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스크랜턴
1. 개요
윌리엄 B. 스크랜턴(William B. Scranton)은 1856년 미국에서 태어나 의사로 활동하다가, 1885년 감리교 선교사로 한국에 파견되었다. 그는 고종으로부터 '시병원'이라는 이름을 하사받은 병원을 설립하여 의료 활동을 펼쳤으며, 1895년 콜레라 유행 시에는 에이비슨 박사와 함께 환자들을 치료했다. 또한 성서 번역에도 참여했다. 1907년 감리교 선교사직을 사임하고 성공회로 개종한 후, 일본 고베에서 미국 영사관 의무 검사관으로 근무하다가 1922년 사망했다. 그의 어머니 메리 스크랜턴은 이화학당을 설립하여 한국 여성 교육에 기여했다.
| 이름 | 윌리엄 벤턴 스크랜턴 |
|---|---|
| 출생일 | 1856년 3월 29일 |
| 출생지 | 뉴헤이븐, 코네티컷 주, 미국 |
| 사망일 | 1922년 3월 23일 |
| 사망지 | 고베시, 효고현, 일본 |
| 국적 | 미국 |
| 직업 | 선교사, 의사 |
| 알려진 이유 | 한국 최초의 감리교 선교사 |
| 로마자 표기 | উইলিয়াম বেনটন স্ক্র্যানটন (벵골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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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리교 선교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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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스크랜튼
메리 스크랜튼은 한국 최초의 여성 선교사로, 이화학당을 설립하여 여성 교육에 기여하고 여러 학교와 병원을 지원하며 한국 사회 발전에 헌신하다 1909년 사망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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펄 S. 벅
펄 S. 벅은 중국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며 중국과 동양을 배경으로 한 소설들을 발표하여 퓰리처상과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미국의 소설가이자 작가이며, 펄벅재단을 설립하여 여성 인권, 인종 간 입양, 혼혈아 문제 등 사회 문제에도 관심을 갖고 활동했고 한국과의 인연도 깊다. -
1855년 출생 -
우겐 도르지
우겐 도르지는 부탄의 명문가 출신 정치인으로, 20세기 초 왕실 정부에서 요직을 겸임하며 영국 및 티베트와의 관계를 발전시키고 부탄 근대화에 기여했다. -
1855년 출생 -
에드윈 홀
에드윈 허버트 홀은 홀 효과를 발견하고 하버드 대학교 물리학 교수로 재직하며 물리학 교과서를 저술한 미국의 물리학자이다.
2. 생애
윌리엄 B. 스크랜턴은 1856년 코네티컷주 뉴헤이븐에서 태어나 예일 대학교와 뉴욕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에서 의사로 일했다. 1884년, 고종이 감리교 선교회의 교육 및 의료 활동을 허가하자, 감리교 감독회 선교회는 헨리 아펜젤러 목사와 윌리엄 B. 스크랜턴 박사를 조선에 파견했다. 윌리엄 스크랜턴은 어머니 메리 스크랜턴과 함께 선교사로 임명되었다.
1885년 2월, 스크랜턴은 아내, 어머니와 함께 조선 선교를 위해 일본에 도착했다. 갑신정변 직후 조선의 정세가 불안정했기 때문에, 스크랜턴은 가족을 일본에 남겨두고 먼저 조선으로 들어왔다. 그는 호러스 N. 앨런의 초청으로 서양식 왕립병원인 광혜원에서 일했지만, 곧 별도의 감리교 병원을 설립하기로 결정했다. 1885년 6월, 스크랜턴의 아내와 어머니가 서울에 도착하여 미국 공사관 근처의 새 집에서 함께 살게 되었다. 스크랜턴은 이 집을 감리교 진료소로 개조하여 1885년 9월부터 환자를 받기 시작했고, 1886년에는 병동을 확장했다. 고종은 이 병원에 "시병원"이라는 이름을 하사했다.
메리먼 콜버트 해리스와의 갈등을 겪은 후, 스크랜턴은 1907년 감리교 선교회에서 사임하고 성공회 신자가 되었다. 1916년에는 만주, 1917년에는 일본 고베로 이주하여 고베 미국 영사관의 의무 검사관으로 일하다 1922년 3월 23일 폐렴으로 사망했다. 그의 유골은 고베 외국인 묘지에 안치되었다.
2.1. 출생과 성장
윌리엄 벤턴 스크랜턴은 1856년 5월 29일 미국 코네티컷주 뉴헤이븐에서 윌리엄 스크랜턴과 메리 스크랜턴 사이에서 외동아들로 태어났다. 뉴헤이븐에서 제조업을 하던 아버지 윌리엄 T. 스크랜턴은 그가 열여섯 살이던 1872년 사망하였다. 1878년 예일 대학교를 졸업하고 1882년 뉴욕 의과대학을 졸업했다. 같은 해 룰리 와이드 암즈(Loulie Wyeth Arms)와 결혼했으며 클리블랜드에서 병원을 개업하였다.
