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오트레드
1. 개요
윌리엄 오트레드는 1574년 또는 1575년에 태어난 영국의 성직자이자 수학자이다. 케임브리지 대학교 킹스 칼리지에서 수학했으며, 1631년 저서 《수학의 열쇠 Clavis Mathematicae》를 통해 수학 기호와 계산법 발전에 기여했다. 곱셈 기호(×)와 슬라이드 자를 발명했으며, 연금술과 점성술에도 관심을 가졌다. 오트레드의 이름을 딴 계산자 수집가 단체인 오트레드 학회가 1991년 미국에서 결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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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생 | 1574년 3월 5일 |
|---|---|
| 출생지 | 잉글랜드 왕국 버킹엄셔 주 이턴 |
| 사망 | 1660년 6월 30일 (86세) |
| 사망지 | 잉글랜드 서리 주 올버리 |
| 국적 | 잉글랜드 |
| 모교 | 이턴 칼리지 |
|---|---|
| 킹스 칼리지 (케임브리지 대학교) | |
| 지도 학생 | 존 월리스 크리스토퍼 렌 리처드 델라마인 세스 워드 |
| 직업 | 수학자 |
|---|---|
| 근무 기관 | 킹스 칼리지 (케임브리지 대학교) |
| 알려진 업적 | 계산자 곱셈 "×" 기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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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4년 출생 -
김집 (1574년)
사계 김장생의 아들이자 조선 중기 문신이자 예학자인 김집은 율곡 이이, 성혼의 성리학과 송익필의 예학을 계승하고 인조반정 공신을 비판하는 등 강직한 성품을 보였으며, 『신독재문집』 등의 저서를 남기고 많은 제자를 배출하여 조선 후기 예학과 정치에 큰 영향을 미쳐 문묘에 배향되고 동방 18현에 오르는 영예를 누렸다. -
1574년 출생 -
유키 히데야스
유키 히데야스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차남으로 태어나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양자로 보내졌으며, 유키 가문의 가독을 잇고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에치젠의 영주가 되었다. -
케임브리지 대학교 킹스 칼리지 교수 -
마이클 이그나티에프
마이클 이그나티에프는 캐나다의 저명한 역사가, 소설가, 정치인이자 국제적 지식인으로, 인권, 국제 관계, 국가 건설에 관한 저술 활동과 하버드 케네디 스쿨 교수, 그리고 캐나다 연방 하원의원을 역임했다. -
케임브리지 대학교 킹스 칼리지 교수 -
존 메이너드 케인스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경제학자 중 한 명으로, 거시경제 이론을 통해 현대 경제학과 정책에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왔으며, 정부의 적극적인 경제 개입을 옹호하는 그의 사상은 현대 경제학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
잉글랜드의 발명가 -
앨런 튜링
앨런 튜링은 제2차 세계 대전 중 에니그마 암호 해독에 기여하고 컴퓨터 과학 분야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영국의 수학자, 컴퓨터 과학자이며, 동성애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은 후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
잉글랜드의 발명가 -
아서 C. 클라크
영국의 SF 작가이자 발명가, 해저 탐험가인 아서 C. 클라크는 '스페이스 오디세이' 시리즈로 유명하며 SF계의 '빅3'로 불리고, 정지 궤도 통신 위성의 개념을 제안하여 '클라크 궤도'라는 용어를 탄생시킨 인물이다.
2. 생애
버킹엄셔 이턴(현재 버크셔)에서 태어나 케임브리지 대학교 킹스 칼리지에서 수학하고 펠로우가 되었다. 1603년경 케임브리지 대학교를 떠나 성직록을 얻었고, 1610년에는 서리 올버리의 목사관에 정착했다. 1628년경 아룬델 백작의 명으로 그의 아들에게 수학을 가르치기도 했다.
윌리엄 앨러배스터, 찰스 캐번디쉬 경, 윌리엄 가스코인 등과 서신을 주고받았고, 헨리 브리그스나 에드먼드 건터와도 교류하며 그레샴 칼리지와 정기적으로 교류했다.
리처드 델라메인이나 조나스 무어 등 여러 수학자를 가르쳤고, 세스 워드, 찰스 스카버러는 오트레드의 집에 머물며 수학을 배웠다. 존 윌리스, 크리스토퍼 렌과 서신을 주고받았으며, 로버트 우드는 오트레드의 저서 출판을 도왔다.
