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키야마 요시후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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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키야마 요시후루는 일본 제국의 군인으로, 러일 전쟁에서 기병 제1여단장으로 활약하며 '일본 기병의 아버지'로 불렸다. 그는 이요 마쓰야마 번의 하급 무사 출신으로,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육군대학교에서 기병 전술을 연구했다. 청일 전쟁과 의화단 사건에 참전했으며, 러일 전쟁에서 기병 부대를 이끌고 활약했다. 이후 육군 교육총감, 조선군 사령관 등을 역임했으며, 1924년에는 고향으로 돌아가 학교 교장으로 교육에 헌신했다. 그는 검소한 생활과 뛰어난 군사적 업적으로 평가받았으며, 만년에 당뇨병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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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키야마 요시후루 | |
---|---|
기본 정보 | |
![]() | |
이름 | 아키야마 요시후루 |
로마자 표기 | Akiyama Yoshifuru |
출생일 | 1859년 2월 9일 |
사망일 | 1930년 11월 4일 |
출생지 | 마쓰야마, 이요, 일본 |
사망지 | 마쓰야마시, 에히메현, 일본 |
별명 | 일본 기병의 아버지, 비신 |
묘소 | 아오야마 영원, 와시타니 묘지 (마쓰야마시) |
군사 경력 | |
소속 | 일본 제국 육군 |
복무 기간 | 1879년–1923년 |
최종 계급 | 육군 대장 |
지휘 | 일본 제국 육군 제1사단 일본 제국 육군 제5사단 |
주요 참전 전투/전쟁 | 청일 전쟁 의화단 운동 러일 전쟁 |
서훈 | 욱일동화대수장 공2급 금치훈장 서보장 금치훈장 금치2급 서보2급 욱일2급 금치훈장 2급 서보장 2급 적수리 훈장 2급 |
기타 정보 | |
재직 후 | 기타요 중학교 교장 |
관련 정보 | |
로마자 표기(일본어) | Akiyama Yoshifuru |
2. 생애
아키야마 요시후루는 이요 마쓰야마 번의 마쓰야마 성 아래에서 가난한 하급무사 아키야마 히사타케(秋山久敬)의 3남으로 태어났다. 매우 검소하게 생활하고 사치품을 싫어했으며, 식사 때 반찬은 단무지 절임 한 가지만 먹을 정도로 욕심이 없는 인물로 알려져 있다. 개선했을 때 급료나 품계 대부분을 부하에게 주었다.
육군대학교에서 학생들에게 기병의 특징을 설명할 때 맨주먹으로 유리창을 박살, 피투성이가 된 주먹을 보여 주면서 "기병은 이것이다."라고 밝혔다.
1924년 고향인 에히메현으로 돌아가 중학교 교장을 하다가 1930년 당뇨로 인한 심근 경색으로 사망했다. 관동 대지진 당시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켰다",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 등 조선인에 대한 소문이 퍼지자 학생과 마을 사람들을 모아놓고 "조선인들은 그럴 사람들이 아니다. 그것은 유언비어이며, 여러분들은 흔들리지 않길 바란다"라며 사람들을 설득하였다.[59]
아키야마 요시후루의 주요 연표는 다음과 같다.
