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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이텐펠트 전투 (163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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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브라이텐펠트 전투는 1631년 9월 17일, 스웨덴-작센 연합군과 신성 로마 제국군 사이에 벌어진 30년 전쟁의 중요한 전투이다. 스웨덴 국왕 구스타프 2세 아돌프가 이끄는 연합군은 틸리 백작이 지휘하는 제국군을 상대로 승리하며, 프로테스탄트 세력에게 첫 승리를 안겨주었다. 이 전투는 구스타프 2세 아돌프의 군사적 혁신을 보여주는 사례로, 기동성이 뛰어난 여단 중심의 진형과 화력 집중 전술을 통해, 전통적인 테르시오 대형의 제국군을 격파했다. 브라이텐펠트 전투의 승리는 이후 스웨덴의 전쟁 참여를 확고히 하고, 유럽의 군사 전술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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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이텐펠트 전투 (1631년) - [전쟁]에 관한 문서
위치 정보
전투 정보
전투명브라이텐펠트 전투 (제1차)
관련 전쟁30년 전쟁
날짜1631년 9월 17일 (신력), 1631년 9월 7일 (구력)
장소독일 작센 공국 라이프치히 북방 브라이텐펠트
결과스웨덴-작센 연합군의 승리
교전 세력
교전국 1스웨덴 제국
작센 선제후국
교전국 2신성 로마 제국
가톨릭 연맹
지휘관 및 지도자
교전국 1 지휘관구스타브 2세 아돌프
구스타브 호른 백작
요한 바네르
요한 게오르크 1세
한스 게오르크 폰 아르님-보이첸부르크
교전국 2 지휘관틸리 백작
고트프리트 추 파펜하임
에곤 8세 폰 퓌르스텐베르크-하일리겐베르크
병력 규모
교전국 1 병력총 40,150명
스웨덴군: 22,800명
작센군: 17,350명
대포: 66문
교전국 2 병력총 31,400명
제국군: 14,700명
가톨릭 연맹군: 15,700명
비정규군: 1,000명
대포: 27문
사상자 규모
교전국 1 사상자총 5,550명
스웨덴군: 전사 또는 부상 3,550명
작센군: 전사 또는 부상 2,000명
교전국 2 사상자총 16,600명
전사: 7,600명
포로: 6,000명
추격 과정에서 사망, 탈영 또는 포로: 3,000명 항복, 5,000명 탈영 또는 작센 농민에 의해 사살

2. 배경

30년 전쟁은 유럽에서 프로테스탄트와 가톨릭 사이에 발생한 여러 갈등들이 얽힌 전쟁이었다. 1618년 5월 프라하의 프라하의 창밖 투척 사건 이후 일어난 프로테스탄트 반란이 전쟁의 시작이었다.[1] 신성 로마 제국 내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국가 간의 종교적 분열은 유럽 강대국들 간의 소규모 세계 대전으로 발전하였다. 전쟁 후반부에는 가톨릭 국가인 프랑스 왕국이 합스부르크 가문과 가톨릭 국가인 스페인 제국과 전쟁을 벌였고, 스웨덴 제국러시아 제국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과 갈등을 빚었다. 덴마크-노르웨이, 작센 선제후국 등도 신성 로마 황제 페르디난트 2세와 갈등을 빚었다.[1]

보헤미아 반란(1618-1622) 이후, 전쟁은 팔츠-덴마크 단계(1623-1629)로 이어졌다. 발렌슈타인이 이끄는 제국군은 북부 독일에서 덴마크군을 패퇴시켰다. 1629년 덴마크의 전쟁 탈퇴 이후, 독일의 프로테스탄트 국가들은 어려움을 겪었다. 황제와 가톨릭 측의 입지 강화를 배경으로 1629년 3월 회복칙령이 발표되었는데, 이는 프로테스탄트 국가들의 독립에 위협이 되었다.[1]

이러한 배경과 1629년 9월 폴란드와 체결된 조약 이후, 스웨덴 국왕 구스타프 2세 아돌프는 전쟁 개입을 계획하고 북부 독일의 프로테스탄트 지도자가 되었다.[1]

1631년 5월 20일에 발생한 신성 로마 제국군의 마그데부르크 약탈은 독일 내외에서 격렬한 비판을 받았고, 틸리 백작의 명성은 실추되었다. 중립을 지키던 작센 선제후 요한 게오르크 1세,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게오르크 빌헬름이 구스타프 2세 아돌프와 동맹을 맺었다. 가톨릭의 주력군이자 틸리 백작의 주군인 바이에른 공작 막시밀리안 1세가 비밀리에 프랑스 왕국과 협정을 맺으면서 틸리 백작은 고립되었다. 틸리 백작은 작센으로 진격하여 9월에 라이프치히를 점령했고, 스웨덴군은 작센 선제후군과 합류하여 라이프치히로 향했다. 틸리 백작은 포위 공격을 생각했지만, 그의 부관이 독단으로 진격하자 틸리 백작도 뒤따라 출진했다.

