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셀 옥센셰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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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악셀 옥센셰르나는 스웨덴의 정치가이자 외교관으로, 1583년 포뇌에서 태어나 1654년 사망했다. 그는 칼 9세와 구스타프 2세 아돌프 국왕, 그리고 크리스티나 여왕 시대를 거치며 스웨덴의 정치, 군사, 행정, 외교에 큰 영향을 미쳤다. 1612년 총리가 된 후 구스타프 2세 아돌프 국왕과 협력하여 덴마크와의 칼마르 전쟁을 종식시키고, 30년 전쟁에서 스웨덴을 이끌었다. 구스타프 2세 아돌프 사후에는 섭정으로서 크리스티나 여왕을 보좌하며 베스트팔렌 조약 체결에 기여했다. 그는 뛰어난 실용주의자이자 행정 개혁가로 평가받으며, 스웨덴의 근대화에 크게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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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셀 옥센셰르나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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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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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위 | 고귀하신 백작 |
이름 | 악셀 옥센셰르나 |
출생일 | 1583년 6월 16일 |
출생지 | 폰외, 웁란드 , 스웨덴 |
거주지 | 티되 성 |
사망일 | 1654년 8월 28일 |
사망지 | 스톡홀름, 스웨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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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 | 정치가 |
배우자 | 안나 오케스도테르 보트 |
자녀 | 13명 (요한 옥센셰르나 포함) |
관직 | |
직책 | 스웨덴 왕국 재상 |
재임 시작 | 1612년 |
재임 종료 | 1654년 |
군주 | 구스타브 2세 아돌프 크리스티나 여왕 |
전임자 | 스반테 투레손 비엘케 |
후임자 | 에리크 옥센셰르나 |
관직 2 | |
직책 | 리가 총독 |
재임 시작 | 1622년 |
재임 종료 | 1626년 |
전임자 | 직책 신설 |
후임자 | ? |
관직 3 | |
직책 | 프로이센 총독 |
재임 시작 | 1626년 |
재임 종료 | 1631년 |
전임자 | 직책 신설 |
후임자 | 직책 폐지 |
기타 정보 | |
로마자 표기 | Aksel Okseonsyeruna |
국적 | 스웨덴 |
2. 생애
우플란드 지방 포뇌(Fånö)에서 귀족 가문 출신으로 태어난 악셀 옥센셰르나는 독일에서 유학 후 1603년 귀국하여 칼 9세의 왕실 고문, 1606년 추밀원 위원으로 임명되었다. 1611년 칼 9세의 뒤를 이은 구스타브 2세 아돌프와 협력 관계를 맺고, 1612년 1월 6일 총리로 임명되어 스웨덴의 정치, 군사, 행정, 무역, 통상 제도를 정비하고 외교 정책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1613년 덴마크와의 칼마르 전쟁을 종식시킨 크네레드 조약을 체결하고, 1617년 구스타브 2세 아돌프 대관식에서 기사 작위를 받았다. 1626년 귀족원(Riddarhusordning)을 설립하여 귀족 계층을 체계화했고, 1622년부터 1626년까지 리가 총독, 1626년부터 1631년까지 프로이센 총독을 역임했다. 1629년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과의 전쟁을 종식시킨 알트마르크 조약을 체결했다.
1631년 9월 17일 30년 전쟁 중 브라이텐펠트 전투에서 구스타브 2세 아돌프를 보좌했고, 1632년 11월 16일 뤼첸 전투에서 국왕 사망 후 스웨덴의 독일 정책을 주도했다.
1632년 구스타브 2세 아돌프의 딸 크리스티나가 6세의 나이로 즉위하자 1644년까지 섭정을 맡았다.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 체결에 영향을 미쳤으나, 크리스티나 여왕 친정 이후 외교, 종교, 후계자 문제로 갈등을 겪었다. 1650년부터 관계가 개선되었고, 1654년 스톡홀름에서 사망할 때까지 총리 지위를 유지했다.
