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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노 오사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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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나가노 오사미는 고치현 출신의 일본 제국 해군 군인으로, 해군병학교와 해군대학교를 졸업했다. 러일 전쟁에 참전하여 뤼순 공작부대에서 활약했으며, 이후 해군대신, 연합함대 사령관, 군령부총장 등 해군 요직을 두루 거쳤다. 그는 하버드 로스쿨 유학 및 워싱턴 회의 참관을 통해 국제적인 경험을 쌓았고, 해군병학교장 시절에는 달튼식 교육을 도입하여 교육 개혁을 시도했다. 태평양 전쟁 발발 전 군령부총장으로 복귀하여 진주만 공격 계획을 승인했으며, 종전 후 A급 전범으로 기소되었으나 폐렴으로 사망하여 판결을 면제받았다. 그는 일본 해군의 3요직을 모두 경험한 유일한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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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노 오사미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나가노 오사미
로마자 표기Nagano Osami
한자 표기永野 修身
출생일1880년 6월 15일
출생지고치, 고치현, 일본
사망일1947년 1월 5일
사망 장소스가모 형무소, 도쿄, 점령하 일본
별칭미나노가와
묘소조신지 (도쿄도 세타가야구)
후데야마 묘지 (고치현 고치시)
나가노 오사미 (c.1943-45)
군사 경력
소속일본 제국 해군
복무 기간1900년–1947년
최종 계급원수 해군 대장
참전러일 전쟁
제1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
지휘히라도
제3 NGS 사단 정보
제3 전함 사단
제1 중국 파견 함대
해군 군령부
요코스카 진수부
해군성
제1함대
연합 함대
해군 군령부
해군 주요 보직
해군대신재임 시작: 1936년 3월 9일
재임 종료: 1937년 2월 2일
천황: 쇼와
총리: 히로타 고키
전임: 오스미 미네오
후임: 요나이 미쓰마사
군령부 총장재임 시작: 1941년 4월 9일
재임 종료: 1944년 2월 21일
총리:
고노에 후미마로
도조 히데키
전임: 후시미 히로야스 친왕
후임: 시마다 시게타로
훈장
수상 내역욱일대수장 (1등)
금치훈장 (3등)
서보장 (3등)
기타
일본 제국 해군 원수[[파일:元帥徽章.svg|20px]] [[파일:Imperial Japan-Navy-OF-9-collar.svg|30px]]

2. 인물과 경력

1880년, 고치현 사족(士族)의 자식으로 태어나, 해군병학교와 해군대학교를 졸업하였다. 대위 시절, 러일 전쟁에서 뤼순 공작부대 중포대 소속으로 일했으며, 뤼순항에 들어온 러시아 함대의 격멸에도 참가했다.[63] 이때 나가노는 최전선에서 포격을 지시하여 일본 해군을 승리로 이끌었다. 이후에는 순양함 이쓰쿠시마의 포술장으로 근무했고, 1910년에 해군 소좌로 승진하였다.

1913년부터 1915년까지 미국 주재무관으로 하버드 로스쿨에서 유학 생활을 했으며, 1920년부터 1922년까지 다시 미국 주재무관으로 가서 워싱턴 회의도 참관하였다.

나가노는 또한 해군병학교 시절, 자신이 체득한 달튼식 체벌 금지 조항 등을 만들어 교육 개혁안 개선에도 일조했는데, 달튼식 교육은 그가 군령부차관으로 이직한 직후 소멸됐지만, 그가 가르친 해군병들을 중심으로 계속해서 유지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해군병학교장을 지낸 이노우에 시게요시는 해군사관생도를 만드는 데 어느 정도 체벌이 필요하다고 해 비판도 받았지만, 생도들 앞에서 대놓고 나가노의 비판을 할 수 없다고 할 만큼 그는 다른 병사들과 장교들의 존경을 받았다.

1934년, 나가노는 해군 대장에 취임한 후 군사 참모관이 되었고, 1935년 12월부터 런던 군축회의에 전권으로 참석해 연합국의 일방적인 전함감축안에 반대해 일본의 탈퇴를 통보하였다. 나가노는 1936년 3월 9일, 일본 해군대신으로 취임한 후 "국책의 기준"을 설정했는데, 이 때에 야마모토 이소로쿠를 해군항공본부장에서 해군차관으로 발탁하였다.

