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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단 (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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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위단은 당나라 중기의 문신으로, 신라에 파견되는 사신으로 임명되었으나 뇌물 수수를 거부하고 귀국하여 청렴한 관리로서 명성을 얻었다. 용주자사, 무양군 관찰사 등을 역임하며 농업 진흥, 학교 설립, 홍수 예방 등 선정을 베풀었다. 강남서도 관찰사로 재직 시에는 제방을 축조하여 홍수를 막아 백성들의 칭송을 받았으며, 하남소윤을 거쳐 간의대부를 지냈다. 사후 당 선종 때 그의 덕을 기리는 비석이 세워졌으며, 두목이 비문을 짓고 이상은이 시를 남겼다.

2. 생애

위단은 북주 대사공 위효관의 아들 위진(韋津)의 후손으로, 일찍 부모를 여의고 외조부인 의 태사 안진경 밑에서 학문을 배웠다.[2] 명경(明經)과 오경과에 연이어 급제하며 관직에 나아갔고, 함양위(咸陽尉), 전중시어사(前中侍御史) 등을 거쳐 어사중승(御使中丞)에 이르렀다.

798년 신라원성왕이 사망하고 소성왕이 즉위하자, 당 조정은 위단을 조문 겸 책봉 사절로 임명하였다. 당시 사신 파견 시 관행이었던 '사적관'(私覿官) 제도를 통한 경비 마련을 거절하고 황제에게 직접 경비를 요청하여 그의 청렴함이 알려졌다. 그러나 신라로 가던 중 소성왕마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귀환하였다. 이 일로 위단의 이름은 조정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이후 용주자사(容州刺史)와 강남서도관찰사(江南西道觀察使) 등 지방관을 역임하며 선정을 베풀었다. 용주에서는 농업과 학문을 장려하고 번진 토벌을 건의하여 관찰사로 승진하고 '''무양군공(武陽郡公)'''에 봉해졌다. 강남서도에서는 청렴한 행정으로 백성들의 삶을 개선하는 데 힘썼는데, 특히 홍주자사 시절 화재 예방을 위한 기와집 개량 지원과 대규모 관개 시설인 제방 축조는 큰 업적으로 평가받는다.[3][4]

하남소윤(河南少尹), 간의대부(諫議大夫) 등 중앙 관직을 거친 후, 원화 5년(810년) 8월 6일(양력 9월 8일) 5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며[5] 이듬해인 원화 6년(811년) 7월 임인(양력 8월 2일) 만년현의 소릉원(少陵原)에 안장되었다.[5] 사후 수십 년이 지난 선종(宣宗) 대에 이르러서도 그의 선정이 회자되어, 황제의 명으로 그의 공적을 기리는 비석이 세워졌다. 이 비문은 당대 문인 두목(杜牧)이 작성하였으며, 이상은(李商隱) 역시 시를 통해 그의 공적을 기렸다.

2. 1. 초기 생애와 관직 진출

북주의 대사공을 지낸 위효관의 아들 위진(韋津)의 후손이다. 일찍 부모를 여의고 외할아버지이자 당나라의 태사였던 안진경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안진경은 외손자 위단을 매우 아꼈다고 전해진다.[2]

위단은 자라서 명경(明經)에 급제하여 안원현령(安遠縣令)이 되었으나, 자신의 배다른 서형(庶兄)에게 관직을 양보하였다. 이후 다시 오경과에 급제하여 수석을 차지했으며, 함양위(咸陽尉), 전중시어사 사인(舍人)을 거쳐 시봉랑중 겸 어사중승이 되었다.

신라에서 원성왕이 사망하고(798년) 소성왕이 즉위했음을 알리자, 조정은 위단을 조문 겸 책봉 사절로 임명했다. 당시 외국 사신에게는 '사적관'(私覿官)이라 하여 주현 관리 열 명의 임명권을 주어, 사신이 이들을 임명하고 재물을 받아 경비로 충당하는 관행이 있었다. 그러나 위단은 "내가 천자의 관리로서 해외에 사신으로 가는데, 비용이 부족하면 위에 청할 일이지 어찌 관직을 팔아 돈을 받겠는가?"라며 이를 거절하고 황제에게 청하여 경비를 받았다. 위단은 치청번진이 다스리던 운주(鄆州)에 이르렀을 때 신라에서 소성왕마저 이미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신라로 가지 않고 귀환하였다. 이 일로 당 조정에서 위단의 이름이 크게 알려지게 되었다.

《전당문》(全唐文) 권491에 실린 「봉송위중승사신라서」(奉送韋中丞使新羅序)는 위단이 신라 책봉사로 떠날 때 권덕여(權德輿)가 지어준 글이다.

