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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융 (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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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왕융은 서진 시대의 인물로, 죽림칠현 중 한 명이다. 어려서부터 영특하여 조예와 완적의 인정을 받았으며, 사마소의 초빙을 받아 위나라와 서진에서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형주자사, 예주자사, 건위장군을 거쳐 오나라 정벌에 참여하여 공을 세웠으며, 혜제 시대에는 태자태부, 광록대부, 중서령을 역임했다. 관리 임용 제도인 갑오제를 실시했으나 폐단이 발생하기도 했다. 300년 사마륜의 난에 연루되어 면직되었고, 305년에 사망했다. 왕융은 인색하다는 평을 받기도 했지만, 정치적 혼란 속에서도 비교적 무난한 삶을 살았으며, 그의 가계는 친척이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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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융 (서진)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산도와 왕융
4세기 부조에 묘사된 산도(왼쪽)와 왕융(오른쪽)
이름왕융
로마자 표기Wang Rong
출생234년
출생지린이시, 산둥성
사망305년 7월 11일
사망지자현, 허난성
준충 (濬沖)
시호원 (元)
작위안풍후 (安豐侯)
아버지왕혼 (王渾)
자녀왕완 (王萬)
왕흥 (王興)
배위의 아내 (딸)
직업군사 장군, 시인, 정치인
관직 경력
사도 (司徒)재임 시작: 302년
재임 종료: 305년
상서령 (尚書令)재임 시작: 301년
재임 종료: 302년
이부상서 (吏部尚書)재임 시작: 291년
재임 종료: 297년
상서좌복야 (尚書左僕射)재임 시작: 291년
재임 종료: 297년
광록대부 (光祿大夫)재임 시작: 291년
재임 종료: 291년
중서령 (中書令)재임 시작: 291년
재임 종료: 291년
태자태부 (太子太傅)재임 시작: 290년
재임 종료: 291년
군주혜제
광록훈 (光祿勳)재임 시작: 284년
재임 종료: 290년
시중 (侍中)재임 시작: 282년
재임 종료: 284년
건위장군 (建威將軍)재임 시작: 278년
재임 종료: 280년
예주자사 (豫州刺史)재임 시작: 278년
재임 종료: 280년
형주자사 (荊州刺史)재임 시작: 276년
재임 종료: 278년
군주무제
사도 (司徒)재임 시작: 297년
재임 종료: 300년

2. 생애

왕융은 죽림칠현 중 한 사람으로, 어릴 때부터 영특하여 조예완적의 인정을 받았다. 아버지 왕혼이 세상을 떠나자 아버지의 관직을 이어받았다. 사마소의 초빙을 받아 위나라서진에서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관직 생활 동안 이부황문(吏部黄門), 산기상시(散騎常侍), 하동태수(河東太守), 형주자사(荊州刺史)를 거치며 승진했다. 형주자사 시절 역인(役人)을 사적인 용무로 사용하다 면직될 위기에 처했으나, 벌금을 내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이후 예주자사(豫州刺使)가 되었고 건위장군(建威將軍)을 겸직했다. 279년 서진이 오나라를 정벌할 때 왕준과 함께 무창을 공격하여 오나라를 멸망시키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이 공으로 양양현후(安豊亭侯)로 책봉되었다. 오나라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시중(侍中)이 되었으나, 뇌물 수수 혐의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사마염이 그를 감쌌다.

어머니 상을 치르기 위해 관직에서 물러났으나, 사마충이 즉위한 후 양준이 정치를 독식하자 태자태부에 임명되었다. 양준이 주살된 후, 사마요가 제멋대로 행동했기 때문에 왕융은 이를 간했다. 광록대부·중서령이 되었다. '갑오제'라는 관료 등용 제도를 시작했지만, 부정의 온상이 되고 있다고 지탄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외척인 가씨와 곽씨와 결탁했기 때문이었다.

297년 삼공사도까지 올랐으나, 300년 사위 배위와 연루되어 면직되었다. 그 후에도 조정의 요직에 취임했음에도 불구하고 팔왕의 난의 정치적 혼란 속에서, 적극적인 정치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305년 왕융은 세상을 떠났으며, 아들 왕만(王万)은 젊어서 요절하였고, 다른 아들 왕흥(王興)은 서자였기 때문에, 그의 친척이 대를 잇게 되었다.

2. 1. 초기 생애와 명성

왕융은 죽림칠현 중 한 사람으로, 어릴 때부터 영특하여 그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조예(명제)와 죽림칠현의 일원인 완적에게 능력을 인정받았다. 완적은 아버지와 친구였지만, 자신보다 20살 어린 왕융과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했다. 양주자사(涼州刺史)를 지낸 아버지 왕혼이 죽자, 옛 하인들이 부의금을 가지고 조문을 왔지만, 왕융은 부조를 모두 받지 않아 명성을 높였다.

왕융은 체격이 작았지만 떳떳하게 행동했고, 반드시 예에 얽매이지 않았다. 말하기를 좋아하고 술을 즐기며 완적 등과 죽림에서 놀았다. 촉 정벌에 나서는 종회가 상담을 해왔을 때, 도교의 말을 인용하며 말한 발언은 종회의 운명을 꿰뚫어 본 것이었기에 식자들에게 칭찬받았다.