옥센셰르나는 칼마르 전쟁 종결, 크네레드 조약 체결에 기여하고, 구스타브 2세 아돌프와 함께 전장을 누비며 내정에서 군주를 지지했다. 관료 제도, 상법, 우편 제도를 근대화하고 웁살라 대학교 총장을 역임했다.[29] 구스타브 2세 아돌프는 군사적 천재였지만, 옥센셰르나의 침착함과 신중함 덕분에 위기를 극복한 경우가 많았다. 두 사람의 "냉정함"과 "열정"은 균형을 이루며 스웨덴 발전에 기여했다.
30년 전쟁에서 스웨덴은 루터파 프로테스탄트를 지원했고, 구스타브 2세 아돌프는 브라이텐펠트 전투 등에서 가톨릭을 격파하여 사자왕 칭호를 얻었다. 1632년 옥센셰르나는 5만 군대를 이끌고 독일에 파견되었고, 같은 해 11월 6일 뤼첸 전투에서 구스타브 2세 아돌프가 전사했다.
옥센셰르나는 구스타프 혼 등에게 스웨덴군 지휘를 맡기고 귀환하여 크리스티나를 왕위에 앉히고 섭정단의 중심이 되어 국정을 총괄했다. 하일브론 동맹을 결성하고 프랑스를 참전시키는 등 30년 전쟁 승리에 기여하여 스웨덴을 발트 제국으로 만들었다.[30] 1654년 옥센셰르나는 스웨덴이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북방 패권을 확립하는 것을 확인하고 사망했다.
구스타브 2세 아돌프와 옥센셰르나는 서로 존경했지만, 정치적으로 중앙 집권을 추구한 구스타프 2세 아돌프와 귀족 대표 옥센셰르나는 입장이 달랐다. 구스타프 2세 아돌프는 옥센셰르나의 조언 없이 결정하기도 했지만, 대부분 그의 조언을 구했고, 제도의 근대화와 가톨릭에 대한 승리라는 공동 목표를 위해 협력했다.
2. 1. 초기 생애 및 교육
우플란드 지방 포뇌(Fånö)에서 옥센셰르나 가문(Oxenstierna) 출신의 귀족 구스타프 가브리엘손 옥센셰르나(Gustaf Gabrielsson Oxenstierna)와 비엘케 가문(Bielke) 출신의 귀족 바르브로 악셀도테르 비엘케(Barbro Axelsdotter Bielke) 부부의 아들로 태어났다.[3] 아버지 구스타프가 사망한 이후, 어머니 바르브로는 악셀과 그의 형제들인 크리스테르(Christer), 구스타프(Gustaf)가 해외에서 유학하도록 했다.[3] 악셀 옥센셰르나 형제들은 독일 로스토크 대학교, 비텐베르크 대학교(현재의 할레-비텐베르크 대학교), 예나 대학교에서 유학했다.[3]1603년 스웨덴으로 귀국한 후 칼 9세 국왕의 왕실 고문 대신으로 위촉되었고, 1606년에는 추밀원(Riksrådet) 위원이 되었다.[4] 옥센셰르나는 스코틀랜드어(Scots language)에 능통했는데, 이는 당시 스웨덴에 거주하던 스코틀랜드인들의 중요성을 반영한다. 옥센셰르나는 그의 대리인 제임스 스펜스 경(Sir James Spens)으로부터 스코틀랜드어로 된 서신을 정기적으로 받았으며, 스코틀랜드측 상대인 라우던 백작(Earl of Loudoun)에게 공식 서한을 직접 스코틀랜드어로 작성하기도 했다.[5]
2. 2. 구스타프 2세 아돌프와의 협력
