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수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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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원수는 일본 군대에서 사용된 칭호로, 계급으로서의 원수와 칭호로서의 원수로 구분된다. 계급으로서의 원수는 1871년부터 1873년까지 존재했으며, 사이고 다카모리가 유일하게 임명되었다. 1898년부터 1945년까지는 칭호로서의 원수 제도가 운영되었으며, 육군과 해군 대장 중 공이 큰 자에게 군무 고문 자격으로 부여되었다. 1945년, 칭호로서의 원수 제도는 폐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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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수 (일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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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명칭 | 원수 (元帥) |
로마자 표기 | Gwon-su |
일본어 표기 | げんすい (Gensui) |
계급 | |
군대 계급 | 계급 |
상세 정보 | |
임명 | 원수부 조례에 따라 천황이 임명 |
자격 | 공적이 혁혁한 상장 중에서 선발 |
대우 | 군사 참모관의 우두머리로서 천황을 보좌하고 군정에 참여 |
예우 | 정1위에 준하는 예우 |
역사 | 1871년 8월 병부성에 대원수 및 원수 설치 (이후 폐지) 1898년 원수부 조례 제정 |
특징 | 대원수에 다음가는 계급 육군과 해군 모두에 존재 |
참고 | 천황이 대원수가 되었을 때의 계급장을 규정한 기록이 있음 |
2. 계급으로서의 원수 (1871년~1873년)
1871년 일본군에 처음으로 원수 계급이 도입되었으나, 매우 짧은 기간 동안만 존속했다. 1872년 사이고 다카모리가 육군 원수에 임명되었으나, 1873년 관제 개정으로 원수 계급이 폐지되면서 사이고 다카모리도 육군 대장으로 변경되었다.
2. 1. 도입 배경
1871년 8월 병부성 상당표[31][32]와 1872년 10월 해군성 관등표[34]에 게재된 원수 계급이 일본군에서 등장한 첫 원수이다.[29][30] 실제로 원수에 임명된 사람은 사이고 다카모리뿐인데, 사이고는 1872년 8월 22일 육군 원수를 겸하게 되어 참의 겸 육군 원수가 되고 근위 도독에 임명되었다.[36] 같은 해 9월 1일에는 참의 겸 육군 원수를 고쳐 육군 원수 겸 참의에 임명되었다.[36][39] 9월 7일에는 태정관포고 제252호를 반포해 대원수 및 원수의 제복과 계급장을 제정했다.[40]이후 1873년 5월 8일 관제를 개정해 대원수와 원수를 폐지했으며,[30][35] 5월 12일 유일한 원수였던 사이고도 육군 대장 겸 참의에 임명되었다.[41] 이를 끝으로 일본사에서 계급으로서의 원수는 다시 등장하지 않았다.
2. 2. 사이고 다카모리
사이고 다카모리는 일본군 역사상 유일하게 원수 계급에 임명된 인물이다.[10] 1872년 8월 22일, 사이고 다카모리는 참의 겸 육군 원수를 겸임하며 근위 도독에 임명되었다.[36] 이후 9월 1일에는 육군 원수 겸 참의로 직책이 변경되었다.[36][39]1873년 5월 8일 관제 개정으로 대원수 및 원수가 폐지되면서,[30][35] 사이고 다카모리는 육군 원수 직에서 해제되었다. 같은 해 5월 12일, 사이고는 다시 육군 대장 겸 참의에 임명되었다.[41] 이를 끝으로 일본사에서 계급으로서의 원수는 다시 등장하지 않았다.
2. 3. 제도 폐지
1873년 5월 8일 관제 개정으로 대원수와 함께 원수 계급이 폐지되었다.[30][35] 같은 해 5월 12일 유일한 원수였던 사이고 다카모리는 육군 대장 겸 참의에 임명되었다.[41] 이를 끝으로 일본사에서 계급으로서의 원수는 다시 등장하지 않았다.3. 칭호로서의 원수 (1898년~1945년)
1898년 「원수부 조례」 제정으로 칭호로서의 원수 제도가 부활했다.[38] 야마모토 이소로쿠나 고가 미네이치처럼 요건을 충족하고도 원수 칭호를 받지 못했거나, 현역 대장인 채로 사망했을 때 사망일로 소급하여 원수 칭호를 부여하기도 했다. 오쿠 야스카타는 고령과 청력 저하로 군사 고문 역할 수행이 어렵자 원수 사임을 희망했지만 각하되었다.