2. 1. 30년 전쟁의 발발과 초기 전개

종교개혁 이후 신성 로마 제국 내 로마 가톨릭과 개신교 세력 간의 갈등은 계속되었다. 1618년 5월 프라하에서 일어난 프라하 창밖 투척사건을 계기로 보헤미아에서 프로테스탄트 반란이 일어났다. 이 반란은 30년 전쟁의 첫 번째 불씨가 되었다.[1]

1618년 신성 로마 제국 지도


30년 전쟁은 처음에는 종교 전쟁의 성격이 강했지만, 점차 신성 로마 제국 내 권력 투쟁과 주변 강대국들의 개입으로 국제전으로 확대되었다. 신성 로마 제국 내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국가 간의 종교적 분열은 전쟁 과정에서 유럽 강대국들 간의 소규모 세계 대전으로 발전하였다.[1] 전쟁 후반부에는 가톨릭 국가인 프랑스가 합스부르크 가문과 가톨릭 국가인 스페인과 동시에 전쟁을 벌였다. 스웨덴러시아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과 갈등을 빚었고, 덴마크-노르웨이, 작센 선제후국 등도 참전하였다.[1]

1629년 프로테스탄트 제후들은 황제군의 지휘관 틸리 백작 요한 체르클라에스와 발렌슈타인에게 각지에서 패퇴를 거듭했다. 덴마크가 참전했으나 패배하였고, 발렌슈타인이 이끄는 제국군은 북부 독일에서 성공적인 작전을 통해 덴마크군을 패퇴시켰다. 1629년 덴마크의 전쟁 탈퇴 이후, 독일의 프로테스탄트 국가들은 극심한 어려움을 겪었다.[1] 이러한 상황에서 신성 로마 제국이 독일 지역을 통일할 경우 곧바로 압력을 받게 될 위치에 있던 덴마크가 참전했다.

2. 2. 스웨덴의 참전과 구스타프 2세 아돌프의 군사적 혁신

30년 전쟁은 종교개혁의 여파로 개신교 세력과 로마 가톨릭 세력 사이에 벌어진 종교전쟁으로 시작되었으나, 점차 종교적인 의미는 사라지고 신성 로마 제국 내 권력 다툼으로 변질되었다.[1] 1629년, 프로테스탄트 제후들은 틸리 백작 요한 체르클라에스와 알브레히트 폰 발렌슈타인에게 패배하였다.[1] 이러한 상황에서 신성 로마 제국이 독일 지역을 통일하면 직접적인 압력을 받게 될 덴마크가 참전했고, 스웨덴의 구스타프 2세 아돌프 또한 발트해 연안을 지배하여 발트해 제국을 만들고자 프로테스탄트 진영에 합류했다.[1]

1630년 포메라니아 상륙 당시 구스타프 2세 아돌프


덴마크군이 패배하자, 구스타프 2세 아돌프는 1630년 6월, 1만 3,000명의 정예병을 이끌고 포메른에 상륙했다.[2] 그는 독일에서 모집한 용병을 더해 2만에 달하는 군대를 갖추게 되었다.[2] 당시 알브레히트 폰 발렌슈타인은 황제의 의심을 받아 해임된 상태였지만, 전반적인 전황은 여전히 가톨릭 동맹군에게 유리했다.[2]

북부 독일은 스웨덴의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걸린 지역이었다. 가톨릭 군대가 발트해에 함대를 건설하면 스웨덴 영토에 큰 위협이 될 수 있었다. 1628년과 1629년 삼부회(Riksdag of the Estates)에 연설한 구스타프 2세 아돌프는 프로테스탄트 신앙 수호와 북부 독일의 제국 해군 군비 위협을 이유로 전쟁 참여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1630년 6월 17일, 왕과 그의 군대는 스톡홀름 군도의 엘브스나벤(Älvsnabben)에서 스웨덴 함대에 승선했다. 1630년 6월 25일, 함대는 뤼겐(Rügen)의 페르드 곶을 돌았고, 이틀 후 왕은 우제돔(Usedom)의 페네뮌데(Peenemünde)에 상륙했다.

구스타프 2세 아돌프는 슈테틴 조약을 통해 보기슬라프 14세와 동맹을 맺었다.

2. 3. 마그데부르크 약탈과 그 영향

1631년 5월 20일, 신성 로마 제국군의 마그데부르크 약탈은 독일 안팎에서 격렬한 비판을 불러일으켰고, 틸리 백작의 명성은 크게 실추되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그때까지 중립을 지키던 작센 선제후 요한 게오르크 1세와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게오르크 빌헬름은 구스타브 2세 아돌프와 동맹을 맺게 되었다. 가톨릭 진영의 주축이자 틸리 백작의 주군이었던 바이에른 공작 막시밀리안 1세마저 비밀리에 프랑스 왕국과 협정을 맺으면서 틸리 백작은 고립되었다. 보급 문제로 어려움을 겪던 틸리 백작은 결국 작센으로 진격하여 9월에 라이프치히를 점령했다. 이에 맞서 스웨덴군은 작센 선제후군과 합류하여 라이프치히로 향했다. 틸리 백작은 포위 공격을 고려했으나, 그의 부관이 독단적으로 진격하자 어쩔 수 없이 그 뒤를 따랐다.

''마그데부르크 약탈 – 마그데부르크 처녀들'', 에두아르트 슈타인브뤼크(Eduard Steinbrück)의 1866년 작품.


1631년 4월 초, 마그데부르크는 제국군에 의해 포위되었다. 도시 사령관 팔켄베르크는 구스타브 2세 아돌프로부터 최소 두 달 동안 도시를 방어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팔켄베르크는 틸리가 포위 공격을 주저하는 틈을 타 도시 방어를 강화하고 2,500명의 수비대와 5,000명의 무장 시민의 지원을 확보했다. 그러나 프랑크푸르트 함락 후, 4월 말 틸리는 마그데부르크로 돌아와 도시 외곽 방어 시설을 체계적으로 공격했고, 스웨덴 수비대는 점차 방어 시설을 포기해야 했다. 제국군은 참호를 파 5월 중순에는 도시 성벽에서 불과 5미터 떨어진 곳까지 접근했다. 5월 18일, 틸리는 도시에 최후통첩을 보냈지만 도시 의회는 이를 거부했다. 5월 19일, 틸리는 장군들과 회의를 열어 다음 날 여섯 방향에서 도시에 대한 최종 공격을 감행하기로 결정했다. 5월 20일 아침, 틸리의 대포가 도시를 포격했고, 제국군은 여러 방향에서 도시로 진입했다. 도시는 불길에 휩싸였고, 팔켄베르크와 도시 수비대는 전멸했다. 제국군은 며칠 동안 도시를 약탈하며 2만 5천 명의 시민들에게 잔혹한 폭력을 행사했다. 5월 24일, 틸리가 약탈 중단을 명령했을 때 마그데부르크는 약 2만 명의 시민이 사망한 잿더미로 변해 있었다.