1611년에 사망한 칼 9세의 뒤를 이어 스웨덴의 국왕으로 즉위한 구스타프 2세 아돌프와 협력 관계를 수립했다. 1612년 1월 6일에 구스타프 2세 아돌프 국왕으로부터 스웨덴의 총리로 임명된 이후에는 스웨덴의 정치, 군사, 행정, 무역, 통상 제도를 정비하는 한편 스웨덴의 외교 정책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4][6] 1613년에는 덴마크와의 칼마르 전쟁을 종식시킨 크네레드 조약을 체결했다.[1][7] 1617년에는 구스타프 2세 아돌프 국왕이 대관식을 치르면서 기사 계급을 받았다.[3]

리보니아 공국과 핀란드(1614-1616)에서 구스타프가 자주 부재했던 동안 옥센셰르나는 그의 총독직을 수행했다.[6] 국왕이 리보니아에 있었을 때 옥센셰르나가 받았던 임무 중 하나는 요한 카지미어와 국왕의 여동생인 카타리나의 결혼과 관련된 협상을 마무리하는 것이었다.[4] 1620년 그는 구스타프와 브란덴부르크의 마리아 일레오노라(Maria Eleonora of Brandenburg)의 혼인 계약을 체결하기 위해 베를린으로 파견된 사절단을 이끌었다.[6] 국왕의 러시아와 폴란드 전쟁 동안 그는 인력과 자금을 포함하여 필요한 모든 것을 스웨덴 군과 스웨덴 왕립 해군에 공급하는 주요 임무를 맡았다.[6]
옥센셰르나는 구스타프 2세 아돌프의 칭찬을 받으며 1622년 스웨덴 왕국 총독 겸 리가 사령관으로 임명되었고, 1629년에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과의 전쟁을 종식시킨 알트마르크 조약을 체결했다.[1][6]
1631년 9월 17일 브라이텐펠트 전투에서 구스타프 2세 아돌프 국왕을 보좌했고, 1632년 11월 16일 뤼첸 전투에서 국왕이 사망한 이후에는 스웨덴의 독일 정책에서 중대한 역할을 수행했다.
옥센셰르나는 국왕의 신임을 얻어 1612년부터 1632년까지 오랫동안 성공적인 협력 관계를 맺었다. 그의 "냉정함"은 국왕의 "열정"과 균형을 이루었고, 때로는 국왕의 충동적인 계획을 현실적으로 실행 가능하도록 만들었다. 30년 전쟁 참전 문제에서 옥센셰르나는 국왕만큼 열정적이지 않았지만, 국왕의 의지가 결정적이었기에 그의 뜻에 따랐다. 때때로 옥센셰르나는 국왕의 가혹한 행동으로 인해 긴장된 관계를 완화하기 위해 개입하기도 했다.[8] 그는 국왕으로부터 업무에 대해 정기적으로 최고의 칭찬을 받았으며, 구스타프 국왕은 거의 모든 분야에서 옥센셰르나와 상의했다.[1]
구스타프 2세 아돌프는 군사적 천재였지만, 급하고 혈기왕성한 성격이었기에 침착하고 신중한 옥센셰르나의 기량 덕분에 위기를 모면한 경우도 많았다. 구스타프 2세 아돌프가 군사적 자질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도 옥센셰르나가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할 수 있다. 이 두 사람의 성격을 잘 보여주는 일화로 "옥센셰르나, 만약 사람들이 모두 당신처럼 냉정하다면 세상은 얼어붙어 버릴 거요." "만약 사람들이 모두 폐하처럼 급하다면 세상은 불타 버릴 것입니다."라는 대화가 전해진다.
독일(신성 로마 제국)에서 30년 전쟁이 시작되자, 스웨덴은 루터파 프로테스탄트를 돕기 위해 참전한다. 구스타프 2세 아돌프는 군대를 이끌고 북독일에 상륙하여 브라이텐펠트 전투 등에서 가톨릭을 무찔러 사자왕이라는 칭호를 얻게 된다. 1632년에는 구스타프의 원군 요청에 응하여 5만의 군대를 편성하여 독일에 건너간다.