1937년 2월, 히로타 내각의 총사퇴로 해군 대신에서 물러나, 연합함대 사령관 겸 제1함대 사령 장관에 취임하였다. 그 후에는 다시 군사 참모관이 되어 1941년, 후시미노미야 히로야스의 후임으로 군령부총장에 올랐다.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는 병을 이유로 사직했지만, 태평양 전쟁이 일어난 후에는 다시 군령부총장으로 복귀해 야마모토 이소로쿠진주만 공격 계획을 승인하였다.[63] 1943년 6월 21일에는 원수로 추대되었고, 1944년 2월 21일에는 트랙 섬 공습의 여파로 다른 직책을 겸임하면서 군령부총장을 사임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 후에는 극동 국제 군사 재판에서 A급 전범 판결을 받았으나, 수감 중이었던 1947년 1월 5일, 폐렴으로 인한 폐결절로 66세의 나이로 사망하면서 판결을 면제받았다.[64] 나가노는 일본제국 해군의 3요직 (해군대신, 연합함대사령관, 군령부총장) 을 모두 경험한 유일한 인물이다.

나가노 오사미


해군병학교 시절 사진


나가노 오사미와 친족(1940년경)


나가노 오사미와 셋째 아들 나가노 타카아키(센다이 공습으로 사망) 사진


제임스 리처드슨(James Richardson) 미국 해군 대장(전 미국 함대 사령관)

2. 1. 초기 생애 및 교육

나가노 오사미는 1880년 6월 15일 고치현 고치시에서 전직 사무라이 가문 출신으로 태어났다. 카이난 중학교를 졸업하고, 1900년에 해군병학교 28기 졸업생 105명 중 2위로 졸업했다. 졸업 후, 순양함 하시다테(Hashidate)와 전함 아사히(Asahi)에서 견습 함장으로 복무한 후, 1902년 1월 18일 소위로 임관하여 순양함 아사마(Asama)에 배치되었다. 러일 전쟁 중에는 여러 참모직을 역임했으며, 뤼순 포위 공격 중 육상 기반의 중화력 해군포대를 지휘하기도 했다.

1905년 중위로 진급한 후, 나가노는 전함 시키시마(Shikishima)에서 복무했다. 1905년부터 1906년까지 함포와 항해술을 공부했으며, 1906년부터 1908년까지 순양함 이쓰쿠시마(Itsukushima)의 함포장이었다. 1909년에는 해군대학교를 졸업했다.

1910년 소령으로 진급하여 전함 가토리(Katori)의 함포장으로 임명되었다. 1913년 1월부터 1915년 4월까지 미국에서 언어 장교로 근무하며 하버드 로스쿨에서 수학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중에는 순양함 닛신(Nisshin)과 순양함 이와테(Iwate)에서 함장을 역임했다. 1918년 대령으로 진급했으며, 1919년에는 순양함 히라도(Hirado)를 지휘하며 첫 함장직을 맡았다.

1920년 12월부터 미국 주재 무관으로 근무하며 워싱턴 해군 군축 회의에 참석했다. 1923년 11월 귀국했지만, 1927년과 1933년에 공식 방문으로 미국에 다시 돌아갔다. 1923년 12월 소장으로 진급했다.

2. 2. 해군 내 주요 경력



고치현 출신으로 해군병학교와 해군대학교를 졸업했다. 러일 전쟁 당시 뤼순 공작부대 중포대 소속으로 참전, 뤼순항에 정박한 러시아 함대 격멸에 기여했다.[63] 뤼순 요새 공략에는 간접사격을 활용, 최전선에서 포격을 지휘하여 일본 해군 승리에 공헌했다. 이후 순양함 이쓰쿠시마의 포술장을 거쳐 1910년 해군 소좌로 승진했다.

1913년부터 1915년까지 미국 주재무관으로 하버드 로스쿨에서 유학했고, 1920년부터 1922년까지 다시 미국 주재무관으로 워싱턴 회의에 참관했다.

