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촉한의 멸망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촉한의 멸망은 263년 위나라의 침공으로 촉한이 멸망한 사건을 말한다. 촉한은 유선 황제의 사치와 환관 황호의 농간으로 쇠퇴했으며, 대장군 강유는 북벌 실패와 황호와의 갈등으로 권력이 약화되었다. 위나라는 사마소의 지휘 아래 종회, 등애, 제갈서 등을 보내 촉한을 공격했고, 강유는 검각에서 방어전을 펼쳤지만, 등애의 기습 작전에 실패하며 면죽에서 제갈첨이 전사하면서 유선은 항복했다. 촉한의 멸망으로 삼국시대는 종식되었고, 위나라는 천하 통일의 기반을 다졌다. 이후 종회는 등애를 제거하고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고, 오나라의 지원 시도도 실패로 돌아갔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263년 중국 - 교지의 난
    교지의 난은 후한 말부터 삼국 시대에 걸쳐 교주에서 발생한 반란과 동오, 서진 간 교전을 통칭하며, 동오의 수탈과 차별에 대한 반발, 찌에우 티찐 부인의 저항, 서진의 교지 점령 등 복잡한 양상으로 전개되어 베트남 민족의식 형성과 삼국 시대 종결에 영향을 미쳤다.
  • 조위가 참전한 전쟁 - 제갈량의 북벌
    제갈량의 북벌은 228년부터 234년까지 제갈량이 위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시도한 군사 작전으로, 여러 차례 실패했으나 위나라에 피해를 입히고 인재를 얻었지만 결국 전략적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고 제갈량의 사망과 촉한의 멸망에 영향을 미쳤다.
  • 조위가 참전한 전쟁 - 강유의 북벌
    강유의 북벌은 제갈량 사후 강유가 촉한의 생존 기반을 확보하고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240년부터 262년까지 11차례에 걸쳐 위나라를 공격한 군사 작전으로, 곽회, 등애 등의 저항에 부딪혀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으며 국력 소진이라는 비판과 조위 약화 시도라는 엇갈린 평가를 받는다.
  • 촉한이 참전한 전쟁 - 이릉 대전
    이릉 대전은 221년부터 222년까지 유비가 손권의 오나라를 공격한 전투로, 육손의 화공 계책으로 유비가 대패하여 촉한이 큰 피해를 입고 형주를 완전히 상실하는 삼국 시대 판도를 결정짓는 중요한 사건이다.
  • 촉한이 참전한 전쟁 - 제갈량의 남정
    제갈량의 남정은 225년 촉한 승상 제갈량이 남중 지역의 반란을 진압하고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감행한 군사 작전으로, 반란 세력 평정과 맹획 귀순을 통해 남중 지역을 안정시키고 북벌을 위한 후방 기지를 확보했으며, 칠종칠금 고사는 제갈량의 심리전 전략을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받는다.
촉한의 멸망 - [전쟁]에 관한 문서
개요
분쟁 명칭촉한 멸망전
다른 명칭위멸촉지전, 위멸한지전
시기263년
위치익주 (현재의 쓰촨 성, 간쑤 성, 산시 성)
결과조위의 승리, 촉한의 멸망
관련 전쟁삼국 시대
교전 세력
교전국 1촉한
교전국 2조위
지휘관 및 지도자
촉한 지휘관유선 (항복), 강유 (항복), 제갈첨
조위 지휘관사마소, 종회, 등애, 제갈서
병력 규모
조위 병력160,000 ~ 180,000명
촉한 병력90,000 ~ 102,000명
전투 및 사건
주요 전투 지역한성, 악성, 양안관구, 검각, 면죽
이미지
위멸촉지전
위멸촉지전

2. 배경

262년 촉한 정복 직전의 삼국 시대.


220년 후한이 멸망한 후, 중국에는 위, 촉한, 오 세 나라가 옛 한나라의 영토를 차지하기 위해 경쟁했다. 이 중 위나라는 군사력, 경제력, 인력, 영토 면에서 가장 강력했다. 촉나라와 오나라는 223년에 위나라에 대항하기 위해 동맹을 맺었다.

228년부터 234년까지, 위나라에 대한 공격적인 외교 정책을 펼쳤던 촉나라 섭정 제갈량옹주양주(현재의 간쑤성산시성 일부)에 있는 위나라 영토를 공격하기 위해 다섯 차례의 군사 원정 (북벌)을 감행했다. 이 원정의 목표는 촉나라 군대가 위나라 수도 낙양을 점령하고 한나라를 부활시키는 것이었으나, 모두 실패로 끝났다. 234년 제갈량이 사망한 후, 그의 후계자인 장완비의는 위나라에 대해 방어적인 입장을 취하며 촉나라 내부 개발과 안정에 집중했다. 그러나 240년부터 262년까지 촉나라 장군 강유는 제갈량의 유지를 이어받아 위나라에 맞서 11차례의 군사 원정을 감행했다. 하지만 이 원정들은 식량 공급 부족, 전장에서의 큰 손실 등의 이유로 중단되었다. 이러한 원정은 촉나라의 자원을 고갈시키고 백성들에게 큰 피해를 입혔으며, 강유에 대한 불만을 야기했다.

한편, 위나라에서는 장군 사마의249년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잡았다. 251년 그가 사망한 후, 그의 장남 사마사가 섭정이 되어 위나라 정부에 대한 권력을 강화했다. 254년, 사마사는 위나라 황제 조방을 폐위시키고 조모를 즉위시켰다. 255년 사마사가 사망한 후, 그의 동생 사마소가 섭정이 되어 권력을 독점했다. 260년, 조모는 사마소를 몰아내려 했으나 실패하고 목숨을 잃었다. 조모의 뒤를 이어 위나라 황제가 된 조환은 사마소의 꼭두각시 통치자로 남았다.

2. 1. 촉한의 쇠퇴와 내부 갈등

유선 황제의 향락과 사치, 환관 황호의 농간으로 촉한은 크게 쇠퇴해 있었다.[102][101] 256년 단곡 전투에서의 대패와 잦은 북벌 실패로 대장군 강유의 권력은 약화되었고, 황호는 염우를 내세워 강유를 대체하려 했다. 강유는 황호의 전횡을 우려하여 유선에게 황호를 제거할 것을 건의했으나 거절당했고, 답중에서 보리를 파종하며 핍박을 모면하려 했다.[102][101]

흥세산 전투의 전훈을 바탕으로 강유는 한중 방어책을 변경했다. 기존 방어 방식은 유비위연에게 한중을 맡기면서 각 군영에서 적의 침입을 저지하도록 한 것이었다. 흥세산 전투에서 왕평조상을 무찌른 것도 이 방식을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강유는 이 방법이 적을 막아내기에는 적합해도 큰 피해를 주기는 어렵다고 보았다.[102]

강유는 새로운 전략을 채택했다. 각 위(圍)는 적이 침입하면 한성(漢城)과 악성(樂城)으로 모여들어 농성해 적이 평지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여러 관문을 지켜 적이 평지로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적은 관문을 뚫지 못하고, 식량을 현지 조달하지도, 멀리서 가져오기도 어려워 언젠가는 지쳐 퇴각할 것이니, 그때 성의 주둔군과 밖에 대기하던 기동부대를 한데 모아 적을 진멸시키려는 계획이었다. 그래서 한중의 군대를 지휘하는 한중독 호제는 한수성까지 물러나게 했다. 감군 왕함에게는 낙성을, 호군 장빈에게는 한성을 지키게 했고, 서안, 건위, 무위, 석문, 무성, 건창, 임원에 모두 위를 세워 지키게 했다.[102]

2. 2. 위나라의 정벌 계획과 내부 동향

사마소촉한강유의 잦은 북벌로 국력이 약해졌다고 판단하여, 촉한의 위협을 제거하기 위해 대규모 정벌을 계획하였다. 그는 여러 사람들에게 자문하였는데, 오직 종회만이 위나라가 촉한을 정복할 수 있다는 데 동의하였다. 종회는 이후 사마소가 촉한 정복 전략을 세우는 데 도움을 주었다.[5]

사마소는 위나라 조정에 다음과 같이 발표하였다.

