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바네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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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요한 바네르는 1596년 스웨덴에서 태어난 군인으로, 30년 전쟁에서 스웨덴 군의 주요 지휘관으로 활약했다. 그는 1615년 스웨덴 육군에 입대하여 군사적 재능을 보였으며, 30년 전쟁 동안 브라이텐펠트 전투, 비트슈토크 전투 등 주요 전투에서 승리하며 스웨덴의 영향력을 확대했다. 1641년 사망했으며, 렌나르트 토르스텐손을 후계자로 지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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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바네르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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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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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일 | 1596년 6월 23일 |
사망일 | 1641년 5월 10일 (향년 44세) |
출생지 | 스웨덴 Djursholm 성 |
사망지 | 작센 선제후국 할버슈타트 |
군사 복무 | |
소속 | 스웨덴 |
군종 | 스웨덴 육군 |
복무 기간 | 1615년–1641년 |
최종 계급 | 육군 원수 |
주요 참전 전투/전쟁 | 잉그리아 전쟁 폴란드-스웨덴 전쟁 (1621-1625) 폴란드-스웨덴 전쟁 (1626-1629) 30년 전쟁 |
기타 정보 | |
이후 활동 | 추밀 고문관 |
종교 | 프로테스탄트 |
2. 초기 생애
요한 바네르(Johan Banér)는 웁살라의 듀르스홀름 성에서 태어났다. 네 살 때, 그는 아버지인 스웨덴 국왕 비밀평의회 의원 구스타프 바네르와 삼촌인 스텐 악셀손 바네르(역시 국왕 비밀평의회 의원)가 처형당하는 것을 목격해야 했다. 이들은 1600년 링셰핑 학살에서 시기스문드 국왕을 지지했다는 이유로 카를 9세 국왕에 의해 반역죄로 기소되어 처형되었다. 구스타프 2세 아돌프 국왕의 아버지가 바네르의 아버지를 처형했음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어린 시절부터 깊은 우정을 쌓았다. 이는 주로 구스타프 2세 아돌프가 즉위 직후 바네르 가문을 복권시켰기 때문이다.
요한 바네르는 1615년 스웨덴 육군에 입대하여 잉그리안 전쟁 중 프스코프 공성전 등에 참전하며 군 경력을 시작했다. 이후 러시아, 폴란드와의 전쟁에서 뛰어난 활약을 보여 25세의 젊은 나이에 대령으로 진급했다.
3. 군사 경력
그의 군사적 역량이 가장 두드러진 무대는 30년 전쟁이었다. 1630년 구스타프 2세 아돌프 국왕이 독일에 상륙했을 때 왕의 주요 지휘관 중 한 명으로 참전하여, 브라이텐펠트 전투에서 스웨덴 기병 우익을 지휘하는 등 북독일 전역에서 활약했다. 그는 아우크스부르크, 뮌헨 점령과 레흐 전투 등 초기 스웨덴군의 승리에 기여했다.
국왕 사후에도 바네르는 스웨덴군의 핵심 인물로 활동했다. 1634년 스웨덴 육군 원수로 진급하여 군대를 이끌고 보헤미아와 작센 선제후령 등지에서 작전을 수행했다. 뇌르틀링겐 전투 패배로 스웨덴군이 위기를 맞기도 했으나, 1636년 비트슈토크 전투에서 알렉산더 레슬리 등과 연합하여 황제군을 격파하며 중부 독일에서 스웨덴의 영향력을 회복시키는 중요한 전공을 세웠다.[4][1] 이후에도 독일 북부와 보헤미아를 오가며 켐니츠 전투에서 작센 군을 패배시키는 등 활약을 이어갔고, 1641년 초에는 다뉴브강의 레겐스부르크를 기습하는 대담한 작전을 시도하기도 했다.
1641년 5월 할버슈타트로 후퇴한 후 사망했으며, 과도한 음주로 인한 간경변이 원인으로 추정된다.[2][5] 그는 죽기 전 렌나르트 토르스텐손을 후계자로 지명했다.