1632년 11월 6일 발렌슈타인 장군이 이끄는 신성 로마 황제군과 구스타프 2세 아돌프가 이끄는 스웨덴군이 뤼첸 전투에서 격돌했고, 혼전 속에서 구스타프 2세 아돌프는 총탄을 맞고 전사한다.
구스타프 2세 아돌프와 옥센셰르나는 죽을 때까지 변치 않는 우정을 맺었지만, 정치적 성향에서는 중앙 집권을 추구한 구스타프 2세 아돌프와 귀족 계급의 대표자였던 옥센셰르나의 입장이 상충되는 부분도 있었다. 재위 기간 중 구스타프 2세 아돌프는 옥센셰르나의 조언 없이 독자적으로 판단한 경우도 있지만, 많은 경우 항상 그의 조언을 구했고, 별동대를 이끌 때에는 그의 조언을 얻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했다. 그들의 강력한 협력 관계는 제도의 근대화와 가톨릭에 대한 승리라는 공통 목표에서 비롯된 것으로 여겨진다.
2. 3. 섭정 및 크리스티나 여왕 시대
1632년 11월 16일 뤼첸 전투에서 구스타브 2세 아돌프 국왕이 사망한 후, 옥센셰르나는 스웨덴의 독일 정책을 주도했다.[1]구스타브 2세 아돌프의 유일한 딸 크리스티나가 6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면서, 옥센셰르나는 1644년까지 스웨덴의 섭정을 맡았다.[1] 1634년에는 새로운 헌법을 작성하여 섭정 위원회를 구성하고 의장을 맡았다.[8]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 체결 과정에서 영향력을 행사했으나,[1] 크리스티나 여왕의 친정 이후 외교 정책, 종교 정책, 후계자 선정 문제로 갈등을 빚었다.[1] 옥센셰르나는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스웨덴이 얻은 서포메라니아, 위제돔, 볼린, 비스마르, 브레멘-베르덴 등의 영토가 크리스티나의 과도한 간섭 때문이라고 비판했다.[6]
크리스티나가 퇴위 의사를 밝히자 처음에는 반대했으나, 결국 카를 10세 구스타프를 지지하며 퇴위를 도왔다.[6][7] 옥센셰르나는 카를 10세 즉위 두 달 만에 사망했다.[6][7]
3. 업적 및 유산
1612년 옥센셰르나는 총리가 된 후, 칼마르 전쟁을 종결시킨 크네레드 조약 체결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29] 그는 현명한 군주 구스타프 2세 아돌프와 함께 전장을 누비며 내정에서 끊임없이 군주를 지지했다. 관료 제도, 상법, 우편 제도를 근대화했고, 웁살라 대학교 총장으로서 학문의 중요성을 강조했다.[29]
구스타프 2세 아돌프는 군사적 천재였지만, 급하고 혈기왕성한 성격이었기에 침착하고 신중한 옥센셰르나의 기량 덕분에 위기를 모면한 경우도 많았다. 구스타프 2세 아돌프가 군사적 자질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도 옥센셰르나가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할 수 있다. 이 두 사람의 성격을 잘 보여주는 일화로 "옥센셰르나, 만약 사람들이 모두 당신처럼 냉정하다면 세상은 얼어붙어 버릴 거요." "만약 사람들이 모두 폐하처럼 급하다면 세상은 불타 버릴 것입니다."라는 대화가 전해진다.
독일(신성 로마 제국)에서 30년 전쟁이 시작되자, 스웨덴은 루터파 프로테스탄트를 돕기 위해 참전했다. 구스타프 2세 아돌프는 군대를 이끌고 북독일에 상륙하여 브라이텐펠트 전투 등에서 가톨릭을 무찔러 사자왕이라는 칭호를 얻게 된다. 1632년에는 구스타프의 원군 요청에 응하여 5만의 군대를 편성하여 독일에 건너갔다.
