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신 (회음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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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신은 전국 시대 초나라 출신으로, 초기에는 항우를 섬겼으나 유방에게 투항하여 한나라의 대장군이 되었다. 그는 뛰어난 군사적 재능으로 한나라의 중국 통일에 크게 기여했지만, 종리매를 숨겨준 일로 유방의 미움을 사 초나라 왕에서 회음후로 강등되었다. 이후 모반 혐의로 체포되어 처형당했으며, 그의 일생과 관련된 '가랑이 밑을 기어가는 치욕', '다다익선', '토사구팽' 등의 고사성어가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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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신 (회음후)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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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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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분 | |
작위 | 제왕 → 초왕 → 회음후 |
관위 | (초) 낭중 → (한) 연오 → 치속도위 → 대장군 |
생애 | |
출생 | 불명, 화이인 |
사망 | 기원전 196년, 장안성 미앙궁 |
사인 | 참형 |
소속 | |
소속 세력 | 항량 → 항우 → 유방 |
주요 전투 | |
전투 | 안읍 전투 정형 전투 위수 전투 해하 전투 |
주요 경력 | |
역임 | 낭중 (郎中) 208-206 BC |
역임 | 치속도위 (治粟都尉) 206 BC |
역임 | 대장군 (大將軍) 206-202 BC |
역임 | 좌승상 (左丞相) 205 BC |
역임 | 조나라 상국 (相國) 204 BC |
기타 정보 | |
별칭 | 병선(兵仙) |
관련 인물 | 소하, 장량, 팽월 |
2. 생애
한신은 전국 시대 당시 초 지역이었던 회음현(현대 장쑤성)에서 태어났다. 매우 가난하여, 그의 어머니가 죽었을 때 제대로 장례를 치를 돈이 없었다고 한다.[2] 관직을 얻지도 못하고 상인이 되지도 못해 궁핍한 삶을 살았고, 종종 다른 사람들에게 의존하여 식사를 했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았다.[3]
기원전 209년, 진나라를 전복하기 위해 중국 전역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항량의 반군에 합류했다. 항량이 정도 전투에서 전사한 후 항우(항량의 조카)를 계속 섬겼으나, 높은 평가를 받지 못하고 "낭중"(郎中; 때로는 근위대장으로 번역됨[7])으로 일했다.[8] 그는 끊임없이 항우에게 전략을 제안했지만 무시당했다.[9]
기원전 206년, 한신은 항우의 군대를 탈영하여 유방에게 합류했다.[10] 유방의 군대에서 군법을 위반하여 처형될 위기에 처했으나, 하후영 (유방의 측근 장군 중 한 명)에게 자신의 뜻을 밝혀 목숨을 건졌다. 하후영은 한신과 대화한 후 그를 유방에게 추천했지만, 유방은 한신을 식량 보급을 담당하는 치속도위(治粟都尉)로 임명했다.[11] 이 시기에 한신은 유방의 재상인 소하와 자주 만났는데, 소하는 그에게 깊은 인상을 받았다.[12]
기원전 206년 4월,[13] 유방의 군대에서 탈영한 한신을 소하가 직접 쫓아가 설득하여 데려왔다. 소하는 유방에게 한신의 재능을 설명하고 군대 최고 지위인 대장군(大將軍)으로 승진시킬 것을 강력하게 주장하며, 정식 의식을 거행할 것을 요구했다. 유방은 마지못해 특별 의식을 거행하여 한신을 대장군으로 임명했다.[14]
한신은 유방을 위해 상황을 분석하고 항우의 서초를 정복할 계획을 세웠다.[15] 기원전 206년 말, 한신은 병사들에게 잔도를 수리하는 척하게 하고, 다른 군대는 몰래 진창을 통과하여 장한을 기습하도록 하여 삼진을 점령했다.[16][17] 이 전략은 '명수잔도, 안도진창'(明修棧道, 暗度陳倉)으로 알려져 있으며, 삼십육계 중 하나가 되었다.[18]
기원전 205년 팽성 전투에서 패배한 이후, 한신은 서위왕 위표를 격파하고, 조나라를 공격하여 배수진 전술로 대승을 거두었다. 이후 광무군 이좌거의 조언에 따라 연나라를 항복시켰다.
기원전 204년, 유방이 역이기를 보내 제나라를 항복시켰음에도 불구하고, 한신은 괴철의 설득으로 제나라를 공격하여 임치를 함락시키고 전광을 성양까지 추격해 사로잡았다. 이후 유방에게 자신을 임시 왕으로 봉해달라고 청했고, 유방은 장량과 진평의 조언으로 한신을 제나라 왕으로 삼았다.