마그데부르크 함락은 틸리와 구스타프 2세 아돌프 모두에게 심각한 결과를 초래했다. 틸리는 도시 인근 병력을 지원할 수 없었고, 구스타브 2세 아돌프는 도시를 제때 구원하지 못해 명성에 흠집이 났다. 또한, 마그데부르크 함락으로 인해 구스타브 2세 아돌프는 이전의 신중한 전쟁 방식을 버리고 프로테스탄트 주민들에 대한 학살에 보복하고자 했다. 스웨덴군은 마그데부르크 약탈을 효과적으로 선전하여 유럽 전역의 귀족과 평민 모두에게 황제, 혹은 적어도 그의 군대가 프로테스탄트 신민들을 어떻게 대우하는지 알렸다.

3. 전투의 진행 과정

1631년 9월 17일, 틸리 백작이 이끄는 황제군과 구스타프 2세 아돌프가 이끄는 스웨덴-작센 연합군은 라이프치히 북쪽 브라이텐펠트 평원에서 격돌했다. 이 전투는 30년 전쟁에서 스웨덴군이 거둔 첫 번째 주요 승리였다.

전투는 정오 무렵 양측의 포격전으로 시작되었다. 레나르트 토르스텐손이 지휘하는 스웨덴군 포병은 틸리군의 테르시오 대형에 집중 사격을 가해 큰 피해를 입혔다.[1] 반면, 스웨덴군은 넓게 분산되어 있어 피해를 줄일 수 있었다.[2]

파펜하임은 틸리의 명령 없이 기병대를 이끌고 스웨덴군 우익을 공격했지만, 스웨덴군의 집중 사격과 기병대의 반격으로 번번이 격퇴되었다. 한편, 제국 동맹군 우익의 휘르스텐베르크와 이졸라니 기병대는 작센군을 공격하여 패주시켰다.

틸리는 작센군이 무너진 것을 보고 스웨덴군 좌익 측면에 대한 공격을 명령했지만, 구스타프 2세 아돌프는 예비대를 투입하여 좌익을 재편성하고 틸리군의 공격을 저지했다. 구스타프 호른은 좌익을 90도로 재배치하여 새로운 방어선을 형성하고, 깊은 도랑을 방어 장애물로 활용했다.

스웨덴군은 연대포를 이용한 근거리 포격과 기병대의 돌격으로 제국 동맹군의 진격을 늦추었고, 존 헵번, 에크슈테트, 튀른의 여단과 예비 부대가 도착하여 호른의 전선을 강화했다.

오후 5시, 구스타프 2세 아돌프는 틸리 군대를 돌파할 기회를 포착하고 우익 기병대를 이끌고 황제군 포병대를 공격하여 점령하고, 좌측 측면에서 황제 동맹군 중앙을 공격했다. 스웨덴군은 탈취한 황제군 포병과 함께 밀집한 황제 동맹군 보병들에게 강력한 교차 사격을 퍼부었다.

오후 6시에서 7시 사이, 틸리 군대는 붕괴되었고, 틸리 자신도 부상을 입고 겨우 탈출했다. 파펜하임은 마지막 잔여 병력으로 저항했지만, 해질 무렵에는 4,100명에서 600명으로 줄어들었다. 전투는 저녁 9시에 끝났고, 파펜하임은 마지막 황제 동맹군 병사들과 함께 후퇴했다.

스웨덴-작센 연합군은 오라녜 공작 마우리츠가 고안하고 구스타프 2세 아돌프가 발전시킨 3병 전술(보병, 기병, 포병 결합), 높은 소총 보유율과 빠른 사격 속도, 연대포를 활용한 보병 지원, 유연한 전술 등으로 승리할 수 있었다.[1][2] 반면, 틸리 백작의 황제군은 경직된 테르시오 진형을 사용하여 스웨덴군의 유연한 전술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어려웠다.

3. 1. 양측 군대의 배치와 전술

브라이텐펠트 전투 - 초기 양군 배치도


브라이텐펠트는 완만한 구릉이 연이어 있는 평원이었다. 틸리 백작의 군대는 전형적인 스페인식 대형인 테르시오 진형을 사용하였다. 이 진형은 전면에 약 100명 단위의 대오가 12열~15열로 이루어져 있고, 최전면에 소총병, 중심에 창병을 두었다. 방진의 사각에는 각각 4개의 작은 소총대가 있어서 이것이 1개 단위의 테르시오가 완성된다. 17개의 테르시오가 가로로 전개하면서 양익에는 기병대가 배치되었다. 틸리의 본진은 테르시오 후방에 위치하고 있었다. 좌익의 기병 지휘관은 파펜하임으로, 용맹한 돌격과 "카라콜" 전법으로 유명했다. 또한 24파운드 중포 36문을 테르시오 전면에 배치했다.

구스타프 2세 아돌프의 진형은 틸리와 달리 중앙에 보병 4개 여단을 배치하고 그 후방에 보병 2개 여단과 기병 1개 연대, 그리고 보병 3개 여단과 기병 2개 연대를 예비대로 배치했다. 우익에 기병 6개 연대, 후방에도 기병 1개 연대, 예비대로는 기병 4개 연대가 배치되었다. 좌익 기병대는 전면 3개, 후방 2개 연대였으며 우익에 비해 얇은 진형이었으나 작센 공국 군대가 포진하여 지원했다. 기병 사이는 보병대가 메꾸고 있었다. 또한 각 부대는 1~2문의 소형 대포를 가지고 있었고, 중앙 보병대 전면에는 구스타프 군이 보유한 100문의 대포를 배치했다. 여기엔 중포도 50문이나 있었다. 포병대 지휘는 토르스텐손이 맡았다.