연도 | 사건 |
---|---|
1859년 | 이요마쓰야마 성 아래에서 마쓰야마번 사무라이 아키야마 히사타카, 사다의 셋째 아들로 태어남.[7] |
1875년 | 관립 오사카 사범학교에 입학[5]. |
1876년 | 관립 오사카 사범학교 졸업[5]. |
1877년 | 육군사관학교(구 3기) 입교. |
1879년 | 육군사관학교 졸업. 임 육군 기병 소위. 도쿄 진대에 배속됨. |
1880년 | 아키야마가의 가독 상속. 정팔위에 서위. |
1883년 | 임 육군 기병 중위. 종칠위에 승서. 육군대학교(1기) 입교. |
1885년 | 육군대학교 졸업. 참모본부 근무. |
1886년 | 임 육군 기병 대위. |
1887년 | 생시르 육군사관학교에 유학. |
1890년 | 부친 사망. |
1891년 | 귀국. |
1892년 | 임 육군 기병 소좌. |
1893년 | 종육위에 승서. 사쿠마 타미와 결혼. |
1894년 | 청일 전쟁에 종군. |
1895년 | 임 육군 기병 중좌. |
1896년 | 정육위에 승서[10] |
1897년 | 임 육군 기병 대좌. 종오위에 승서. |
1899년 | 육군 수의학교장을 겸임. |
1901년 | 청국 주둔군 참모장. |
1902년 | 육군소장으로 승진. 정오위에 승서. |
1903년 | 기병 제1여단으로 이동. |
1904년 | 러일 전쟁에서 기병 제1여단장[11]으로 출정. |
1905년 | 모친 사망. |
1906년 | 기병감. 금치훈장 공 2급 수장. |
1907년 | 종사위에 승서. |
1909년 | 임 육군 중장. |
1912년 | 정사위에 승서. |
1913년 | 제13사단장으로 이동. |
1915년 | 근위사단장으로 이동. |
1916년 | 종삼위에 승서. 조선주둔군 사령관. 임 육군대장. |
1917년 | 군사참의관. |
1919년 | 정삼위에 승서. |
1920년 | 교육총감. |
1923년 | 예비역으로 편입[12](원수위 서임의 이야기도 있었지만 본인이 고사함). 특지로 종이위에 서위. |
1924년 | 사립 호쿠요 중학교(현재의 아이치현립 마쓰야마 북 고등학교) 교장 취임. |
1930년 | 교장을 사임[15]. 사망. 향년 72세. |
2. 1. 어린 시절과 교육
안세이 6년(1859년) 1월 7일 (1859년 2월 9일), 이요 마쓰야마 번의 마쓰야마 성 아래(현 아이치현 마쓰야마시 보행정)에서 하급 무사 아키야마 히사타카(秋山久敬)와 사다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7] 이름은 논어의 한 구절인 "믿음직하고 옛것을 좋아함(信而好古)"에서 유래했다. 아키야마가는 아시가루보다 한 계급 위인 10석 정도의 하급 무사(도시 신분)였다.어린 시절, 아키야마는 번교인 명교관(현재의 아이치현립 마쓰야마 동 고등학교)에 입학하여 가계를 부양하며 공부했다. 이 무렵, 덴포 센 한 개(100문[8])로 센토의 물 긷기, 가마 땔나무, 번대 관리를 했다. 그는 매우 검소하게 생활하고 사치품을 싫어하여, 식사 때 반찬은 단무지 절임 한 가지만 먹었다고 한다.
메이지 8년(1875년), 납부금 없이 월 8엔의 학비를 지급받는[6] 관립 오사카 사범학교에 입학했다.[5] 1876년 7월, 오사카 사범학교를 졸업하고[5], 제3대학구 18중학교구 사카이현 가와치국 제58번 소학교(현재의 네야가와 시립 남 소학교)를 거쳐 아이치현 사범학교 부속소학교(현재의 아이치 교육대학 부속 나고야 소학교)에 근무했다.[9]
1877년 5월, 교직을 그만두고[6] 육군사관학교(구 3기)에 입교했다. 아키야마가 교육자에서 군인으로 전직한 이유나 동기는 불명확하다.[6] 이후 육군대학교에 진학하여 프랑스로 파견되어 기병 전술과 기술을 연구하는 군사 참관원으로 활동했다. 당시 일본군이 독일군을 모델로 삼고 독일 교관에게 교육을 받던 시기에, 생시르 육군사관학교에서 유학한 유일한 일본군 장교였다.