기원전 202년, 해하 전투에서 항우가 자결하면서 5년간의 초한전쟁이 끝났다. 항우가 죽은 후, 한신은 초나라 왕으로 옮겨졌고, 동해군 하비현(현 피저우시)에 서울을 두었다.[62]
기원전 202년, 항우가 죽자, 항우의 장수였던 종리말이 한신에게 피신했다. 고조는 종리말이 한신의 영토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체포 명령을 내렸지만, 한신은 이를 거절했다.[19] 1년 후, 고조는 한신이 반역을 꾀하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진평의 계책에 따라 한신을 유인하여 체포했다. 한신은 "사냥개는 사냥에 사용된 후에는 먹이가 되고, 좋은 활은 더 이상 쏠 새가 없으면 버려지며, 신하는 군주가 적국을 정복하도록 도운 후에는 죽는다."라고 외쳤다.[23] 고조는 한신을 사면했지만, "초왕"에서 "회음후"로 강등시켰다.[24]
좌천 이후, 한신은 고조가 자신을 불신하고 경계함을 알고 병을 칭하며 집에 머물렀다. 기원전 197년경, 진희가 반란을 일으키자 한신은 수도 안에서 돕겠다고 약속했다.[25] 기원전 196년 한신의 하인의 밀고로 계획이 발각되었고, 여후와 소하의 계략으로 한신은 장락궁에서 처형되었으며, 멸족되었다.[26] 한신은 죽기 전 "괴통의 조언을 듣지 않은 것을 후회한다"라는 유언을 남겼다.[27]
2. 1. 임관 전
평민 출신인 한신은 가난하고 품행이 좋지 못해 관리로 천거되지도 못하고, 생업을 꾸려나가며 장사를 하지도 못했다. 그래서 항상 남의 집에 붙어먹으며 살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그를 싫어했다. 회음현 속향 하향(下鄕)의 남창정(南昌亭) 정장(亭長)에게 몇 달 간 기식했는데, 정장 아내가 이걸 싫어해 밥을 주지 않았다. 한신은 그 속셈을 알아채고 분노해 그곳을 떠났다.[3]성 아래에서 낚시질을 하는데, 굶고 있는 그를 보고 빨래하는 여자 중 하나가 밥을 줬다. 한신은 “훗날 부인에게 반드시 많이 보답하겠소.”라고 답했지만, 그 부인은 “사내자식이 스스로 밥도 못 먹고 다니기에, 왕손[44]이 불쌍해서 밥을 좀 줬기로서니, 어찌 보답을 바라겠느냐?”라며 화를 냈다.[4]
성 내의 무뢰배 젊은이들은 칼을 차고 다니는 한신을 비웃으며, “죽음을 각오할 수 있으면 그 칼로 나를 찔러라. 못 하겠다면, 내 가랑이 밑으로 나와라!”라고 모욕을 주었다. 한신은 그 사람을 한 번 보고는 허리를 굽혀 그 가랑이 사이를 기어나갔다. 이 일은 '과하지욕(袴下之辱)'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 시장 사람들은 모두 그를 비웃으며 겁쟁이로 여겼다.[5]
몇 년 후, 초나라의 왕이 된 한신은 고향으로 돌아와 자신에게 음식을 제공했던 여인에게는 1000냥의 금을 하사했다. 남창정의 정장에게는 백 개의 동전을 주며 “당신은 좋은 사람이 아닙니다. 좋은 일을 하지만 당신의 관대함은 제한적입니다.”라고 말했다. 또한 깡패를 찾아 그를 중위(中尉; 현재의 중위에 해당)로 임명하고, 부하들에게 “이 사람은 영웅이다. 내가 그때 그를 죽여도 나는 유명해지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굴욕을 참아내어 미래에 위대한 일을 성취하기 위해 목숨을 보존했다.”라고 말했다.[6]
진(秦)의 시황제 사후, 진승·오광의 난을 계기로 대규모 동란이 시작되자, 기원전 209년에 한신은 항량을 섬기다가, 그의 조카 항우를 섬기며 낭중(화북에서는 중랑(중좌))이 되었으나, 여러 차례 올린 진언이 항우에게 채택되는 일은 없었다.