이 진형은 테르시오를 연구하여 개량 발전시킨 오라녜 공작 마우리츠가 고안한 진형으로, 구스타프 2세 아돌프는 이를 전수받아 보병, 기병, 포병이 결합하는 3병 전술을 개발했다. 마우리츠의 전술은 대량의 화력과 기동전의 조합이었다. 이를 위해 틸리 진형에 비해 소총의 보유율을 월등히 높였다. 틸리 군의 소총병 비율이 30%였던 데 반해 구스타프 군은 70%였고, 또한 소총도 최신형이라 틸리 군이 1분에 1발을 쏠 때 구스타프 군은 1분에 3발을 쏠 수 있었다.

사실상 구스타프 군의 화력은 틸리 군의 3배나 월등했다. 거기에 연대포라는 3파운드의 소형 대포를 각 부대에 배치해 보병 지원용으로 사용하였다. 이 대포는 병사 3명이 움직일 수 있을 정도의 소형이었다.

9월 17일 새벽 9시, 양측은 브라이텐펠트 교외에서 대치했다. 틸리 백작이 이끄는 황제군은 약 3만 3천 명, 구스타프 2세 아돌프가 이끄는 스웨덴-작센 연합군은 약 4만 명이었다. 약 8만 명이 참여한 대회전이었다. 이 전투의 진형은 양측이 완전히 달랐다. 틸리 백작이 이끄는 황제군은 테르시오라 불리는 전통적인 대형을 취했다. 반면 스웨덴-작센 연합군은 여단을 중심으로 기동력이 뛰어난 진형을 취했으며, 화력 활용에 중점을 두었다. 총병의 기동력은 틸리 백작 군의 3배였고, 가장 중요한 것은 야전에 대포를 사용한 것이었다. 황제군에도 대포가 있었지만, 겨우 36문에 불과했다. 스웨덴군은 100문을 보유하고 있었다.

상세한 양측 군대의 배치는 다음과 같다.

양측 군대 배치
구분지휘관병력 구성비고
스웨덴-작센 연합군구스타프 2세 아돌프총병력 약 4만 명[1], 중앙: 보병 4개 여단, 후방 보병 2개 여단, 기병 1개 연대, 예비 보병 3개 여단, 기병 2개 연대우익: 기병 6개 연대, 후방 기병 1개 연대, 예비 기병 4개 연대, 좌익: 기병 3개 연대, 후방 기병 2개 연대, 작센 군 지원, 각 부대마다 1~2문 소형 대포 보유, 중앙 보병대 전면에 총 100문 대포(중포 50문 포함) 배치, 포병대 지휘관 토르스텐손
요한 게오르그 1세총 17,325명 (보병 12,100명, 기병 5,225명), 대포 12문작센 군은 전통적인 대형으로 스웨덴 군 좌측에 배치, 총사령관은 요한 게오르그 1세, 차석은 한스 게오르크 폰 아르님-보이첸부르크 원수
신성 로마 제국-가톨릭 동맹군틸리 백작총병력 약 3만 3천 명[1]17개 테르시오 가로 전개, 양익에 기병대, 본진은 테르시오 후방, 좌익 기병 지휘관 파펜하임, 24파운드 중포 36문 전면 배치
에곤 폰 휘르스텐베르크우익 5,400명1,200명의 요한 폰 뱅글러 황제 보병 연대와 5개 기병 연대, 1,000명의 비정규 크로아티아 및 헝가리 기병 부대
고트프리트 하인리히 추 파펜하임좌익 5,300명1,500명의 슐레스비히-홀슈타인-고토르프 황제 보병 연대, 2개 사격병 연대, 5개 퀴라시에 연대
틸리 백작 (부사령관 오토 프리드리히 폰 쇤부르크)중앙 18,700명12개 보병 연대, 예비대 2,000명 (5개 기병 연대), 포병대 총 27문 (32파운드포 11문, 16파운드포 4문, 12파운드포 1문, 8파운드포 3문, 3파운드포 2문, 소형포 6문)


3. 2. 전투의 주요 경과

정오 무렵 양측의 포격전이 시작되었다. 틸리군의 포병대는 작센군과 스웨덴군 중앙 및 좌익에 집중 사격했고, 스웨덴군과 작센군은 이에 대응하여 포격을 가했다. 토르스텐손이 지휘하는 스웨덴군 중포는 배치되어 포격을 개시하기까지 시간이 걸렸지만, 일단 배치된 후에는 제국군에 비해 3~5배 빠른 속도로 사격하며 틸리군의 테르시오 대형에 큰 피해를 입혔다.[1] 반면, 스웨덴군은 넓게 분산되어 있어 피해를 줄일 수 있었다.[2] 약 2시간 동안의 포격전으로 스웨덴군과 작센군은 각각 약 1,000명, 제국 동맹군은 약 2,00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포격전 내내 양측 군대는 움직이지 않았고, 틸리는 유리한 위치를 포기하지 않으려 했다. 강한 바람이 먼지와 연기를 스웨덴군 쪽으로 날려 시야를 가렸기 때문에, 구스타프 2세 아돌프는 바람을 등지기 위해 우익을 좌측으로 회전시켰다.

틸리의 명령 없이, 파펜하임은 기병대를 이끌고 스웨덴군 우익을 공격했다. 그는 스웨덴군 포격을 피하기 위해 측면 기동을 했고, 카라콜 전술을 사용하여 구스타프 2세 아돌프의 전열을 돌파하려 했다. 그러나 바네르와 구스타프 2세 아돌프는 이미 대비하고 있었고, 스웨덴군은 근거리 집중 사격과 기병대의 반격으로 파펜하임의 공격을 번번이 격퇴했다.