해군 참모본부 제3부(정보) 부장(1924년 2월), 제3전함전대 사령관(1924년 12월), 제1차 중국 주둔 함대 사령관(1925년 4월)을 역임했다. 1927년 12월에는 중장으로 승진했다.

1928년부터 1929년까지 해군사관학교 교장을 역임하며 달튼 플랜 등 진보 교육 방식을 도입했다.[4] 해군병학교장 재직 시절에는 이토 세이이치와 함께 자기주도 학습을 중심으로 하는 달튼식 교육을 채택하여 체벌 금지 등 획기적인 교육 개혁을 추진했다. 나가노는 달튼 교육을 도입함으로써 기존의 수동적인 병학교육을 개혁하고, 자주성, 적극성, 창조성을 중시하여 개별 학생들이 가진 재능과 자질, 전문성을 꽃피우고 자유롭게 발전시키는 방향으로 전환하려고 했다.

1930년부터 1931년까지 해군 참모본부 차장을 역임하며 제네바 해군 군축 회의에 참석했고, 1930년 런던 해군 군축 회의에도 참석했다. 1933년부터 1934년까지는 요코스카 해군 지구 사령관을 역임했다.

1934년 대장으로 승진, 군사 참모관이 되었고, 1935년 런던 군축회의에 전권으로 참석, 연합국의 전함감축안에 반대하여 일본의 탈퇴를 통보했다. 1936년 해군대신에 취임, 야마모토 이소로쿠를 해군차관으로 발탁했다.

1937년 연합함대 사령관 겸 제1함대 사령 장관을 거쳐 1941년 군령부총장에 취임했다.[63] 태평양 전쟁 발발 전에는 병으로 사직했으나, 전쟁 발발 후 군령부총장으로 복귀, 야마모토 이소로쿠진주만 공격 계획을 승인했다.[63] 1943년 원수로 추대되었고, 1944년 트랙 섬 공습의 여파로 군령부총장을 사임했다.[63]

제2차 세계 대전 후 극동 국제 군사 재판에서 A급 전범 판결을 받았으나, 수감 중 폐렴으로 사망하여 판결을 면제받았다.[64] 나가노는 일본제국 해군의 3요직 (해군대신, 연합함대사령관, 군령부총장) 을 모두 경험한 유일한 인물이다.

IJN 계급장계급날짜
50px
해군소위후보생 (Kaigun Shōi Kōhōsei)
(사관후보생)
1900년 12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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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군소위 (Kaigun Shōi)
(소위)
1902년 1월 18일
50px
해군중위 (Kaigun Chūi)
(중위)/(소위)
1903년 9월 26일
50px
해군대위 (Kaigun Daii)
(중위)
1905년 1월 12일
50px
해군소좌 (Kaigun Shōsa)
(소령)
1910년 12월 1일
50px
해군중좌 (Kaigun Chūsa)
(중령)
1914년 12월 1일
50px
해군대좌 (Kaigun Daisa)
(대령)
1918년 12월 1일
50px
해군소장 (Kaigun Shōshō)
(소장)
1923년 12월 1일
50px
해군중장 (Kaigun Chūjō)
(중장)
1927년 12월 1일
50px해군대장 (Kaigun Taishō)
(대장)
1934년 3월 1일
50px원수해군대장 (Gensui Kaigun Taishō)
(원수)
1943년 6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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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3.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나가노 오사미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극동 국제 군사 재판에서 A급 전범 판결을 받았으나, 수감 중 폐렴으로 인한 폐결절로 1947년 1월 5일 사망하여 판결을 면제받았다.[64] 그는 일본제국 해군의 3요직 (해군대신, 연합함대사령관, 군령부총장)을 모두 경험한 유일한 인물이다.

1945년 미국 점령군은 나가노를 체포하여 도쿄극동국제군사재판에 A급 전범 혐의로 기소했다. 미국 해군 장교들은 심문 과정에서 나가노가 "매우 협조적이고", "매우 기민하며", "지능적이고", "미국과의 우정을 발전시키기를 열망하는" 사람으로 묘사했다.[12]

포츠담 선언 수락 과정에서 쇼와 천황의 소신을 전달받고 따랐으며, 주변 정리 후 자결하려 했으나 해군 사관학교 동기인 사콘시 마사조(左近司政三)의 만류로 그만두었다. 친척과의 대화에서 패전 책임은 자신에게 있으며, 부하들을 위해 변명하겠다는 결심을 밝혔지만, 미국은 변명 기회를 주지 않았고, 군령부 총장이라는 직책으로 처음부터 전범으로 취급받았다고 슬픈 표정을 지었다고 한다.