2. 2. 한나라의 대장군
한신은 항우 밑에서 낭중(郞中)이 되어 자주 간언했으나, 항우는 그의 책략을 쓰지 않았다. 기원전 206년, 진나라를 멸한 항우가 유방을 한왕으로 봉해 촉으로 보내자, 한신은 초나라를 떠나 한나라로 갔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연오(連敖)[45]가 되었다가, 법에 걸려 참형에 처해질 뻔했다. 동료 13명이 모두 처형되고 자신 차례가 되었을 때, 하후영을 만나 "전하께선 천하를 가지고 싶지 않습니까? 어찌 장사를 베리이까?"라고 말했다. 하후영은 그 말을 특이하게 여기고, 그의 행색이 건장함을 보고 풀어주고 대화한 후 유방에게 천거해 치속도위(治粟都尉)가 됐으나, 아직 유방에게서 인정받지는 못했다.[11] 이 시기에 한신은 유방의 재상인 소하와 자주 만났는데, 소하는 그에게 깊은 인상을 받았다.[12]그해 4월,[13] 유방은 대규모 병사들의 탈영에 직면했다. 한신은 하후영과 소하가 자신을 유방에게 추천했음에도 불구하고 유방이 자신을 등용하지 않자, 더 이상 머물 이유가 없다고 판단하고 그 역시 탈영했다. 소하는 한신이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즉시 직접 한신을 찾아 데려오기 위해 달려갔고, 유방에게 제때 알리지 못했다. 소하는 결국 한신을 따라잡아 그를 설득하여 다시 돌아오게 했다. 이 사건으로 "소하가 달빛 아래 한신을 쫓다"()라는 말이 생겨났다. 한편 유방은 소하가 자신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정신적으로 불안해했다. 소하가 며칠 후 돌아왔을 때, 유방은 안도했지만 동시에 분노했다. 그는 소하에게 화를 내며 "어째서 도망갔느냐?"라고 물었다. 소하는 "도망간 것이 아니라 한신을 쫓아갔습니다"라고 설명했다. 유방은 다시 화를 내며 "수십 명의 탈영병이 있었지만 그들을 쫓지 않았으면서 한신을 쫓아갔다고 하는 것은 나를 속이는 것이 분명하다"라고 말했다. 소하는 한신의 재능을 설명하고 유방에게 한신을 즉시 군대 최고 지위인 대장군(大將軍)으로 승진시키라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소하는 또한 유방의 평소 무례한 행동을 꾸짖으며 유방에게 이 임명을 위한 정식 의식을 거행할 것을 요구했다. 유방은 마지못해 한신의 임명을 위한 특별 의식을 거행했다.[14]
유방은 소하의 천거로 한신을 대장군으로 삼기로 하고 즉시 임명하려 했으나, 소하는 무례한 태도로는 안 된다며 좋은 날짜를 잡고 목욕재계하고 단을 쌓고 예를 갖춰야 한다고 했다. 유방은 그대로 했고, 모든 장수들은 자기가 대장군이 될 것이라 생각하고 기뻐했는데, 막상 한신이 대장군이 되니 모두 경악했다.
예식이 끝난 후, 한신은 유방에게 항우의 약점을 다음과 같이 분석하고, 관중을 정복할 계획을 세웠다.[15]
- 첫째, 항우는 용맹하지만 현능한 장수에게 임무를 맡기지 못하니 이것은 필부의 용맹(匹夫之勇)일 뿐이다.
- 둘째, 항우는 남을 공경하며 자애하고 병든 사람을 위해 울며 음식을 나누지만, 정작 공을 세운 사람에게 작위를 줄 때에는 도장이 닳도록 망설이니 이른바 부인의 어짊(婦人之仁)일 뿐이다.
- 셋째, 천하를 아우르면서 관중이 아니라 팽성에 도읍을 두었다.
- 넷째, 의제와 약속을 어기고 친애하는 사람을 왕으로 세우니 제후들이 불평한다.
- 다섯째, 제후들에게 자기 주인 의제를 강남으로 내쫓은 것을 보여줘, 그들이 제 주인을 내쫓고 좋은 땅에서 왕노릇하게 했다.
- 여섯째, 가는 곳마다 학살하므로 사람들이 원망하고 가까이하지 않으며, 무서워서 그 위세에 눌렸을 뿐이니, 패자라 하나 실은 인심을 잃었다.
그리고 옛 진나라 장수 옹왕 장한, 새왕 사마흔, 적왕 동예와 유방을 비교해 유방이 삼진의 왕보다 우위에 있다고 말했다. 유방은 함부로 사람들을 죽이지 않고 진나라의 가혹한 법을 완화해 진나라 사람들의 인망을 샀고, 의제의 약속에 따라 가장 먼저 관중에 들어왔으므로 관중의 왕이 될 자격이 있으며 진나라 백성들도 유방을 따를 것이라 했다.