255년부터 여러 차례 촉한의 침략에 맞서 위-촉 국경에서 위군을 이끌었던 위나라 장군 등애는 촉한 정벌에 강하게 반대했다.[7] 사마소는 등애가 다른 사람들도 원정에 반대하도록 부추길까 우려하여, 등애의 주부(主簿)인 사찬(師纂)을 등애 휘하의 장수로 임명하고 등애를 설득하도록 지시했다. 등애는 이후 마음을 바꾸어 원정을 지지했다.[7]

262년 겨울, 사마소종회를 진서장군(鎮西將軍)으로 임명하고 관중 지역의 군사 업무를 감독할 수 있는 황제의 권한을 부여했다. 위나라는 촉나라 침공을 준비하기 위해 위나라 전역의 여러 성에서 약 18만 명의 병력을 동원했다. 동시에 위나라는 당자에게 전함 건조를 감독하여 위나라의 또 다른 경쟁국인 에 대한 미래의 침공을 준비하도록 했다.[8][9]

263년 가을, 위 황실은 촉나라에 대한 세 갈래 침공 계획을 담은 칙령을 발표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 등애는 3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감송(甘松; 현재 간쑤성 테워현의 남동쪽)을 거쳐 강유의 타중 (沓中; 현재 간쑤성 주취현의 북서쪽) 진지를 공격한다.
  • 제갈서는 3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무가교 (武街橋; 현재 간쑤성 원현의 북서쪽)로 가서 강유의 퇴각로를 차단한다.
  • 종회는 10만 명 이상의 병력을 이끌고 사곡 (斜谷; 현재 산시성 메이현의 남서쪽)을 통해 촉나라를 공격한다.
  • * 종회의 부하인 이보호열은 낙곡 (駱谷; 현재 산시성 저우즈현의 남서쪽)을 통해 별동대를 이끈다.[10][9]
  • * 위 황실은 위관에게 종회와 등애의 군사 작전을 감독하도록 권한을 부여했다. 위관은 또한 종회 휘하의 임시 군사 재판관 직을 맡았으며 1,000명의 군대를 지휘했다.[11]


263년 9월 20일에서 10월 19일 사이에, 촉나라 정벌을 위해 동원된 위나라 군대는 위나라 수도 낙양에 집결하여 출발할 준비를 마쳤다. 출발 전에 위나라 정부는 승진과 포상을 실시하고 사기 진작을 위한 군사 훈련을 실시했다. 이 시기에 위나라 장수 등돈이 촉나라는 정복할 수 없다고 말하자 사마소는 다른 사람들이 정벌에 대해 험담하지 않도록 경고하기 위해 그를 처형했다.[19]

종회는 베테랑 위나라 장수 허저의 아들인 허의에게 촉나라로 이어지는 도로 건설을 감독하도록 명령했다. 그러나 도로가 부실하게 건설되자 종회는 허의의 배경을 무시하고 임무 실패를 이유로 처형했다. 위나라 군대는 종회의 대담함에 충격을 받았다.[20]

3. 전투 과정

景元|경원중국어 4년(263년) 가을 5월, 위나라의 원정 조서가 발표되어 총 18만의 군대가 사방에서 모여 촉한으로 진격했다. 등애와 옹주자사 제갈서강유의 발목을 잡는 역할을 맡았다. 등애는 적도(狄道)에서 감송(甘松)과 답중(沓中)으로 나아가 강유를 방해하고, 제갈서는 기산(祁山)에서 무가교(武街橋), 무도(武都)의 고루(高樓)로 나아가 강유를 공격하려 했다.[105][106][104] 종회는 전장군 이보(李輔), 정촉호군 호열 등을 지휘해 10여만 대군을 거느리고 한중으로 진입하여 유선의 항복을 받아내는 역할을 맡았다. 8월에 군대는 낙양을 출발했다.[104]

종회의 군사는 야곡(斜谷)과 낙곡(駱谷)으로 나뉘어 한중으로 진격했고, 위흥태수 유흠(劉欽)은 자오곡(子午谷)으로 나아갔다. 이때 종회는 아문장 허의에게 길을 닦게 하고 자신은 그 뒤에 갔는데, 다리에 구멍이 생겨 말 다리가 빠졌으므로 허의를 처형했다.[103]

강유는 종회가 낙곡으로, 등애가 답중으로 침입해온다는 소식을 듣고 요화는 답중을 구원하고, 장익과 보국대장군 동궐 등은 양안관구를 지키러 움직였다. 제갈서가 건위로 향한다는 말을 듣고 이들은 음평에 주둔하며 상황에 대처하려 했다.[102]

등애는 강유를 추격해 음평에 도착했으나, 강유가 검각으로 이동하자 제갈서와 군대를 합치고 정예 병사를 가려서 한덕양(漢德陽)을 따라 강유(江油)·좌담도(左儋道)로 들어가 면죽을 거쳐 성도까지 이르고자 했다. 제갈서는 강유를 공격하라는 명령을 따르고자 검각을 공격하려는 종회에게 합류했다. 종회는 검각으로 진격하기 전 한나라 관료들을 포로로 잡고 한나라 사람들에게 투항을 권유했다. 또한 강유로 우회하는 작전을 택해 장군 전장(田章) 등에게 강유의 서쪽으로 가게 했는데, 전장은 백 리를 미처 가기 전에 복병 3부대를 격파했다. 등애는 전장을 선봉에 세워 멀리까지 나아가게 했다. 종회는 자신이 군대를 홀로 지휘하고자 제갈서가 진격하지 않는다는 상소를 비밀리에 올려 제갈서의 지휘권을 뺏었고, 제갈서는 낙양으로 압송됐다.[103]

제갈서의 군대까지 아우른 종회는 검각을 공격했으나 이기지 못해 퇴각했고, 강유에게 개인적으로 투항을 권유했으나 강유는 응답하지 않고 요충지를 지키며 저항했다. 종회는 검각을 무찌르지도 못하고 군량 수송에도 장애를 겪고 있었다.[103][102] 유선은 검각을 지키는 한편 대사면을 실시하고, 연호를 경요에서 염흥으로 바꿨다.[111][112] 10월, 사마소는 조서를 받아 태원·상당 등 10군을 봉토로 받고 진공(晉公)으로 봉해졌다.[104]

종회가 검각을 뚫지 못하자 등애는 한덕양으로 나아가 면죽으로 들어가 강유가 검각을 포기하고 부를 지키든지, 부를 위험에 처하게 방치하든지 둘 중 하나를 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몰고 가겠다고 상소를 올렸다. 겨울 10월, 등애는 음평에서 사람이 살지 않는 곳을 700여 리 지나며 진군했다. 산을 뚫고 길을 열며 잔도를 까는 험준한 지형 때문에 공사는 매우 어려웠고 식량도 떨어지고 위험했다. 등애 본인은 모전에 둘둘 말려서 산을 굴러내려다니며 장수들과 병사들은 나무를 잡고 벼랑을 따라 일렬로 행군했다. 이런 곤경을 겪으며 선봉이 강유에 이르니, 강유성의 수장 마막이 항복해 면죽으로 가는 길이 열렸다.[108]

10월, 촉한은 자신들이 위나라의 공격을 받고 있음을 오나라에 알렸다. 손휴는 촉한을 구원하고자 군대를 세 방향으로 보냈다. 대장군 정봉은 수춘을 공격하게 하고, 정봉과 손이(孫異)는 면중(沔中)을 공격하게 했다. 유평을 남군에 주둔한 시적에게 보내 진군 방향을 논의하게 했다.[113]

3. 1. 위나라의 3방향 침공

景元|경원중국어 4년(263년) 가을, 위나라는 총 18만 대군을 동원하여 촉한을 침공했다. 등애는 3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감송(甘松; 현재 간쑤성 테워현의 남동쪽)과 답중(沓中; 현재 간쑤성 주취현의 북서쪽)으로 진격하여 강유를 공격했다. 옹주자사 제갈서는 3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무가교(武街橋; 현재 간쑤성 원현의 북서쪽)와 무도(武都)로 진격하여 강유의 퇴로를 차단하려 했다.[105][106][104] 종회는 10만 대군을 이끌고 사곡 (斜谷; 현재 산시성 메이현의 남서쪽)을 통해 한중을 공격했다. 이때 종회는 아문장 허의에게 길을 닦게 하고 자신은 그 뒤에 갔는데, 다리에 구멍이 생겨 말 다리가 빠졌으므로 허의를 처형했다. 공신의 아들이 용서받지 못하니 군대가 모두 놀랐다.[103]