계산자 발명과 관련하여 델라메인과 논쟁이 있었는데, 오트레드는 이론이 실천에 앞서야 한다고 주장하며 수학 교육 방법에서도 의견 차이를 보였다.
1660년에 사망할 때까지 성직자로 활동했으며, 사망 1개월 후 찰스 2세가 복위했다.
2.1. 초기 생애와 교육
윌리엄 오트레드는 1574/75년 3월 5일 버킹엄셔(현재 버크셔의 일부) 이턴에서 태어났으며, 이튼 칼리지에서 서예 선생이었던 아버지에게 배우며 교육을 받았다. 수학에 대한 열정으로 밤에도 깨어 공부하곤 했다. 이후 케임브리지 대학교 킹스 칼리지에 입학하여 1596/97년에 문학사 학위를, 1600년에 문학 석사 학위를 받았으며, 1595년부터 1603년까지 동 대학의 펠로우십을 유지했다. 1600년 루즐리 공원의 윌리엄 모어 경을 위한 라틴어 장례 시를 지었다.
2.2. 성직 활동
윌리엄 오트레드는 1603년경 케임브리지 대학교를 떠나 서리주 길퍼드에 있는 성 메리 교회 교구 목사직을 맡았다. 1605년에는 조지 오스틴의 추천으로 서리주 샬포드 인근 워너시에서 목사로 임명되었다.
1606년 2월 20일, 샬포드에서 오트레드는 샬포드의 그레이트 탠글리 홀에 거주하는 캐릴 가문의 크리스트기프트 캐릴과 결혼했다. 슬하에 12명의 자녀를 두었으며, 이 중 벤자민과 존은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시계 제작자가 되었다.
1610년, 로즐리 공원에 인접한 컴턴 교회의 후원자인 조지 모어 경은 오트레드에게 목사 임명권을 부여했지만, 오트레드가 스스로 목사직을 맡을 권한을 얻지는 못했다. 같은 해 10월 16일, 에드워드 랜들 경에 의해 앨버리 교구에 임명되었고, 1611년 1월 18일에 샬포드를 사임했다.
이후 50년 동안 앨버리에서 교구 사제로 봉사했다. 윌리엄 릴리 등 유명 인사와 교류하며 지역 사회에 기여했고, 1646년 약탈된 목사 위원회로부터 압류될 위기에 처했으나 벌스트로드 휘틀록 경 등 친구들의 도움으로 무죄를 받았다.
1660년, 잉글랜드의 찰스 2세 복위 한 달 후 앨버리에서 사망하여 올드 세인트 피터 앤 세인트 폴 교회, 앨버리에 묻혔다. 왕실의 굳건한 지지자였던 그는 왕의 귀환을 알고 기쁨으로 사망했다고 전해진다.
2.3. 학문적 교류 및 제자 양성
오트레드는 헨리 브리그스, 에드먼드 건터 등 당대 저명한 학자들과 교류했다. 1618년 봄, 런던에서 브리그스를 방문하여 그레샴 칼리지의 천문학 강사인 건터를 소개받았다. 오트레드는 건터에게 자신의 "수평 기구"를 보여주었고, 건터는 이를 칭찬하며 오트레드의 서면 지침에 따라 엘리아스 앨런이 제작한 놋쇠 기기의 인쇄물을 보내주었다. 또한 윌리엄 앨러배스터, 찰스 캐번디시 경, 윌리엄 가스코인 등과 서신을 주고받으며 학문적 교류를 이어갔다.
오트레드는 많은 학생들에게 무료로 수학을 가르쳤으며, 그의 가르침은 한 세대의 수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세스 워드는 오트레드의 집에서 6개월 동안 함께 살면서 수학을 배웠고, 의사 찰스 스카보로 또한 앨버리에서 머물렀다. 존 윌리스와 크리스토퍼 렌은 오트레드와 서신을 주고받은 대표적인 제자들이다. 이 외에도 로버트 우드가 앨버리에서 오트레드에게 수학을 배웠으며, 오트레드의 저서 출판을 돕기도 했다. 아이작 뉴턴은 오트레드를 "매우 훌륭하고 현명한 사람"이라고 칭송하며 그의 판단을 신뢰한다고 언급했다.
리처드 델라메인은 오트레드의 제자였으나, 계산자 발명과 관련하여 오트레드와 논쟁을 벌였다. 오트레드는 이론이 실천에 앞서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델라메인은 실용적인 면을 강조하여 수학 교육 방식에서도 의견 차이를 보였다.