이때의 원수는 계급이 아니라 칭호였기에 육군 원수나 해군 원수로 불리지 않았다.[44][45] 원수 칭호를 받아도 계급은 대장이었기에 원수육군대장이나 원수해군대장이라 불렸으며, 단순히 원수라고만 칭하기도 했다.[44][45]
메이지 시대에는 육군 5명, 해군 3명, 다이쇼 시대에는 육군과 해군 각각 6명, 쇼와 시대 초기에는 육군 6명, 해군 4명이 원수 칭호를 받았다. 제2차 세계 대전 때 육군과 해군에서 각각 3명씩 원수 칭호를 받았는데, 이 중 해군 대장 2명은 사후 추서되었다.
1926년 4월 26일,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 순종에게도 원수 예우가 부여되었다. 순종은 대한제국 황제에서 이왕으로 격하된 뒤 일본 육군 대장의 예우를 받고 있었는데, 사망 직전 원수로 추서된 것이다. 순종은 전날 사망했으나, 정식 보고 전에 원수 추서가 이루어졌다.[46]
1945년 칙령 제669호 「원수부 조례 등 폐지의 건」에 따라 칭호로서의 원수 제도도 폐지되었다.[47] 당시 생존 중이던 원수는 나시모토 모리마사, 후시미노미야 히로야스 왕, 데라우치 히사이치, 하타 슌로쿠, 나가노 오사미 등 다섯 명이었다.
3. 1. 제도 도입 배경
1898년(메이지 31년) 원수부 조례가 제정되어 육해군 대장 중에서 특별히 공이 큰 자에게 군무 고문으로서 원수 칭호를 부여하게 되었다.[38] 이 조례에 따르면 대장 승진 후 공을 세운 자로 한정되었기 때문에, 대장 승진 전에 공을 세운 경우에는 원수 칭호를 받을 수 없었다. 실제로 러일 전쟁에서 카자크 기병을 상대로 승리한 아키야마 요시후루는 당시 계급이 소장이었기 때문에 대장으로 승진한 후에도 원수 칭호를 받지 못했다.[38]조례 제정 직후 원수 칭호를 받은 사람은 고마쓰노미야 아키히토 친왕, 야마가타 아리토모, 오야마 이와오 육군 대장과 사이고 주도 해군 대장 등 4명이었다. 같은 해 칙령 제96호 「원수 휘장의 제식 및 장착에 관한 건」을 통해 원수 휘장이 만들어졌다.[42] 1918년에는 칙령 제331호 「원수 패도 제식」이 제정되어, 일종의 원수장에 해당하는 원수도(원수 패도)를 패용하게 되었다.[43] 원수들은 천황의 최고 군사 고문으로 원수부에 소속되었고, 육해군 대장과 달리 종신 현역이었다.
3. 2. 원수부 조례
1898년 「원수부 조례」가 제정되어 육해군 대장 중 탁월한 공을 세운 자에게 군사 고문으로서 원수 칭호를 부여하기로 했다.[38] 조례 제정 직후 원수 칭호를 받은 사람은 고마쓰노미야 아키히토 친왕, 야마가타 아리토모, 오야마 이와오 육군 대장과 사이고 주도 해군 대장 등 총 4명이었다. 같은 해에 칙령 제96호 「원수 휘장의 제식 및 장착에 관한 건」을 통해 원수 휘장이 만들어졌다.[42] 1918년에는 칙령 제331호 「원수 패도 제식」이 제정되어 이른바 원수도로 불리는 원수 패도를 패용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일종의 원수장에 해당했다.[43] 원수들은 천황의 최고 군사 고문으로 원수부에 속했고 육해군 대장과 달리 종신 현역이었다.이때의 원수는 계급이 아니라 칭호였기 때문에 육군 원수나 해군 원수로 불리지 않았다.[44][45] 원수 칭호를 받아도 계급은 대장이었기에 원수육군대장이나 원수해군대장이라 불렸으며, 단순히 원수라고만 칭하기도 했다.[44][45]
메이지 시대에는 육군에서 5명, 해군에서 3명이 원수 칭호를 받았으며, 다이쇼 시대에는 육군과 해군에서 각각 6명씩, 쇼와 시대 초기에는 육군에서 6명, 해군에서 4명이 원수 칭호를 받았다. 제2차 세계 대전 때는 육군과 해군에서 각각 3명씩 원수 칭호를 받았는데, 이 중 해군 대장 2명은 사후 추서된 사례였다.