유방은 한신의 제안을 기뻐해, 기원전 206년 말, 한신의 계책에 따라 즉시 삼진을 칠 장군들의 부서를 정했다.[16][17] 한신은 일부 병사들에게 관중과 한중을 잇는 잔도를 수리하는 척하게 하고, 다른 군대는 몰래 진창을 통과하여 장한을 기습하도록 명령했다. 장한은 방심했고 한나라는 승리를 거두어 사마흔과 동예의 왕국을 점령했다. 한신이 사용한 전략은 '명수잔도, 안도진창'(明修棧道, 暗度陳倉; '잔도를 수리하는 척하며 진창을 통해 몰래 진격한다'는 의미)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는 삼십육계 중 하나가 되었다.[18]
기원전 205년, 새왕 사마흔, 적왕 동예, 하남왕 신양이 모두 항복했다. 왕흡과 설구는 무관을 나와 남양의 왕릉과 합류해 패에 있는 유방의 가족들을 데려오게 하니, 항우가 새로 세운 한(韓)나라 왕 정창이 저항했다. 유방은 한나라 왕족으로 한나라 태위를 맡은 한신을 시켜 정창을 무찌르고 대신 한왕으로 삼았다. 3월, 임진에 이르자 서위왕 위표가 나와서 항복했고, 은왕 사마앙을 사로잡았다. 이렇게 삼진과 함곡관 밖의 하남, 한, 은을 평정했다. 그리고 조나라, 제나라의 도움까지 얻어 초나라로 진격해, 4월에 팽성에 이르렀으나 항우의 반격을 받아 뿔뿔이 흩어져 돌아갔다(팽성 전투). 한신은 이 패잔병들을 모아 유방과 합류하고, 경과 색 사이에서 초나라의 추격군을 격퇴해 초나라가 더 서쪽으로 진격하지 못하게 했다.
2. 3. 북벌
한신은 팽성 전투에서 패배한 한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서위왕 위표를 쳐서 한나라의 불리한 정세를 전환하고자 했다. 유방은 한신을 좌승상으로 삼고, 조참, 관영과 함께 위나라를 공격하게 했다. 한신은 위나라 장수 백직(柏直)이 자신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고 판단하고 출정했다.[48]한신은 황하를 건너기 위해 목앵부(木罌缶)를 사용, 안읍(安邑)을 습격하여 위표를 사로잡았다.[47][48] 이후 유방에게 3만 명의 증원을 요청하여 승인을 받고, 장이와 함께 대나라와 조나라를 공격했다. 대나라를 격파하고 대나라 재상 하열(夏說)을 사로잡았다.[54]
한신과 장이는 조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정형(井陘)으로 진군했다. 조나라 군대는 20만 대군으로 정형구(井陘口)에 집결했고, 광무군 이좌거는 한신군의 보급로를 끊는 계책을 제안했으나 성안군 진여는 이를 거부했다. 한신은 이 정보를 입수하고, 배수진(背水陣) 전술을 사용하여 조나라 군대를 대파하고 진여를 죽이고 조왕 헐을 사로잡았다.[47][48]
전투 후, 한신은 광무군 이좌거를 생포하여 스승으로 모시고, 그의 조언에 따라 연나라에 사신을 보내 항복을 받아냈다. 그리고 장이를 조나라 왕으로 세울 것을 유방에게 청하여 승인을 받았다.[47][48]
이후 유방이 초나라와의 전투에서 위기에 처하자, 한신은 장이와 함께 조나라를 구원하고, 유방에게 구원군을 보냈다. 유방은 한신의 군대를 빼앗아 장이는 조나라를 지키게 하고, 한신을 상국으로 임명하여 조나라의 신병을 모아 제나라를 치게 했다.[56]
2. 4. 제나라 왕
한왕 3년(기원전 204년) 9월, 유방이 역이기를 보내 제나라를 항복시켰다.[48] 한신은 이 소식을 듣고 제나라 정벌을 멈추려 했으나, 괴철이 역이기보다 못한 평가를 받을 것을 우려하여 제나라 원정을 강행하자고 설득했다. 한신은 이를 따라 강을 건너 역하의 제나라 군대를 기습했다. 제나라는 한나라와 화친했으므로 대비를 하지 않아 한신의 공격에 패배했고, 임치까지 함락되었다. 전광은 고밀로 달아나 항전하며 초나라에 구원병을 청했다. 한신은 임치를 평정하고 고밀까지 추격했고, 초나라는 용저에게 20만 군대를 보내 제나라를 구원하게 했다. 한왕 4년(기원전 203년) 10월의 일이었다.[48]용저는 한신을 우습게 여기고 개전을 결심했다. 양측이 유수(濰水)를 끼고 진을 쳤을 때, 한신은 밤중에 모래주머니로 상류를 막고 공격했다가 거짓 후퇴했다. 용저가 추격하자 둑을 터뜨려 용저 군 대부분이 건너지 못한 상황에서 공격하여 용저를 죽였다. 강 동편의 용저 군은 달아났고, 전광은 떠났다. 한신은 성양까지 추격해 전광을 사로잡고 초나라 군을 항복시켜 제나라를 평정했다. 한왕 4년(기원전 203년) 11월의 일이었다.[48] 그러나 한신의 무리한 제나라 정복으로 제나라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조참 등 상당수의 병력이 해하 전투에 참전하지 못하고 제나라에 묶여있어야 했다.[59]