3. 수학자로서의 업적
오트레드는 수학 교수는 아니었지만, 1631년 저서 《수학의 열쇠(Clavis Mathematicae)》를 통해 산술과 대수를 설명하여 영국의 수학계에 크게 공헌하였다. 이 책은 수학 기호의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며, 17세기 말까지 널리 사용되었다. 이 책에서 곱셈 기호(×)와 비례 기호(::)가 처음으로 사용되었다. 그는 스위스의 뷔르기 방법을 개량한 생략 곱셈법(오트레드 방법)을 고안했고, 계산자의 발명자로도 알려져 있다. 1657년에 출간된 《삼각법(Trigonometry)》에서는 평면 및 구면 삼각법을 다루었고, sin, tan, sec 기호를 사용하였다.
오트레드는 젊은 시절부터 수학에 관심을 가졌고, 케임브리지 대학교 킹스 칼리지에서 펠로우십을 받던 1597/98년에 이미 어떤 표면에도 해시계를 그리는 방법을 발명했다. 그는 휴대용 해시계 개발에 몰두하여 지구본을 이용한 장치를 고안하기도 했다.
1618년 봄, 오트레드는 그레샴 칼리지에서 헨리 브리그스를 통해 천문학 강사 에드먼드 건터를 소개받았다. 오트레드는 건터에게 자신의 "수평 기구"를 보여주었고, 건터는 이를 칭찬하며 엘리아스 앨런에게 제작을 의뢰했다. 그러나 1632년 리처드 델라메인이 이 발명을 자신이 했다고 주장하면서 논쟁이 벌어졌다.
1628년경, 오트레드는 애런델 백작 토마스 하워드의 아들 윌리엄 하워드의 수학 교사로 임명되었다. 그는 피에르 베일의 《일반 사전》과 리고드 박사의 《과학자들의 서신》에 기록된 것처럼, 윌리엄 앨러배스터, 찰스 캐번디시 경(1635), 요하네스 반피 후니아데스(1637), 윌리엄 가스코인(1640), 존 트위스든 박사 (1650) 등과 수학 서신을 주고받았다.
오트레드는 리처드 델라메인, 조나스 무어, 세스 워드, 찰스 스카보로, 존 윌리스, 크리스토퍼 렌, 로버트 우드 등에게 무료로 수학을 가르쳤고, 그의 가르침은 한 세대의 수학자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아이작 뉴턴은 오트레드를 "매우 훌륭하고 현명한 사람"이라고 칭찬하며 그의 판단을 신뢰했다.
존 윌리스의 미적분학 기본 텍스트인 《무한대 산술(Arithmetica Infinitorum)》(1656) 초판에는 오트레드에게 헌정하는 긴 편지가 실려 있다.
3.1. 수학 기호 도입
윌리엄 오트레드는 수학 교수는 아니었으나, 저서 《수학의 열쇠(Clavis Mathematicae, 1631)를 통해 산술과 대수를 논하여 영국의 수학계에 크게 공헌하였다. 이 책은 수학 기호 역사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며, 17세기 말까지 널리 사용되었다. 특히, 수학 기호 '~'와 곱셈 기호 '×'는 이 책에서 처음으로 사용되었다. 또한, 스위스의 뷔르기 방법을 개량한 생략 곱셈(오트레드 방법)을 고안하였고, 계산자의 발명자로도 알려져 있다. 1657년에 출간된 《삼각법》(Trigonometry)에서는 평면 및 구면 삼각법을 다루었으며, sin, tan, sec 기호를 사용하였다.
3.2. 저서
윌리엄 오트레드는 다양한 수학 서적을 저술했는데, 대표적인 저서는 다음과 같다.
| 제목 | 출판 연도 | 내용 | 비고 |
|---|---|---|---|
| 수학의 열쇠 (Clavis Mathematicae라틴어) | 1631년 | 산술, 대수, 수학 기호(×, :: 등) | 아이작 뉴턴 등이 교과서로 사용, 여러 판본 출판 |
| Circles of Proportion and the Horizontal Instrument | 1632년 | 항해, 삼각법, 계산자, 해시계 | 제자 윌리엄 포스터 편집 |
| Trigonometria with Canones sinuum | 1657년 | 삼각 함수 (sin, tan, sec 기호), 평면 및 구면 삼각법, 수학 표 | 리처드 스토크스, 아서 호턴 편집 |
| Opuscula Mathematica라틴어 | 1677년 | 기계학, 중력, 자동 장치, 디오판토스 문제, 음악, 요새 방어 등 | 찰스 스카버러 경 편집, 사후 출판 |
오트레드는 두 개의 링으로 구성된 휴대용 해시계를 발명하기도 했다.