2. 2. 군 경력
아키야마 요시후루는 1894년부터 1895년까지 청일 전쟁에서 제1사단 기병 연대장으로 참전했다.[7] 이후 의화단 사건 때 제5사단과 함께 일본 원정군으로 복무했다.[7] 1904년부터 1905년까지 벌어진 러일 전쟁에서는 사하 전투, 산데푸 전투, 봉천 전투 등에서 코사크 기병 사단을 주축으로 하는 러시아 제국 육군과 맞서 싸웠다.[7] 1906년 4월에는 욱일장(2등)을 받았다.[7]
1913년 제13사단 사단장이 되었고,[7] 1916년 정규 장군으로 승진한 후 근위사단 사령관을 맡았다.[7] 이듬해에는 조선군 사령관에 임명되었으며,[7] 1920년에는 군사교육총감이 되었다.[7]
1923년 현역에서 은퇴한 후 육군원수 승진을 거절하고 고향 시코쿠 섬으로 돌아갔다.[12]
2. 3. 교육자로서의 삶
1924년 고향인 에히메현으로 돌아가 중학교 교장을 하다가 1930년 당뇨로 인한 심근 경색으로 사망했다.[59] 동양경제일보에 따르면, 중학교 교장 시절에 "학생은 군인이 아니다."라고 하면서 학교에서 군사 교련을 최대한 줄이고 학생들의 견문을 넓히고자 수학여행지로 당시 일본 제국의 통치하에 있는 조선을 선택하였다. 또한 전쟁 관련 일화를 들려달라는 학생과 학부모들의 요청을 일체 거절하였다.[59]관동 대지진 당시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켰다",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 등 조선인에 대한 소문이 퍼지자 학생과 마을 사람들을 모아놓고 "조선인들은 그럴 사람들이 아니다. 그것은 유언비어이며, 여러분들은 흔들리지 않길 바란다"라며 사람들을 설득하였다.[59]
1924년 4월, 사립 호쿠요 중학교(현재의 아이치현립 마쓰야마 북 고등학교) 교장에 취임했다. 1930년 4월 9일, 노쇠함을 이길 수 없었던 것과 동향의 후진인 시라카와 요시노리 육군대신 등의 걱정도 있어 교장을 사임했다.[15] 그 후에도 학교 이사로서 마쓰야마에 거주했다.
3. 군사적 업적
아키야마는 다른 병과보다 1년 일찍 졸업하고 급여를 받을 수 있다는 점과, 장신에 팔다리가 길어 기수로서 적성이 있었다는 이유로 기병을 선택했다.[17]
청일 전쟁 이후 육군 승마학교장이 된 아키야마는 프랑스 유학 경험을 바탕으로 기병 연구에 매진했다. 그 결과, 기병과 다른 병과와의 연계가 필수적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러일 전쟁에서는 보병, 포병, 공병 등을 포함한 전투 집단(아키야마 부대)을 편성하여 세계 최강으로 불리던 코사크 기병을 상대로 좋은 성과를 거두었다.
흑구대 전투에서는 오쿠 야스무네가 이끄는 제2군 소속으로 일본군 최좌익을 방어했다. 40km가 넘는 전선에 8,000명 정도의 병력만 배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거점에 참호를 파고 말과 함께 숨어 기관총 등으로 공격하는 거점 방어 방식을 채택했다. 이는 기동력을 활용하여 적의 약점을 공격하는 기병 전술과는 달리 기동력을 포기하는 것이었지만, 방어 체제를 구축하여 러시아 제2군을 후퇴시키는 데 성공했다.
아키야마는 육군 기병 실시학교장 등 후진 육성에 공헌하며 육군 삼장관 중 하나인 교육총감의 지위에 올랐다.