강유는 유선에게 경요 6년(263년)에 종회가 진격하려고 하니 우거기장군 장익과 좌거기장군 요화를 보내 양안관구와 음평교두를 나누어 지키도록 표를 올렸었다. 실권을 쥔 황호는 신임하는 무당의 말에 따라 적의 침입이 없을 것이라고 믿고 의논을 그만두게 하니 아무도 알지 못했다. 종회가 낙곡으로, 등애가 답중으로 침입해온다는 소식을 듣고 요화는 답중을 구원하고 장익과 보국대장군 동궐 등은 양안관구를 지키러 움직이는데, 제갈서가 건위로 향한다는 말을 듣고 이들은 그대로 음평에 주둔하며 상황에 대처하려 했다.[102]

한군은 위군이 쳐들어오는 것을 보고 강유의 작전대로 각 위에서 물러나 한성과 악성으로 모여들었는데, 한성의 군대는 5천으로 장빈이, 악성의 군대도 5천으로 왕함이 지휘했다. 종회는 한성은 호군 순개에게, 악성은 전장군 이보에게 각각 1만 명을 주어 포위하게 했고 또 양안관구(陽安關口)에도 별장을 보내 공격했다. 이때 양안구에는 옛 무흥독(武興督) 장서가 있었는데 공이 없어 무흥독에서 면직된 채 한중을 지키고 있었으므로 불만을 품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위군의 침입을 받자, 항복하려 하고 부첨을 속여 성 밖으로 나가서 싸우자고 했다. 부첨은 승산이 없다며 말렸으나 장서가 굳이 출전하니, 부첨은 장서가 싸우러 간 줄 알았으나 장서는 음평에 이르러서 종회의 선봉 중 호열에게 투항했다. 호열은 성의 허점을 틈타 함락시켰고 많은 곡식을 얻었으며 부첨은 전사했다. 종회는 낙성을 공격했으나 이기지 못했는데, 마침 양안구가 함락됐다는 소식을 듣자 그쪽으로 전진했다. 때는 9월이었다.[104][103][102][107]

답중으로 출정한 등애도 9월에 강유와 교전했다. 등애는 천수태수 왕기, 농서태수 견홍, 금성태수 양흔 등에게 강유의 진영을 세 방향에서 공격하게 했다. 강유는 한중에 위군이 들어왔다는 소식을 듣고 퇴각했는데, 양흔이 이를 쫓으니 강천구(彊川口)에서 양측이 크게 싸워 강유가 패주했다. 그러나 교두에 제갈서가 주둔하고 있으므로 강유의 퇴로는 끊긴 상태였다. 강유는 공함곡(孔函谷)으로 나아가 옹주를 치는 움직임을 보였고, 제갈서는 이를 듣고 30리를 돌아갔다. 강유 역시 30여리를 진격했었는데, 제갈서의 움직임을 듣고 곧장 돌아나와 교두를 빠져나왔으니, 뒤늦게 눈치챈 제갈서의 추격을 겨우 하루 차이로 따돌렸다.[108]

3. 2. 한중 공방전

漢中之戰|한중지전중국어은 263년 가을, 위나라가 촉한을 공격하면서 벌어진 전투이다. 촉한군은 강유의 작전에 따라 한성(漢城중국어)과 낙성(樂城중국어)에 집결하여 농성했다. 그러나 양안관(陽安關중국어)의 수장 장서는 위나라에 투항했고, 부첨은 전사했다. 종회는 한성과 낙성을 함락시키지 못하고 양안관으로 진격했다.[104][103][102][107]

263년 여름 5월, 위나라 황제 조환의 칙령에 따라 촉한 토벌이 시작되었다. 정서장군 등애는 3만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강유를 공격했고, 옹주 자사 제갈서는 3만여 명을 이끌고 강유의 퇴로를 차단하려 했다. 진서장군 종회는 10만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한중을 공격했다.[104]

강유는 위군의 침공을 알아채고 유선에게 원군을 요청했으나, 황호는 점을 믿고 이를 무시했다. 원군 파견이 늦어져 종회가 낙곡에, 등애가 답중에 침입하려 할 때 요화, 장익, 동궐 등이 파견되었다.[102]

강유는 종회가 한중으로 쳐들어온 것을 알고 후퇴했다. 후퇴 중 등애의 부장 양흔, 견홍 등의 추격을 받아 패배하고, 조운의 아들 조광 등이 전사했다. 강유는 제갈서에게 퇴로를 막힐 뻔했으나, 피하는 데 성공했다.[108]

촉한의 호군 장빈은 한성을, 감군 왕함은 낙성을 각각 5000명의 병사로 지켰다. 종회는 전장군 이보와 호군 순개에게 각각 1만 명의 병사를 주어 한성과 낙성을 공격하게 하고, 호열에게 양안관을 습격하게 했다.[104][103][102] 장서는 호열에게 양안관을 넘겨주고 항복했고, 부첨은 싸우다 전사했다. 종회는 한성과 낙성을 함락시키지 못하고, 검각으로 진격했다.[104][103][102][107] 위흥 태수 유흠은 황금의 유은을 공격했지만 함락시키지 못했다.[110]

장익과 동궐은 한수에 도착했고, 음평에서 철수한 강유, 요화 등과 합류하여 검각을 수비했다. 종회는 검각을 공격했지만 제압하지 못했고, 보급선 문제로 철수를 고려했다.

3. 3. 강유의 고군분투와 검각 방어

姜維|강유중국어등애에게 패배하고 퇴각하던 중, 제갈서에게 퇴로가 막힐 위기에 처했으나 공함곡(孔函谷)을 통해 우회하여 위기를 모면했다.[108] 강유는 음평에서 요화와 합류하고, 한수에서 장익, 동궐과 합류하여 검각을 방어했다.[103][102] 종회는 검각을 공격했으나 함락시키지 못하고, 보급 문제로 퇴각을 고려했다.[48]

다음은 위나라의 촉나라 정복 연표이다:[4]

대략적인 날짜지역사건
263년 10월 20일 – 11월 17일문현, 간쑤성강유제갈서를 우회하기 위해 공한곡으로 가서 음평 근처의 무계교를 막고 있다. 제갈서가 봉쇄를 해제하자 강유는 재빨리 돌아서서 다리를 건너 검각으로 이동한다. 제갈서는 너무 늦게 도착하여 강유를 막을 수 없었다.
263년 10월 20일 – 11월 17일검각현, 사천성강유, 요화, 장익과 동궐은 검각으로 후퇴한다. 중회는 검각을 여러 번 공격했지만 촉나라 방어선을 돌파하지 못했다.



오늘날 사천성 검각현에 위치한 검각(劍閣, 검문관)의 재건축 모습

3. 4. 등애의 우회 기습과 면죽 전투

鄧艾중국어는 검각을 우회하여 면죽으로 진격하는 기습 작전을 제안했다. 그는 음평에서 험준한 산길을 넘어 강유성에 도착했고, 강유성 수장 마막이 항복했다.[108]

10월이 되어서야 한나라는 자신들이 위나라의 공격을 받고 있음을 오나라에 알렸다. 손휴는 촉을 구원하고자 군대를 세 방향으로 보냈는데, 이 중 둘은 위나라를 공격하는 것이었다. 대장군 정봉은 수춘을 공격하게 하고, 정봉과 손이(孫異)는 면중(沔中)을 공격하게 했다. 다른 하나는 유평을 남군에 주둔한 시적에게 보내 진군 방향을 논의하게 했다.[113]

등애가 경곡도(景谷道)를 지나 들어왔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한나라의 위장군 제갈첨이 등애를 막으러 군대를 지휘해 부(涪)에 머물렀다. 상서랑 황숭제갈첨에게 빨리 나아가 험지에 의지하여 적을 평지에 들여보내지 말라고 했으나 제갈첨은 우물쭈물하며 따르지 않았다. 그러던 중 제갈첨의 선봉이 격파당해, 제갈첨은 면죽으로 퇴각했다.[108][114][115]

등애는 제갈첨을 회유하려 했으나[116] 제갈첨은 노하여 사자를 베고 진영을 갖추어 등애가 싸우러 오기를 기다렸다. 등애는 아들 혜당정후 등충을 오른쪽으로, 사마 사찬을 왼쪽으로 보내 제갈첨을 쳤는데, 제갈첨이 이들을 이기니 후퇴하여 등애에게 싸울 수 없다고 했다. 등애는 노하여 이 둘을 베려고 하니, 둘이 다시 돌아나가 싸웠다. 이번에는 제갈첨이 대패해 전사했고 제갈첨의 아들 제갈상도 위군에 돌입해 전사했다. 황숭도 군대를 격려하며 분투하다 전사했고, 상서 장준, 우림우부독 이구제갈첨을 수행해 이 전투에 참전했다가 죽었다.[117] 등애는 제갈첨과 장준 등의 머리를 얻었다.[108][111][115][118][119]