미국 전략폭격조사단의 잠수함 운용에 관한 질문에 나가노는 "잠수함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한다"고 진술했다.[31][32]

진주만 공격을 허가한 책임을 추궁받는 과정에서도 자신에게 유리한 변명은 하지 않고, 진주만 공격의 책임은 모두 자신에게 있다고 하면서 전사한 야마모토 이소로쿠에게 책임을 떠넘기려 하지 않았다. 제임스 리처드슨 미 해군 대장은 진정한 무인이라 칭찬하며, 피고석에 있던 나가노에게 경의를 표했다.

재판 중이던 1947년 1월 2일, 추위로 인해 급성 폐렴에 걸려 스가모 구치소에서 미국 육군 병원으로 이송된 후, 1월 5일에 사망했다. 전 외무대신 시게미쓰 마모루는 나가노의 죽음을 애도하며 시를 읊었다. 나가노의 아내는 남편이 전범으로 살아남은 것은 해군 지도자로서 일본이 싸운 정당성을 명확히 하기 위해서였는데, 그것을 하지 못하고 죽은 남편을 생각하면 잔혹한 죽음이라며 화를 냈다고 한다.

향년 66세. 묘소는 도쿄도 세타가야구 오쿠자와의 죠신지[34]고치시의 붓산묘지에 있다. 1978년,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되었다.

도쿄 재판 당시 나가노의 변호를 맡은 존 G. 브래넌 변호인은 재판 자체의 불합리성은 물론, 나가노 원수의 무죄를 확신했다고 한다. 나가노는 옥중에서 토혈했을 때 많은 일기와 자료를 브래넌에게 넘겼고, 1961년 일본을 재방문한 브래넌은 유족을 만나 나가노는 무죄라고 말했다고 한다.

3. 해군 교육 개혁

1928년(쇼와 3년) 12월 10일, 나가노 오사미는 해군병학교장에 취임했다. 이토 세이이치와 함께 자기주도 학습을 중심으로 하는 달튼식 교육을 채택하여 체벌 금지 등 획기적인 교육 개혁을 추진했다. 나가노는 달튼 교육을 도입함으로써 기존의 수동적인 병학교육을 개혁하고, 자주성, 적극성, 창조성을 중시하여 개별 학생들이 가진 재능과 자질, 전문성을 꽃피우고 자유롭게 발전시키는 방향으로 전환하려고 했다.

나가노는 일본은 국토도 좁고 자원도 없어 가장 큰 재산은 인재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뛰어난 인재를 육성함으로써 일본을 지키고자 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므로 나가노는 서구인들이 만든 교과서를 그대로 암기하는 인재를 육성하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 스스로 자유롭게 생각하고 자발적으로 배우도록 함으로써 일본의 미래를 책임질 인재를 육성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교육 활동에 임했기에, 학생들에게 "나가노 교장의 머리를 두드리면 자기주도학습의 소리가 난다"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이러한 노력으로 학습 의욕이 넘치는 학생들은 스스로 교관을 활용하며 자유롭게 자기주도 학습을 하고 뛰어난 인재로 성장하는 한편, 자주성 부족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낙오하는 학생들도 생겨나 찬반이 갈렸다고 한다.

달튼 교육의 도입은 나가노가 군령부 차장으로 전임한 후 사라졌지만, 태평양 전쟁에서 구축함장, 잠수함장, 부대 사령관으로 활약한 55기 (요시다 토시오에 따르면 58기부터 60기)를 중심으로 한 나가노의 제자들 사이에서는 나가노 교장 시절 병학교의 교풍을 칭찬하는 목소리가 크다. 한편, 타율적인 틀에 박힌 교육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임관 후 다른 기수의 장교들로부터 상관에 대한 의견(제안)이 많고, 이론적이고 의견이 많다는 평판이 좋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달튼 교육을 받은 사람들 중에는 새로운 폭격술의 연구 개발을 한 세키 마모루 등 많은 유능한 인재를 배출했다.