한신은 제나라 정벌 후 제나라의 반란을 핑계로 유방에게 자신을 임시 왕으로 봉해달라고 청했다. 유방은 분노했으나, 장량과 진평의 조언으로 한신을 제나라 왕으로 삼고 초나라를 치게 했다.[48][60]
2. 5. 한나라의 중국 통일
기원전 206년 말, 유방의 군대는 한중을 떠나 관중의 삼진을 공격할 준비를 했다. 이때 한신은 일부 병사들에게 관중과 한중을 잇는 잔도를 수리하는 척하게 하고, 다른 군대는 몰래 진창을 통과하여 장한을 기습하도록 명령했다. 장한은 방심했고 한나라는 승리를 거두어 사마흔과 동예의 왕국을 점령했다.[16][17] 한신이 사용한 전략은 '명수잔도, 안도진창'(明修棧道, 暗度陳倉; '잔도를 수리하는 척하며 진창을 통해 몰래 진격한다'는 의미)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는 삼십육계 중 하나가 되었다.[18]이후 초한전쟁은 광무산에서 장기간 대치 상태로 이어졌고, 양측 군대는 지쳐 화해하고 각자의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그러나 유방은 강화 조약을 파기하고 철수하는 초나라 군대를 공격했다. 한신도 지원 요청을 받았지만 묵살하여 유방은 패배했다. 유방은 장량의 조언에 따라 한신에게 제, 제북, 교동을 포함하는 제나라 왕의 지위를 약속하고 다시 원군을 요청했다. 이에 한신은 30만 대군을 이끌고 참전했다. 다른 제후들도 잇따라 한나라 군대에 참전했다. 한나라 군대는 해하 전투에서 초나라 군대를 몰아붙였고, 항우는 기원전 202년 겨울 12월에 오강(현재의 안후이성마안산시허현 오강진)에서 자결하면서 5년간의 초한전쟁은 끝났다.
2. 6. 초나라 왕
항우가 죽은 후, 회군하던 중 정도에서[48] 유방의 습격을 받아 군대를 빼앗기고 제나라 대신 옛 항우가 18제후왕 분봉 당시에 받은 서초 일대를 받아 초나라 왕으로 옮겼고, 동해군 하비현(현 피저우시)에 서울을 두었다. 강요된 봉토 이전이기는 해도, 초나라는 한신의 고향 땅이며, 규모도 89현으로 73현의 제나라보다 더 컸다.[62] 정월에는 다른 제후왕들과 함께 상소해 유방에게 황제의 존호를 바쳤다.[48]초나라에 와서는 밥을 얻어먹은 빨래하는 여자를 불러 천금을 주었고, 하향의 남창정장에게는 밥을 주다 말았다며 돈 100을 주었다. 그리고 자기를 가랑이 밑으로 기어 모욕을 준 사람도 불러 중위로 삼고, 여러 장상들에게 말했다.
“이자는 장사다. 나를 욕보였을 당시에 내가 어찌 죽일 수 없었겠는가? 죽여도 이름을 낼 수 없어 지금 성공하기까지 참은 것이다.”
202년, 항우가 죽자, 종리말 (항우의 장수 중 한 명)이 한신에게 와서 피신처를 요청했다. 과거의 우정 때문에 한신은 종리말을 보호하고 그와 함께 머물게 했다. 고조는 종리말이 한신의 영토에 숨어 있다는 소식을 듣고 한신에게 종리말을 체포하라고 명령했지만, 한신은 거절했다.[19]
1년 후, 고조는 한신이 반역을 꾀하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당시 장량은 이미 정치에서 물러났고, 진평이 고조의 가장 신뢰받는 조언자였다. 논의 끝에 그들은 고조가 전투에서 한신을 이길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고, 한신이 준비되지 않았을 때 그를 공격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라고 판단했다. 진평은 고조가 운몽(현재의 강한 평원, 후베이 성)을 순찰하는 핑계로 한신을 유인해 만나자는 제안을 했다. 그는 이 메시지를 전국 각지의 제후들에게 보냈다. 한신은 고조가 초나라 땅으로 향한다는 소식을 듣고 반역을 일으키려는 본능을 느꼈지만, 자신이 죄를 범하지 않았다고 판단하고 가만히 있었다.[20] 이때 누군가가 한신에게 종리말의 머리를 고조에게 바치면 그가 기뻐하며 한신을 용서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신은 종리말을 만나 그들의 다음 행동 방침을 결정했고, 이 아이디어를 꺼냈다. 종리말은 즉시 자신의 목을 베었지만, 한신도 곧 따라올 것이라고 말했다.[21] 한신은 종리말의 잘린 머리를 고조에게 가져가 자신의 무죄를 설명했지만, 고조는 한신을 체포하라고 명령했다.[22] 한신은 외쳤다. "사람들이 말하는 것이 사실이로다. 사냥개는 사냥에 사용된 후에는 먹이가 되고, 좋은 활은 더 이상 쏠 새가 없으면 버려지며, 신하는 군주가 적국을 정복하도록 도운 후에는 죽는다. 이제 천하가 안정되었으니, 나는 더 이상 아무런 쓸모가 없다!"[23] 유방의 유일한 대답은 "누군가 당신이 반역했다고 주장했다"였고, 한신에게 수갑을 채워 낙양으로 데려갔다. 고조는 한신을 사면하고 나중에 풀어주었지만, 한신의 지위를 "초왕"에서 "회음후"로 강등시켰다.[24]