2. 2. 신라와의 외교 활동

신라에서 원성왕이 798년에 사망하고 소성왕이 뒤를 이어 즉위했음을 조정에 알려왔다. 이에 당 조정은 신라로 파견할 조문 겸 책봉 사절로 위단을 임명했다. 당시 외국 사신에게는 '사적관'(私覿官)이라 하여, 배정된 주현 관리 열 명의 임명권을 주고 그 대가로 재물을 받아 사신 활동 경비로 사용하는 관행이 있었다. 그러나 위단은 "천자의 신하로서 외국에 사신으로 가는데, 비용이 부족하면 조정에 청할 일이지 어찌 관직을 팔아 돈을 마련하겠는가?"라며 이를 거절하고, 황제에게 직접 경비를 요청하여 받았다. 위단이 치청번진이 다스리던 운주에 이르렀을 때, 신라에서 소성왕마저 이미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는 신라로 가지 않고 그대로 당으로 귀환했으며, 이 일로 그의 이름이 조정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권덕여(權德輿)는 위단이 책봉사의 명을 받고 신라로 떠날 때 그를 위해 「봉송위중승사신라서」(奉送韋中丞使新羅序)라는 글을 지어주었으며, 이 글은 《전당문》(全唐文) 권491에 실려 있다.

2. 3. 지방관으로서의 업적

위단은 용주자사(容州刺史)로 임명된 후, 관내 백성들에게 농사를 적극적으로 권장하고 학교를 세워 학문을 진작시키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 또한 재임 기간 동안 홍수와 가뭄에 대한 구제 활동을 펼치고 부패를 금지하였으며, 백성을 돌보고 농사와 양잠을 장려하는 등 백성들의 삶을 개선하는 데 힘썼다.

이후 강남서도관찰사(江南西道觀察使)로 부임하여 청렴하고 올바른 행정으로 평가받았다. 특히 홍주자사(洪州刺史)로 있을 때는 화재 예방을 위해 기와 기술자를 동원하여 백성들의 초가집을 기와집으로 개량하도록 지원했다.[3] 또한 길이 20리의 제방을 쌓아 강을 막고 수로를 내어 물길을 조절했는데, 이를 통해 598개의 못을 만들고 12,000경(頃)의 농경지에 물을 공급할 수 있게 되었다. 위단이 떠난 이듬해 강남서도에 큰 홍수가 발생했을 때 이 제방 덕분에 피해를 막을 수 있었고, 주민들은 "이 제방이 없었더라면 우리 시체가 저 바다에 떠다녔을 것"이라며 그의 공덕을 칭송했다고 전해진다.[4]

훗날 선종(宣宗) 대에 이르러, 이전 시대 가장 뛰어난 지방관이 누구였냐는 황제의 물음에 강서관찰사를 지낸 주지(周墀)는 위단을 꼽았다. 그는 "위단의 덕이 여덟 고을에 미쳤으며, 죽은 지 40년이 지났음에도 백성들이 그를 잊지 못하고 있다"고 아뢰었다. 이에 선종은 위단의 업적을 기리는 비석을 세우도록 명했으며, 이 비문은 당대의 문인 두목(杜牧)이 작성하였다. 이상은(李商隱) 역시 시에서 이 비석을 언급하며 그의 공적을 기렸다.

2. 4. 중앙 관직과 죽음

명경(明經)과 오경과에 연이어 급제한 후 함양위(咸陽尉), 전중시어사(前中侍御史) 사인(舍人)을 거쳐 시봉랑중 겸 어사중승(御使中丞)이 되었다.[2]

798년 신라원성왕이 사망하고 소성왕이 즉위하자, 조정은 위단을 조문 겸 책봉 사절로 임명했다. 당시 사신에게는 임명권을 주고 관리 임명을 통해 경비를 마련하게 하는 '사적관'(私覿官) 관행이 있었으나, 위단은 "천자의 관리로서 어찌 관직을 팔아 경비를 마련하겠는가?"라며 이를 거부하고 황제에게 직접 경비를 요청했다. 그러나 신라로 가던 중 치청번진이 다스리던 운주에서 소성왕마저 이미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귀환했다. 이 일로 위단은 조정에서 청렴함으로 명성을 얻게 되었다. 권덕여(權德輿)는 이때 신라로 떠나는 위단을 위해 「봉송위중승사신라서」(奉送韋中丞使新羅序)라는 글을 지어주었다.

이후 용주자사(容州刺史)로 임명되었을 때, 황제를 따르지 않는 번진을 적극 토벌해야 한다고 건의하여 황제의 신임을 얻었다. 이에 관찰사로 승진하고 무양군공(武陽郡公)에 봉해졌다. 다시 강남서도관찰사(江南西道觀察使)로 임명되었으며, 청렴하고 올바르게 직무를 수행한다는 평을 받았다.[3][4]

그는 하남소윤(河南少尹)을 거쳐 간의대부(諫議大夫) 등을 역임하였고, 원화 5년(810년) 8월 6일(양력 9월 8일) 5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5] 이듬해인 원화 6년(811년) 7월 임인(양력 8월 2일) 만년현의 소릉원(少陵原)에 안장되었다.[5]

훗날 선종(宣宗)이 원화 연간의 가장 뛰어난 지방관이 누구였는지 물었을 때, 주지(周墀)는 위단을 언급하며 "위단의 덕이 여덟 고을에 미쳤으며, 죽은 지 40년이 지났어도 노인과 아이들이 그를 잊지 못한다"고 평했다. 이에 선종은 위단의 사적을 기리는 비석을 세우도록 명했고, 비문은 당대의 문인 두목(杜牧)이 지었다. 이상은(李商隱)은 이 비석을 두고 시를 짓기도 했다.