3. 1. 30년 전쟁 활약
30년 전쟁은 요한 바네르가 군사적 역량을 크게 발휘한 무대였다. 1630년 구스타프 2세 아돌프가 독일에 상륙했을 때, 바네르는 왕의 주요 지휘관 중 한 명으로서 북독일 전역에 참전했다. 그의 첫 주요 전투인 브라이텐펠트 전투에서는 스웨덴 기병의 우익을 성공적으로 지휘했다. 이후 그는 아우크스부르크와 뮌헨을 점령하는 데 기여했으며, 레흐 전투와 도나우뵈르트에서 황제군을 격파하며 뛰어난 전공을 세웠다.
그러나 알브레히트 폰 발렌슈타인의 진영이 있던 알테 페스테 공격에서는 실패하고 부상을 입었다. 이 부상으로 인해 구스타프 2세 아돌프가 뤼첸으로 진격할 때 그는 서부 지역 사령부에 남아 황제군 장군 요한 폰 알드링겐과 대치해야 했다. 스웨덴 국왕이 뤼첸 전투에서 전사한 지 2년 후, 바네르는 스웨덴 육군 원수로 진급하여 16,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보헤미아로 진격했다. 그는 작센 선제후령 군대와 합류하여 프라하로 향했으나, 뇌르틀링겐 전투에서 동맹군인 베른하르트가 대패하면서 그의 진군은 잠시 멈추게 되었다.
1635년 프라하 조약 체결로 스웨덴군의 입지는 불안정해졌으나, 1636년 10월 4일 비트슈토크 전투에서 알렉산더 레슬리가 이끄는 스코틀랜드군과 연합하여 황제군을 격파하면서 중부 독일에서 스웨덴의 영향력을 다시 회복시켰다. 바네르는 이 전투의 중요성에 대해 크리스티나 여왕에게 보낸 보고서에서 레슬리의 지원이 없었다면 전군이 위기에 빠졌을 것이라고 언급하기도 했다.[1][4]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합군은 수적으로 열세였기에, 1637년 바네르는 공세를 이어가지 못하고 토르가우의 포위된 수비대를 구출한 뒤 오데르강 너머 포메라니아로 후퇴해야 했다.
1639년, 바네르는 다시 북독일로 진격하여 켐니츠 전투에서 작센 군을 격파하고 보헤미아를 침공했다. 1640년에서 1641년으로 넘어가는 겨울 동안에는 서부 지역에서 활동했으며, 그의 마지막 군사적 업적은 다뉴브강에서의 대담한 기습 공격 시도였다. 한겨울에 귈브리앙 백작이 이끄는 프랑스 군대와 연합하여 레겐스부르크를 기습했으나, 강을 건너던 중 얼음이 녹는 바람에 점령에는 실패했다. 이후 바네르는 할버슈타트로 후퇴했고, 1641년 5월 10일 그곳에서 사망했다. 사망 원인은 과도한 음주로 인한 간경변으로 추정된다.[2][5] 그는 후임자로 렌나르트 토르스텐손을 지명했다. 그의 부하들은 그를 매우 따랐으며, 그의 시신을 볼펜뷔텔 전투의 전장에서 함께 운구했다. 반면 그의 약탈로 고통받았던 보헤미아에서는 그의 죽음을 조롱하는 노래가 만들어지기도 했다.[2] 그의 유해는 스톡홀름의 리다홀멘 교회에 안장되었다.[3]
3. 2. 30년 전쟁 후반기 활약
알브레히트 폰 발렌슈타인의 알테 페스테 진영 공격 실패로 부상을 입은 바네르는 구스타프 2세 아돌프가 뤼첸으로 진군했을 때 서부 지역에 남아 황제군 장군 요한 폰 알드링겐과 대치했다. 뤼첸 전투에서 스웨덴 국왕이 사망한 지 2년 후, 바네르는 스웨덴 육군 원수가 되어 16,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보헤미아로 진격했다. 그는 작센 선제후령 군대와 합류하여 프라하로 향했으나, 베른하르트가 뇌를링겐 전투에서 대패하면서 진군이 중단되었다.