제국 기병이 스웨덴 우익과 작센 군대를 공격한다. 후자는 후퇴하게 된다.


오후 4시경, 파펜하임이 일곱 번째 공격을 격퇴당한 후, 구스타프 2세 아돌프는 바네르에게 기병대를 집결시켜 반격을 명령했다. 바네르의 돌격 공격은 파펜하임의 지친 기병대를 혼란에 빠뜨렸고, 일부는 갈겐베르크의 제국 포병 진지로 후퇴했고, 다른 부대는 피콜로미니와 함께 전장에서 후퇴했다.

파펜하임의 기병대가 전투력을 상실하자, 슐레스비히-홀슈타인-고토르프 연대의 보병 연대만이 남았다. 이들은 테르시오를 형성하여 스탈한스케와 운슈의 하카펠리타의 공격에 맞섰지만, 결국 스웨덴군의 화력에 압도되어 궤멸되었다.

한편, 제국 동맹군 우익의 휘르스텐베르크와 이졸라니 기병대는 작센군 중앙과 좌익을 공격했다. 작센군은 이 공격을 견디지 못하고 패주했고, 일부는 스웨덴군의 수송대를 약탈하기도 했다. 오후 3시, 틸리는 작센군이 무너진 것을 보고 스웨덴군 좌익 측면에 대한 공격을 명령했다. 그러나 구스타프 2세 아돌프는 예비대를 투입하여 좌익을 재편성했고, 틸리군의 공격을 저지했다.

황제 동맹군이 집게 작전을 위해 우측으로 방향을 전환한다. 스웨덴군은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보조 부대를 이용해 좌익을 확장한다.


틸리는 중앙군이 점령한 작센 포병의 화력 지원을 받아 혼의 열린 좌익에 대한 정면 공격을 개시하려 했다. 휘르스텐베르크와 이졸라니에게는 스웨덴 중앙군의 열린 측면과 후방을 공격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그러나 스웨덴군은 빠르게 대응했다. 혼은 좌익을 90도로 재배치하여 새로운 방어선을 형성했고, 깊은 도랑을 방어 장애물로 활용했다. 이 기동은 단 15분 만에 이루어졌으며, 연기와 먼지 구름을 이용하여 은폐했다.

호른은 얇은 전열만으로는 제국 동맹군의 공격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지연전을 펼치며 증원을 요청했다. 스웨덴군은 연대포를 이용한 근거리 포격과 기병대의 돌격으로 제국 동맹군의 진격을 늦추었고, 헵번, 에크슈테트, 튀른의 여단과 예비 부대가 도착하여 호른의 전선을 강화했다.

카를 발봄(Carl Wahlbom)이 그린 ''브라이텐펠트 전투''.


스웨덴 지원군이 도착한 후, 파펜하임의 테르시오는 녹색 여단과 격돌했다. 녹색 여단은 연대포와 집중 사격으로 파펜하임의 공격을 저지했고, 괴스의 테르시오는 에크슈테트 여단과 격돌했다. 양측은 치열한 전투를 벌였지만, 스웨덴군의 화력 우세와 반격으로 제국 동맹군은 점차 밀려났다.

1631년 브라이텐펠트 전투 (올로프 외르네후푸드의 그림을 바탕으로 마티아스 메리안 1세가 그린 그림)


오후 5시, 바네르의 기병대가 파펜하임의 기병대를 격파한 후, 구스타프 2세 아돌프는 틸리 군대를 돌파할 기회를 포착했다. 그는 우익 기병대를 이끌고 황제군 포병대를 공격하여 점령하고, 좌측 측면에서 황제 동맹군 중앙을 공격했다.

황제군 기병대가 후퇴하고 황제 동맹군 보병대가 여러 방향에서 공격을 받고 있다.


구스타프 2세 아돌프는 우익의 나머지 병력과 중앙의 여단들에게 왼쪽으로 방향을 전환하여 틸리군의 후퇴로를 차단하도록 명령했다. 토르스텐손은 경포병을 전진시켰고, 매케이와 몬로의 연대는 작센군 포병을 탈환했다. 탈취한 황제군 포병과 함께, 스웨덴군은 밀집한 황제 동맹군 보병들에게 강력한 교차 사격을 퍼부었다.

오후 6시에서 7시 사이, 호른은 마지막 기병 돌격을 감행했고, 헵번의 여단이 보병 공격을 이끌었다. 이 공격과 스웨덴군 포병의 교차 사격은 틸리 군대의 붕괴를 초래했다. 틸리 군대의 잔여 병력은 무질서하게 후퇴했고, 틸리 자신도 부상을 입고 겨우 탈출했다.

저녁 6시, 파펜하임은 링켈발트 숲 언덕에 마지막 잔여 병력으로 테르시오를 형성하여 저항했지만, 해질 무렵에는 4,100명에서 600명으로 줄어들었다. 전투는 저녁 9시에 어둠 속에서 끝났고, 파펜하임은 마지막 황제 동맹군 병사들과 함께 후퇴했다.

3. 3. 스웨덴-작센 연합군의 승리 요인

오라녜 공작 마우리츠가 고안하고 구스타프 2세 아돌프가 발전시킨 3병 전술(보병, 기병, 포병 결합)은 스웨덴군에게 뛰어난 전술적 유연성을 부여했다. 이는 대량의 화력과 기동전을 조합한 것이었다.

스웨덴군은 틸리 백작의 군대보다 훨씬 높은 소총 보유율을 자랑했다. 틸리군의 소총병 비율이 30%였던 데 반해, 스웨덴군은 70%에 달했고, 최신형 소총을 사용하여 틸리군보다 3배나 빠른 속도로 사격할 수 있었다. 이러한 화력 우위는 전투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1]

또한 스웨덴군은 각 부대에 3파운드 소형 대포인 연대포를 배치하여 보병을 효과적으로 지원했다. 이 대포는 병사 3명이 움직일 수 있을 정도로 가벼워 기동성이 뛰어났다.[2] 레나르트 토르스텐손이 지휘한 포병대는 중앙 보병대 전면에 100문의 대포(중포 50문 포함)를 배치했다.