3.2.1. 수학의 열쇠 (Clavis Mathematicae)
윌리엄 오트레드의 저서 《수학의 열쇠 (라틴어: Clavis Mathematicae)》(1631)는 산술과 대수를 다룬 책으로, 영국의 수학계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이 책은 17세기 말까지 널리 사용되었으며, 수학 기호 역사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특히, 곱셈 기호(×)와 비례 기호(::)를 처음으로 사용하였다.
이 책은 초등 대수학 교과서로, 힌두-아라비아 소수 표기법을 설명하고 소수 곱셈과 나눗셈 기호, 장제산 방법을 소개한다. 또한, 두 변수의 차이를 나타내는 "~" 기호를 도입했다. 《수학의 열쇠》는 여러 판으로 재발행되었으며, 존 윌리스와 아이작 뉴턴 등이 교과서로 사용했다. 오트레드는 프랑수아 비에트의 영향을 받아 수학을 간결하게 표현하기 위해 기호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1631년 초판은 대수학과 수학 기본 사항을 포함하여 20개의 장과 88페이지로 구성되었다. 1647년에는 영어판인 The Key of the Mathematicks New Forged and Filed가 출판되었고, 1648년에는 라틴어판인 Clavis Mathematica Denuo Limata, sive potius Fabricata가 출판되었다. 이 판에서는 서문이 제거되고 책이 한 장으로 줄었다.
1652년에는 세 번째 판이 나왔고, 이후 1667년, 1693년(라틴어), 1694년(영어)에 사후 판이 출판되었다. 이 책은 수학이 고등 교육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면서 출판 후 약 15년 만에 인기를 얻었다. 윌리스는 1652년판 서문에서 자신의 암호학 기술을 홍보했으며, 다른 판에서는 오트레드가 크리스토퍼 렌의 재능을 칭찬했다.
3.2.2. 비례의 원과 수평 기구 (The Circles of Proportion and the Horizontal Instrument)
이 작품은 오트레드가 그의 제자 윌리엄 포스터가 출판을 위해 편집하기 전에 원고에서 사용되었다. 여기서 오트레드는 삼각 함수에 대한 약어를 도입했으며, 로그 결과를 찾는 기계적 수단인 그의 중요한 발명품인 계산자의 사용에 대한 설명과 지침이 포함되어 있다.
오트레드의 학생 두 명인 윌리엄 포스터와 리처드 델라메인은 이 책의 내용과 관련이 있다. 오트레드는 애런들 백작의 아들의 강사로서 런던의 스트랜드에 있는 백작의 저택인 아룬델 하우스에서 방을 사용했다. 그는 리처드 델라메인에게 무료 강습을 제공했는데, 그는 수학적 기기에 너무 의존하여 그 뒤에 숨겨진 이론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1620년대에 초심자로 그를 찾아온 또 다른 학생인 포스터는 기기를 사용하지 않고 가르침을 받아 진정한 기초를 다질 수 있었다. 1630년 긴 휴가 기간 동안 (엘리아스 앨런의 가게와 같은 지역인 템플 바의 웨스트민스터 쪽에 있는 세인트 클레멘트 데인스 교회 부지에서 수학을 가르친) 포스터는 앨버리에서 오트레드와 함께 머무르면서 건터의 자에 대해 질문했고, 오트레드의 원형 계산자를 포함한 그의 스승이 사용한 두 개의 기기를 보여주었다.
오트레드는 포스터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 "... 예술의 진정한 방법은 기기가 아니라 증명에 의한 것입니다. 그리고 ... 기기부터 시작하고 과학부터 시작하지 않는 것은 속된 교사들의 터무니없는 과정이며, 예술가가 되는 대신, 그들의 학생들을 단지 속임수를 쓰는 자, 즉 마치 마술사처럼 만들 뿐입니다. 이는 예술을 멸시하고, 소중한 시간을 낭비하며, 의지와 근면함이 있는 재치있는 사람들을 무지와 게으름으로 배반하는 것입니다. ... 기기의 사용은 실제로 훌륭하며, 만약 사람이 예술가라면 그렇습니다. 그러나 예술에 반대하는 경우 경멸받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 그는 나에게 기기의 기술을 칭찬하려고 했지만, 먼저 나에게 과학을 잘 가르쳐야 했습니다."