1632년 11월 6일, 발렌슈타인 장군이 이끄는 신성 로마 황제군과 구스타프 2세 아돌프가 이끄는 스웨덴군이 뤼첸 전투에서 격돌했다. 혼전 속에서 구스타프 2세 아돌프는 총탄을 맞고 전사했다. 옥센셰르나는 지휘권을 계승한 작센바이마르 공 베른하르트를 보좌하여, 격전 끝에 스웨덴군은 황제군을 격파했지만, 위대한 군주의 죽음을 만회할 수는 없었다.
구스타프 2세 아돌프 사후, 옥센셰르나는 구스타프 혼 등 동료 장군들에게 스웨덴군의 지휘를 맡기고 본국으로 귀환한다. 크리스티나를 왕위에 앉히고, 섭정단의 중심이 되어 스웨덴의 국정을 총괄했다. 옥센셰르나는 왕을 잃고 약화된 스웨덴군의 열세를 구하기 위해 프로테스탄트 제후들을 결집시켜 하일브론 동맹을 결성하고, 합스부르크 가문에 반대하면서도 측면 지원에 머물렀던 프랑스를 직접 참전시키는 등 30년 전쟁의 최종 승리를 이끌어내어 대국의 자리를 획득했다.[30] 그리고 스웨덴이 30년 전쟁의 강화 조약베스트팔렌 조약에 의해 북방의 패권을 확립하고 발트 제국의 자리에 군림하는 것을 확인한 후, 1654년에 세상을 떠났다.
휘고 그로티우스는 옥센셰르나를 "이 세기의 가장 위대한 인물"이라고 칭송했고,[4] 리슐리외 추기경은 "끝없는 좋은 조언의 원천"이라고 불렀다.[4] 마자랭 추기경은 유럽의 모든 장관들이 같은 배에 있다면 키를 옥센셰르나에게 맡겨야 한다고 말했으며, 8세 우르바누스 교황은 그를 세상이 본 가장 뛰어난 인물 중 한 명이라고 평가했다.[4]
구스타프 2세 아돌프와 옥센셰르나는 서로를 존경하는 사이였다. 오늘날 스웨덴의 수도 스톡홀름 구스타프 2세 아돌프 광장에는 구스타프 2세 아돌프의 동상이 있고, 그 아래쪽에는 옥센셰르나의 동상이 있다.
3. 1. 행정 개혁
악셀 옥센셰르나(Axel Oxenstiernasv)는 1612년 1월 6일 국왕 비밀평의회(Privy Council)의 고등대법관(Lord High Chancellor, Rikskansler)이 되었다.[3] 그의 통제적이고 조직적인 손길은 곧 행정부의 모든 부서에서 드러났다.[6] 옥센셰르나는 행정 시스템을 통일적으로 수립하는데 큰 영향을 주었다.[2]1610년대와 1620년대의 광범위한 개혁 기간 동안 스웨덴 정부는 크게 현대화되고 효율성이 높아졌으며, 이는 스웨덴 제국을 건설할 전쟁 정책에 필요한 것이었다. 개혁된 분야에는 육군과 해군 조직 및 모병, 무역 및 산업 정책, 지역 및 지방 행정, 고등 교육 시스템, 사법 제도가 포함된다.[8] 행정 구역인 스웨덴의 주의 경계는 오늘날까지도 17세기 옥센셰르나가 설정한 경계를 상당 부분 따르고 있다.