3. 5. 유선의 항복과 촉한 멸망

제갈첨이 패배했다는 소식을 들은 유선은 초주의 건의를 받아들여 등애에게 항복하기로 결정했다.[120] 유선은 극정에게 항복 문서를 쓰게 하고,[122] 초주와 시중 장소, 부마도위 등량을 보내 항복 문서와 옥새를 등애에게 바쳤다.[108][111][123] 유선은 당시 중국의 항복 의식에 따라 수레에 관을 싣고 입에 구슬을 물고 몸을 묶은 채 등애에게 나아갔다. 등애는 유선의 결박을 풀고 구슬을 거두고 관을 불태웠다.[108][111][123]

등애는 등우의 고사를 따라 승제(承制)하여[124] 유선을 행표기장군으로 삼고 유선이 원래 지내던 궁궐에 머물게 했다. 태자 유선은 봉거도위로, 다른 여러 왕들은 부마도위로 삼았다. 옛 촉한의 관리들은 이전 직위의 높고 낮음에 따라 왕의 관리로 삼아 임용하고, 일부는 등애 자신의 관속을 겸하게 했다.[108]

유선이 옥새를 보낸 날, 유선유비의 사당에 들어가 곡하고 처자를 먼저 죽이고 자결했다.[121] 유선은 상서랑 이호(李虎)에게 사민부(士民簿)를 보내 촉 지역의 호구, 인구, 군사, 관리, 창고의 식량, 금은, 비단 등의 물자 현황을 보고하게 했다. 촉 지역에는 28만 호, 남녀 94만 명, 장수와 군사 10만 2,000명, 관리 4만 명, 창고의 식량 400000섬, 금은 각 2000근, 무늬 비단과 채색 비단 각 20만 필과 그 외의 물건들이 있었다.[126][127]

한편, 강유는 제갈첨이 패배했다는 소식을 듣고 광한군 처현(郪縣)으로 이동하여 유선의 행방을 알아보았다.[103][102] 결국 강유는 광한군 처현에서 유선이 보낸 칙서를 받고 종회에게 항복했다. 강유의 병사들은 칼을 뽑아 바위를 치며 분노를 표출했다.[103][102] 종회는 강유를 후대하여 옛 촉한 장수들이 항복하며 바친 장수의 표식들을 모두 돌려주었다.[103][102] 한성을 지키던 장빈도 유선이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종회에게 항복했다.[109]

4. 전투 이후

촉한 멸망 후, 오나라에서 온 구원병들도 모두 물러갔다. 강유264년 장익, 요화, 동궐 등과 함께 위의 장수 종회에게 항복하여 촉나라를 부활시키기 위해 반(反) 사마소 봉기를 일으켰으나 실패하여 자결했으며, 종회는 잡혀서 처형되었다.[4]

이로써 위의 사마씨 정권은 촉을 멸하고 천하통일의 기초와 정권 이양으로 가는 길을 닦았다. 촉한의 멸망은 군사적 패배뿐만 아니라, 유선황호를 비롯한 지도층의 무능함과 정치적 혼란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특히, 제갈량 사후 장완, 비의 등이 내부 안정에 힘썼으나, 강유의 잦은 북벌은 국력을 소진시키고 백성들의 불만을 야기했다.[4]

위나라의 촉나라 정복 이후, 촉나라 백성들 사이에서는 제갈량과 그의 아들 제갈첨에 대한 존경심이 여전히 높았다. 268년에는 제갈첨을 사칭한 반란이 일어났을 정도였다.[99] 한편, 강유가 받아들였던 족의 백호문은 촉한 멸망 후 선비의 난에 가담하여 위나라에 저항하기도 했다.[100]

4. 1. 종회의 난과 진압

등애는 유선을 항복시킨 후 구 촉한 영토 통치의 주도권을 잡았으나, 264년 봄 1월, 잇따른 독단과 전횡으로 인해 병권을 박탈당하고 체포되었다. 독립의 야심을 품고 있던 종회는 대군을 혼자 통솔하게 되자, 강유와 함께 위나라에 반역하여 호열을 포함한 일부 장군과 관리들을 유폐시켰다.[83]

호열의 전 부하인 구건의 종졸이 호열에게 식량을 가져다주었다. 호열은 그 종졸에게 "구건이 극비리에 정보를 제공해 주었는데, 종회가 큰 구덩이를 파고, 몽둥이 수천 개를 준비하여 다른 병사들을 차례로 몽둥이로 때려 죽여 구덩이에 던져 넣을 생각인 것 같다"는 거짓 정보를 흘렸다. 가보왕기도 비슷한 정보를 흘렸다.[86] 이 정보를 들은 호열의 아들 호연위관 등 여러 군대가 종회와 강유를 습격하여 살해했고, 종회의 난은 끝났다. 이 난으로 성도는 막대한 피해를 입었으며, 등애, 좌차기장군 장익, 촉한 황태자 유선, 장빈, 상서 위계 등 다수의 장병이 사망했다. 왕은의 『촉기』에 따르면 방덕의 아들 방회관우의 자손을 몰살했다고 하지만, 진수를 비롯한 촉나라 사람들의 사가들은 그러한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4. 2. 오나라의 개입과 좌절

263년 11월 18일부터 12월 17일 사이, 촉한은 동맹국 동오에 지원을 요청했다. 264년 1월 8일, 오나라 황제 손휴는 정봉에게 수춘(현재의 안후이성수현)을 공격하게 하고,[76] 유평과 사적은 남군(현재의 후베이성징저우)을, 정풍과 손이는 면수를 따라 위나라 영토를 공격하게 하여 위나라의 관심을 촉나라에서 돌리려 했다. 그러나 오나라 군대는 촉나라가 멸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철수했다.[77]

위나라가 촉나라를 침공할 때 촉한의 엄우는 파동군(현재의 충칭시 일부)을 지키고 있었는데, 최전선 지원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엄우의 부관 낙현[87]은 2,000명의 병력만으로 파동군의 수도인 영안(현재의 충칭시 펑제현)을 지켰다.[88][89]

263년 11월이나 12월, 성도 함락 소식이 영안에 전해지자 낙현은 백성들을 안심시키고 질서를 회복시켰다. 유선이 실제로 위나라에 항복했다는 소식을 확인한 후, 낙현은 사흘 동안 촉나라의 멸망을 애도했다.[90]

한편, 오나라는 촉나라를 돕는다는 구실로 과거 촉나라 영토를 차지하려 했다. 264년 3월경, 오나라 장수 보협은 서릉(현재의 후베이성 이창시)에서 군대를 이끌고 영안을 공격했으나, 낙현에게 저지당했다. 오나라 군대가 화살을 퍼붓자 낙현은 부하 양종(楊宗)에게 포위망을 뚫고 위나라에 도움을 요청하게 했다. 그는 또한 자신의 부절을 넘겨주고 아들을 인질로 보내 사마소에게 진심을 알렸다. 이 기간 동안 그는 병사들을 이끌고 오나라 군대를 반격하여 격파했다.[91]

보협의 패배에 분노한 손휴육항에게 3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영안을 포위하게 했다. 6개월 동안 이어진 포위 공격으로 영안 인구의 절반 이상이 전염병에 걸렸다. 그때 위나라 장수 호열이 형주에서 낙현을 돕기 위해 증원군을 이끌고 와 영안의 포위를 풀었다. 위나라 증원군이 도착하자 오나라 군대는 후퇴했다.[92] 사마소는 낙현의 항복을 받아들여 그에게 영안을 계속 지키라고 명령했다.[93]

4. 3. 촉한 멸망의 의의와 영향

220년 후한 멸망 이후 지속된 삼국 시대는 촉한의 멸망으로 막을 내리고, 위나라의 천하 통일이 가시화되었다. 위나라는 촉한의 인적, 물적 자원을 흡수하여 국력을 강화했다.[4] 촉한 멸망은 군사적 패배뿐만 아니라, 유선황호를 비롯한 지도층의 무능함과 정치적 혼란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특히, 제갈량 사후 장완, 비의 등이 내부 안정에 힘썼으나, 강유의 잦은 북벌은 국력을 소진시키고 백성들의 불만을 야기했다.[4]

위나라의 촉나라 정복 이후, 촉나라 백성들 사이에서는 제갈량과 그의 아들 제갈첨에 대한 존경심이 여전히 높았다. 268년에는 제갈첨을 사칭한 반란이 일어났을 정도였다.[99] 한편, 강유가 받아들였던 족의 백호문은 촉한 멸망 후 선비의 난에 가담하여 위나라에 저항하기도 했다.[100]

5. 주요 인물

263년 촉한의 멸망 당시 주요 인물들의 행적은 다음과 같다.