대전 중 병학교장을 지낸 이노우에 시게미는 "제대로 된 해군 장교를 육성하는 것이 병학교의 최대 임무이며, 어느 정도 틀에 박힌 교육은 필요하다"는 입장에서 나가노의 달튼식 교육을 비판했고, 나가노가 이노우에 교장 시절 병학교를 방문했을 때 "학생들 앞에서 나가노가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면 곤란하다"는 생각에서 관례였던 학생들을 위한 강연을 시키지 않았다. 이는 "즉시 현장에서 활용 가능한 전투력을 갖춘 해군 장교를 육성하는 것이 병학교의 최대 임무"라고 생각한 이노우에 교장과 미래에 병학교 학생들이 문제나 장벽에 부딪혔을 때 스스로 생각하고, 꾸준히 학습(자기주도 학습)하면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행동력이나 창조력 등)을 갖춘 인재를 육성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나가노 교장의 생각 차이에 있었다. 이상과 같이, 초급 장교로서 당면한 임무 수행에 필요한 교육을 우선시하는 교육을 중시한 것이 이노우에 시게미의 교육 방침이었던 반면, 미래의 지휘관으로서의 기반을 형성하는 교육을 중시한 것이 나가노 오사미였다. 어느 것을 우선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장교 양성 교육의 딜레마로서 해군 내에서 계속 존재했다.

해군 반성회 등의 자료에는 전전 일본군의 교육 문제가 적혀 있지만, 일본군에서는 교과서 암기를 기본으로 하는 교육이 중심이었기 때문에, 일본군의 행동은 미국군에 의해 쉽게 예측되었다고 한다. 게다가 일본군 지휘관에게는 창조성이나 개성이 없어 교과서대로 틀에 박힌 전법을 반복하는 경우가 많았고, 미국군처럼 한번 실패한 전법도 재검토하여 대책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일본군은 같은 것을 반복하여 희생을 늘렸다고 한다.

학교법인 다마가와가쿠엔의 오하라 쿠니요시와는 특히 친분이 좋았고, 자택에 다마가와가쿠엔 학생들을 불러 원유회 등을 열거나, 학원 시찰을 자주 하는 등 교류를 깊게 했다고 한다. 또한 자유학원의 하니 모토코 등과도 일본의 교육 활동 방식에 대해 자주 의견을 교환했다. 나가노의 교육 개혁을 지원한 오이카와 고시로 해군대장의 손자 오이카와 이쿠로가 달튼 플랜의 창시자 헬렌 파커스트가 방일했을 때 방문한 것으로 알려진 명성학원에 입학했던 것으로 보아, 동학원과도 깊은 교류를 가졌다.

4. 평가 및 논란

나가노 오사미는 1941년 9월 6일, 미국과의 전쟁이 불가피하다는 견해를 밝혔다. 그는 미국의 요구를 수용하면 일본이 멸망할 것이라고 보았지만, 미국과 싸워도 멸망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다.[11] 그는 미국과의 외교 협상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으나, 전쟁 발발 시 싸울 것이라고 언급했다.[11]

나가노는 가족에게 보낸 문서(「전쟁 발발과 우리의 입장」)에서 태평양 전쟁을 「자위전」으로 규정하고, 개전까지의 일본 국내 정세와 미국 정부의 태도 등 세계 정세를 상세히 분석하며, 대전의 원인이 일본과 미국 양측에 있다고 주장했다.

나가노는 A급 전범으로 기소된 것에 대해 유감을 표하며, 자신은 순수한 해군 군인으로서 공명정대한 생활을 해왔다고 주장했다. 그는 1941년 4월 군령부 총장 취임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며, 중일 전쟁의 난항, 삼국 동맹 체결 후의 국내외 정세 악화, 미영과의 관계 악화 등을 언급했다. 그는 대미영 협상의 어려움이 육군의 강경한 태도와 삼국 동맹 처리 문제에 있다고 지적하며, 해군은 삼국 동맹 체결 당시부터 대미영 전쟁을 하지 않도록 노력했으나, 육군을 중심으로 하는 시대의 흐름에 저항할 수 없어 전쟁에 이르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나가노는 전쟁이 일본만의 책임이 아니라고 주장하며, 미국의 반일 감정과 일본을 멸시하는 태도, 일미 통상 항해 조약 파기, 석유 공급 중단, 중국에 대한 항전 지원 등을 미국의 책임으로 지적했다. 그는 이러한 미국의 행위가 일본을 자위전으로 몰아넣었다고 주장했다.