옥센셰르나는 1626년 기사원(riddarhusordning)의 상임규칙에 크게 기여했다.[2] 구스타프 2세 아돌프 사후, 1634년 정부 형태 문서(Instrument of Government of 1634)의 배후 인물이었으며, 이 문서에서 5명의 고위 관리(Great Officers of the Realm)의 조직이 명확하게 규정되었다. 고위 관리들이 수장이 된 5개의 정부 부처가 설립되었다.[2][23] 옥센셰르나는 반대에도 불구하고 정부 형태 문서를 통과시켰다. 그는 새로운 정부 형태가 고(故) 구스타프 국왕의 의지를 반영한다고 주장하며, 자신을 국왕의 생각과 희망을 해석하는 사람으로 만들고, 반대파가 진실을 통제할 가능성을 없애버렸다.[8]
옥센셰르나는 1612년에 총리가 되었다. 1611년에 시작된 칼마르 전쟁 종결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으며(크네레드 조약), 구스타프 2세 아돌프와 함께 내정에서 끊임없이 군주를 지지했다. 관료 제도와 상법 및 우편 제도를 근대화했고, 웁살라 대학교 총장에 취임했다.[29]
3. 2. 외교적 성과
1612년 1월 6일, 악셀 옥센셰르나는 국왕 비밀평의회(Privy Council)의 고등대법관(Lord High Chancellor, Rikskansler)이 되었다.[3] 당시 스웨덴은 덴마크(칼마르 전쟁) ,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폴란드-스웨덴 전쟁)), 러시아(잉그리아 전쟁)와의 세 차례 전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옥센셰르나의 첫 번째 큰 과제는 이 전쟁들에서 평화를 달성하는 것이었다.[7]1613년 크네레드 조약 협상에서 스웨덴의 전권대사로 활약하여 조약 체결에 기여했다. 이 공로로 스내브링에(Snävringe) 지방 판사직과 키미토(Kimito) 남작 작위를 받았다.[1]
1620년에는 브란덴부르크의 마리아 일레오노라와 구스타프 2세 아돌프의 혼인 계약을 체결하기 위해 베를린으로 파견되었다.[6]
1622년, 옥센셰르나는 리가 총독 겸 사령관으로 임명되어[1][6] 부르트니에키 성을 포함한 4개의 성과[3] 벤덴 주교구를 하사받았다.[6] 1623년 폴란드와의 휴전 협상을 맡았고, 1624년에는 덴마크와의 관계 악화를 막았다.[6]
1626년 폴란드-스웨덴 전쟁이 재개되자 프로이센 총독이 되었고,[6] 1629년에는 폴란드-리투아니아와 유리한 알트마르크 휴전을 체결했다.[6] 1628년 9월에는 슈트랄준트 요새를 지키기 위해 덴마크와 공동 점령을 준비했다.[6]
1643년 덴마크를 공격하여 토르스텐손 전쟁을 일으켰다. 이 전쟁에서 스웨덴군이 승리하고, 1644년 페마른 해전에서 스웨덴 해군이 덴마크 해군을 격파하면서 덴마크는 평화를 요청했다.[14]
옥센셰르나는 브룀세브로 조약 협상에 직접 참여하여 스웨덴이 갓란드, 사아레마 등 여러 영토를 획득하는 데 기여했다.[8][11] 이 조약으로 스웨덴은 북해로의 무제한적인 접근권을 확보하고 덴마크-노르웨이의 포위망에서 벗어났다.[17] 조약 체결 후, 옥센셰르나는 쇠데르외레 백작(Count of Södermöre)으로 봉해졌다.[1]
1632년 뤼첸 전투에서 구스타프 2세 아돌프가 전사한 후, 옥센셰르나는 하일브론 동맹을 결성하여 프로테스탄트 제후들을 결집시키고, 프랑스를 30년 전쟁에 직접 참전시키는 등 뛰어난 외교적 수완을 발휘했다.[30]
3. 3. 30년 전쟁과 하일브론 동맹