이 패배와 이듬해 프라하 조약 체결로 스웨덴군은 매우 불안정한 상황에 놓였다. 그러나 1636년 10월 4일, 바네르는 스코틀랜드 출신의 알렉산더 레슬리, 렌나르트 토르스텐손, 제임스 킹 장군 등과 연합하여 비트슈토크 전투에서 황제군을 격파하며 중부 독일에서 스웨덴의 영향력을 다시 회복시켰다. 바네르는 크리스티나 여왕에게 보낸 보고서에서 레슬리의 지원이 결정적이었음을 언급하며 "[나의 병사들은] 전투 중 그와 함께 있던 5개의 보병 여단이 적시에 우리를 도와 적의 4개 보병 여단을 우리에게서 몰아내고 용감하게 공격하지 않았다면 완전히 혼란에 빠졌을 것이다. 그래서 마침내 숨을 돌릴 수 있었다."라고 적었다.[4][1]
하지만 연합군은 여전히 수적으로 열세였기에, 1637년 바네르는 공세를 이어가지 못하고 토르가우의 포위된 수비대를 구출한 뒤 오데르 강 너머 포메라니아로 후퇴해야 했다.
1639년, 바네르는 다시 독일 북부를 장악하며 켐니츠 전투에서 작센 군대를 격파하고 보헤미아를 직접 침공하여 스웨덴의 군사적 우위를 재확인했다. 1640년부터 1641년까지 겨울 동안 그는 서부 지역에서 활동했다. 그의 마지막 주요 군사 활동은 다뉴브 강에서의 대담한 기습 작전이었다. 한겨울에 프랑스의 귈브리앙 백작 휘하 군대와 연합하여 국회가 소집 중이던 레겐스부르크를 기습 공격했다. 그러나 강을 건너던 중 얼음이 녹아내려 도시 점령에는 실패했다.
바네르는 이후 할버슈타트로 후퇴했고, 1641년 5월 10일 그곳에서 사망했다. 사망 원인은 과도한 음주로 인한 간경변으로 추정된다.[5][2] 그는 죽기 전 렌나르트 토르스텐손을 자신의 후계자로 지명했다. 바네르는 부하들에게 큰 사랑을 받았으며, 그의 병사들은 볼펜뷔텔 전투의 혼란 속에서도 그의 시신을 수습하여 운구했다. 반면, 그에게 약탈당했던 보헤미아 등 적대 지역에서는 그의 죽음을 기뻐하며 풍자적인 레퀴엠을 작곡하기도 했다.[2] 그는 스톡홀름의 리다홀멘 교회에 안장되었다.[3]
4. 유산 및 평가
크리스티나 여왕 재위 시절 악셀 옥센셰르나의 지휘 아래 뛰어난 군사적 성과를 거두었다. 그의 군사 경력에서 켐니츠 전투는 최고의 순간으로 평가받을 가능성이 높다. 비트슈토크 전투에서의 스웨덴군 승리 역시 중요한 업적이지만, 이는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로 여겨진다. 이는 바네르 본인이 작성한 1636년과 1640년 보고서 사이의 차이점에서도 엿볼 수 있다. 그는 황제가 자신을 휘하에 두기 위해 제시한 매력적인 제안을 거절하며 스웨덴에 대한 충성심을 지켰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5. 가족 관계
(Catharina Elisabeth von Pfuelde)
아담 폰 프펠(Adam von Pfuel)과 바르바라 폰 부르크스도르프(Barbara von Burgsdorff)의 딸.
(Elisabeth Juliana von Erbachde)
게오르크 3세 에르바흐-브로이베르크 백작(George III, Count of Erbach-Breuberg)과 마리아 폰 바르비-뮐링겐 백작 부인(Maria von Barby-Mühlingen)의 딸.
(Johanna von Baden-Durlachd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