반면, 틸리 백작이 이끄는 황제군은 전형적인 스페인식 대형인 테르시오 진형을 사용하였다. 이 진형은 보병대가 100명 단위의 대오 12~15열로 구성되었고, 최전면에 소총병, 중심에 창병을 배치했다. 방진 사각에는 각각 4개의 작은 소총대가 있었다. 17개의 테르시오가 가로로 전개하고 양익에는 기병대가 배치되었으며, 틸리의 본진은 테르시오 후방에 있었다. 이러한 테르시오 진형은 경직되어 스웨덴군의 유연한 전술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어려웠다.

4. 전투의 결과와 영향

이 전투는 프로테스탄트 진영에게 첫 승리를 안겨주었으며, 그 심리적 영향력은 상당했다. 작센 공국의 수도 드레스덴에서는 9월 17일을 감사제로 지정하고 긴 축제일로 삼았다. 구스타프 2세 아돌프는 프로테스탄트 세력의 영웅이 되었다.

가톨릭측은 13년간 지속된 전쟁에서 최초의 대패를 당했다. 용병 페터 하겐도르프는 이 패배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전투 직후 틸리의 제국 동맹군 잔여 병력은 두 부대로 나뉘어 남쪽으로 후퇴했다. 틸리는 그의 부대를 뇌를링겐으로 이끌었고, 파펜하임은 그의 부대와 함께 베저강으로 진군하여 구스타프 2세 아돌푸스의 예비군을 매복 공격하려 했다.

브라이텐펠트에서의 스웨덴의 승리는 전쟁 발발 이후 독일 프로테스탄트 국가들이 거둔 최초이자 가장 큰 승리였기 때문에 유럽 전역에 충격을 주었다. 브라이텐펠트는 몇 달 전 마그데부르크 학살에 대한 루터교도들의 복수를 상징하게 되었다. 이 승리로 구스타프 2세 아돌푸스는 진군 방향을 선택할 수 있게 되었다. 9월 15일, 할레에서 전쟁 계획을 계속 논의하기 위한 전쟁 회의가 열렸다. 한 가지 선택지는 바로 으로 가서 전쟁을 신속히 끝내려는 것이었다. 참가자들은 요한 게오르크 1세의 작센 군대가 오스트리아 영토와 빈으로 진군하고, 스웨덴 군대는 남서쪽으로 라인강으로 이동하여 남은 제국군과 교전하기로 결정했다. 이 결정은 그 이후로 끊임없이 논의되고 의문을 제기받았지만, 1632년에 이미 빈으로의 진군이 프로테스탄트에게 유리한 평화 조건을 가져왔을지 알 수 없다.

할레에서의 전쟁 회의 직후, 구스타프 2세 아돌푸스의 군대는 처음에 남서쪽으로 진군하여 산발적인 제국군의 저항만을 받았다. 1631년 9월 22일, 그는 에르푸르트를 점령했고, 10월 5일에는 뷔르츠부르크를 점령했지만, 근처의 마리아베르크 요새는 계속 저항했다. 결연한 공격 끝에 마리아베르크는 10월 8일 스웨덴군에 의해 함락되었다. 11월 19일, 구스타프 2세 아돌푸스는 1만 3천 명의 병력을 이끌고 진영을 풀고 7천 명을 뷔르츠부르크에 주둔군으로 남겨두었다. 국왕은 마인강을 따라 진군하여 그곳을 지나는 여러 도시와 요새들을 점령했고, 그곳의 수비대는 대거 스웨덴군으로 넘어갔다. 이미 11월 17일, 프랑크푸르트는 무혈 입성했다. 국왕의 군대는 마인강을 따라 계속 진군하여 라인강으로 향했고, 큰 강을 건너 1631년 12월 11일 선제후의 거주지인 마인츠를 점령하여 동계 주둔지를 설치했다.

브라이텐펠트 전투 200주년을 기념하여 세워진 브라이텐펠트 기념비. 독일어 비문: ''세계의 신앙의 자유, 브라이텐펠트에서 구원받다, 구스타프 아돌프, 기독교인이자 영웅.'''


알 수 없는 화가가 그린 '브라이텐펠트 전투에서의 구스타브 2세 아돌푸스'


압도적인 승리는 구스타프 2세 아돌푸스의 군사적 혁신을 확인시켜 주었고, 스웨덴이 가까운 미래에도 전쟁에 계속 참여할 것임을 보장했다. 장기적으로는 상당한 병력 손실과 강력한 프로테스탄트 반제국 세력의 창출로 인해 황제와 프로테스탄트 및 가톨릭 제후들은 전쟁 수행 방식과 외교적 노선을 재고해야 했다. 구스타프 2세 아돌푸스의 성공은 다른 여러 제후들이 스웨덴 국왕과 그의 소수의 동맹국 대의에 합류하도록 고무시켰다. 그 달 말까지 하노버, 헤세 공작, 브란덴부르크작센이 공식적으로 제국에 반대하여 연합했고, 프랑스는 구스타프 2세 아돌프의 군대에 훨씬 더 많은 자금을 제공하기로 합의했다. 구스타프 2세 아돌푸스는 1년 후 뤼첸 전투 (1632)에서 전사했지만, 새로운 군대의 추가로 동맹의 군사력은 확보되었다. 스웨덴의 지도부가 약해지더라도 실패하지 않았고, 프랑스 자금의 유입은 적대 행위가 계속될 수 있도록 보장했다.[1]