4. 1. 긍정적 평가

4. 2. 부정적 평가

나가노 오사미는 1941년 9월 3일 대본영 정부 연락 회의에서 물자 부족으로 인해 일본이 쇠약해지고 있음을 지적하며, 시간이 지날수록 불리해지므로 외교적 해결이 불가능할 경우 빠른 결단을 내려야 한다고 주장했다.[38] 그는 장기전을 예상하면서도, 초반 승리를 통해 유리한 상황을 만들어야 한다고 보았다.[38]

9월 6일 천황 회의에서 쇼와 천황이 전쟁의 승리 가능성에 대해 질문하자, 나가노는 절대적인 승리를 장담할 수는 없지만 전력을 다해야 한다고 답했다.[39] 또한 오사카의 진을 예로 들며, 미온적인 태도로 단기적인 평화를 얻는 것은 장기적으로 일본에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39]

추밀원 의장 하라 요시미치는 나가노의 발언이 불명확하다고 지적했지만, 나가노는 같은 말을 반복했다.[40] 카메이 히로시는 이를 나가노 특유의 간결한 표현으로 최대한 진실을 밝힌 것이라고 평가했다.[40] 반면, 오이 아츠시는 "알 수 없다"는 부분이 애매하며, 더 명확한 설명이 필요했다고 비판했다.[41]

쿠보타 요시오에 따르면, 나가노는 해군이 육군에 밀린 이유에 대해 내란의 위험을 언급하며, 영미와의 전쟁에서 승산은 없지만 용감하게 싸우다 졌을 때 민족이 멸망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토미오카 사다토시는 나가노가 전쟁을 불가피하다고 판단한 이유에 대해, 육군의 쿠데타와 내란 가능성을 언급하며, 육해군이 일치하여 전쟁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세키구치 코우조는 나가노가 미영과의 전쟁을 피하고 싶었지만, 불가피하다고 판단될 경우 개전 시기를 늦출 수 없다고 생각했으며, 싸우지 않고 굴복한 국가는 성공한 예가 없다고 말했다고 증언했다.

요시다 토시오는 나가노가 미국의 국력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전력이 강해지기 전에 행동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추측한다.[42] 토리이 타미키는 나가노가 육군의 독소 전쟁 개입을 막으려 했으며, 일본이 이중 전선에 놓이는 것을 피하려 했다고 추측한다.

해군 반성회에서는 나가노 개인의 문제뿐 아니라 일본 해군 조직 전체의 체질에 문제가 있었다고 지적한다. 당시 일본 해군은 "사일런트 네이비(Silent Navy)"를 모토로 육군의 횡포를 방관해 왔던 것이 문제였다고 분석된다.

나가노는 가족에게 보낸 문서에서 "자위전"을 각오하게 된 경위를 설명하며, 미국의 대일 정책과 여론 변화 등을 언급했다.[44] 그는 일미 통상 항해 조약 파기, 석유 공급 중단 등 미국의 압박이 일본을 궁지로 몰아넣었다고 주장했다.

5. 한국과의 관계

6. 기타

1941년 9월 6일, 나가노 오사미는 일본 정부가 미국의 요구를 수용하면 멸망할 것이라고 보았지만, 미국과 싸워도 멸망할 가능성이 있다고 언급하였다. 그는 미국의 요구를 수용하면 미국과 싸우지 않고도 일본이 멸망할 것이며, 미국과 싸워 일본을 지키는 정신을 보여준다면 후손들이 일본을 재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11] 그는 외교 협상으로 문제를 해결하기를 바랐지만, 전쟁을 하라는 명령을 받는다면 싸울 것이라고 언급하였다.[11]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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