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집 (157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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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집은 1574년에 태어나 1656년에 사망한 조선 시대의 문신이자 성리학자이다. 그는 김장생의 아들이자 김계휘의 손자로, 18세에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벼슬보다는 학문에 전념했다. 김장생, 이이, 성혼의 학문을 이어받아 예학을 연구하고 보급했으며, 효종 대에 예조참판 등을 역임하며 북벌을 추진했다. 그는 소현세자와 민회빈 강씨의 복권을 주장했고, 저서로 《신독재문집》과 《의례문해속》이 있다. 김집은 송시열, 송준길 등을 제자로 두어 기호학파를 형성하는 등 조선 예학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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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집 (1574년) | |
---|---|
기본 정보 | |
한글 이름 | 김집 |
한자 이름 | 金集 |
자 | 사강(士剛) |
호 | 신독재(愼獨齋), 신독(愼獨) |
시호 | 문경(文敬) |
출생일 | 1574년 7월 4일 |
출생지 | 조선 한성부 황화방 정릉동 |
사망일 | 1656년 6월 5일 |
사망지 | 조선 충청도 논산 |
국적 | 조선 |
거주지 | 조선 한성부 |
정치 활동 | |
정당 | 서인 세력 |
임기 | 1649년 2월 ~ 1654년 3월 |
임금 | 조선 인조 이종 조선 효종 이호 |
대리청정 | 왕세자 이호 |
직책 | 조선의 이조판서 |
경력 | 공조참판 |
학력 및 분야 | |
학력 | 1591년(선조 24) 진사시 급제 |
직업 | 문신, 정치인, 유학자, 철학자 |
분야 | 유학 가운데 유교 성리학 |
가족 관계 | |
배우자 | 본부인 기계 유씨 측실 덕수 이씨 |
자녀 | 김익형(장남), 김익련(차남) 딸 2명(壻 : 김태립, 정광원) |
부모 | 김장생(부) 창녕 조씨 부인(모) 순천 김씨 부인(계모) |
친인척 | 조카 김익훈, 종손 김만기, 종손 김만중, 종증손녀 인현왕후, 외조부 조대건, 사돈 송준길, 부실 장인 이이 |
기타 | |
한국학중앙연구원 인물 | 한국학중앙연구원 인물 정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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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1574년 6월 6일 한성부 황화방(皇華坊) 정릉동(貞陵洞)에서 김장생과 창녕 조씨 사이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임진왜란 때 의병으로 참전했던 형 김은(金檃|김은한국어; 1567년~1592년?)이 실종되어, 사실상 장남 역할을 하였다.
김집은 어려서부터 특별한 자질을 보였으며, 영특하고 순수함이 남달랐다. 말을 배울 무렵에는 이미 글자를 알았는데, 할아버지 김계휘가 무릎에 앉히면 손가락으로 입을 가리키며 "이는 한자로 '中(중)'자가 됩니다."라고 말하곤 했다. 네 살 때 종두를 앓자, 김계휘는 직접 그를 업고 다니며 "이 아이의 골격이 비범하니, 훗날 큰 인물이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김집의 가계는 다음과 같다.
구분 | 내용 |
---|---|
부친 | 김장생 (1548년 7월 8일 ~ 1631년 8월 3일) |
모친 | 친모 - 조어화(曺於火|조어화한국어, 창녕 조씨; 1551년~1586년); 김장생의 첫 번째 부인 |
계모 - 순천 김씨 (1572년~1633년); 김종서의 후손 | |
형제자매 | 형 - 김은; 임진왜란 중 실종 |
언니 - 광산 김씨 (1570년~?) | |
남동생 - 김반 (1580년~1640년) | |
여동생 - 광산 김씨 (1581년~1661년) | |
이복 남동생 - 김영 (1590년~1644년) | |
이복 남동생 - 김경 (1594년~?) | |
이복 여동생 - 광산 김씨 (1597년~?) | |
이복 남동생 - 김고 (1600년~?) | |
이복 남동생 - 김구 (1604년~1684년) | |