1632년 11월 6일, 발렌슈타인 장군이 이끄는 신성 로마 황제군과 구스타프 2세 아돌프가 이끄는 스웨덴군이 뤼첸 전투에서 격돌했다. 혼전 속에서 구스타프 2세 아돌프는 총탄을 맞고 전사했다. 옥센셰르나는 지휘권을 계승한 작센바이마르 공 베른하르트를 보좌하여, 격전 끝에 스웨덴군은 황제군을 격파했다. 하지만 위대한 군주의 죽음을 만회할 수는 없었다.구스타프 2세 아돌프 사후, 옥센셰르나는 구스타프 혼 등 동료 장군들에게 스웨덴군의 지휘를 맡기고 본국으로 귀환한다. 옥센셰르나는 군주의 유자 크리스티나를 왕위에 앉히고, 섭정단의 중심이 되어 스웨덴의 국정을 총괄했다. 옥센셰르나는 왕을 잃고 약화된 스웨덴군의 열세를 구하기 위해 프로테스탄트 제후들을 결집시켜 하일브론 동맹을 결성하는 등의 성과를 거두고, 30년 전쟁의 최종 승리를 이끌어내어 대국의 자리를 획득한다. 그중에서도 합스부르크 가문에 반대하면서도 측면 지원에 머물렀던 프랑스를 직접 참전시킨 것은 놀라운 수완이라고 할 수 있다.[30]
1632년 11월 구스타프 국왕이 사망했을 때, 그의 유일한 적법한 생존 자녀인 크리스티나는 여섯 살이었다. 그녀가 18세가 되어 성년이 될 때까지 섭정 위원회가 스웨덴을 통치했다. 이 위원회는 대총재 옥센셰르나가 의장을 맡았으며, 새로운 헌법인 정부 형태를 작성했다. 국왕 사망 후 몇 년 동안 위원회 내에서 의견 차이가 있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옥센셰르나의 동료 중 일부는 1634년 뇌를링겐 전투에서 패배한 후 특히 스웨덴이 평화를 추구하고 독일 전쟁에서 철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스웨덴이 감수한 희생에 대한 보상을 확보하기 위해 전쟁에 남아 있어야 한다는 옥센셰르나의 의견이 우세했다.[8]
3. 4. 평가
옥센셰르나는 뛰어난 실용주의자이자 중상주의를 지지하고 이민과 자유 기업을 믿는 인물로 평가받는다.[2] 그는 자신의 입장을 재고할 의향이 있는 인물로, 이전에 도입했던 법률을 기각하고 더 나은 방향으로 정책을 변경하기도 했다.[7] 그의 정책 검토, 재고, 시험, 그리고 때로는 이전 의견을 기각하는 방식은 그의 중요한 유산으로 여겨진다.[7]옥센셰르나는 귀족 가문 외부 출신 소년들이 고등 교육을 받고 귀족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여 스웨덴 실력주의의 아버지로 여겨지기도 한다.[7]
휘고 그로티우스는 옥센셰르나를 "이 세기의 가장 위대한 인물"이라고 칭송했고,[4] 리슐리외 추기경은 "끝없는 좋은 조언의 원천"이라고 불렀다.[4] 마자랭 추기경은 유럽의 모든 장관들이 같은 배에 있다면 키를 옥센셰르나에게 맡겨야 한다고 말했으며, 8세 우르바누스 교황은 그를 세상이 본 가장 뛰어난 인물 중 한 명이라고 평가했다.[4]
옥센셰르나는 1612년 총리가 된 후 칼마르 전쟁을 종결시킨 크네레드 조약 체결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29] 그는 현명한 군주 구스타프 2세 아돌프를 보좌하며 관료 제도, 상법, 우편 제도를 근대화했고, 웁살라 대학교 총장으로서 학문의 중요성을 강조했다.[29] 구스타프 2세 아돌프의 급하고 혈기왕성한 성격을 옥센셰르나의 침착함과 신중함이 보완하여 위기를 극복하는 경우가 많았다. "옥센셰르나, 만약 사람들이 모두 당신처럼 냉정하다면 세상은 얼어붙어 버릴 거요." "만약 사람들이 모두 폐하처럼 급하다면 세상은 불타 버릴 것입니다."라는 대화는 그들의 상호 보완적인 성격을 잘 보여준다.
30년 전쟁에서 스웨덴이 루터파 프로테스탄트를 지원하기 위해 참전했을 때, 구스타프 2세 아돌프는 군대를 이끌고 브라이텐펠트 전투 등에서 가톨릭 세력을 격파하여 사자왕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1632년 뤼첸 전투에서 구스타프 2세 아돌프가 전사한 후, 옥센셰르나는 작센-바이마르 공 베른하르트를 보좌하며 스웨덴군을 승리로 이끌었다.
