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목 (당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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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두목(杜牧)은 당나라 중·후기 시인으로, 803년에 태어나 852년에 중서사인(中書舍人)을 지냈다. 그는 경조 두씨 명문가 출신으로, 26세에 진사에 급제한 후 회남절도사 우승유 밑에서 서기를 지냈다. 이후 지방관을 역임하고 중앙으로 돌아와 중서사인이 되었으며, 그의 문집 《번천집》에는 신라 장보고와 정연의 이야기를 다룬 「장보고정년전」이 실려 있다. 두목은 《강남춘》, 〈제오강정〉 등 호방하고 현실적인 시를 주로 지었으며, 그의 작품은 당 후기 시를 대표하지만, 명나라의 문학관에 따라 《당시선》에는 그의 시가 실리지 않았다.
당나라의 명문가 경조 두씨 출신으로, 진사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쳤으며, 만년에는 중서사인에 이르렀다. 그의 문집인 《번천집》(樊川集)에는 신라의 장보고와 친구 정연의 이야기를 다룬 「장보고정년전」(권제3)이 실려 있어 주목받는다. 이 기록은 후대에 《신당서》 신라전(권제220)과 《삼국사기》 장보고 열전(권제44)의 주요 자료로 인용되었다.
두목의 주요 작품으로는 강남의 풍경을 그린 〈강남춘〉(江南春), 양주에서의 생활을 묘사한 〈견회〉(遣懷), 해하 전투의 항우를 노래하며 ‘권토중래(捲土重來)’ 고사의 유래가 된 〈제오강정〉(題烏江亭) 등의 시가 있다. 또한 젊은 시절 지은 부(賦) 〈아방궁부〉(阿房宮賦)도 유명하다.
2. 약력
2. 1. 출생과 가문
덕종 정원 19년(803년)에 태어났다. 당나라의 명문가였던 경조 두씨 출신으로, 두목 자신도 가문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여 조카에게 보낸 시에서 "우리 집안은 상공의 집안, 칼 차고 띵땅거렸지(我家公相家, 劍佩嘗丁當)"라고 읊기도 했다.
2. 2. 관직 생활
문종 대화(大和) 2년(828년), 26세의 나이로 진사에 급제하였다.
대화 7년(833년), 31세 때 양주의 회남절도사(淮南節度使) 우승유(牛僧孺) 밑에서 서기(書記)를 맡았다. 양주에 머무르는 3년 동안 밤마다 기루를 드나들며 풍류를 즐겼다고 전해진다.
그 뒤에는 일족을 부양하기 위해 명문 출신임에도 중앙에서의 출세를 단념하고 지방관 부임을 자원하여 황주(黄州), 지주(池州), 목주(睦州), 호주(湖州)의 자사(刺史)를 차례로 역임하였다.
선종 대중(大中) 6년(852년)에 중앙으로 돌아와 중서사인(中書舎人)이 되었다. 두목을 가리키는 '''두자미(杜紫微)'''라는 별칭은 중서성의 다른 이름이었던 자미성(紫微省)에서 비롯된 것이다.
3. 주요 작품
3. 1. 대표작
만당(晩唐) 시기 당시(唐詩)의 섬세하고 기교적인 풍조에 비해 평이하면서도 호방한 시를 지었다. 그의 시는 풍류를 즐기기 위한 풍류시와 과거의 역사를 노래한 영사(詠史), 시사 풍자에 뛰어날 뿐 아니라 요염하면서도 아름다운, 그럼에도 강건한 면을 모두 갖추어 때때로 사실주의를 떠나서 인상파적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강남(江南)의 풍경을 그림처럼 표현한 〈강남춘〉(江南春)이 유명하며, 양주에서 풍류재자(風流才子)로서 지내던 시절의 모습을 그린 〈견회〉(遣懷)는 현실을 벗어난 가상적이라는 시풍(詩風)을 반영하고 있다.
원문 | 해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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千里鴬啼緑映紅 | 천지에 꾀꼬리 소리, 푸르고 붉은 꽃들이 서로 비추고 |
水村山郭酒旗風 | 강마을 산어귀에 술집 깃발 펄럭이는데 |
南朝四百八十寺 | 남조(南朝) 때의 480개 절이 |
多少樓臺烟雨中 | 다소 누대가 안개비 속에 잠겼구나 |
또한 해하 전투에서 패한 항우가 오강(烏江)까지 도망쳐 왔을 때의 일을 노래한 〈제오강정〉(題烏江亭)은 「권토중래(捲土重來)」라는 고사성어의 유래가 되기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원문 | 해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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勝敗兵家事不期 | 승패란 병가(兵家)에서 기약할 수 없는 것 |
包羞忍恥是男兒 | 수치를 안고 부끄러움을 견디는 게 사나이라 |
江東子弟多才俊 | 강동(江東)의 자제에 숨은 인재가 많으니 |
捲土重來未可知 | 흙먼지 일으키며 다시 돌아올지도 몰랐을지라 |
부(賦)로는 23세 때 정치에 대한 정의감을 불태우며 지었던 〈아방궁부〉(阿房宮賦)가 유명하다.