이복 남동생 - 김규 (1606년 6월 23일 ~ 1697년 7월 24일) | |
이복 여동생 - 광산 김씨 (1610년~?) | |
이복 남동생 - 김비 (1623년~1699년) | |
배우자와 자녀 | 기계 유씨 (1570년~1622년); 유홍(兪泓|유홍한국어)의 딸 — 자녀 없음. |
덕수 이씨 (1570년~1658년); 이이의 딸 | |
아들 - 김익형 (1600년~1662년) | |
딸 - 광산 김씨 (1603년~?) | |
아들 - 김익련 (1606년~1689년) | |
딸 - 광산 김씨 (1620년~?) |
김집은 6세 때 이미 글을 읽고 쓸 줄 알았으며, 아버지 김장생과 할아버지 김계휘의 총애를 받았다. 8세에 주자강목을 읽고 문리가 트이자, 1581년 송상현과 송익필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이후 김장생으로부터 율곡 이이, 우계 성혼의 성리학과 송익필의 예학을 전수받았고, 1585년부터는 우계 성혼의 문하에서도 수학하였다.[7]
9살 때 할아버지 상을, 13살에 어머니 상을 당했을 때도 예를 다해 상을 치렀으며, 이 과정에서 병을 얻기도 하였다. 19세에 기계 유씨와 결혼하였으나, 부인이 병이 있어 이이의 서녀인 덕수 이씨를 부실(副室)로 맞았다. 임진왜란 중 형 김은, 형수, 조카가 왜군에게 살해되었다. 기계 유씨가 사망하자 집안 어른들은 재혼을 원했으나, 김집은 "사람마다 운명이 있는데, 운명이 좋지 않아 먼저 사람과 평생 욕을 보았는데 다시 장가든다고 해도 먼저 사람보다 나을 줄 알겠습니까" 라며 거절하고 덕수 이씨와 해로하였다.[9][10]
덕수 이씨는 남편과 함께 시아버지를 30여 년간 봉양하여 효부로 칭송받았다.[8][9][10] 김집은 덕수 이씨에게서 아들 김익형과 김익련 등을 얻었다.
1591년 진사시에 급제했으나 벼슬에 뜻이 없었다. 1610년 헌릉참봉이 되었으나 광해군 조정의 문란한 정치에 염증을 느껴 사퇴하였다. 1614년 위성원종공신 3등에 책록되었다. 이후 여러 관직을 제수받았으나 나가지 않았다.
1623년 인조반정 직후 대사헌에 제수되었지만 사양하였다. 인조반정 직후 공신들의 월권행위와 권력남용을 비판하다 밉보이게 되었다. 이괄의 난 역시 공신들의 잘못된 논공행상이 원인이라 지적하였다.[1] 이후 부여 현감으로 부임하여 학교를 일으키고 고을 정사를 바로잡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
1634년 선공감 첨정, 1635년 사헌부 지평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였다. 1636년 여러 관직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이후 김상헌, 안방준 등과 북벌론을 제창하였으나, 인조 반정 공신들의 반발에 부딪쳤다.
1649년 '국조오례의'의 상례를 고례와 비교, 분석하고 자신의 견해를 첨가한 '고금상례이동의'를 왕에게 올렸다.[1] 같은 해 예조참판, 공조참판이 되어 시무 7조를 올렸다.[11] 이후 대사헌, 이조판서 등에 제수되었으며, 효종, 김상헌과 더불어 북벌을 추진했다. 김육 등이 대동법을 추진하려 하자 김육을 규탄하며 반대하다 언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1650년 인물 전형 선발 문제로 재상과 의견이 달라 스스로를 탄핵하고 물러났다. 이후 김자점 일파가 숙청된 뒤 대사헌이 되었다가 소현세자, 민회빈 강씨의 복권 여론을 주도하였다. 김홍욱이 민회빈 강씨 복권과 경안군 석방을 요구하다 장살당하자 관직을 사퇴하였다.
2. 1. 생애 초반
김집은 어려서부터 남다른 재능을 보였다. 말을 배우기 시작할 무렵에는 이미 글자를 알았으며, 할아버지 김계휘에게 "이는 한자로 '中(중)'자가 된다"고 말하곤 했다고 한다. 네 살 때 종두를 앓았는데, 김계휘는 그를 업고 다니며 "이 아이의 골격이 비범하니, 훗날 큰 인물이 될 것이다"라고 예견했다.6세 때 이미 글을 읽고 쓸 줄 알았으며, 아버지 김장생과 할아버지 김계휘의 총애를 받았다. 8세에 주자강목을 읽고 문리가 트이자, 1581년 송상현과 송익필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이때 김집은 <대부송>이라는 시를 지었는데, 최립은 이를 보고 "문장가의 솜씨"라며 칭찬했다고 한다. 이후 김장생으로부터 율곡 이이, 우계 성혼의 성리학과 송익필의 예학을 전수받았고, 1585년부터는 우계 성혼의 문하에서도 수학하였다.[7]
9살 때 할아버지 상을, 13살에 어머니 상을 당했을 때도 예를 다해 상을 치렀으며, 이 과정에서 병을 얻기도 하였다.
