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화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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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용화교는 1960년대에 교주 서백일이 성범죄, 경제적 착취 등의 범죄 행각을 벌여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유사 종교이다. 서백일은 신도들을 성폭행하고 재산을 갈취했으며, 종말론을 이용하여 신도들을 속였다. 1962년 징역형을 선고받았으나 병보석으로 풀려난 후에도 범죄를 계속하다가 1966년 신도에게 살해당했다. 서백일 사망 후 용화교는 급격히 쇠퇴했으며, 작가 탁명환은 서백일의 범죄 행각을 폭로하는 논픽션 '용화교'를 발표했으나 음란성 논란에 휩싸였다.

용화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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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교주 서백일의 범죄 행각

교주 서백일은 신도들을 상대로 성범죄, 경제적 착취 등 다양한 범죄를 저질렀다.

2.1. 성범죄

교주 서백일은 '교리를 넣어준다'는 명목으로 34명의 여수좌(여신도)들을 성폭행한 혐의로 구속되었다. 서백일은 여신도를 성폭행한 것을 시인하였으나, 인간의 3대 욕구 중 하나인 성욕을 만족시킨 것이며 억제했을 때 오히려 믿음에 방해가 된다는 황당한 주장을 하였다.

2.2. 경제적 착취

교주 서백일은 신도들에게 재물을 헌납받아 사리사욕을 채웠다. 그는 경상남도, 경상북도, 제주도 등에서 수많은 신도를 거느리며 자신에게 많이 헌납한 신도에게는 현(玄), 종(宗)과 같은 존칭을 내려 다른 신도들도 재물을 헌납하도록 유도하는 심리 전술을 사용했다. '여언주'라는 신도 대표를 두어 20여 명씩 반을 짜서 각 도, 각 구별로 헌금을 거두었는데, 헌금을 받는 날을 '공사날'이라고 하였다.

매년 1월 3일, 1월 5일, 3월 3일, 4월 1일, 4월 5일 등이 공사날이었는데, '여언주'들이 한번 들어갔다 나오면 3여만 환씩 헌납되었다. 서백일은 '1962년 4월 8일에는 천지개벽이 있으니 살고 싶은 사람은 용화사나 원각사로 오라'는 종말론을 내세워 신도들로 구성된 수백 가구의 전 재산을 헌납받아 녹용인삼을 복용하였다.

2.3. 수사 및 처벌

1962년 3월 17일, 서백일은 신도 간음 혐의로 현장 검증을 받았으나 법정에서는 혐의를 부인했다. 같은 해 4월 3일, 전주지방검찰은 서백일에게 징역 1년 6개월을 구형했고, 전주지방법원은 검찰의 구형대로 선고했다. 서백일은 이에 불복하여 항소했으나 전주지방법원은 공소를 기각했다.

1962년 10월 2일, 서백일은 고혈압과 뇌동맥경화 등을 이유로 광주고등법원에 병보석을 신청했고, 광주고법은 이를 받아들여 서백일을 석방했다. 서백일은 원각사에서 요양하게 되었으나, 이후에도 범죄 행각은 계속되었다. 결국 1964년 11월 5일, 전라북도 경찰은 서백일이 도피하자 상습 사기, 횡령, 간음 혐의로 그를 수배하였다.

3. 교세 몰락

서백일이 사망하면서 용화교는 급격히 쇠퇴했다. 신도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용화사는 폐허처럼 변했다. 일부 광신도들만이 교주의 무덤을 통과하여 흐르는 물을 마시고 몸에 바르면 병이 낫는다고 믿고 몰려들었다.

용화사는 인적이 드물어져 폐허에 가까워졌고, 머물던 여수좌들은 동냥으로 연명하거나 연고자를 찾아갔다. 교주 사후 용화교는 형식상 종주였던 노신도 김덕연(1966년 당시 71세)에 의해 겨우 명맥만 유지되었고, 일부 열성 신도들과 갈 곳 없는 남수좌들만 남았다.

3.1. 교주 피살

1966년 3월 27일 새벽 2시 20분경, 교주 서백일이 소윤하(당시 23세, 본명은 소재열)에게 칼에 찔려 살해당했다. 살해범 소윤하는 교주가 불교와 유사한 교리를 내세워 신도들을 위협, 공갈하고 금품을 갈취했으며, 여신도들을 간음했기 때문에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어 살해했다고 진술했다. 그는 교주를 살해한 후 경찰에 자수했으며, 양심의 가책은 느끼지만 후회하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소윤하는 용화교 신도였다가 1961년조계종으로 개종했으며, 사건 발생 5년 전부터 교주 서백일에게 앙심을 품어왔다.

3.2. 교세 몰락

徐白一중국어 사망 후 용화교는 급격히 쇠퇴했다. 신도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용화사는 폐허처럼 변했다. 교주의 무덤을 통과하여 흐르는 물을 마시고 몸에 바르면 병이 낫는다고 믿은 일부 광신도들만 몰려드는 정도였다.

용화사는 인적이 드물어져 폐허에 가까워졌으며, 머물던 여수좌들은 동냥으로 연명하거나 연고자를 찾아갔다. 교주 사후 용화교는 형식상 종주였던 노신도 김덕연(1966년 당시 71세)에 의해 겨우 명맥만 유지되었고, 일부 열성 신도들과 갈 곳 없는 남수좌(男首座)들만 남았다.

한편, 교주 피살사건에 관하여 전주지방법원은 살해범 소윤하에게 검찰 구형량보다 5년 낮은 징역 10년을 선고하였다. 소윤하는 항소하였는데, 광주고등법원은 원심을 깨고 징역 5년만 선고하였으며, 대법원은 소윤하의 상고를 기각하여 광주고등법원의 원심이 확정되었다.

4. 논픽션 용화교

용화교 사건은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켰고, 이 사건을 다룬 논픽션 작품이 출판되기도 했다. 1969년 월간지 '아리랑'에 논픽션(실화) '용화교'가 연재되었는데, 탁명환과 관련자들이 음란서적 제작 및 반포 혐의로 입건되면서 논란이 되었다.

4.1. 출판 및 논란

1969년 7월 12일 서울지방검찰청 특별단속반은 월간지 '아리랑'에 논픽션(실화) '용화교'를 연재했던 탁명환(전 국제종교문제연구소 소장, 1937년~1994년)과 발행인 박세준, 편집인 전승욱을 음란서적 제작 및 반포 혐의로 입건했다. 그러나 법원은 부분적으로 남녀관계의 음란한 묘사가 삽입되었다 해도 전체적인 내용으로 보아 외설이 아니라고 판단하여 기각했고, 검찰은 7월 14일 오후에 다시 영장을 신청했다. 결국 검찰은 저자 탁명환과 아리랑사 편집자 전승우(당시 34세)를 음란문서 제조 혐의로 같은 날 밤에 구속하고, 다음 날 오전에 기소했다.

1971년 서울형사지방법원 목요상 판사는 유죄를 인정하나 정상을 참작하여 선고유예 판결을 내렸다. 재판부는 "허울좋은 교리를 앞세워 죄악을 일삼는 유사종교의 내막을 폭로하려는 작가의 의도는 인정되나 그 표현방법이 노골적으로 음란한 것이므로 유죄를 인정하나 정상을 참작한다."고 밝혔다. 이후 탁명환은 같은 해 6월 1일 서울YMCA소강당에서 논픽션 용화교 출판기념회와 한국신흥유사종교사진전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