5. 1. 촉한

220년 후한이 멸망한 후, 중국에는 세 개의 세력이 나타나 옛 한 제국의 영토를 차지하기 위해 싸웠다. 그 중 위는 군사력, 경제력, 인력, 영토 면에서 가장 강력했다. 나머지 두 나라인 과 오는 223년에 위를 상대로 동맹을 재결성했다.

228년부터 234년까지, 위나라에 대한 공격적인 외교 정책을 주장했던 촉나라 섭정 제갈량옹주와 양주 (현재의 간쑤성산시성의 일부)에 있는 위나라 영토를 공격하기 위해 일련의 다섯 차례 군사 원정 (일명 "북벌")을 감행했다. 이 원정의 궁극적인 목표는 촉나라 군대가 위나라 수도 낙양을 점령하고 한 왕조를 부활시킬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는 것이었다. 모든 원정은 실패로 돌아갔다. 제갈량234년에 사망한 후, 그의 후계자인 장완비의는 위나라에 대해 더욱 방어적인 입장을 취했고 촉나라의 내부 개발과 안정을 촉진하는 정책에 집중했다. 그러나 240년부터 262년까지 촉나라 장군 강유는 제갈량의 유산을 이어받아 위나라에 맞서 다른 11차례의 군사 원정을 감행했다. 그러나 각 원정은 부적절한 식량 공급, 전장에서의 막대한 손실 또는 기타 이유로 인해 결국 중단되었다. 이 원정들은 촉나라의 이미 제한된 자원을 심각하게 고갈시키고 촉나라 인구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혔을 뿐만 아니라 강유에 대한 많은 대중의 불만을 초래했다.

그 동안, 위나라 장군 사마의249년성공적인 ''쿠데타''를 일으킨 후 권력을 잡았다. 251년 그가 사망한 후, 그의 장남 사마사가 그의 뒤를 이어 섭정이 되어 위나라 정부에 대한 권력과 통제를 강화했다. 254년, 사마사는 그로부터 권력을 되찾으려 했던 위나라 황제 조방을 폐위시키고 조모를 즉위시켰다. 255년 사마사가 사망한 후, 그의 동생 사마소가 새로운 섭정이 되어 위나라에서 계속 권력을 독점했다. 260년, 조모는 사마소를 몰아내기 위해 ''쿠데타''를 시도했지만 실패하고 목숨을 잃었다. 조모의 뒤를 이어 위나라 황제가 된 조환은 사마소의 영향과 통제 하에 꼭두각시 통치자로 남았다.

262년, 사마소는 강유가 위나라에 끊임없이 전쟁을 걸면서 촉한이 약해지고 자원이 부족해졌다고 언급하며, 촉한의 위협을 제거하기 위해 대규모 침략을 감행하려 했다. 그가 자문한 사람들 중 종회만이 위나라가 촉한을 정복할 수 있다고 동의했다. 종회는 이후 사마소가 촉한 정복 전략을 수립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5]

255년부터 여러 차례 촉한의 침략에 대항하여 위-촉 국경에서 위군을 이끌었던 위나라 장군 등애는 촉한에 대한 원정에 강하게 반대했다. 사마소는 등애가 다른 사람들도 원정에 반대하도록 부추길까 우려하여, 등애의 주부(主簿)인 사찬(師纂)을 등애 휘하의 장수로 임명하고 등애를 "설득"하도록 지시했다. 등애는 이후 마음을 바꾸어 원정을 지지했다.[7]

과거 촉나라 장수 위연219년 처음 한중군 방어를 맡았을 때, 그는 ''역경''의 "이중 관문" 개념을 차용하여, 한중으로 이어지는 길목과 출구에 겹쳐진 진지에 중무장한 병력을 배치했다. 이 진지들은 침략군을 막고 저지하기 위한 것이었다.[12] 244년 흥세 전투에서 촉나라 장수 왕평조상이 이끄는 위나라의 침략으로부터 한중을 방어하기 위해 같은 전략을 사용했다.[13]

강유는 위연의 겹쳐진 진지 아이디어가 방어에만 유용하고 추가적인 이점을 제공하지 못한다고 지적했다.[14] 그는 진지를 비우고 모든 병력과 자원을 한중 평원에 접근할 수 있는 한성(漢城, 현재 산시성 면현 동쪽)과 낙성(樂城, 현재 산시성 성고현 동쪽)의 두 요새로 이동시킬 것을 제안했다. 그 의도는 침략군을 유인하여 요새를 공격하게 하고, 보급선을 과도하게 늘린 후 게릴라전 방식의 공격으로 약화시키는 것이었다. 침략군이 퇴각을 결정하면, 수비군은 전면적인 반격을 시작하여 그들을 격파할 기회를 잡을 것이다.[15]

258년, 강유는 한중 방어를 감독하는 호제, 강빈, 왕한(王含)에게 겹쳐진 진지를 해체하고 병력과 자원을 각각 한수(漢壽, 현재 쓰촨성 검각현 북동쪽), 한성, 낙성으로 이동하라고 명령했다. 그는 또한 한중 주변의 여러 지역: 서안(西安), 건위(建威), 무위(武衛), 석문(石門), 무성(武城), 건창(建昌), 린위안(臨遠)에서 방어 시설을 강화하도록 명령했다.[16]

263년 초, 강유유선에게 상소를 올려 예방 조치로 장익요화에게 군대를 이끌고 양안관과 음평의 다리를 지키게 해야 한다고 건의했다.[17]

유선의 측근 환관인 황호는 점술을 믿었는데, 점쟁이가 위나라가 촉나라를 침략하지 않을 것이라고 예언한 것을 믿고, 황제에게 강유의 상소를 무시하고 조정에서 논의하지 말라고 조언했다.[18]

당시 촉한은 황제 유선의 향락과 사치, 환관 황호의 농간으로 크게 쇠퇴해 있었다.[18] 경요 5년(262년) 위나라의 등애에게 후화에서 진 촉한의 대장군 강유는 답중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여러 번의 실패로 인해 강유의 권력은 매우 약해졌고, 안으로는 황호가 권세를 농단하고 있었다. 황호는 우대장군 염우(閻宇) 로 강유를 대신하려 했고, 강유는 매우 두려워해 성도로 돌아오지 못했다. 강유는 황호의 전횡을 싫어해 유선에게 황호를 없앨 것을 진언했으나, 유선은 황호를 비호해 이를 거절했다. 강유는 황호에게 자신이 답중에서 보리를 파종할 수 있게 구하면서 핍박을 모면하려 했다.[102][101]

촉한의 승상 제갈량234년에 사망한 후, 촉한의 국력은 점차 쇠퇴했다. 강유의 잇따른 북벌256년의 단곡 전투에서의 대패로 국력은 크게 쇠퇴했다. 또한 258년 이후 환관 황호가 정치 권력을 잡으면서 촉한의 정치는 크게 혼란해졌다.

종래의 한중군 방어법은 여러 진영을 교차시켜 수비하는 것이었지만(위연의 중문지계), 강유는 여러 진영을 물러나게 하고 병력을 한(漢)·낙(樂) 두 성에 집중시켜 적이 쇠약해져 철수할 때 추격하여 적을 섬멸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방어법으로 바꿨다.[97]

위는 일관되게 촉을 멸망시키는 방침이었고, 정서부(옹주 도독부)에 속하는 관직으로 정촉호군(조진·진랑·하후유·대릉·하후패·호렬), 또는 사정장군과는 별도로 정촉장군(위진·조엄·사마소)의 직을 두어 항상 그 기회를 엿봤다.