19세에 유홍(兪泓)의 딸 기계 유씨와 결혼하였으나, 부인이 병이 있어 이이의 서녀인 덕수 이씨를 부실(副室)로 맞았다. 임진왜란 중 형 김은, 형수 음성 박씨, 세 살 된 조카가 왜군에게 살해되었다. 기계 유씨가 사망하자 집안 어른들은 재혼을 원했으나, 김집은 "사람마다 운명이 있는데, 운명이 좋지 않아 먼저 사람과 평생 욕을 보았는데 다시 장가든다고 해도 먼저 사람보다 나을 줄 알겠습니까" 라며 거절하고 덕수 이씨와 해로하였다.[9][10]
덕수 이씨는 남편과 함께 시아버지를 30여 년간 봉양하여 효부로 칭송받았다.[8][9][10] 김집은 덕수 이씨에게서 아들 김익형(金益炯)과 김익련(金益煉) 등을 얻었고, 김익형이 신독재 김집의 제사를 계승하였다.
2. 1. 1. 출생과 가계
1574년 6월 6일 한성부 황화방(皇華坊) 정릉동(貞陵洞)에서 사헌부대사헌을 지낸 황강 김계휘의 손자이자, 사계 김장생과 창녕 조씨 사이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 창녕 조씨는 첨지중추 조대건(曺大乾)의 딸이었다. 임진왜란 때 의병으로 참전했던 형 김은(1567년~?)이 실종되어, 사실상 장남 역할을 하였다. 김집은 태어날 때부터 특별한 자질을 보였으며, 영특하고 순수함이 남달랐다. 말을 배울 무렵에는 이미 글자를 알았는데, 할아버지 황강공이 무릎에 앉히면 손가락으로 입을 가리키며 "이는 한자로 '중(中)'자가 됩니다."라고 말하곤 했다. 네 살 때 종두를 앓자, 황강 김계휘는 직접 그를 업고 다니며 "이 아이의 골격이 비범하니, 훗날 큰 인물이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김집은 총명함뿐만 아니라 진중함까지 갖춰, 일찍부터 아버지 김장생의 큰 믿음을 받았다.
할아버지 황강 김계휘는 김집을 기특하게 여겨 "우리 집안을 이을 사람은 이 아이"라고 말하곤 했다. 김집의 자(字)는 사강(士剛), 호(號)는 신독재(愼獨齋)이다.
구분 | 내용 |
---|---|
부친 | 김장생 (金長生|김장생한국어; 1548년 7월 8일 ~ 1631년 8월 3일) |
모친 | 친모 - 조어화 (曺於火|조어화한국어, 창녕 조씨 昌寧 曺氏|창녕 조씨한국어; 1551년~1586년); 김장생의 첫 번째 부인 |
계모 - 순천 김씨 (順天 金氏|순천 김씨한국어; 1572년~1633년); 김종서의 후손 | |
형제자매 | 형 - 김은 (金檃|김은한국어; 1567년~1592년?); 임진왜란 중 실종 |
언니 - 광산 김씨 (光山 金氏|광산 김씨한국어; 1570년~?) | |
남동생 - 김반 (金槃|김반한국어; 1580년~1640년) | |
여동생 - 광산 김씨 (光山 金氏|광산 김씨한국어; 1581년~1661년) | |
이복 남동생 - 김영 (金榮|김영한국어; 1590년~1644년) | |
이복 남동생 - 김경 (金景|김경한국어; 1594년~?) | |
이복 여동생 - 광산 김씨 (光山 金氏|광산 김씨한국어; 1597년~?) | |
이복 남동생 - 김고 (金高|김고한국어; 1600년~?) | |
이복 남동생 - 김구 (金榘|김구한국어; 1604년~1684년) | |
이복 남동생 - 김규 (金槼|김규한국어; 1606년 6월 23일 ~ 1697년 7월 24일) | |
이복 여동생 - 광산 김씨 (光山 金氏|광산 김씨한국어; 1610년~?) | |
이복 남동생 - 김비 (金棐|김비한국어; 1623년~1699년) | |
배우자와 자녀 | 기계 유씨 (杞溪 兪氏|기계 유씨한국어; 1570년~1622년); 유홍(兪泓|유홍한국어)의 딸 — 자녀 없음. |
덕수 이씨 (德水 李氏|덕수 이씨한국어; 1570년~1658년); 이이의 딸 | |
아들 - 김익형 (金益炯|김익형한국어; 1600년~1662년) | |
딸 - 광산 김씨 (光山 金氏|광산 김씨한국어; 1603년~?) | |
아들 - 김익련 (金益煉|김익련한국어; 1606년~1689년) | |
딸 - 광산 김씨 (光山 金氏|광산 김씨한국어; 1620년~?) |
2. 1. 2. 초기 활동과 성리학 수학
6세 때 이미 글을 읽고 작문하였으며, 할아버지 김계휘와 아버지 김장생의 총애를 받았다. 8세에 주자강목을 읽고 문리가 트이자, 1581년 송상현과 송익필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이때 김집은 <대부송>이라는 시를 지었는데, 이를 본 최립은 "문장가의 솜씨이다."라며 그의 재능을 칭찬했다 한다. 이후 충청도 연산에서 아버지 김장생으로부터 율곡 이이, 우계 성혼의 성리학과 송익필의 예학을 전수받았다. 1585년부터는 우계 성혼의 문하에서도 수학하였다.[7]9살 때 할아버지 상을 맞아 김장생이 시묘살이를 하자, 김집은 아버지 곁을 떠나지 않고 예를 다했다. 13살에 어머니 상을 당했을 때도 예를 다해 상을 치렀고, 이 과정에서 병을 얻기도 하였다. 김장생은 '예를 곧게 행하다가 병을 얻어 깊이 후회하게 되리라.'며 걱정했다 한다.