구스타프 2세 아돌프 사후, 옥센셰르나는 크리스티나 여왕의 섭정으로서 스웨덴 국정을 총괄하며 하일브론 동맹을 결성하는 등 30년 전쟁 승리에 기여했다.[30] 특히, 합스부르크 가에 반대하면서도 소극적이었던 프랑스를 직접 참전시킨 것은 그의 뛰어난 외교적 수완을 보여준다.[30] 옥센셰르나는 베스트팔렌 조약을 통해 스웨덴이 북방의 패권을 확립하고 발트 제국으로 군림하는 것을 확인한 후 1654년 사망했다.
구스타프 2세 아돌프와 옥센셰르나는 서로 존경하는 관계였으며, 스톡홀름의 구스타프 2세 아돌프 광장에는 두 사람의 동상이 나란히 있다.
4. 가족 관계
악셀 옥센셰르나는 1608년 6월 5일 피홀름 성(Fiholm Castle)에서 안나 아케스도테르 바아트와 결혼하여 13명의 자녀를 두었으나, 그중 5명만이 성인이 되었다. 옥센셰르나의 아내는 1649년에 사망했다.[3]
5. 어록
'''"아들아, 세상이 얼마나 적은 지혜로 다스려지는지 알지 못하느냐?"'''[25]
이 말은 베스트팔렌 조약 협상에 참여한 아들을 격려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아들은 경험 많고 저명한 정치가와 외교관들 사이에서 자신의 능력을 걱정하고 있었다. 이 인용구는 옥센셰르나에게서 나온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교황 율리우스 3세(1487-1555)가 최초로 기록된 저자로 여겨지기도 한다.[26] 리슐리외 추기경 또한 저자로 여겨진다. 이는 아마 영어권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스웨덴어 인용구일 것이다.
6. 대중문화 속 옥센셰르나
크리스티나 여왕의 멘토이자 후견인 역할로 인해 옥센셰르나는 여러 무대와 스크린에서 그려졌다. 루벤 마무리안 감독의 1933년 할리우드 영화 ''크리스티나 여왕''에서는 그레타 가르보가 여주인공을 맡은 가운데 루이스 스톤이 연기했고, 앤서니 하비 감독의 ''퇴위''(1974)에서는 시릴 커색이, 미카 카우리스마키 감독의 ''걸 킹''(2015)에서는 마이클 뉘크비스트가 연기했다.
사무엘 아흘그렌(1764~1816)은 왕이자 극작가였던 구스타프 3세의 1790년 작품 ''드로트닝 크리스티나''(Drottning Kristina)에서 옥센셰르나 역을 맡았다.
아우구스트 스트린드베리의 1901년 작품 ''크리스티나''(Kristina)에서 옥센셰르나는 크리스티나의 사치스러운 생활 방식과 총애하는 이들에게 주는 선물을 비판하는 냉철한 현실주의자로 묘사된다.[27]
자코포 포로니의 1849년 오페라 ''크리스티나, 스웨덴 여왕''(Cristina, regina di Svezia)에서 옥센셰르나의 베이스(Bass (voice type)) 파트는 조반니 카를로 카사노바가 초연했다.
옥센셰르나 백작은 에릭 플린트 외 다수가 집필한 하이퍼소설 화염의 고리에서 주요 인물로 등장한다. 5번째 주요 시리즈 소설인 1636: 색슨의 봉기에서 그는 구스타프 2세 아돌프 국왕이 무능력해진 틈을 타 귀족들의 우월성을 회복하기 위한 반란을 조직하려 한다. 하지만 구스타프 2세 아돌프가 회복하고, 52장에서 옥센셰르나와 그의 참모 장교 3명(총을 뽑으려 했던)은 반역죄로 처벌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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