2. 7. 회음후로의 폄작, 죽음
기원전 202년, 항우가 죽자, 항우의 장수였던 종리말이 한신에게 피신했다. 과거의 우정으로 한신은 종리말을 숨겨주었다. 고조는 종리말이 한신의 영토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체포 명령을 내렸지만, 한신은 이를 거절했다.[19]1년 후, 고조는 한신이 반역을 꾀하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진평의 계책에 따라 고조는 운몽(현재의 강한 평원, 후베이성)을 순찰하는 핑계로 한신을 유인해 만나자는 제안을 했다. 한신은 고조가 초나라 땅으로 향한다는 소식을 듣고 반역을 의심했지만, 자신이 죄를 범하지 않았다고 판단하고 가만히 있었다.[20] 이때 누군가가 한신에게 종리말의 머리를 바치면 고조가 기뻐하며 용서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신은 종리말에게 이 아이디어를 말했고, 종리말은 자결했다.[21] 한신은 종리말의 잘린 머리를 고조에게 가져가 자신의 무죄를 설명했지만, 고조는 한신을 체포하라고 명령했다.[22] 한신은 "사냥개는 사냥에 사용된 후에는 먹이가 되고, 좋은 활은 더 이상 쏠 새가 없으면 버려지며, 신하는 군주가 적국을 정복하도록 도운 후에는 죽는다. 이제 천하가 안정되었으니, 나는 더 이상 아무런 쓸모가 없다!"라고 외쳤다.[23] 유방은 "누군가 당신이 반역했다고 주장했다"라고 말하며 한신에게 수갑을 채워 낙양으로 데려갔다. 고조는 한신을 사면했지만, "초왕"에서 "회음후"로 강등시켰다.[24]
기원전 201년, 고향 출신 옛 친구였던 초나라 장군 종리매를 숨겨준 일로 한신은 유방의 미움을 샀고, "한신에게 모반 혐의가 있다"라는 참언으로 인해 종리매에게 자결을 권했다. 종리매는 "다음은 당신 차례요"라고 말하며 스스로 목을 베었다. 한신은 그 목을 가지고 알현했지만, 모반 혐의로 체포되었다. 한신은 범려의 말을 인용하며 유방에게 항변했다. 유방은 모반 혐의에 대해서는 보류하고, 한신을 회음후로 강등시켰다.
좌천 이후, 한신은 고조가 자신을 불신하고 경계함을 알았다. 그래서 병을 칭하며 집에 머물면서 고조의 의심을 줄였다. 기원전 197년경, 진희(양하후)는 거록으로 떠나기 전 한신을 만났고, 한신은 진희가 반란을 일으키면 수도 안에서 돕겠다고 약속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진희가 반란을 일으켰고 고조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진압하러 갔지만, 한신은 병을 핑계로 뒤에 남았다.[25]
고조가 자리를 비운 사이, 한신의 하인 중 한 명이 그를 모욕하여 한신은 그를 가두었다. 그 하인의 어린 동생은 한신의 반란 의사를 여후에게 알렸고, 여후는 소하와 공모하여 한신을 함정에 빠뜨리기로 했다. 소하는 한신을 설득하여 장락궁으로 오게 했고, 한신은 문을 들어서자마자 묶여 처형되었다. 한신의 일족도 멸족되었다.[26] 고조는 원정에서 돌아와 한신의 죽음을 알고 안도감과 후회를 동시에 표현했다. 그는 여후에게 한신의 유언을 물었고, 한신의 유언은 "괴통의 조언을 듣지 않은 것을 후회하며, 이제 저런 비열한 자들에게 속다니. 이것이 하늘의 뜻이다!"였다.[27]
기원전 196년 봄, 진희는 거록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유방은 진압을 위해 친정하여 도성을 비웠다. 한신은 장안에서 반란을 일으켜 정권을 빼앗으려고 꾀했지만, 하인 낙설의 밀고로 계획은 사전에 발각되었다.[38] 여후에게 상담받은 상국 소하는 한신을 유인하여 붙잡았다. 한신은 미앙궁 안에서 참수되었으며, 죽기 직전에 "괴통의 권유를 따르지 않은 것이 한스럽다"라고 유언을 남겼다. 한신의 삼족도 처형되었다.