19세에 유홍(兪泓)의 딸과 결혼하였으나, 부인이 병이 있어 이이의 서녀인 덕수 이씨를 부실(副室)로 맞았다. 이씨는 어질고 정숙하여 집안일을 잘하고 시아버지를 30여 년간 봉양하여 효부로 칭송받았다.[8][9][10] 임진왜란 중 형 김은, 형수 음성 박씨, 세 살 된 조카가 왜군에 살해되었다. 유씨가 사망하자 집안 어른들은 재혼을 원했으나, 김집은 "사람마다 운명이 있는데, 운명이 좋지 않아 먼저 사람과 평생 욕을 보았는데 다시 장가든다고 해도 먼저 사람보다 나을 줄 알겠습니까" 라며 거절하고 덕수 이씨와 해로하였다.[9][10]
부실 이씨는 남편과 함께 시아버지를 30여 년 봉양하여 효도를 잘한다는 칭송을 들었다. 김집은 이씨에게서 아들 김익형(金益炯)과 김익련(金益煉) 등을 얻었고, 김익형이 신독재 김집의 제사를 계승하였다.
2. 2. 학문 연구와 관료 생활
1591년(선조 24년) 18세에 진사시에 2등으로 급제하여 진사가 되었으나 벼슬에 뜻이 없었다. 이후 성혼이 사망하고 주요 학자들도 임진왜란을 전후해 대부분 사망했으므로 아버지 김장생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수학하며 학문을 연마하였다. 1610년(광해군 2년) 헌릉참봉이 되었으나 광해군 조정 북인들의 문란한 정치와 상궁 김개시가 전권을 휘두르는 것에 염증을 느껴 관직을 사퇴하였다. 1614년(광해군 6년) 8월 27일 위성원종공신 3등(衛聖原從功臣三等)에 책록되었다. 그 뒤 세자익위사 위솔(世子翊衛司衛率), 전라도 도사(全羅道都事) 등을 제수하였으나 나가지 않았다.후에 산림의 천거로 동부승지·우부승지·공조참판·예조참판·대사헌 등을 역임하였으나, 벼슬 자리에 오래 머물지 않고 곧 사임하였다.[6] 아버지 김장생은 계축화옥 때 북인의 공격을 받았으나, 혐의가 없어 처벌받지 않았다. 김집은 계축화옥을 계기로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아버지 김장생을 스승으로 모시며 학문에 정진하여 가학을 조선예학으로 발전시키게 되었다.[1]
1623년(광해군 15년) 인조반정 직후 학행으로 천거되어 사헌부대사헌에 제수되었지만 사양하고 취임하지 않았다. 인조반정 직후 공신들의 월권행위와 권력남용, 탐욕스러움을 논하다가 반정공신들로부터 밉보이게 되었다. 이괄의 난 역시 공신들의 잘못된 논공행상이 원인이라 지적하였다.[1] 그 뒤 외직을 자청하여 5월 부여현감이 되었다. 부여현감으로 부임한 그는 제일 먼저 학교를 일으키고, 고을 정사를 바로잡는 한편, 모든 행정을 두터운 인정으로 행했으므로 교화가 마을마다 행해져 소송과 다툼이 없어지고 고을의 청년들 사이에서 문풍이 유행하였다. 1634년(인조 12) 선공감 첨정에, 1635년 사헌부 지평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였다. 1636년(인조 14) 5월에 사헌부 장령, 6월에 종친부 전첨, 7월에 집의(執義), 8월에 용양위 부호군, 10월에 군자감 정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취임하지 않았다.
이후 청음 김상헌, 우산 안방준 등과 함께 북벌론을 제창하였다. 그는 병력을 양성하고 허례허식을 폐지하며 공신들에게 지나치게 부여된 특권을 감축할 것을 진언하였다. 그러나 이는 인조 반정 공신들의 강한 반발에 부딪쳤다.