3. 일화


  • 위단은 일찍이 승려 영철과 알고 지냈다. 위단이 강남서도관찰사(江南西道觀察使)로 있을 때 영철에게 시를 보내어 다음과 같이 말했다.[6]

:: 왕사는 번다하여 한가한 날이 없고, 덧없는 생은 무상하기 구름 같을 뿐이네. 내 이미 상평자처럼 돌아가 쉴 계획 했거니, 오로암 앞에서 반드시 그대와 함께할 걸세.〔王事紛紛無暇日, 浮生冉冉只如雲. 已爲平子歸休計, 五老巖前必共君.〕

이에 영철은 다음과 같이 시를 지어 화답했다.[6]

:: 나이 늙고 몸 한가하여 바깥일 없으니, 삼베옷에 풀밭 자리도 몸을 용납할 만하다네. 서로 만나면 다들 벼슬 그만두고 떠난다 하지만, 숲 아래서 그런 사람 하나나 본 적 있던가.〔年老身閒無外事, 麻衣草坐亦容身. 相逢盡道休官去, 林下何曾見一人?〕

  • 의 학자 정극(鄭克)이 지은 《절옥귀감》(折獄龜鑑)에는 위단이 기한을 정해 반납과 보충을 명한 일화가 기록되어 있다.
  • 의 학자 고사기(高士奇, 1645~1704)의 저서 《속편주》(續編珠)에는 《길흉향응록》(吉凶響應錄)을 인용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 어느 날 위단은 어부가 매우 큰 자라 한 마리를 잡은 것을 보고, 이를 사서 강에 돌려보내 주었다. 훗날 원준(元濬)이라는 이름의 장사(長史) 관직에 있는 사람이 위단을 찾아와, 자신이 바로 그때 위단이 살려준 자라였다며 감사를 표했다고 한다.

4. 가족

;6대 조

: 위효관 - 북주의 운국공(郧国公)[2]으로 경조 위씨 운공방파의 파조(派祖)이다.

;증조할아버지

: 위유평(韋幼平) - 의 기주참군(岐州参军)[7]

;할아버지

: 위포정(韋抱貞) - 재주자사(梓州刺史)[8]

;할머니

: 낭야 안씨(琅邪颜氏) - 의 태사로 노군문충공(鲁郡文忠公) 안진경의 누이[9]

;아버지

: 위정(韋政) - 낙현현승(雒县县丞)을 지내고 괵주자사(虢州刺史)에 추증되었다.[10]

;부인

: 청하 최씨(清河崔氏) - 지강현령(支江县令) 최풍(崔讽)의 딸이다.[11]

: 난릉 소씨(兰陵萧氏) - 중서령(中書令) 소화(蕭華)의 손녀로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 소항(蕭恒)의 딸이다.[2]

;자녀

: 위치(韦寘)[12]

: 위주(韦宙) - 검교상서좌복야 동평장사(检校尚书左仆射同平章事), 영남절도사(嶺南節度使)

: 위수(韦岫) - 복건관찰사(福建观察使)

참조

[1] 서적 《樊川文集·卷四·唐故江西观察使武阳公韦公遗爱碑》
[2] 서적 《韩愈集·卷二十五·碑志二·唐故江西观察使韦公墓志铭》
[3] 서적 《신당서》(新唐書) 권제197 순리열전(循吏列傳)
[4] 서적 《신당서》(新唐書) 권제197, 순리열전(循吏列傳); 《송사》(宋史) 권제173, 식화(食貨) 상(上)
[5] 서적 《韩愈集·卷二十五·碑志二·唐故江西观察使韦公墓志铭》
[6] 서적 《감주집》(紺珠集) 권4
[7] 서적 《樊川文集·卷四·唐故江西观察使武阳公韦公遗爱碑》
[8] 서적 《樊川文集·卷四·唐故江西观察使武阳公韦公遗爱碑》
[9] 서적 《韩愈集·卷二十五·碑志二·唐故江西观察使韦公墓志铭》
[10] 서적 《韩愈集·卷二十五·碑志二·唐故江西观察使韦公墓志铭》
[11] 서적 《韩愈集·卷二十五·碑志二·唐故江西观察使韦公墓志铭》
[12] 서적 《韩愈集·卷二十五·碑志二·唐故江西观察使韦公墓志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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