당 후기를 대표하는 시인으로서 인기도가 높지만, 성당(盛唐)을 중시하여 중당(中唐)・만당의 시를 비판했던 명나라의 고문사파(古文辭派)의 문학관이 반영된 《당시선》(唐詩選)에는 두목의 시가 한 수도 실려 있지 않다.
3. 2. 작품의 특징
만당(晩唐) 시기 당시(唐詩)의 섬세하고 기교적인 경향과 비교했을 때, 두목은 평이하면서도 호방한 시를 썼다. 그의 시는 풍류를 즐기는 내용을 담은 풍류시, 과거 역사를 노래한 영사시(詠史詩), 시사 풍자 등 다양한 주제를 다루었다. 또한, 요염하면서도 아름답고 동시에 강건한 면모를 지녀 때로는 사실주의를 넘어 인상파적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강남의 풍경을 그림처럼 묘사한 〈강남춘〉(江南春)은 그의 대표작 중 하나로 꼽힌다.
강남춘 (江南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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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 해석 |
千里鴬啼緑映紅 (천리앵제녹영홍) | 온 땅에 꾀꼬리 소리, 푸른 잎 붉은 꽃 서로 비추고 |
水村山郭酒旗風 (수촌산곽주기풍) | 강마을 산 어귀엔 술집 깃발 바람에 펄럭이네 |
南朝四百八十寺 (남조사백팔십사) | 남조 시절 지어진 사백팔십 개의 절들이 |
多少樓臺烟雨中 (다소누대연우중) | 수많은 누대와 함께 안개비 속에 잠겨 있구나 |
양주(揚州)에서 풍류를 즐기던 시절의 모습을 그린 〈견회〉(遣懷)는 현실을 벗어난 듯한 인상을 주는 그의 시풍을 잘 보여준다.
또한 해하 전투에서 패배한 항우가 오강까지 도망쳤을 때의 일을 노래한 〈제오강정〉(題烏江亭)은 권토중래(捲土重來)라는 고사성어의 유래가 된 것으로 유명하다.
제오강정 (題烏江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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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 해석 |
勝敗兵家事不期 (승패병가사불기) | 승패란 전쟁에서 미리 알 수 없는 법 |
包羞忍恥是男兒 (포수인지시남아) | 부끄러움을 참고 견디는 것이 사나이라네 |
江東子弟多才俊 (강동자제다재준) | 강동의 젊은이 중에는 재능 있는 이가 많으니 |
捲土重來未可知 (권토중래미가지) | 흙먼지 일으키며 다시 쳐들어올 수도 있었을 것을 |
부(賦)로는 23세 때 정치에 대한 정의감을 담아 지은 〈아방궁부〉(阿房宮賦)가 잘 알려져 있다.
두목은 당나라 후기를 대표하는 인기 있는 시인이었지만, 성당(盛唐) 시기의 시를 중시하고 중당(中唐)과 만당 시기를 비판했던 명대의 고문사파(古文辭派) 문학관이 반영된 《당시선》(唐詩選)에는 그의 시가 한 수도 실리지 않았다.
4. 《번천집》과 장보고
두목의 문집인 《번천집》(樊川集)에는 신라의 장보고와 그의 친구 정연의 이야기를 다룬 「장보고정년전」(張保皐鄭年傳, 권제3)이 실려 있어 주목받는다. 이 기록은 후대에 편찬된 《신당서》 신라전(권제220)과 《삼국사기》 장보고 열전(권제44)의 주요 자료로 인용되었으며, 장보고 관련 연구에 중요한 사료로 평가받는다.
5. 계보
당의 명문가였던 경조 두씨(京兆杜氏) 출신이다.
관계 | 이름 | 비고 |
---|---|---|
아버지 | 두종욱(杜從郁) | 당의 재상 두우의 셋째 아들 |
처 | 배씨(裴氏) | 낭주자사(郎州刺史) 배언(裴偃)의 딸. 두목보다 먼저 사망. |
아들 | 두매사(杜晦辭) | 어릴 때 이름은 조사(曹師). 회남절도판관(淮南節度判官) 역임. |
아들 | 두덕상(杜德祥) | 어릴 때 이름은 축니(祝柅). 예부시랑(禮部侍郞)을 역임하고 아들 준(遵)을 둠. |
아들 | 두승택(杜承澤) | 자는 준지(浚之). 일찍 사망. |
아들 | 두란(杜蘭) | |
아들 | 두흥(杜興) | |
딸 | 두진(杜眞)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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