1649년(효종 즉위년) 김집은 '국조오례의'가 고례에 비해 많은 문제점을 지닌 예서라고 인식하고,[1] '국조오례의'의 상례(喪禮)를 고례(古禮)인 '의례경전(儀禮經典)'과 비교하여, 양자의 같고 다름, 빠지고 보태진 것을 분석하고 자신의 견해를 첨가한 예서인 '고금상례이동의'를 왕에게 올렸다.[1]
1649년 1월 공조참의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였다. 5월 인조가 승하하고 세자가 효종으로 즉위하자, 특명으로 부름을 받아 가선대부 예조참판이 되고, 그해 공조참판이 되어 상례이동(喪禮異同)과 시정의 개혁을 논한 시무 7조를 올렸다.[11] 이후 대사헌, 이조판서 등에 제수되었으며, 효종, 김상헌과 더불어 북벌을 추진했다. 이후 왕명을 받아 소학의 주(註)와 중용의 구두(句讀)를 교정했다. 김육 등이 대동법을 추진하려 하자 김육을 규탄하며 반대하다 언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1650년 1월 왕의 간청에 따라 인물을 전형 선발하는 일을 주관하였으나 재상과 의견이 일치되지 않아 상소하여 스스로를 탄핵하고 물러났다. 4월 호분위 사직(虎賁衛司直)에 제수되어 출사하였다. 그러나 유배지에 있던 김자점이 비밀리에 북벌계획을 밀고함으로써 청나라의 문책으로 조정이 어수선해지자 사임하였다. 그 뒤 김자점 일파가 숙청된 뒤 사헌부 대사헌이 되었다가 소현세자, 민회빈 강씨의 복권 여론을 주도하였다. 그 뒤 김홍욱이 민회빈 강씨의 복권과 경안군 석방을 요구하다가 장살당하자 관작을 사퇴하였다.
2. 2. 1. 학문 연구
1591년(선조 24년) 18세에 진사시에 2등으로 급제하여 진사가 되었으나 벼슬에 뜻이 없었다. 이때 김집의 글이 과거를 보았던 사람들 중에 뛰어나서 당대의 이름난 사람들은 "황강 김계휘가 손자를 잘 두었다."라며 감탄했다고 한다. 이후 성혼이 사망하고 주요 학자들도 임진왜란을 전후해 대부분 사망했으므로 아버지 김장생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수학하며 학문을 연마하였다. 김집은 대부분 가정에서 아버지로부터 학문을 배웠으며 과거에 응시하라는 권유도 받았다. 그러나 정작 그는 과거에 응시하는 것조차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고, 오직 성현(聖賢)의 학문에 전념할 뜻을 갖고 있었다. 후일 문인들이 지은 그의 행장에 의하면 '선생은 가정에서 학문을 닦았는데 이름이 세상에 드러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비록 부친의 명으로 과거에 힘쓰기는 했지만, 여러 번 세상의 변란을 겪고서는 나아가 취할 뜻이 없었다.'고 한다.1596년 전란으로 가족을 이끌고 피신하였다가 1597년 4월 아버지 김장생을 모시고 연산으로 돌아왔다. 1610년(광해군 2년) 헌릉참봉(獻陵參奉)이 되었으나 광해군 조정 북인들의 문란한 정치와 상궁 김개시가 전권을 휘두르는 것에 염증을 느껴 관직을 사퇴하였다. 1614년(광해군 6년) 8월 27일 위성원종공신 3등(衛聖原從功臣三等)에 책록되었다. 그 뒤 세자익위사 위솔(世子翊衛司衛率), 전라도 도사(全羅道都事) 등을 제수하였으나 나가지 않았다.