4. 1. 직접적인 결과

이 전투는 프로테스탄트 진영에게 첫 승리를 안겨주었으며, 그 심리적 영향력은 상당했다. 작센 공국의 수도 드레스덴에서는 9월 17일을 감사제로 지정하고 긴 축제일로 삼았다. 구스타프 2세 아돌프는 프로테스탄트 세력의 영웅이 되었다.[1]

황제-가톨릭 동맹군의 손실은 막대하여, 7,000명에서 8,000명이 사망하고 약 6,000명이 포로로 잡혔다. 틸리는 단 며칠 만에 그의 군대의 3분의 2를 잃었다. 전투 다음 날, 3,000명의 도망치는 황제군 병사들이 작센 추격병들에게 항복했고, 그들은 라이프치히까지 추격을 받았다. 전투에서 포로로 잡힌 황제-가톨릭 동맹군 포로들은 곧 스웨덴군의 손실을 메우기 위해 스웨덴군에 합류했다. 전투 후 며칠 동안 최대 5,000명의 도망치는 황제-가톨릭 동맹군 병사들이 탈영하거나 복수심에 불탄 작센 농민들에게 살해당했다.

사망자 중에는 포병 사령관 쇤부르크, 에르비테 장군, 그리고 바움가르텐, 슐레스비히-홀슈타인-고토르프, 카파렐리, 필립 파펜하임 대령 등이 포함되었다. 또한 블랑카르트, 코로니니, 몬테쿠쿨리, 뱅글러 대령과 여러 중령, 기병대장 및 대위들이 포로로 잡혔다. 틸리와 파펜하임 원수 그리고 휘르스텐베르크 장군은 전투 중 부상을 입었다.

틸리는 또한 그의 모든 포병대, 군자금, 그리고 120개의 군기와 깃발을 잃었다. 후자는 전리품으로 스톡홀름의 리다홀름 교회로 옮겨져 공개적으로 전시되었다.

스웨덴군의 손실은 3,550명으로, 보병 2,100명과 기병 1,450명으로 나뉘었다. 사망자 중에는 테우펠(Teuffel) 소장, 에페렌-할(Efferen-Hall), 칼덴바흐(Caldenbach), 다미츠(Damitz) 대령, 아더카스(Aderkas) 중령이 포함되었다. 쿠르빌(Courville) 대령은 황제군의 포로가 되었다.

작센군은 2,000명에서 3,000명 사이의 사상자를 냈다. 대부분은 전투 시작 시 포격으로 사망하거나 황제군 기병으로부터 도주하다가 사망했다. 사망자 중에는 빈다우프(Bindauf) 장군과 스타르셰델(Starschedel) 대령이 포함되었다.

4. 2. 30년 전쟁에 미친 장기적인 영향

이 전투는 개신교 진영에게 30년 전쟁에서 첫 승리를 안겨준 전투였다. 그 심리적 영향력은 대단하여 작센 선제후국의 수도 드레스덴에서는 9월 17일을 감사절로 지정하고 긴 축제일로 삼았다. 구스타프 2세 아돌프는 프로테스탄트 세력의 영웅이 되었다.

압도적인 승리는 구스타프 2세 아돌프의 군사적 혁신을 확인시켜 주었고, 스웨덴이 가까운 미래에도 전쟁에 계속 참여할 것임을 보장했다. 장기적으로는 상당한 병력 손실과 강력한 프로테스탄트 반제국 세력의 창출로 인해 황제와 프로테스탄트 및 가톨릭 제후들은 전쟁 수행 방식과 외교적 노선을 재고해야 했다. 구스타프 2세 아돌프의 성공은 다른 여러 제후들이 스웨덴 국왕과 그의 소수의 동맹국 대의에 합류하도록 고무시켰다. 그 달 말까지 하노버, 헤세 공작, 브란덴부르크작센이 공식적으로 제국에 반대하여 연합했고, 프랑스는 구스타프 2세 아돌프의 군대에 훨씬 더 많은 자금을 제공하기로 합의했다. 구스타프 2세 아돌푸스는 1년 후 뤼첸 전투 (1632)에서 전사했지만, 새로운 군대의 추가로 동맹의 군사력은 확보되었다. 스웨덴의 지도부가 약해지더라도 실패하지 않았고, 프랑스 자금의 유입은 적대 행위가 계속될 수 있도록 보장했다.[1]

1642년 11월 2일 같은 장소에서 전투가 벌여졌다. 제2차 브라이텐펠트 전투는 이미 구스타프 2세 아돌프가 사망한 후였으나, 그의 충실한 부하였던 토르스텐손 장군이 황제군을 격파하고 승리를 거두었다.[2]

5. 역사적 평가와 의의

브라이텐펠트 전투는 군사 전략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구스타프 2세 아돌프가 이끈 스웨덴군의 전술적 유연성과 기동성이 틸리가 이끄는 황제군에 비해 뛰어났다. 이는 전투의 승패를 가르는 중요한 요인이었다.

오토 아우구스트 만켈의 브라이텐펠트 전투 그림으로, 스웨덴 우익에 대한 기병 공격을 묘사하고 있다.


틸리의 명령 없이 파펜하임은 기갑 기병대를 이끌고 스웨덴 우익을 공격했다. 그는 스웨덴 포병의 사격을 피하기 위해 측면 기동을 실시했고, 카라콜 전술을 사용하여 구스타프 2세 아돌프의 전선을 돌파하려 했다. 그러나 스웨덴군은 근접 거리에서 집중 사격을 가했고, 기갑 기병대는 제국 기갑 기병대에 권총을 발사하여 돌격을 방해하고 후퇴하게 만들었다.