3. 1. 청일 전쟁
아키야마는 1894년부터 1895년까지 청일 전쟁에서 제1사단 기병 연대장으로 참전했다.[18] 이후 의화단 사건에서 제5사단과 함께 일본 원정군으로 복무했다.[20] 청국 주둔군 사령관으로 귀국할 때 톈진의 영사관에서 열린 송별회에서 이주인 히코키치 총영사가 금시계를 선물하려 했으나, "성의를 현금으로 받고 싶다"고 요청했다. 현금을 받은 아키야마는 "방금 받은 현금은 일본 거류민 소학교에 기부하여 교육 자금으로 사용하겠다"고 말했다.[22]3. 2. 러일 전쟁
러일 전쟁에서 아키야마는 기병 제1여단장[11]으로 출정하여 제2군에 소속되어 사하 전투, 흑구대 전투, 봉천 전투 등에서 기병 전술을 구사하여 러시아군과 싸웠다. 1904년에서 1905년까지 사하 전투, 산데푸 전투, 봉천 전투에서 코사크 기병 사단의 러시아 제국 육군과 맞서 싸웠으며, 1906년 4월에는 욱일장(2등)을 수훈받았다.청일 전쟁 후, 아키야마는 육군 승마학교장이 되어 프랑스 유학 경험을 바탕으로 기병 연구에 전념했다. 그 결과 기병과 다른 병과와의 연계가 필수적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러일전쟁에서는 기병 부대에 보병, 포병, 공병 등을 포함한 전투 집단(아키야마 부대)을 편성했다. 이러한 노력으로 나폴레옹을 격파하는 등 세계 최강으로 불렸던 코사크 기병을 상대로 선전할 수 있었다.
흑구대 전투에서는 오쿠 야스무네 대장이 이끄는 제2군 소속으로 일본군 최좌익을 방어했다. 이 부대는 40km가 넘는 전선에 8,000명 정도의 병력만 배치되어 있었다. 이 때문에 거점에 참호를 파고 말과 함께 숨어 기관총 등으로 공격하는 거점 방어 방식을 채택했다.
기병은 기동력을 활용하여 적의 약점을 공격하는 병종이지만, 이 전술은 기동력을 포기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방어 체제를 구축하여 러시아 제2군을 후퇴시키는 데 성공했다. 또한 아키야마 부대에서 러시아군의 후방 교란을 위해 파견된 나가누마 정진대의 활약은 소설 『적중 횡단 삼백리』를 통해 널리 알려졌다. 그 후, 아키야마는 「일본 기병의 아버지」라고 불렸다.
4. 평가
아키야마 요시후루는 청렴하고 검소한 생활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욕심 없는 인물로, 개선했을 때 봉급과 물품 대부분을 부하들에게 주었다.[27]
관동 대지진 당시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켰다",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는 유언비어가 돌자, "조선인들은 그럴 사람들이 아니다. 그것은 유언비어이며, 여러분들은 흔들리지 않길 바란다"라며 사람들을 설득하였다.[59]
육군대학교에서 학생들에게 기병의 특징을 설명할 때 맨주먹으로 유리창을 깨고 피투성이가 된 주먹을 보여주며 "기병은 이것이다."라고 설명한 일화나,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서 코를 골며 잠을 잔 일화는 그의 독특한 성격을 보여준다.
또한, 극도로 목욕을 싫어하고, 군복도 전혀 세탁하지 않아 이가 들끓었다는 일화는 그의 괴팍한 면모를 드러낸다. 술을 매우 좋아하여 전장에서도 물통에 술을 넣어 가지고 다녔으며, 과도한 음주로 만년에는 당뇨병을 앓았다.
4. 1. 긍정적 평가
아키야마 요시후루는 매우 검소하게 생활하고 사치품을 싫어했다. 식사 때 반찬은 무장아찌뿐이었다. 마사유키가 얹혀 살 때도 식기는 하나만 사용하고, 버선을 신지 않았으며, 다른 형에게서 받은 비단 띠를 사용하지 못하게 했다. 끊어진 나무신 끈을 고치려는 마사유키를 보고 "할 일이 없으면 맨발로 다녀라"라고 꾸짖는 등, 사생활에서 검소함을 중시했다.[27] 그는 욕심 없는 인물로 알려져, 개선했을 때 봉급과 물품 대부분을 부하들에게 주어 가방에는 목록과 명세서만 가득했다.육군대학교에서 학생들에게 기병의 특징을 설명할 때 맨주먹으로 유리창을 박살내고, 피투성이가 된 주먹을 보여 주면서 "기병은 이것이다."라고 밝혔다.