3. 평가
사마천은 주공, 소공, 강태공에 비견될 만한 인재였던 한신이 겸손하지 못하고 오만하여 자멸했다고 평가했다.[33] 고조가 자신을 불신하고 경계하자, 한신은 병을 칭하며 집에 머물렀다.[25]
역사가들은 한신의 반란 가능성에 대해 논쟁을 벌여왔다. 사기에는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지만, 많은 이들은 한신이 죽을 때까지 충성을 지켰다고 믿는다. 여후와 소하가 유방의 지시를 받아 한신을 반역죄로 모함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한신의 명성이 높고 재능이 뛰어나 황위에 위협이 되었기 때문이다. 당나라 시인 허혼은 "한신사"에서 군사력을 쥔 한신이 충성을 지키기는 어려웠겠지만, 병사 하나 없이 반란을 일으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29]
사마광은 한신이 전한 건국에 큰 공을 세웠으나, 항우와의 성양 전투에서 고조를 돕지 않았고, 고릉 전투에서 약속을 어겨 고조를 패배하게 한 점 등 한신에게도 잘못이 있다고 평가했다.[34]
사마천은 "한신은 평민일 때부터 뜻이 남달랐다... 만약 한신이 겸손하고 자신의 공적을 자랑하지 않았다면, 주 왕조에 대한 주공, 소공, 강태공의 공적에 비견되며, 자손 대대로 칭송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한신은 그러지 않고 천하가 안정된 뒤 반역을 꾀해 일족이 멸망당했다."라고 평했다.[39]
4. 고사성어
- '''토사구팽(兎死狗烹)''' : 춘추전국시대 월나라 왕 구천의 신하인 범려가 처음 사용한 표현이다. 범려는 오나라를 멸하고서 구천의 심중을 꿰뚫어보고 관직을 내놓으면서 문종에게 함께 물러나자고 권하면서 이 표현을 썼다. 사기 회음후열전에 따르면, 한신은 유방에게 사로잡혀 압송될 때 이 고사를 인용했다.[30]
- '''가랑이 밑을 기어가는 치욕''' (胯下之辱|과하지욕중국어) : 굴욕적인 사건을 묘사하는 데 사용된다. 한신이 불량배에게 괴롭힘을 당한 사건에서 유래되었다.
- '''한신이 병사를 선택할 때,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 유방과의 대화에서 유래되었다. 유방이 한신에게 지휘할 수 있는 병사 수를 묻자, 한신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습니다."라고 대답했다.
- '''성공과 실패는 모두 소하 때문이며, 삶과 죽음은 두 여자 때문이다''' : 소하는 한신이 장군이 되도록 도왔지만, 한신의 몰락 또한 소하 때문이었다. 한신은 음식을 제공한 노파에게서 "생명"을 얻었고, 그의 죽음은 여태후 때문이었다.
5. 기타
한신의 일생에서 유래된 몇몇 성어와 속담은 다음과 같다.
- '''가랑이 밑을 기어가는 치욕'''(胯下之辱|과하지욕중국어): 굴욕적인 사건을 묘사하는 데 사용된다. 이 성어는 한신이 불량배에게 괴롭힘을 당한 사건에서 유래되었다.
- '''한신이 병사를 선택할 때,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韓信點兵,多多益善|한신점병, 다다익선중국어): 유방과의 대화에서 유래되었다. 유방이 한신에게 "내가 몇 명의 병사를 지휘할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라고 묻자, 한신은 "최대 10만 명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유방이 "그럼 너는?"이라고 묻자 한신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유방은 "그러면 내가 너를 이길 수 없다는 뜻이냐?"라고 말했고, 한신은 "아닙니다. 주군께서는 장수를 지휘하시고 저는 병사를 지휘합니다."라고 설명했다.
- '''성공과 실패는 모두 소하 때문이며, 삶과 죽음은 두 여자 때문이다'''(成也蕭何, 敗也蕭何|성야소하 패야소하중국어): 소하는 한신이 장군이 되도록 도왔고, 이는 한신이 그의 재능을 잘 활용할 수 있게 했다. 그러나 한신의 몰락 또한 소하 때문이었다. 초창기에 한신은 음식을 제공한 노파에게서 "생명"을 얻었다. 그의 죽음은 여태후 때문이었다.
한신이 가택 연금 상태에 있을 때, 그는 장량과 함께 병법서를 대량으로 정리했다. 그들은 182권의 책을 엮어 일부를 삭제하고 신뢰할 수 있는 부분을 선택하여 35권의 책을 만들었다.[30] 한신 자신도 군사 전략에 관한 세 편의 글을 썼다.[31]
그의 후손들은 오늘날 광둥 및 광시 지역으로 피신하여 성을 위(韋)로 바꾸었다고 한다.[32]
한신의 생애를 다룬 작품으로는 중국의 텔레비전 드라마 『항우와 유방 - 배수진(원제: 淮陰侯韓信, 1991년, 배우: 장펑이)가 있다. 또한, 중국 영화 『초한지: 영웅의 부활(원제: 王的盛宴, 2012년, 배우: 장첸)에서도 주요 등장인물 중 한 명으로 등장한다.