포스터는 오트레드로부터 원고로 가지고 있던 설명, 해설 및 지침을 번역, 편집 및 출판할 수 있는 허가를 받아 1632년에 작업을 완료했다. 한편, 기기를 보여주었고 오트레드가 그의 기기 제작자인 엘리아스 앨런에게 보낸 텍스트를 복사한 델라메인은 자신의 설명과 설명을 작성하고 있었다. 델라메인은 두 개의 별도 논문으로 먼저 출판되어 자신이 발명가라고 주장하고, 먼저 쓴 논문을 찰스 1세에게 헌정했다. 그는 심지어 그의 교정쇄가 준비되는 동안 오트레드에게 보여주고 그의 반대를 묵살했으며, 머리말에 포스터와 오트레드를 비난하는 몇몇 조롱 섞인 발언을 인쇄했다. 포스터는 자신의 책 The Circles of Proportion을 유명한 지식인 케넬름 디그비 경에게 헌정하면서, 다른 사람이 오트레드의 출판을 서둘러 예상했다고 언급했다. 오트레드 자신은 자신의 발명품과 저작물의 우선 순위를 설명하고 델라메인의 행동을 보여주는 Just Apologie를 출판해야 했다.
1632년에는 항해에 관한 논문 Circles of Proportion이 있으며, 그 안에서 삼각법과 해시계를 사용한 계시 방법 등이 쓰여 있다. 이 논문은 제자 윌리엄 포스터가 편집했다.
3.2.3. 삼각법 (Trigonometria)
Trigonometria, Hoc est, Modus Computandi Triangulorum Latera & Angulos(삼각법, 즉 삼각형의 변과 각을 계산하는 방법)은 리처드 스토크스와 아서 호턴이 윌리엄 오트레드의 논문을 모아 엮은 것이다. 1657년에 출판된 이 책은 약 36페이지 분량으로, 삼각 함수에 대한 약어(sin, tan, sec)와 수학 표가 포함되어 있으며, 평면 및 구면(球面) 삼각법을 다루었다. 책 전면에는 벤젤 슬라르 홀러가 그린 초상화와 유사하지만 윌리엄 페이스혼이 다시 새긴 오트레드의 초상화가 실려 있는데, 83세의 오트레드를 묘사하고 있으며, 그 아래에는 "R.S."의 짧은 경구가 있다. 크리스토퍼 웨이즈가 쓴 오트레드에게 보내는 긴 시는 서두에 있다.
3.2.4. 수학 소논문집 (Opuscula Mathematica)
Opuscula Mathematica라틴어는 윌리엄 오트레드의 사후인 1677년에 출판된 논문 모음집으로, 그의 친구인 찰스 스카버러 경이 편집했다.
이 모음집은 다음과 같은 주제들을 다루고 있다.
* 기계학 원론
* 여러 종류의 물체의 중력과 크기 비교
* 자동 장치
* 알렉산드리아의 디오판토스, 3권의 문제
* 직각 평면 삼각형
* 표면 분할
* 음악 원리
* 요새 방어
* 각도 단면
3.3. 계산자 발명
오트레드는 건터가 고안한 단일 "자"를 개량하여 계산자를 발명했다. 건터는 자에서 거리를 표시하기 위해 컴퍼스를 사용해야 했지만, 오트레드는 두 개의 자를 서로 밀어서 같은 결과를 얻는 방식을 고안했다. 1620년대에 원형 슬라이드 자를 먼저 디자인했지만, 1630년 델라메인이 먼저 출판했다. 1650년대에는 선형 자에 미끄러지는 중간 부분을 갖춘 기존 디자인이 발명되었다.
오트레드의 계산자는 건터가 이미 설명한 대수 척을 이용한 계산 방법을 더욱 간편하게 만들었다. 건터의 방법은 캘리퍼스로 대수 척 위의 간격을 이동시켜 눈금을 읽어야 했지만, 오트레드는 두 개의 대수 척을 서로 슬라이드시키는 방식을 사용했다. 1620년대 오트레드는 원형 계산자를 고안했지만, 1630년 델라메인이 먼저 출판했다. 현재와 같이 중간 부분이 슬라이드하는 곧은 모양의 계산자는 1650년대에 등장했다.
