-05
[3] 서적 A New History of Korea Ilchokak 1984
[4] 웹사이트 대광 왕식렴이 죽다 https://db.history.g[...]
[5] 서적 고려명신전 성남 문화원 2004
[6] 서적 고려왕조사 이야기 청아출판사 2007
[7] 서적 고려왕조사 이야기 청아출판사 2007
[8] 서적 고려명신전 성남 문화원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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