로버트 몬로는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 "오후 3시 반쯤, 우리 대포의 사격이 약간 멈추자 양쪽 날개의 기병들이 서로 맹렬하게 돌격했는데, 우리 기병들은 적이 먼저 사격할 때까지 권총을 쏘지 않고 버티는 결의를 가지고 있었고, 그 후 가까운 거리에서 우리 사격수들이 일제 사격으로 그들을 맞이했습니다. 그런 다음 우리 기병들은 권총을 쏘고 검으로 그들을 돌파했습니다. 그리고 돌아올 때 사격수들은 다시 그들 사이에 두 번째 일제 사격을 할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적은 우리 기병들의 용감한 저항과 우리 사격수 소대의 맹렬한 공격으로 이러한 방식으로 두 번 돌격한 후 곧 기세가 꺾이고 격퇴되었습니다."

파펜하임은 여러 차례 공격을 시도했지만, 스웨덴 사격수와 기병의 협동 작전에 의해 모두 격퇴되었다. 이후 파펜하임은 국왕의 전선을 우회하여 우익을 포위하려 했으나, 구스타프 2세 아돌프는 즉각 대응했다.

오후 4시경, 파펜하임이 일곱 번째로 격퇴된 후, 구스타프 2세 아돌프는 바네르에게 기병을 집결시켜 반격을 감행하도록 명령했다. 이 돌격 공격으로 파펜하임의 기갑 기병대는 혼란에 빠졌고, 일부 부대는 후퇴했다.

파펜하임의 기병이 전투력을 상실하자, 슐레스비히-홀슈타인-고토르프 연대의 보병 연대만이 남았다. 이들은 테르시오를 형성하여 저항했지만, 스웨덴군의 집중 포화에 결국 무너졌다. 1,500명 중 300명만이 살아남았고, 연대장은 전투에서 치명상을 입고 포로로 이송되었으나 이틀 후 사망했다.

5. 1. 다양한 역사적 평가

전투 중인 테르시오(tercio)


30년 전쟁 당시 파이크 앤 샷(Pike and shot) 전술 대형의 모형. 스웨덴 스톡홀름에 위치한 스웨덴 육군 박물관(Swedish Army Museum)에 전시되어 있다. 당시 군대는 제복을 갖추는 것이 일반적이지 않았다.


브라이텐펠트 전투는 군사, 정치, 종교 등 다양한 측면에서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

  • '''군사사적 평가:''' 이 전투는 구스타프 2세 아돌프의 뛰어난 군사적 역량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구스타프 2세 아돌프는 기존의 스페인-독일식 테르시오(tercio) 전술의 한계를 극복하고, 네덜란드식 전술을 발전시킨 새로운 군사 교리를 선보였다. 그는 보병, 기병, 포병을 유기적으로 결합한 합동 무기 전술을 활용하여 근접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특히, 경량화된 연대포를 활용한 보병 지원과 기병 돌격 전 화력 지원은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전술이었다. 이러한 전술은 근세 전쟁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이후 유럽 군대에 널리 채택되었다.

  • '''정치사적 평가:''' 브라이텐펠트 전투는 30년 전쟁의 전황을 뒤바꾸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신성 로마 제국 황제군은 이 전투에서 대패하면서 세력이 크게 약화되었고, 스웨덴 제국은 프로테스탄트 세력의 맹주로 떠올랐다. 이로 인해 유럽의 세력 균형은 크게 변화하였으며, 베스트팔렌 조약 체결의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 '''종교사적 평가:''' 브라이텐펠트 전투는 프로테스탄트 진영에게는 종교적 자유를 지켜낸 중요한 승리였다. 당시 가톨릭 세력의 압박으로 위기에 처해있던 프로테스탄트 세력은 이 전투를 통해 세력을 회복하고, 종교적 자유를 확보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작센 선제후국수도 드레스덴에서는 이 전투의 승리를 기념하여 9월 17일을 추수감사절로 지정하고 오랫동안 공휴일로 삼았다. 구스타프 2세 아돌프는 프로테스탄트 세력의 영웅으로 추앙받게 되었다.

5. 2. 현대적인 관점에서의 재조명

브라이텐펠트 전투는 17세기 유럽의 종교적 갈등과 국가 간 역학 관계 속에서 벌어진 중요한 사건이다. 이 전투는 30년 전쟁에서 프로테스탄트 세력이 거둔 첫 번째 주요 승리였으며, 스웨덴의 구스타프 2세 아돌프를 프로테스탄트의 영웅으로 만들었다. 작센 선제후국의 수도 드레스덴에서는 이 승리를 기념하여 9월 17일을 추수감사절로 지정하고 오랫동안 공휴일로 삼았다.

이 전투는 군사 전략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스웨덴군은 틸리가 이끄는 황제군에 비해 기동성과 유연성이 뛰어났으며, 이는 전투의 승패를 가르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특히, 스웨덴군의 지휘관 혼은 틸리 군대의 움직임을 빠르게 파악하고, 자신의 부대를 90도로 재배치하여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하는 기민함을 보였다. 이러한 전술적 우위는 스웨덴군이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승리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되었다.[1]

그러나 이 전투는 전쟁의 참혹함을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전투 과정에서 발생한 거대한 먼지 구름은 시야를 가렸고, 이로 인해 틸리 군대의 일부는 전투에 제대로 참여하지 못했다. 또한, 휘르스텐베르크가 이끄는 황제군 기병대는 스웨덴군의 집중 사격에 의해 격퇴되는 등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2]

결론적으로, 브라이텐펠트 전투는 종교적 갈등, 국가 간 역학 관계, 군사 전략, 그리고 전쟁의 참혹함이라는 여러 측면을 보여주는 역사적 사건이다. 이 전투는 단순한 승리를 넘어, 근대 유럽의 형성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 사건으로 평가할 수 있다. 또한 1642년에는 토르스텐손 장군에 의해 제2차 브라이텐펠트 전투가 벌어져 황제군에게 다시 한번 승리하였다.

참조

[1] 문서 Battle of Breitenfeld (1631) Casualties
[2] 웹사이트 ブリタニカ国際大百科事典 小項目事典の解説 https://kotobank.jp/[...] コトバンク 2018-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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