1924년 고향인 에히메현으로 돌아가 중학교 교장을 하다가 1930년 당뇨로 인한 심근 경색으로 사망했다. 동양경제일보에 따르면, 중학교 교장 시절 "학생은 군인이 아니다."라고 하면서 학교에서 군사 교련을 최대한 줄이고 학생들의 견문을 넓히고자 수학여행지로 당시 일본 제국의 통치하에 있는 조선을 선택했다. 또한 전쟁 관련 일화를 들려달라는 학생과 학부모들의 요청을 일체 거절하였다.
관동 대지진 당시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켰다",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 등 조선인에 대한 소문이 퍼지자 학생과 마을 사람들을 모아놓고 "조선인들은 그럴 사람들이 아니다. 그것은 유언비어이며, 여러분들은 흔들리지 않길 바란다"라며 사람들을 설득하였다.[59]
- 특징적인 코 때문에 "코신(鼻信)"이라는 별명이 있었으며, 키가 크고 피부가 하얗고 눈이 컸다. 육군대학교 시절 교관인 메켈로부터 유럽 사람으로 오해받았다는 일화가 있다.
- 청년 시절부터 용모가 뛰어나다고 칭찬받았으며, 고향인 마쓰야마와 유학지인 프랑스에서 여성들에게 상당히 인기가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남자에게 미추는 필요 없다"는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용모를 결코 자랑하지 않았고, 오히려 미추를 지나치게 신경 쓰는 사고방식을 싫어했다고 한다.
- 술을 매우 좋아했는데, 도쿄대학 예비문을 목표로 하고 있던 마사유키와 함께 살던 시절에는 "아키야마 형제는 밥그릇 하나로 밥을 먹는다"는 소문이 돌 정도로 가난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루에 5합은 마셨다고 한다. 전장에서도 물통에 술을 넣어 가지고 다녔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해서 종병이 눈치껏 종병의 물통에도 술을 채워주었다.
- 극도로 목욕을 싫어해서, 러일 전쟁 중에 목욕한 것은 단 두 번뿐이었다고 한다. 군복도 전혀 세탁하지 않고 계속 입고 다녔기 때문에 이가 들끓었고, 가까이만 있어도 이상할 정도의 악취가 풍겼다. 부하와 동료들이 목욕을 하고 몸을 청결히 하도록 여러 번 권했지만, "군인이란 전장에서 언제 어디서든 적에게 대처할 수 있어야 한다(목욕하는 동안 변고가 있을 경우 대처할 수 없다)", "이렇게 먼 전장까지 목욕하러 온 것이 아니다"라며 거절했다.
- 동생인 아키야마 마사유키가 태어났을 때, 가정 형편이 어려워 절에 보내려는 이야기가 나왔지만, "아버지, 아기를 절에 보내면 안 됩니다. 제가 열심히 공부해서 두부 값 정도는 벌어오겠습니다."라고 부모님께 간청했다.[27]
- 프랑스 유학 중 장티푸스에 걸렸지만, 의사의 진찰을 받지 않고 스스로 치유했다. 하지만 일시적으로 머리카락이 모두 빠져 대머리가 되었다는 일화가 있다(머리카락은 나중에 다시 자랐다).
- 후쿠자와 유키치를 존경하여 자신의 아이들은 모두 게이오기주쿠에 입학시켰다.