어머니 메리 스크랜턴은 외할아버지와 외삼촌이 감리교 목사였을 정도로 독실한 감리교 가정에서 성장한 개신교인이었다. 해외 선교에 관심이 많았던 어머니는 해외선교회 임원으로도 활동하였다. 스크랜턴은 어려서부터 어머니의 신앙과 사상적 영향을 받으며 자랐다.
2.3. 한국에서의 선교 및 의료 활동
1885년 2월 3일, 윌리엄 스크랜턴은 아펜젤러 목사 부부, 그리고 어머니와 함께 한국 선교를 위해 출발했다. 이들은 인천에 도착했지만, 갑신정변 직후의 불안한 정국 때문에 잠시 일본 요코하마로 건너가 그곳에서 수신사 박영효에게 한국어를 배웠다.
그 후 스크랜턴은 감리교 선교부 간부가 되어 성서 한역 통일회 회장을 맡아 성서 번역에 힘썼다. 1907년에는 선교 정책을 둘러싸고 친일 성향의 해리스 선교회 감독과 의견 충돌을 일으켜 선교사직과 감리교 목사직을 사임했다. 이후 성공회로 교파를 옮겨 평신도로서 서울, 평북 운산, 충남 직산, 중국 대련 등지에서 의사로 활동하였다.
2.3.1. 시병원 설립과 의료 활동
1885년 5월 3일 한국에 도착한 스크랜턴은 장로교 선교사인 앨런 박사가 설립한 광혜원에서 6주간 근무하였다. 이후 정동에 집을 마련하여 1886년 병원을 세웠는데, 고종 황제로부터 '시병원(施病院)'이라는 이름을 하사받았다.
갑신정변으로 인한 조선의 정치적 불확실성으로 인해, 스크랜턴은 아내와 어머니를 일본에 남겨두고 혼자 조선으로 왔다. 호러스 N. 앨런의 초청으로 광혜원에 합류했지만, 곧 별도의 감리교 병원을 설립하기로 결정했다. 1885년 6월, 스크랜턴의 아내와 어머니는 서울에 있는 미국 공사관 근처 새로 구입한 집에서 윌리엄 스크랜턴과 재회했다. 스크랜턴은 그 집을 감리교 진료소로 개조하여 1885년 9월 10일부터 환자를 받기 시작했다. 이 진료소는 1886년에 병동 5개를 포함하도록 확장되었고, 고종은 이 병원에 "시병원"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1895년 콜레라가 유행하였을 때, 에이비슨 박사와 함께 많은 환자들을 치료했다.
2.3.2. 이화학당 설립 지원 (어머니 메리 스크랜턴)
1885년 6월, 윌리엄 스크랜턴의 어머니 메리 스크랜턴은 아들 윌리엄과 함께 서울에 있는 미국 공사관 근처의 새로 구입한 집에서 지내게 되었다. 메리 스크랜턴은 이 집에서 이화학당을 시작하였다. 이화학당은 한국 최초의 여성 교육 기관으로, 한국 여성 교육의 효시가 되었다.
2.3.3. 성서 번역 활동
1895년 콜레라가 유행하였을 때, 에이비슨 박사와 함께 많은 환자들을 치료했다. 그 후 감리교 선교부의 간부가 되어 성서 한역 통일회 회장을 맡아 성서 번역에도 힘썼다.
2.4. 선교사직 사임과 성공회 개종
1907년 선교 정책을 둘러싸고 친일파인 해리스 선교회 감독과 의견 충돌을 일으켜 감리교 선교사직과 목사직을 사임하고, 성공회로 교파를 옮겨 평신도로서 서울, 평북 운산, 충남 직산, 중국 대련 등지에서 의사로 활동하였다.
2.5. 만년과 죽음
1917년 일본 고베로 건너가 그곳에서 의사로 활동하다 1922년 별세하여 고베 외국인 묘지에 안장되었다. 1916년 만주로 이주했고, 1917년에는 일본 고베로 이주했다. 스크랜턴은 1922년 3월 23일 폐렴으로 사망할 때까지 고베 미국 영사관의 의무 검사관으로 일했다. 그는 화장되었고 그의 유골은 가스가노(Kasugano)에 있는 고베 외국인 묘지에 안치되었다.
3. 한국 사회에 끼친 영향
스크랜턴은 의료와 교육 분야에서 한국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1885년 9월부터 미국 공사관 근처의 집을 개조하여 진료소를 운영하였고, 1886년에는 병동 5개를 포함하도록 확장했다. 고종은 이 병원에 "시병원(施病院)"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시병원을 통해 근대 의료 기술을 도입하고 가난한 환자들을 치료했다. 또한 그의 어머니인 메리 F. 스크랜턴은 이화학당을 설립하여 여성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