거듭된 북벌에 피폐해지고, 촉한의 국력이 쇠퇴했다고 생각한 위의 대장군 사마소와 그의 부하인 종회는 촉한을 제압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익주의 지형을 조사하고 상황을 검토하여 토벌 계획을 세웠다. 사마소는 배를 대량으로 건조하고, 겉으로는 오를 토벌하는 준비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했다.

5. 2. 위나라

司馬昭중국어강유가 위나라에 끊임없이 전쟁을 걸면서 촉한이 약해지고 자원이 부족해졌다고 언급하며, 촉한의 위협을 제거하기 위해 대규모 침략을 감행하려 했다. 그가 자문한 사람들 중 종회만이 위나라가 촉한을 정복할 수 있다고 동의했다. 종회는 이후 사마소가 촉한 정복 전략을 수립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5]

사마소는 위나라 조정에 다음과 같이 발표했다.

> "[수춘 삼반(三叛)|수춘의 반란]] 이후 6년 동안 군사 원정을 하지 않았고, 병사들을 훈련시키고 갑옷을 수리하여 두 오랑캐 국가를 제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오나라를 정복할 계획이라면, 배를 건조하고 수로를 개척하는 데 1만 명의 인력이 1,000단위 이상 소요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즉, 10만 명의 노동자가 100일 이상 일해야 합니다. 게다가 남쪽 땅은 습하고, 우리 군대는 분명히 역병과 질병에 시달릴 것입니다. 따라서 저는 먼저 촉한을 정복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로부터 3년 후, 촉한의 지리적 이점을 활용하여 강을 따라 해군을 파견하여 오나라를 공격하고, 육군을 파견하여 오나라를 침략할 수 있습니다. 이는 진이 우와 곽을 정복하고, 진이 한과 위를 제거하는 것만큼 쉬울 것입니다. 우리의 계산에 따르면 촉한은 9만 명의 군대를 보유하고 있으며, 그 중 4만 명 이상이 성도와 내륙 군현을 지키고 있습니다. 이는 다른 지역에 5만 명 미만의 군대가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현재 우리는 타중에서 강유를 교란하여 그가 동쪽의 상황에 대처하지 못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런 다음 로곡(羅谷)을 통해 군대를 보내 방어가 가장 허술한 곳에서 한중을 장악할 수 있습니다. 만약 촉한 군대가 요새와 관문을 지킨다면, 서로 고립될 것입니다. 우리는 주력 부대를 파견하여 그들의 도시를 정복하고, 소규모 부대를 파견하여 그들의 마을을 점령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그들은 검각과 양안관을 지킬 충분한 시간이나 인력을 갖지 못할 것입니다. 그 시점에서 유선의 무능한 통치자, 촉한의 국경 방어선 붕괴, 그리고 공포에 떠는 백성들로 인해 촉한의 멸망은 불가피합니다."[6]

255년부터 여러 차례 촉한의 침략에 대항하여 위-촉 국경에서 위군을 이끌었던 위나라 장군 등애는 촉한에 대한 원정에 강하게 반대했다. 사마소는 등애가 다른 사람들도 원정에 반대하도록 부추길까 우려하여, 등애의 주부(主簿)인 사찬(師纂)을 등애 휘하의 장수로 임명하고 등애를 "설득"하도록 지시했다. 등애는 이후 마음을 바꾸어 원정을 지지했다.[7]

262년 겨울, 司馬昭중국어종회를 진서장군(鎮西將軍)으로 임명하고 관중 지역의 군사 업무를 감독할 수 있는 황제의 권한을 부여했다. 위나라는 또한 촉나라 침공을 준비하기 위해 위나라 전역의 여러 성에서 약 18만 명의 병력을 동원했다. 동시에 위나라는 또한 당자에게 전함 건조를 감독하여 위나라의 다른 경쟁국인 에 대한 미래의 침공을 준비하도록 했다.[8][9]

263년 가을, 위 황실은 촉나라에 대한 세 갈래 침공 계획을 담은 칙령을 발표했다.

  • 등애는 3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감송(甘松, 현재 간쑤성 테워현의 남동쪽)을 거쳐 강유의 타중 (沓中, 현재 간쑤성 주취현의 북서쪽) 진지를 공격할 것이다.
  • 제갈서는 3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무가교 (武街橋, 현재 간쑤성 원현의 북서쪽)로 가서 강유의 퇴각로를 차단할 것이다.
  • 종회는 10만 명 이상의 병력을 이끌고 사곡 (斜谷, 현재 산시성 메이현의 남서쪽)을 통해 촉나라를 공격할 것이다.
  • 종회의 부하인 이보호열은 낙곡 (駱谷, 현재 산시성 저우즈현의 남서쪽)을 통해 별동대를 이끌 것이다.[10][9]
  • 위 황실은 위관에게 종회와 등애의 군사 작전을 감독하도록 권한을 부여했다. 위관은 또한 종회 휘하의 임시 군사 재판관 직을 맡았으며 1,000명의 군대를 지휘했다.[11]


263년 9월 20일에서 10월 19일 사이에, 촉나라 정벌을 위해 동원된 위나라 군대는 위나라 수도 낙양에 집결하여 출발할 준비를 마쳤다. 출발 전에 위나라 정부는 승진과 포상을 실시하고 사기 진작을 위한 군사 훈련을 실시했다. 이 시기에 위나라 장수 등돈이 촉나라는 정복할 수 없다고 말하자 사마소는 다른 사람들이 정벌에 대해 험담하지 않도록 경고하기 위해 그를 처형했다.[19]

종회는 베테랑 위나라 장수 허저의 아들인 허의에게 촉나라로 이어지는 도로 건설을 감독하도록 명령했다. 그러나 도로가 부실하게 건설되자 종회는 허의의 배경을 무시하고 임무 실패를 이유로 처형했다. 위나라 군대는 종회의 대담함에 충격을 받았다.[20]

263년 10월 20일부터 11월 17일 사이에, 사마소는 세 명의 군(郡) 태수를 명하여 그들의 주둔군을 이끌고 작전에 참여하게 했다. 왕기는 천수군에서 군대를 이끌고 강유의 진영을 공격하게 했고, 전홍은 농서군에서 군대를 이끌고 강유의 위치를 정면으로 공격하게 했으며, 양신(楊欣)은 금성군(金城郡, 오늘날 간쑤성 위중현 부근)에서 군대를 이끌고 감송(甘松)을 공격하게 했다.[21]

유흠(劉欽)은 또한 위흥군(魏興郡, 오늘날 산시성 안캉시 부근)에서 군대를 이끌고 자오곡(子午谷, 오늘날 산시성 양현 동쪽)을 통해 한중군을 공격했다.[22]

등애(鄧艾)가 제갈서(諸葛緒)에게 검각(劍閣)을 우회하여 진격할 것을 요청했으나, 제갈서는 권한이 없다며 거절했다. 이후 제갈서는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백수(白水)로 이동하여, 중회(鍾會)와 합류하여 검각에서 강유(姜維)를 공격하려 했다. 중회는 제갈서의 군대를 장악하고 싶어, 제갈서가 전투에서 겁을 먹었다고 위(魏) 조정에 몰래 보고했다. 그 결과 제갈서는 지휘권을 박탈당하고 감옥 수레에 실려 위 수도 낙양으로 압송되었다.[49]

등애는 음평에 도착했을 때 덕양촌을 거쳐 부현으로 가는 지름길을 택하여 검각 서쪽 약 100 리, 촉의 수도 성도에서 약 300리 떨어진 지역으로 진격하겠다는 생각을 떠올렸다. 그의 생각은 강유가 검각에서 부현으로 원군을 보내 검각의 방어력을 약화시키는 것이었다. 만약 강유가 원군을 보내지 않는다면 부현은 고립되어 쉽게 정복될 것이다.[50]

종회는 등애의 생각을 승인했고, 그의 부하 전장(田章)에게 등애의 원정에 합류하라고 명령했다. 263년 11월 18일에서 12월 17일 사이 등애는 음평에서 지름길을 통해 타격 부대를 이끌고 검각 서쪽을 우회하여 강유현으로 곧장 진격했다. 이 지름길은 700 리가 넘는 거리를 포함하고 있으며 험준한 산악 지대를 가로질렀다. 등애와 그의 병사들은 도중에 여러 다리를 건설해야 했다. 산은 높고 골짜기는 깊어 여정이 극도로 위험했다. 얼마 후, 그들은 보급 부대와 완전히 격리되었다. 등애는 큰 펠트 조각으로 몸을 감싸고 산을 굴러 내려갔다. 그의 부하들은 나무를 타고 절벽을 한 줄로 기어올랐다.[51] 그들은 가는 길에 세 그룹의 촉 복병과 마주쳤고, 그들을 격파하고 그들의 진영을 파괴했다. 등애는 전장에게 선봉을 이끌고 길을 개척하게 했다.[52] 등애와 그의 선봉은 강유현에 나타났다. 강유현의 촉나라 행정관으로 임명된 마묘 (馬邈)는 저항을 포기하고 등애에게 항복했다.[53]