- 만혼주의자로, 36세에 결혼했을 때도 "결혼이 너무 빨랐다"고 말할 정도였다. 결혼을 결심한 것은 하녀의 절도 사건으로 어머니께 걱정을 끼친 것이 계기였다. 약혼자로 선택한 것은 12살 연하의 구 봉건 영주 가문인 사쿠마 가문의 셋째 딸 다미였는데, 어머니가 가장 마음에 들어 했던 여성이었다.[28]
4. 2. 비판적 평가
아키야마 요시후루는 청렴하고 검소한 생활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식사 때 반찬은 무장아찌뿐이었고, 개선했을 때 봉급과 물품 대부분을 부하들에게 주었으며, 가방에는 목록과 명세서만 가득했다.[27]관동 대지진 당시에는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켰다",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는 유언비어가 돌자, "조선인들은 그럴 사람들이 아니다. 그것은 유언비어이며, 여러분들은 흔들리지 않길 바란다"라며 사람들을 설득하였다.[59]
육군대학교에서 학생들에게 기병의 특징을 설명할 때 맨주먹으로 유리창을 깨고 피투성이가 된 주먹을 보여주며 "기병은 이것이다."라고 설명한 일화나,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서 코를 골며 잠을 잔 일화는 그의 독특한 성격을 보여준다.
또한, 극도로 목욕을 싫어하고, 군복도 전혀 세탁하지 않고 계속 입고 다녀 이가 들끓었고, 가까이만 있어도 이상할 정도의 악취가 풍겼다는 일화는 그의 괴팍한 면모를 드러낸다. 부하와 동료들이 청결을 권유했지만, "군인이란 전장에서 언제 어디서든 적에게 대처할 수 있어야 한다"며 거절했다.
술을 매우 좋아하여 전장에서도 물통에 술을 넣어 가지고 다녔으며, 과도한 음주로 만년에는 심각한 당뇨병을 앓았다.
5. 아키야마 요시후루를 연기한 작품
6. 기타
- 매우 검소하게 생활하고 사치품을 싫어하였다. 예를 들어 식사할 때 반찬은 무장아찌 한 가지만 먹었다. 욕심이 없는 인물로 알려져 있으며, 개선했을 때 급료나 품계 대부분을 부하에게 주었으므로, 가방에는 목록과 명세서만 들어 있었다.[59]
- 육군대학교에서 학생들에게 기병의 특징을 설명할 때 맨주먹으로 유리창을 박살내고, 피투성이가 된 주먹을 보여 주면서 "기병은 이것이다."라고 밝혔다.
- 관동 대지진 당시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켰다",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 등 조선인에 대한 소문이 퍼지자 학생과 마을 사람들을 모아놓고 "조선인들은 그럴 사람들이 아니다. 그것은 유언비어이며, 여러분들은 흔들리지 않길 바란다"라며 사람들을 설득하였다.[59]
- 동생인 秋山真之가 태어났을 때, 가정 형편이 어려워 절에 보내려는 이야기가 나왔지만, "아버지, 아기를 절에 보내면 안 됩니다. 제가 열심히 공부해서 두부 값 정도는 벌어오겠습니다."라고 부모님께 간청했다.[27]
- 프랑스 유학 중 장티푸스에 걸렸지만, 의사의 진찰을 받지 않고 스스로 치유했다. 하지만 일시적으로 머리카락이 모두 빠져 대머리가 되었다는 일화가 있다(머리카락은 나중에 다시 자랐다).
- 마사유키가 얹혀 살 때 식기는 하나만 사용하고, 버선을 신기지 않고, 다른 형에게서 받은 비단 띠를 사용하지 못하게 했으며, 끊어진 나무신 끈을 고치려는 마사유키를 보고 "할 일이 없으면 맨발로 다녀라"라고 꾸짖는 등, 사생활에서도 검소한 행동을 중시했다.