2. 2. 조위와 서진에서의 관직 생활

죽림칠현 중 한 명이었던 왕융은 어릴 때부터 영특하여 조예완적의 인정을 받았다. 아버지 왕혼이 세상을 떠나자 왕융은 아버지의 관직을 이어받았다.[1] 사마소의 초빙을 받아 위나라서진에서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1]

관직 생활 동안 이부황문(吏部黄門), 산기상시(散騎常侍), 하동태수(河東太守), 형주자사(荊州刺史)를 거치며 승진했다.[1] 하지만 형주자사 시절 역인(役人)을 사적인 용무로 사용하다 면직될 위기에 처했으나, 벌금을 내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1]

이후 예주자사(豫州刺使)가 되었고 건위장군(建威將軍)을 겸직했다.[1] 279년 서진이 오나라를 정벌할 때 왕준과 함께 무창을 공격하여 오나라를 멸망시키는 데 큰 공을 세웠다.[1] 이 공으로 양양현후(安豊亭侯)로 책봉되었다.[1] 오나라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시중(侍中)이 되었으나, 뇌물 수수 혐의를 받기도 했다.[1] 하지만 사마염이 그를 감쌌다.[1]

어머니의 상을 치르기 위해 관직을 그만두기도 했으나, 사마충이 즉위한 후 양준이 정치를 독식하자 태자태부(太子太傅)로 임명되었다.[1] 사마위와 사마요가 양준 일당을 제거한 후, 사마요가 제멋대로 행동하자 이를 충고하기도 했다.[1] 이후 광록대부(光祿大夫) · 중서령(中書令)이 되었다.[1]

왕융은 관리 임용 제도인 '갑오제'(甲午制)를 실시했으나, 폐단이 발생하기도 했다.[1]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씨(賈氏) · 곽씨(郭氏)와의 인척 관계를 통해 자신의 지위를 유지했다.[1]

2. 3. 어머니의 죽음과 양준의 죽음

어머니 상을 치르기 위해 관직에서 물러난 왕융은 아버지에게 효성이 지극했기에 순식간에 쇠약해졌다. 그 모습은 유의에게 "죽은 효"라고 평가받았고, 신변의 안전을 걱정한 무제(사마염)는 왕융에게 약을 주고 의사에게 진료를 받게 했다.[3]

무제 사후, 외척 양준이 실권을 잡자 왕융은 태자태부에 임명되었다.[3] 양준이 주살된 후, 동안공 사마요가 제멋대로 행동했기 때문에 왕융은 이를 간했다.[4]

2. 4. 갑오제와 팔왕의 난

죽림칠현 중 한 명인 왕융은 '갑오제'라는 관료 임용 제도를 실시했으나, 여러 폐단이 발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씨(賈氏)와 곽씨(郭氏)와 인척 관계를 맺어 자신의 지위를 유지했다.[1]

297년 삼공(三公) 중 하나인 사도(司徒)에 올랐으나,[1] 300년 조왕(趙王) 사마륜(司馬倫)이 혜제의 황후였던 가씨와 그 일파를 제거할 때, 왕융의 사위 배위(裴頠)가 연루되어 처형되었다. 왕융 또한 연좌되었지만, 처벌은 면직에 그쳤다.[1]

305년 왕융은 세상을 떠났다.[1]

2. 5. 가계와 후사

왕웅을 할아버지로, 왕혼을 아버지로 두었다.[2] [3] 아들 왕만(王万)은 요절하였고, 서자 왕흥(王興)이 있었으나 대를 이을 수 없었기 때문에, 그의 친척이 대를 이었다.

3. 인물됨과 평가

왕융은 명성이 지닌 위험성을 일찍이 간파하고, 위정자로부터 불필요한 혐의를 받지 않도록 인색함이라는 오명을 써서 고의로 명성을 낮추려 했다. 아버지 왕혼이 사망했을 때, 양주 시대의 옛 관리들로부터 수백만 전의 조문이 들어오자, 그는 일절 받지 않았다. 이것이 그의 본래 성향이었고, 아버지의 죽음에 동요했기 때문에 "연극"을 잊는 일이 종종 있었다고 한다.[1]

어린 시절부터 문재에 뛰어났고, 순우(순욱의 셋째 아들 순유의 아들)와 두묵 등과 친교가 있었다. 또한 광록대부의 자리에 있을 때, 등애의 손자 등천추를 무제에게 추천하여 등애의 명예 회복에도 힘썼다. 게다가 옛 오나라의 석위라는 인물을 발탁했다.[1]

《세설신어》에서는 어렸을 때 신동이었지만, 자라서는 구두쇠로 알려지게 되었으며, 상반되는 면에서의 일화가 전해진다. 예를 들어 "뜰의 자두를 팔았는데, 자두는 발아하지 않도록 씨앗에 구멍을 뚫어 팔았다" · "조카가 결혼할 때 옷을 준비했지만, 나중에 대금을 청구했다" · "딸이 배위의 집에 시집갈 때, 수만 전을 보냈다. 그 후, 그녀가 친정에 돌아와도 왕융이 언짢아하자, 황급히 돈을 돌려주자 갑자기 웃는 얼굴을 보였다" 등의 이야기가 있다.[1]

4. 참고 문헌

참조

[1] 서적 jiazi day of the 6th month of the 2nd year of the Yong'xing era, per Emperor Hui's biography in Book of Jin Jin Shu
[2] 서적 Jin Shu
[3] 문서 not the same person as Wang Hun (general)|the general who took part in the conquest of Wu
[4] 문서 jiazi day of the 6th month of the 2nd year of the Yong'xing era, per Emperor Hui's biography in Book of J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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