위(魏)나라의 촉(蜀)나라 정복 연표[4]
대략적인 날짜지역사건
262년 겨울뤄양, 허난성사마소가 위 조정에 촉나라 정복 계획을 발표하다. 그는 종회관중 지역의 군사 업무를 담당하게 한다. 위는 촉나라 침공을 준비하기 위해 여러 성에서 약 18만 명의 병력을 동원한다.
263년 초주거현, 간쑤성강유는 위나라가 촉나라를 침공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경고를 성도에 보낸다. 황호유선에게 경고를 무시하라고 조언한다.
263년 가을뤄양, 허난성위 조정은 촉나라에 대한 3면 침공을 개략적으로 설명하는 조서를 발표한다. 종회, 등애, 제갈서는 각각 동쪽, 서쪽, 중앙 측면에서 군대를 이끌고 촉나라를 공격할 것이다.
263년 9월 20일 – 10월 19일뤄양, 허난성위 군대는 뤄양에서 출발한다.
산시성종회는 촉나라로 가는 길 건설을 감독하는 임무를 수행하지 못한 허의를 처형한다.
성고현과 면현, 산시성종회는 이부와 순개를 각각 낙성현과 한성현을 공격하도록 명령한다. 왕한과 강빈은 각각 낙성현과 한성현에서 자리를 지킨다.
녕강현, 산시성종회호열을 보내 양안관을 공격하게 한다. 강서가 호열에게 항복하고 양안관을 정복하는 것을 돕는다. 부첨은 관문을 방어하다가 전사한다.
263년 10월 20일 – 11월 17일천수, 농서군 및 우중현, 간쑤성, 그리고 안강, 산시성위(魏)군(Wei Commandery) 관리 왕기, 전홍, 양신, 유진은 각기 자신의 군대에서 군대를 이끌고 촉나라 침공에 합류한다.
롱난과 문현, 간쑤성유선요화, 장익과 동궐을 보내 각각 타중과 양안관으로 지원군을 이끌게 한다. 촉나라 지원군은 제갈서의 군대가 건위를 공격한다는 소식을 듣고 음평에서 멈춘다.
주거현, 간쑤성등애는 타중에서 강유를 격파한다.
백룡강과 가릉강의 교차점강유는 백수로 퇴각을 시도하지만 양신이 강천구에서 그를 가로막고 격파한다.
문현, 간쑤성강유제갈서를 우회하기 위해 공한곡으로 가서 음평 근처의 무계교를 막고 있다. 제갈서가 봉쇄를 해제하자 강유는 재빨리 돌아서서 다리를 건너 검각으로 이동한다. 제갈서는 너무 늦게 도착하여 강유를 막을 수 없었다.
검각현, 사천성강유, 요화, 장익과 동궐은 검각으로 후퇴한다. 종회는 검각을 여러 번 공격했지만 촉나라 방어선을 돌파하지 못했다.
문현, 간쑤성 및 검각현, 사천성등애는 음평에서 검각의 방어를 우회하고 바로 성도로 가는 지름길을 택하는 아이디어를 내놓는다. 그는 제갈서에게 함께 할 것을 요청하지만 후자는 거절한다. 중회는 제갈서를 비겁함으로 모함하고 그의 군대에 대한 지휘권을 빼앗는다.
263년 11월 18일 – 12월 17일문현, 간쑤성등애는 검각을 우회하고 음평에서 성도로 이어지는 지름길을 통해 정예 타격 부대를 이끈다.
강유현, 사천성강유의 촉나라 관리인 마막등애에게 항복한다.
면죽, 사천성등애는 면죽에서 제갈첨을 격파한다. 제갈첨, 제갈상, 황숭, 이구 및 장준이 전투에서 전사한다.
면양, 사천성강유는 검각을 버리고 파군으로 향한다. 종회는 부현으로 이동하여 호열, 전서와 방회에게 강유를 추격하도록 명령한다.
성도 및 광한, 사천성유선은 장소, 교주 및 등량을 보내 항복 문서와 옥새를 등애에게 낙현으로 가져간다. 그는 또한 장준과 강선에게 나머지 촉나라에 대한 명령을 위나라에 항복하라고 지시한다. 그는 이호를 보내 강유에게 부현에서 종회에게 항복하라고 명령한다.
성도, 사천성등애와 그의 군대는 성도를 점령한다.
면양, 사천성강유는 부현에서 종회에게 항복한다.


5. 3. 오나라

263년 11월 18일부터 12월 17일 사이, 촉한 정부는 동맹국인 오나라에 긴급 지원을 요청했다. 264년 1월 8일, 오나라 황제 손휴는 다섯 명의 장수에게 세 개의 부대를 이끌고 위나라 영토를 공격하여 위나라의 주의를 촉나라에서 돌리도록 명령했다. 정봉은 수춘 (현재의 안후이성수현)을 공격했고,[76] 유평과 사적은 남군 (현재의 후베이성징저우)을, 정풍과 손이는 면수를 따라 위나라 영토를 공격했다. 오나라 군대는 촉나라가 멸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철수했다.[77]

위나라의 촉나라 침공 중에 파동군(현재의 충칭시 일부)을 지키는 책임을 맡은 촉나라 장수 엄우는 파동에서 병력을 이끌고 최전선에서 촉나라 군을 지원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엄우의 부관인 낙현[87]은 단 2,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파동군의 수도인 용안(현재의 충칭시 펑제현)을 지켰다.[88][89]

263년 11월이나 12월, 성도 함락 소식이 용안에 도달했을 때 낙현은 백성들을 진정시키고 용안의 질서와 안정을 회복했다. 유선이 실제로 위나라에 항복했다는 소식을 확인한 후, 낙현은 모든 병력을 모아 사흘 동안 촉나라의 멸망을 슬퍼했다.[90]

그동안 오나라는 촉나라를 침략하여 위나라 침략에 저항하는 촉나라를 돕기 위해 증원군을 보낸다는 구실로 과거 촉나라 영토를 장악하기 위해 이 상황을 이용하려 했다. 264년 3월경, 오나라 장수 보협은 서릉(현재의 후베이성 이창시)에서 병력을 이끌고 용안을 공격했으나 낙현과 그의 부대에 강력한 저항에 부딪혔다. 오나라 군대가 화살을 그의 위치에 퍼붓자 낙현은 그의 부하 양종(楊宗)에게 포위망을 뚫고 위나라에 도움을 요청하라고 명령했다. 그는 또한 그의 부절을 넘겨주고 그의 아들을 인질로 보내 위나라 섭정 사마소에게 그의 진심을 설득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그의 병사들을 이끌고 오나라 군대를 반격하여 그들을 격파했다.[91]

보협의 패배에 분노한 오나라 황제 손휴는 그의 장수 육항에게 3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보협을 지원하여 용안을 포위하라고 명령했다. 6개월에 걸친 포위 공격 후 용안 인구의 절반 이상이 전염병으로 앓게 되었다. 바로 그때 위나라 장수 호열이 형주에서 낙현을 돕고 용안의 포위를 풀기 위해 증원군을 이끌고 왔다. 위나라 증원군의 도착을 본 오나라 군대는 후퇴했다.[92] 사마소는 낙현의 항복을 받아들여 그에게 남아 용안을 계속 지키라고 명령했다.[93]

오나라의 주요 장수와 그들이 이끈 군사 작전은 다음과 같다.

장수지휘 부대공격 목표비고
정봉오군수춘위나라의 주의를 분산[76]
유평오군남군[77]
사적오군남군[77]
정봉오군면수 중류[77]
손이오군면수 중류[77]
보협오군영안현촉나라 멸망 후 공격[91]
육항3만 명영안현보협 지원[92]


6. 기타

태시 4년(268년), 왕부라는 전직 병사가 도주하다가 "제갈도호(제갈첨의 행관은 도호)"의 이름을 사칭하여 수백 명의 동료를 모아 반란을 일으켰으나 처형되었다.[99] 이 사건은 일반 민중에게도 제갈량이 깊게 사랑받았으며, 그의 아들인 제갈첨의 인기와 지명도 또한 높았음을 보여준다.