-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참가했으나, 각국 위원회의 연설 때 코를 골며 잠을 잤다. 함께 참가했던 都筑馨六가 주의를 주자 "연설의 요지는 알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 프랑스 기병 유학 중 당시 육군 최고위직에 있던 山縣有朋에게 프랑스군 내 고위 장교의 심부름을 부탁받았지만, 심부름 가는 도중 전차 안에서 술을 너무 많이 마시고 잠이 든 나머지 소매치기를 당했다.
- 福沢諭吉를 존경하여 자신의 아이들은 모두 慶應義塾에 입학시켰다.
- 만혼주의자로, 36세에 결혼했을 때도 "결혼이 너무 빨랐다"고 말할 정도였다. 결혼을 결심한 것은 하녀의 절도 사건으로 어머니께 걱정을 끼친 것이 계기였다. 약혼자로 선택한 것은 12살 연하의 구 봉건 영주 가문인 사쿠마 가문의 셋째 딸 다미였는데, 어머니가 가장 마음에 들어 했던 여성이었다. 원래 상경해서 다른 때 사쿠마 집에 얹혀 살았던 요코는 다미에게 "친(狆)"이라는 별명을 붙였다.[28]
- 처: 사쿠마 타미 - 70석 5인 부지를 받는 하타모토(旗本)였으며, 메이지 유신 이후에는 문부성 직원이 되어 東京外国語学校 서기를 역임했고, 어학 학원인 훈몽학사(訓蒙学舎)를 설립한 사쿠마 유시로 마사토시(佐久間雄四郎正節)의 장녀. 어머니 사다(貞)가 마음에 들어 하는 여성이었던 만큼,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사이가 친자매처럼 좋았다.
- 자녀(타미와의 사이에 2남 5녀)
이름 | 배우자 |
---|---|
장남: 노부요시(信好) | |
장녀: 요시(ヨシ) | 쓰카하라 요이치로(塚原嘉一郞) |
차녀: 켄코(ケン子) | 토이 리사부로(土居利三郞) |
삼녀: 카츠코(勝子) | 아다치 소 |
사녀: 하루코(治子) | 요네다 후지오 |
오녀: 야스코(保子) | 요절 |
차남: 지로(次郞) |
참조
[1]
웹사이트
AKIYAMA Yoshifuru Portraits of Modern Japanese Historical Figures National Diet Library, Japan
https://www.ndl.go.j[...]
2023-10-02
[2]
웹사이트
The birthplace of Akiyama Brothers MustLoveJapan Video Travel Guide
https://www.mustlove[...]
2023-10-02
[3]
뉴스
A Thousand Death Threats Against a Popular Anime 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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秋山好古 | 近代日本人の肖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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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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愛媛の偉人たち
愛媛県生涯学習センター 愛媛人物博物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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国立国会図書館デジタルコレクション 秋山好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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国立国会図書館デジタルコレクション 秋山好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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坂の上の雲 校長の六年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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坂の上の雲を見上げ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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官報 第126号「叙任及辞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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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官報 第1048号「叙任及辞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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官報 第1979号「叙任及辞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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官報 第3223号「叙任及辞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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官報 第3671号「叙任及辞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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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官報 第3862号・付録「辞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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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官報 第5487号「叙任及辞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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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官報 第6727号「叙任及辞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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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官報 号外「叙任及辞令」
1906-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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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官報 第402号 叙任及辞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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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官報 第1310号・付録「辞令」
1916-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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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官報 第1898号 叙任及辞令
1923-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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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官報 第2612号「叙任及辞令」
1921-0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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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官報 第1157号 叙任及辞令
1940-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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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中隊長は秋山好古のひ孫 北恵庭駐屯地に着任:苫小牧民報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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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秋山好古のひ孫は陸自指揮官 研究重ね「信頼されたい」 - 47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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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秋山兄弟生誕地 好古の曾孫・秋山純一氏がご来館
http://www.akiyama-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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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인용
[블로그] 두 일본인의 길
http://www.hani.co.k[...]
2019-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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