후에 산림의 천거로 동부승지·우부승지·공조참판·예조참판·대사헌 등을 역임하였으나, 벼슬 자리에 오래 머물지 않고 곧 사임하여, 성균관 유생들이 소를 올려 벼슬에 머물도록 해달라고 하는 등 덕망이 높았다.[6]
2. 2. 2. 계축화옥 전후
아버지 김장생은 서제들이 연루된 계축화옥 때 북인의 공격을 받았으나, 혐의가 없어 처벌받지 않았다. 아버지 김장생은 계축화옥을 계기로 연산으로 내려와 문을 닫은 채 외인과 접촉하지 않고 오직 경서를 연구하는데 몰두했다. 이때 김집도 김장생을 모시고 연산으로 낙향했다. 그리고 김집 역시 자취를 감추고 뜻을 기르며 장차 몸을 마칠 듯 지냈다고 한다. 계축화옥으로 김집은 더욱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아버지 김장생을 스승으로 모시며 묵묵히 학문에 정진하여 가학을 조선예학으로 발전시키게 되었다.[1]신독재행장에 의하면 '노선생(老先生; 김장생)은 계축년 이후로 문을 닫고 외부와 접촉을 끊었으나, 학문 강론만은 그치지 않았다. 선생(김집)이 함께 모시고 앉아 좌우로 일을 보살피며 뜻 봉양할 물건을 준비하며 성리학에 깊이 몰두한지 10여 년을 하루 같이 했다. 인조반정 초에 노선생은 제일 먼저 부름을 받았고 조정에서 학행 있는 선비를 쓰려고 하니 선생에게 차례를 뛰어넘는 명령이 있었다.'고 한다.[1]
김집은 계축화옥 이후 인조반정으로 출사하기 전까지 10여 년 동안, 부친의 가르침을 집중적으로 받으며 학문을 연마하였다.[1]
2. 2. 3. 인조반정 직후
1623년(광해군 15년) 인조반정 직후 학행으로 천거되어 사헌부대사헌에 제수되었지만 사양하고 취임하지 않았다. 그러나 인조반정 직후 공신들의 월권행위와 권력남용, 탐욕스러움을 논하다가 그는 반정공신들로부터 밉보이게 되었다. 이괄의 난 역시 공신들의 잘못된 논공행상이 원인이라 지적하였다.[1]그 뒤 외직을 자청하여 5월 부여현감(扶餘縣監)이 되었다. 경연에서는 김집의 학력을 높이 사서 경연관에 임명해 중앙으로 발탁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 봉양을 위해 한사코 지방관을 희망했다고 한다. 부여현감으로 부임한 그는 제일 먼저 학교를 일으키고, 고을 정사를 바로잡는 한편, 모든 행정을 두터운 인정으로 행했으므로 교화가 마을마다 행해져 소송과 다툼이 없어지고 고을의 청년들 사이에서 문풍이 유행하였다. 부여현감으로 부임했을 때 학교를 일으키고 선정을 베푸니 백성들이 송덕비를 세웠다. 그러나 김집은 부임한지 4년 만에 병이 생겨서 신병으로 사임하게 되었다. 부여 고을 사람들은 그를 위해 송덕비를 세웠고, 후에는 서원을 세워 그의 업적을 기리고 제사를 올렸다. 이후 4개월 뒤 임피현령(臨陂縣令)으로 임명되어 나갔다. 그러나 김집은 7개월만에 다시 관직을 사퇴하고 되돌아갔다.[1]
2. 2. 4. 병자호란과 정묘호란
1634년(인조 12) 선공감 첨정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1635년 사헌부 지평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였다. 1636년(인조 14) 5월에 사헌부 장령, 6월에 종친부 전첨, 7월에 집의(執義), 8월에 용양위 부호군, 10월에 군자감 정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취임하지 않았다.이후 청음 김상헌, 우산 안방준 등과 함께 북벌론을 제창하였다. 그는 병력을 양성하고 허례허식을 폐지하며 공신들에게 지나치게 부여된 특권을 감축할 것을 진언하였다. 그러나 이는 인조 반정 공신들의 강한 반발에 부딪쳤다.
2. 2. 5. 효종 즉위 초
1649년(효종 즉위년) 김집은 '국조오례의'의 상례(喪禮)를 고례(古禮)인 '의례경전(儀禮經典)'과 비교하여, 양자의 같고 다름, 빠지고 보태진 것을 분석하고 자신의 견해를 첨가한 예서인 '고금상례이동의'를 왕에게 올렸다.[1] 김집은 '국조오례의'가 고례에 비해 많은 문제점을 지닌 예서라고 인식했다.[1] 그는 효종에게 '고금상례이동의'를 올리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1]대개 오례의는 개원례(開元禮)를 많이 써서 단상(短喪)의 오류를 범하고 있고, 깎고 보태는 과정에서 빠진 것이 대단히 많습니다. 혹 그 작은 것은 들면서 큰 것은 빼버렸고, 혹은 형식에 급급하여 내용에는 느슨했으니, 예를 강구하는 선비가 깊이 잘못되었다고 여긴 지 오래되었습니다.(신독재전서 권3 봉사)
김집은 왕조례(王朝禮)에 일대 개혁을 위해 '고금상례이동의'를 저술하여 왕에게 바쳤다.[1]
2. 2. 6. 만년
1649년 1월 공조참의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였다. 5월 인조가 승하하고 세자가 효종으로 즉위하자, 특명으로 부름을 받아 청서(淸西)의 김상헌과 함께 등용되어 가선대부 예조참판(禮曹參判)이 되고, 그해 공조참판(工曹參判)이 되어 상례이동(喪禮異同)과 시정의 개혁을 논한 시무 7조를 올렸다.[11] 효종은 즉위 후 '나를 위해 잠시 머물러 준다면 국가에는 도움이 되고, 사림들에게는 얼마나 모범이 되겠는가.' 하며 그를 계속 거듭 불러들였다.이후 대사헌, 이조판서 등에 제수되었으며, 효종, 김상헌과 더불어 북벌을 추진했다. 이후 왕명을 받아 소학의 주(註)와 중용의 구두(句讀)를 교정했다. 그해 7월에 대사헌을 제수하였고, 9월에 다시 대사헌에 제수되었다. 9월 공조참판이 되고, 10월에 사직상소를 했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이후 경연에 참가하여 중용을 강술하고 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에 대해 왕에게 강론하였다. 그해 11월에 귀향을 간청하니 대신, 홍문관, 성균관 유생들까지 상소를 올려 머무르도록 청원하였으나 뜻을 굽히지 않자 조카인 승지 김익희(金益熙)로 하여금 설득하여 왕명에 따르게 하였다. 이후 대사헌, 자헌대부, 이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세 번 상소, 세 번 대면해서 말씀드리고 사양하였다. 12월 왕의 간청에 못 이겨 조정에 들어가 시무를 하였다.