1926년 4월 26일, 순종에게도 원수 예우가 부여되었다. 순종은 대한제국 황제에서 이왕으로 격하된 뒤 일본 정부로부터 육군 대장의 예우를 받고 있었는데, 사후 원수로 추서된 것이었다. 순종은 전날에 사망했는데 정식으로 보고되기 전에 원수 추서가 이루어졌다.[46]
1945년 칙령 제669호 「원수부 조례 등 폐지의 건」에 따라 칭호로서의 원수 제도도 폐지되었다.[47] 당시 생존 중이던 원수는 나시모토 모리마사, 후시미노미야 히로야스 왕, 데라우치 히사이치, 하타 슌로쿠, 나가노 오사미 등 다섯 명이었다.
3. 3. 원수 휘장 및 원수도
1898년 칙령 제96호 「원수 휘장의 제식 및 장착에 관한 건」으로 원수 휘장이 제정되었다.[42] 1918년에는 칙령 제331호 「원수 패도 제식」이 제정되어 이른바 원수도로 불리는 원수 패도를 패용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일종의 원수장에 해당했다.[43]3. 4. 원수의 호칭
이때의 원수는 계급이 아니라 칭호였기 때문에 '육군 원수'나 '해군 원수'로 불리지 않았다.[44][45] 원수 칭호를 받아도 계급은 대장이었기에 '원수육군대장'이나 '원수해군대장'으로 불렸으며, 간단히 '원수'라고만 칭하기도 했다.[44][45] 예를 들어 야마모토 이소로쿠의 경우, "원수 해군 대장 야마모토 이소로쿠" 또는 "야마모토 원수"라고 부르는 것이 옳고, "해군 원수 야마모토 이소로쿠", "야마모토 해군 원수" 등으로 부르는 것은 잘못된 표현이다.3. 5. 대한제국 순종
1926년 4월 26일,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 순종이 일본 정부로부터 원수 예우를 받았다.[46] 순종은 대한제국 황제에서 이왕(李王)으로 격하된 뒤 일본 육군 대장의 예우를 받고 있었는데, 사망 직전 원수로 추서된 것이다.[46] 순종은 전날 사망했으나, 정식 보고 전에 원수 추서가 이루어졌다.[46]3. 6. 제도 폐지
1945년 칙령 제669호 「원수부 조례 등 폐지의 건」에 따라 칭호로서의 원수 제도도 폐지되었다.[47] 폐지 당시 생존해 있던 원수는 나시모토 모리마사, 후시미노미야 히로야스 왕, 데라우치 히사이치, 하타 슌로쿠, 나가노 오사미 다섯 명이었다.4. 역대 원수
일본군에서 원수 제도는 1871년(메이지 4년) 병부성에서 처음 나타났으며,[5] 1872년에는 해군성 관등 표에도 등장했다.[8] 1872년 사이고 다카모리가 참의 겸 '''육군 원수'''로 임명된 것이[10] 실제로 임관된 유일한 사례이다.
1873년 관제 개정으로 대원수 및 원수가 폐지되면서,[4] [9] 사이고 다카모리는 육군 원수에서 해제되고 육군 대장으로 임명되었다.[19] 이처럼 계급으로서의 원수 제도는 매우 짧은 기간 동안만 운용되었다.
1898년 원수부 조례가 제정되면서 "육해군 대장 중 노공 탁월한 자"에게 '''원수''' 칭호를 부여하게 되었다.[11] 이때 칭호를 받은 인물은 고마츠노미야 아키히토 친왕, 야마가타 아리토모, 오야마 이와오, 사이고 주도였다. 원수는 천황의 최고 군사 고문으로서 원수부에 속했으며, 종신 현역이었다.
메이지 시대에는 육군 5명·해군 3명(사이고 다카모리 제외), 다이쇼 시대에는 육군 6명·해군 6명, 쇼와 시대에는 육군 6명·해군 4명이 원수 칭호를 받았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육군 3명, 해군 3명이 원수로 임명되었는데, 야마모토 이소로쿠, 고가 미네이치는 사후 추서였고, 나가노 오사미가 유일하게 생전에 서임되었다.
1945년 원수부 조례 폐지로 일본의 원수 제도는 폐지되었다.[26]
4. 1. 육군 원수
사이고 다카모리는 1872년 7월 20일에 육군 원수로 임명되었다.[10] 일본 근대 군대 역사상 "육군 원수" 계급에 임관된 것은 사이고 다카모리가 유일하다.[10]
4. 2. 원수육군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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