강유는 과거 량주·옹주에서 반란을 일으켜 패배한 족 백호문과 족 치무재를 촉으로 받아들여, 성도 북서쪽에 있는 번현에 거주하게 했다.[100] 백호문은 촉한 멸망 후 량주로 돌아갔으며, 선비족 퇼발 수기능의 난에 참가했다. 촉 침공 당시 종회의 부하였던 진주 자사 호렬, 등애의 부하였던 량주 자사 견홍은 백호문에 의해 살해되었다.

참조

[1] 서적 Jin Shu vol. 2
[2] 서적 Jin Shu vol. 2
[3] 서적 Shu Ji annotation in Sanguozhi vol. 33
[4] 서적 Sanguozhi vols. 28, 33 and 44, Jin Shu vol. 2, and Zizhi Tongjian vol. 78
[5] 서적 Sanguozhi vol. 28
[6] 서적 Jin Shu vol. 2
[7] 서적 Jin Shu vol. 2
[8] 서적 Sanguozhi vol. 28
[9] 서적 Jin Shu vol. 2
[10] 서적 Sanguozhi vol. 28
[11] 서적 Jin Shu vol. 36
[12] 서적 Sanguozhi vol. 44
[13] 서적 Sanguozhi vol. 44
[14] 서적 Sanguozhi vol. 44
[15] 서적 Sanguozhi vol. 44
[16] 서적 Sanguozhi vol. 44
[17] 서적 Sanguozhi vol. 44
[18] 서적 Sanguozhi vol. 44
[19] 서적 Jin Shu vol. 2
[20] 서적 Sanguozhi vol. 28
[21] 서적 Jin Shu vol. 2
[22] 서적 Sanguozhi vol. 28
[23] 서적 Sanguozhi vol. 44
[24] 서적 Sanguozhi vol. 44
[25] 서적 Sanguozhi vol. 28
[26] 서적 Jin Shu vol. 2
[27] 서적 Sanguozhi vol. 28
[28] 서적 Sanguozhi vol. 28
[29] 서적 Sanguozhi vol. 44
[30] 서적 Sanguozhi vol. 44
[31] 서적 Sanguozhi vol. 44
[32] 서적 Jin Shu vol. 2
[33] 서적 Shu Ji annotation in Sanguozhi vol. 44
[34] 서적 Han Jin Chunqiu annotation in Sanguozhi vol. 44
[35] 서적 Sanguozhi vol. 44
[36] 서적 Sanguozhi vol. 44
[37] 서적 Sanguozhi vol. 28
[38] 서적 Jin Shu vol. 2
[39] 서적 Sanguozhi vol. 28
[40] 서적 Sanguozhi vol. 28
[41] 서적 Jin Shu vol. 2
[42] 서적 Sanguozhi vol. 44
[43] 서적 Sanguozhi vol. 28
[44] 서적 Sanguozhi vol. 44
[45] 서적 Sanguozhi vol. 44
[46] 서적 Sanguozhi vol. 28
[47] 서적 Sanguozhi vol. 28
[48] 서적 Sanguozhi vol. 44
[49] 서적 Sanguozhi vol. 28
[50] 서적 Sanguozhi vol. 28
[51] 서적 Sanguozhi vol. 28
[52] 서적 Sanguozhi vol. 28
[53] 서적 Sanguozhi vol. 28
[54] 서적 Sanguozhi vol. 43
[55] 서적 Sanguozhi vol. 35
[56] 서적 Sanguozhi vol. 43
[57] 서적 Sanguozhi vol. 43
[58] 서적 Sanguozhi vol. 36
[59] 서적 Sanguozhi vol. 35
[60] 서적 Sanguozhi vol. 28
[61] 서적 Sanguozhi vol. 28
[62] 서적 Sanguozhi vol. 42
[63] 서적 Sanguozhi vol. 33
[64] 서적 Sanguozhi vol. 33
[65] 서적 Sanguozhi vol. 33
[66] 서적 Sanguozhi vol. 33
[67] 서적 Sanguozhi vol. 28
[68] 서적 Shu Ji annotation in Sanguozhi vol. 33
[69] 서적 Sanguozhi vol. 28
[70] 서적 Sanguozhi vol. 28
[71] 서적 Sanguozhi vol. 28
[72] 서적 Sanguozhi vol. 44
[73] 서적 Sanguozhi vol. 44
[74] 서적 Sanguozhi vol. 28
[75] 서적 Jin Ji annotation in Sanguozhi vol. 44
[76] 서적 Sanguozhi vol. 55
[77] 서적 Sanguozhi vol. 48
[78] 서적 Sanguozhi vol. 28
[79] 서적 Shiyu annotation in Sanguozhi vol. 28
[80] 서적 Sanguozhi vol. 28
[81] 서적 Sanguozhi vol. 28
[82] 서적 Shiyu annotation in Sanguozhi vol. 28
[83] 서적 Han Jin Chunqiu annotation in Sanguozhi vol. 44
[84] 서적 Sanguozhi vol. 28
[85] 서적 Sanguozhi vol. 28
[86] 서적 Sanguozhi vol. 28
[87] 서적 Jin Shu vol. 57
[88] 서적 Jin Shu vol. 57
[89] 서적 Xiangyang Ji annotation in Sanguozhi vol. 41
[90] 서적 Jin Shu vol. 57
[91] 서적 Xiangyang Ji annotation in Sanguozhi vol. 41
[92] 서적 Jin Shu vol. 57
[93] 서적 Xiangyang Ji annotation in Sanguozhi vol. 41
[94] 서적 Jin Shu vol. 34
[95] 웹사이트 滅蜀記 [Mie Shu Ji] http://www.books.com[...] 2018-06-08
[96] 웹사이트 维基百科 魏延 https://zh.wikipedia[...] 维基百科 2024-05-12
[97] 서적 『三国志』姜維伝の裴松之の注
[98] 서적 『三国志』三少帝紀
[99] 서적 『華陽国志』巻八
[100] 서적 陳寿撰、裴松之注『三国志』郭淮伝・後主伝
[101] 서적 화양국지
[102] 서적 《자치통감》 권 78
[103] 서적 《삼국지》 권28 위서28 중 종회 진수
[104] 서적 《진서》 권2 제기2 중 문제 방현령 등
[105] 서적 《삼국지》 권4 삼소제기 중 진류왕 진수
[106] 문서 종회전에도 진류왕기와 비슷한 내용이 있는데 조서가 가을에 내려진 것으로 나온다. 또 이 조서에서 등애와 제갈서는 각각 3만여 군대를 거느린 것으로 나온다.
[107] 서적 한진춘추
[108] 서적 삼국지
[109] 서적 삼국지
[110] 서적 화양국지
[111] 서적 삼국지
[112] 문서 삼국지 후주전에서는 대사면과 개원이 검각 수비 이후에 있는데, 《화양국지》 유후주지에서는 장익·동궐·요화가 5로로 들어온 위군에 맞춰 움직인 직후로 나온다.
[113] 서적 삼국지
[114] 서적 삼국지
[115] 서적 삼국지
[116] 문서 위 (삼국)|위나라는 건국 이래 이때까지 손권 외의 이성제후왕이 없었고, 264년에 진왕이 되는 사마소도 당시에는 갓 진공(晉公)에 봉해졌을 뿐이었다.
[117] 문서 전사자 중 상서와 상서랑이 있는데, 제갈첨은 동궐과 공동으로 평상서사(平尙書事)를 겸직했기 때문에 상서대의 관리들을 부릴 수 있었다.
[118] 서적 삼국지
[119] 서적 삼국지
[120] 서적 삼국지
[121] 서적 한진춘추
[122] 서적 삼국지
[123] 서적 화양국지
[124] 문서 임시로 황제의 권한을 대행하는 것.
[125] 문서 적의 전사자의 시체를 높이 쌓고 흙으로 덮어 만든 것으로, 전공을 뽐내는 데 쓰인다.
[126] 서적 촉기
[127] 문서 촉의 총 인구는 남녀구 94만 명 + 장수와 군사 10만 2천 명 + 관리 4만 명으로 총 108만 2천이다.
[128] 서적 삼국지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