김육 등이 대동법을 추진하려 하자 김육을 규탄하며 반대하다 언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1650년 1월 왕의 간청에 따라 인물을 전형 선발하는 일을 주관하였으나 재상과 의견이 일치되지 않아 상소하여 스스로를 탄핵하고 물러났다. 그러나 효종의 거듭된 부름과 대신과 대학 유생들의 소환상소에 겨우 응했고 4월 호분위 사직(虎賁衛司直)에 제수되어 출사하였다. 그러나 유배지에 있던 김자점이 비밀리에 북벌계획을 밀고함으로써 청나라의 문책으로 조정이 어수선해지자 사임하였다. 그 뒤 김자점 일파가 숙청된 뒤 사헌부 대사헌이 되었다가 소현세자, 민회빈 강씨의 복권 여론을 주도하였다. 그 뒤 김홍욱이 민회빈 강씨의 복권과 경안군 석방을 요구하다가 장살당하자 관작을 사퇴하였다.
3. 가계
항목 | 내용 |
---|---|
할아버지 | 김계휘(金繼輝) |
할머니 | 평산 신씨 |
아버지 | 김장생(金長生) |
어머니 | 창녕 조씨 |
형 | 김은(金檃) (임진왜란 중 실종) |
동생 | 김반(金槃) |
정실 | 기계 유씨 (송당 유홍의 딸) |
적자(첫째 아들) | 김익형(金益炯) |
적손자 | 김만리(金萬里), 김만규(金萬奎), 김만질(金萬窒), 김만량(金萬量), 김만봉(金萬封), 김만당(金萬堂) |
후실 | 덕수 이씨 (율곡 이이의 서녀) |
서자(둘째 아들) | 김익련(金益煉) |
서손자 | 김만성(金萬城), 김만제(金萬堤), 김만주(金萬周), 김만용(金萬墉) |
4. 평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과 견해는 굽히지 않고 끝까지 밀고 나갔다. 조선왕조실록에는 그가 '오롯이 성품이 겸손하여 평생 스승으로 자처하지 않았다'고 평하기도 했다.[1] 김장생의 업적과 더불어, 김집은 조선 예학을 학문적 수준으로 발전시키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된다.[1]
5. 사상과 신념
김집은 아버지 김장생과 스승 성혼의 학문을 이어받아 조선 사회에 예학을 보급하고 체계화하는 데 힘썼다. 5경을 연구하고 논어를 가르치며 성리학의 근본을 다듬었다.[1]
또한 소현세자와 민회빈 강씨가 억울하게 죽었다고 주장하며, 김자점, 귀인 조씨를 비롯한 반정공신과 친청파들이 이들을 모함하여 죽음에 이르게 했다고 비판했다. 김집은 억울하게 죽은 세자와 세자빈의 복권을 공개적으로 요구했다.
5. 1. 예학 보급과 전파
아버지 김장생과 스승 성혼 등의 학문을 계승, 이를 더 깊이 연구하고 가르쳐 예학의 체계를 조선 사회에 보급, 확산시켰다. 5경의 학문을 밝히고 논어를 강하고 성리학의 근본을 정하고 다듬었다.[1]5. 2. 소현세자 복권 노력
그는 당대에 소현세자와 민회빈 강씨가 억울하게 죽었음을 천명하였다. 민회빈 강씨가 사사되자 그는 인조에 의해 제거된 소현세자와 민회빈 강씨는 아무 잘못이 없이 억울하게 죽었으며 김자점과 귀인 조씨를 비롯한 반정공신들, 친청파들의 소행이라며 억울히 죽은 세자와 세자빈의 복권을 공공연히 주장하였다.이후 소현세자와 민회빈 강씨의 복권은 서인 공신세력을 몰아내고 집권한 서인 사림세력의 당론이 되었고, 숙종 때에 그의 제자인 송시열과 송시열의 문인 김수항의 적극적인 상소로 복권되었다.