- 대만에서는 한신이 마작과 주사위의 발명자라는 설이 있어 한신을 "도박의 신"·"재신"으로 숭배하기도 한다.[40][41]
- 앞서 언급했듯이 한신의 삼족은 처형되었지만, 명나라의 래원성이 기록한 "초서"에 따르면, 한신의 3살 난 아들이 소하에게 숨겨져 성을 위(韋)로 바꾸고 남월의 조타에게 도망쳤다는 이야기가 있다. 광서 위씨는 한신의 자손을 자처하고 있다.
- 모모야의 자차이 광고에서 "한신의 가랑이 밑을 기어가는 일화"가 소재로 사용되었다.[42]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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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信崇拜的歷史源流與在台灣的發展─以台中寶林寺為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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賭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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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中国物語篇 {{!}} のり平アニメCMギャラリー {{!}} 懐かしののり平アニメCM {{!}} 広告ギャラリ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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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3-20
[43]
문서
진나라의 행정구역 기준으로 회음현은 동해군에 속한다. 한신이 초왕에서 쫓겨난 직후 동해군이 동해군과 [[광릉군|동양군]]으로 분할된 뒤에는 동양군에 속하며, 한신 사후 79년 후인 기원전 117년에 광릉군(동양군의 새 이름)이 [[임회군]]과 광릉국으로 분할돼, 전한 멸망까지 임회군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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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진짜 왕의 자손이라는 게 아니라, 왕손이나 공자처럼 사람이 귀해 보인다는 말이다.
[45]
문서
사기 삼가주에서 서광은 [[대홍려|전객]](典客)이라 했고, 이기는 초나라 관직 이름이라 했고, 장안은 [[사마 (벼슬)|사마]]라 했다.
[46]
문서
농서군의 속현.
[47]
서적
사마천: 《사기》 권16 진초지제월표
[48]
서적
반고: 《한서》 권1 상 고제기제1 상
[49]
서적
'[[사마천]]: 《[[사기 (역사서)|사기]]》 권92 회음후열전제32 {{위키문헌언어-줄|zh|史記/卷092|사기 권92 회음후열전}}'
[50]
서적
사마천: 《사기》 권54 조상국세가
[51]
문서
포판은 하동군의 속현으로 지금의 [[융지시]]에, 임진은 내사의 직할현으로 지금의 [[다리현]]에 있으며 서로 황하를 끼고 마주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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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지금의 [[한청시]]에 있다.
[53]
문서
하동군의 속현으로 [[윈청시]] [[샤현]] 북서에 있다.
[54]
서적
사마천: 《사기》 권89 장이진여열전제29
[55]
문서
한서 이현주에서 인용한 맹강의 설에 따르면 알여는 [[상당군]] 습현에 있는 읍의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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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사마천: 《사기》 권54 조상국세가제24
[57]
문서
사실 장이가 왕이 되는 것은 한왕 3년(기원전 203년) 11월이다.
[58]
서적
사마천: 《사기》 권94 전담열전제34
[59]
서적
사마천: 《사기》 조상국세가
[60]
문서
《사기·회음후열전》과 《한서·한신열전》에서는 유방이 형양에서 급히 초나라에 포위돼 곤고하던 처지였다고 하는데, 이건 형양이 함락되던 6월의 상황에 더 어울린다.
[61]
서적
사마천: 《사기》 권8 고조본기제8
[62]
문서
《한서·고제기》에서 고제 6년(기원전 201년) 한신의 초나라를 둘로 쪼개 만들어진 유고의 형나라와 원왕의 초나라가 각각 53, 36현이었으니 둘을 합한 한신의 초나라의 규모는 89현에 해당하며, 복국된 도혜왕의 제나라는 73현이었다.
[63]
문서
초나라 [[동해군]] 구현(현 [[롄윈강시]] 남서)에 있는 읍이다.
[64]
서적
사마천: 《사기》 권56 진승상세가제26
[65]
문서
《사기·고조본기》에서는 한신을 사로잡고 10여 일 후 사면해 회음후로 삼았다고 하며, 《사기·고조공신후자연표》에서는 고제 6년(기원전 201년) 4월에 봉했다고 한다.
[66]
서적
사기 고조공신후자연표
[67]
문서
《사기·회음후열전》을 따른 것으로, 《한서·한신열전》에는 而가 없고 善 대신 辦으로 나온다.
[68]
문서
《사기》에서는 21위, 《한서》에서는 22위라 한다.
[69]
문서
상제를 피휘해 융려라고도 한다.
[70]
문서
《사기》에는 순위가 기록되어 있지 않다.
[71]
서적
사기
[72]
서적
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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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사기
[74]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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