3.4. 해시계 발명
오트레드는 23세에 이중 수평 해시계를 발명했는데, 이는 그를 기려 오트레드형이라고 불린다. '이중 수평 해시계의 설명 및 사용법'(16쪽)이라는 짧은 설명은 레크리에이션 수학에 관한 선구적인 책인 헨드릭 반 에텐(장 르레숑의 필명)의 수학적 오락(1624)의 1653년판(영어 번역)에 추가되었다. 이 번역 자체는 더 이상 오트레드의 것으로 여겨지지 않으며, (아마도) 프랜시스 말서스의 작품일 것이다.
윌리엄 오트레드는 만능 환일시계도 발명했다. 그는 이중 링 형태의 휴대용 해시계를 발명했으며, 현재는 이를 오트레드형이라고 부른다. 이 해시계에 대한 간단한 설명인 The description and use of the double Horizontall Dyall(16페이지)은 1653년 영어판 Récréations Mathématiques(1624) (저자는 헨드릭 반 에튼과 장 뢰르숑)에 추가되었으나, 이 번역본에는 오트레드에 대한 언급이 없다.
4. 오컬트에 대한 관심
오트레드는 연금술과 점성술에 관심을 가졌다. 헤르메스주의는 당대 많은 명망 있는 과학자들 사이에서 철학적 시금석으로 남아 있었으며, 그의 제자인 토머스 헨쇼는 그의 스승이 건네준 일기와 "실험"을 필사했다.
존 오브리에 따르면, 오트레드는 점성술에 대해 완전히 회의적이지는 않았다. 윌리엄 릴리는 1646년에 오트레드가 의회에 의해 추방될 위기에 처했을 때 그를 도왔다고 주장하는데, 실제 그 당시 오트레드를 도운 것은 벌스트로드 화이트록 (법률가)으로 알려져 있다.
존 이블린은 1655년 8월 28일의 일기에 오트레드가 천년왕국 신봉자와 같은 견해를 피력했다고 적고 있다.
4.1. 점성술
존 오브리는 오트레드가 출생 점성술 사용에 능했으며, 그 효과가 왜 있는지 알지 못하지만 어떤 "지니어스" 또는 "영"이 돕는다고 믿었다고 말한다. 오브리에 따르면, 엘리아스 애슈몰은 오트레드가 직접 쓴 12개의 황도대 하우스에 대한 합리적인 분할 원본을 소유하고 있었다. 오트레드는 윌리엄 릴리와 친분을 유지했으며, 릴리는 자서전에서 1646년에 오트레드가 의회에 의해 추방될 위기에 처했을 때 그를 도왔다고 주장한다.
4.2. 프리메이슨
엘리아스 애슈몰은 오트레드를 잘 알고 지냈으며, 릴리의 자서전적 스케치에 대한 주석에서 "저는 이 신사와 매우 잘 알고 지냈으며, 서리주 올드버리에 있는 그의 집 맞은편에서 3, 4년 동안 살았습니다."라고 언급했다.
1747년 영국 전기 사전에 실린 애슈몰의 전기는 오트레드가 1646년 애슈몰이 프리메이슨에 가입할 때 참여했다는 추측을 불러일으켰다. 토머스 드 퀸시는 이 주장을 반복적으로 강화했고, 장마리 라공에 의해 상세히 설명되었지만, 앨버트 갤러틴 매키의 프리메이슨의 역사(1906)에서 사실이 아님이 밝혀졌다.
존 오브리에 따르면, 엘라이어스 애슈몰은 서리에 살았는데, 결혼으로 얻은 그 토지는 버크셔주와의 경계선을 넘어 있었다. 애슈몰은 프리메이슨의 일원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1646년 그의 입회식에 오트레드도 참석했다는 이야기가 있으며, 그 이야기의 기원은 토머스 드 퀸시이다. 애슈몰은 1654년 9월 15일, 그해 점성가들의 축제 약 3주 후에 "유명한 수학자 오트레드 씨"를 방문했다고 기록했다.
4.3. 천년왕국 신봉
존 이블린의 일기에서 오트레드(Oughtred)가 천년왕국 신봉과 유사한 견해를 피력했다는 내용이 있다. 그는 물이 연금술사의 제1의 물질이라고 생각하고, 태양이 물질적인 불이고 달은 대륙이라고 믿었다.
5. 오트레드 학회
계산자 수집가 단체인 오트레드 학회(Oughtred Society)는 1991년 미국에서 결성되었다. 이 학회는 연 2회 Journal of the Oughtred Society(오트레드 학회 저널)을 발행하고, 회원들을 위한 회의와 경매를 개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