6. 저서
- 《의례문해속》
- 《고금상례이동의》
- 《신독재문집》
김집은 70세에 사계의 '의례문해'를 교정하고, 자신의 저서 '의례문해속'을 완성했다. '의례문해'는 542개 항목(8권), '의례문해속'은 151개 항목으로 구성되었다. 김집은 사계의 상 이후 학문 연구와 저술에 전념했으며, '의례문해' 교정과 '의례문해속' 편찬은 그가 동시에 완성한 것으로, 후자는 전자의 보완적 성격을 지닌다. 김집은 '의례문해'를 교정하며 문생들에게 재검토시켜 예학 교육 효과를 높이고 중의를 모았다. 그의 문인 권극중은 김집이 예를 우선하여 가르쳐 문생들이 관혼상제에 통달했다고 전한다.[1]
1649년(효종 즉위년), 김집은 '국조오례의'의 상례와 고례인 '의례경전'을 비교, 분석하고 자신의 견해를 첨가한 '고금상례이동의'를 왕에게 올렸다. 그는 '국조오례의'가 고례에 비해 문제점이 많다고 보았다. 효종에게 올린 글에서 김집은 "오례의는 개원례를 많이 써 단상의 오류를 범하고, 깎고 보태는 과정에서 빠진 것이 많습니다. 작은 것은 들면서 큰 것은 빼고, 형식에 급급하여 내용에는 느슨하니, 예를 강구하는 선비들이 잘못되었다고 여긴 지 오래되었습니다"라고 하였다. 김집은 왕조례 개혁을 위해 '고금상례이동의'를 저술했다.[1]
7. 기타
어려서 화려한 문장을 지었으며 글씨도 잘 써 획이 맑고 굳세었다고 한다. 이에 그의 필적을 얻은 사람은 보배 구슬을 얻은 듯 여겼다는 이야기도 전한다.[1]
송시열, 송준길, 민정중, 민유중, 김수항, 김수흥, 김익훈 등이 모두 그의 제자였다. 또한 송시열의 후대에서도 윤증, 박세당 등의 소론계 학맥으로도 분화, 계승되었다. 위로는 아버지 김장생과 이이, 성혼을 거쳐 조광조, 정몽주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성리학 학문을 이어받아 송시열, 윤증 등에게 전해주어 기호학파(畿湖學派)를 형성시켰으며 예학(禮學)을 체계화하였다. 이들은 김장생을 스승으로 모시다가 나중에 김집을 스승으로 하면서 보통 김집을 스승님으로, 김장생은 노스승님, 큰스승으로 불렀다.[1]
아버지 김장생과 함께 서인 예학의 태두가 되었다. 이는 남인과 북인계 예학의 근간이 된 정구의 학파와 대립을 초래한다.[1]
김집은 파리함은 옷을 이기지 못하는 것 같고, 겸손함은 말을 겨우 이겨내는 듯하지만, 일을 처리할 때는 의리로써 판단하고 과감하게 처리하는 추진 능력을 겸비하고 있었다. 그가 외유내강한 성품과 활동을 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러므로 김집의 문하에서 공부한 문인들은 선생에게 높은 관직에 나가 국정을 맡아 줄 것을 끊임없이 요구했다. 여러 번 관직에 임명되었으나 김집은 서울에 오래 머물지 않고 연산으로 돌아가 자신의 학문에 더욱 침잠했다.[1]
그의 문하생들 중에서 송시열을 당수로 하는 노론과 또다른 문인 윤선거의 아들 윤증을 당수로 하는 소론이 나뉘었다.[1]
참조
[1]
문서
1574년 음력 6월 6일
1574-06-06
[2]
문서
1656년 윤 5월 13일
1656-05-13
[3]
문서
그의 서녀가 김집의 부실이다.
[4]
문서
음력 6월 6일
[5]
문서
윤 5월 13일
[6]
인물
한국학중앙연구원 인물
[7]
웹인용
한국역사정보통합시스템
http://yoksa.aks.ac.[...]
2008-04-14
[8]
서적
조선의 문화공간 2
휴머니스트
2007
[9]
서적
일상으로 본 조선시대 이야기 1
청년사
2008
[10]
서적
청백리 열전(하)
매일경제신문사
2007
[11]
문서
이를 본 효종이 탄복하여 그 소장을 늘 옆에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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