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S. 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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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윌리엄 S. 하니는 1800년 테네시주에서 태어나 미국 육군 장교로 복무했으며, 1812년 전쟁의 영웅 앤드루 잭슨의 추천으로 해군 소위로 임관했으나 육군에서 복무했다. 그는 1825년부터 대평원에서 아메리카 원주민과 교류했으며, 블랙 호크 전쟁과 멕시코-미국 전쟁에 참전하여 명성을 얻었지만, 한나 살인 사건과 멕시코에서의 군기 문란으로 논란을 겪었다. 남북 전쟁 발발 당시 미주리주 세인트루이스의 서부 사령부 지휘관이었으나, 미주리 분리주의자들과의 갈등으로 지휘권을 상실했다. 퇴역 후 인디언 평화 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며 여러 조약 체결을 도왔으며, 1889년 사망하여 알링턴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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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S. 하니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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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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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일 | 1800년 8월 22일 |
출생지 | 테네시주 매디슨 |
사망일 | 1889년 5월 9일 |
사망지 | 플로리다주 올랜도 |
묻힌 곳 | 알링턴 국립묘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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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 경력 | |
소속 | 미국 육군 연방군 |
복무 기간 | 1818년 – 1863년 |
계급 | [[파일:Union Army brigadier general rank insignia.svg|35px]] 준장 [[파일:Union Army major general rank insignia.svg|35px]] 명예 소장 소장 |
부대 | 제1 미국 보병 연대 |
지휘 | 제2 미국 용기병 연대 제5 군관구 오리건 관구 서부 관구 |
참전 | 인디언 전쟁 |
2. 유년기 및 초기 군 경력
윌리엄 하니는 군인 가문 출신으로, 그의 군 경력 시작에는 루이지애나주 배턴루지에서 군 외과의사로 근무하던 형 벤자민 F. 하니 박사의 도움이 있었다. 벤자민은 1812년 전쟁의 영웅이자 당시 남부군 사령관이었던 앤드루 잭슨에게 하니의 군 입대를 추천하는 서신을 요청했고, 이를 통해 하니는 군 경력을 시작할 기회를 얻었다.
2. 1. 출생 및 가족 배경
윌리엄 S. 하니는 1800년 8월 27일 테네시주 헤이스보로에서 태어났다. 헤이스보로는 컴벌랜드강 유역에 위치한 마을로, 당시에는 테네시주 내슈빌에서 몇 마일 떨어진 곳이었으나 현재는 내슈빌시에 편입되었다. 그는 지역 사립 학교에 다녔다. 그의 아버지는 육군 장교였던 토마스 하니이며, 형인 벤자민 F. 하니는 육군 군의관이었다.2. 2. 해군 입대 시도와 육군 임관
윌리엄 하니의 군 경력은 그의 형이자 루이지애나주 배턴루지에 주둔하던 육군 군의관 벤자민 F. 하니 박사의 도움으로 시작되었다. 1817년, 벤자민은 당시 남부군 사령관이자 1812년 전쟁의 영웅이었던 앤드루 잭슨에게 동생 윌리엄의 해군 입대를 추천하는 서신을 해군 장관에게 써 달라고 부탁했다. 잭슨은 1817년 7월 23일 이 요청에 따라 서신을 작성했다.같은 해, 하니는 형을 방문하여 고위 군 장교들을 만났고 그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 결과 장교들은 하니를 미국 해군 소위로 임관시키는 데 동의했으며, 제임스 먼로 당시 대통령이 이를 승인하고 서명했다.
그러나 하니는 해군 대신 앤드루 잭슨 휘하의 육군에서 복무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1818년 제1 미국 보병 연대의 소위로 임관하며 육군 경력을 시작했다. 그의 초기 임무 중 하나는 해적 장 라피트가 활동 근거지를 루이지애나 준주에서 스페인령으로 옮기도록 압박하는 작전에 참여한 것이었다.
3. 군 경력
윌리엄 S. 하니는 1818년 제1 미국 보병 연대의 소위로 군 경력을 시작했다. 그는 초기 블랙 호크 전쟁에 참전했으며, 이후 플로리다에서 벌어진 제2차 세미놀 전쟁에서는 세미놀 족과의 전투에서 명성을 얻었다. 그러나 1834년에는 자신이 부리던 노예 여성을 폭행하여 숨지게 한 혐의로 기소되었으나 재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아 논란이 되기도 했다.
멕시코-미국 전쟁에서는 제2 용기병 연대를 이끌고 여러 전투에 참여하여 공을 세웠으나, 상관과의 갈등으로 군법회의에 회부되기도 했다. 전쟁에서의 활약으로 명예 준장으로 진급했다.
전쟁 이후에는 대평원 지역에서 아메리카 원주민과의 충돌에 깊이 관여했다. 특히 1855년 애쉬 할로우 전투에서는 수 족 마을을 공격하여 여성과 어린이를 포함한 많은 희생자를 내어 "여자 살해자"(Woman Killer영어)라는 비판적인 별명을 얻었다. 이후 유타 전쟁과 피 흘리는 캔자스 사태에도 관여했으며, 오리건 관구 사령관 재직 중에는 영국과의 돼지 전쟁을 촉발시키는 등 외교적 마찰을 빚기도 했다. 1858년 준장으로 진급하여 남북 전쟁 발발 직전까지 군 복무를 이어갔다.
3. 1. 초기 활동 (1818년 ~ 1834년)
1818년 앤드루 잭슨 휘하 제1 미국 보병 연대의 소위로 군 복무를 시작했다. 해적 장 라피트가 활동 근거지를 루이지애나 준주에서 스페인령으로 옮기는 데 기여했다.1825년 대평원에서 아메리카 원주민과 처음 접촉하며 오랜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헨리 앳킨슨 대령과 벤자민 오펄론이 이끄는 상부 미주리 지역 부족과의 조약 체결 원정에 참여했다. 1832년 블랙 호크 전쟁에서는 소크 앤드 폭스 부족과의 전투에 참여했으며, 당시 재커리 테일러 장군의 부관으로 활동했다.[1] 이 전쟁에서 그는 테일러 장군의 사위이자 동료 장교였던 제퍼슨 데이비스를 만나 함께 싸우며 친분을 쌓았다.
3. 2. 한나 살인 사건 (1834년)
1834년 6월, 미주리주 세인트루이스의 제퍼슨 배럭스 군사 기지에서 급료 지불 담당 장교로 복무하던 중, 하니는 노예 여성이었던 한나를 가죽 채찍으로 때려 숨지게 한 혐의로 기소되었다. 그는 격분하여 한나를 폭행했으며, 체포를 피하기 위해 다른 주로 도망가려 했다. 검시관은 한나가 하니의 폭력적인 행위 때문에 사망했다고 결론 내렸고, 1834년 7월 배심원단은 하니를 살인죄로 기소했다. 재판은 미주리주 유니언으로 옮겨져 1835년 봄에 열렸다. 전기 작가 조지 롤리 아담스에 따르면 "하니가 안심할 수 있는 평판"을 가진 판사가 재판을 맡았다고 한다. 15명의 증인이 증언했지만 그 내용은 기록되지 않았고, 하니는 "분명히 한나의 죽음에 책임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무죄 판결을 받았다.[2]3. 3. 제2차 세미놀 전쟁 (1835년 ~ 1842년)
제2차 세미놀 전쟁(1835년 ~ 1842년) 동안 하니는 대담하고 무자비한 습격으로 세미놀족과의 전투에서 명성을 얻었다.[3] 하니와 그의 부대는 종종 세미놀족의 전쟁 지도자이자 신비주의자인 아비아카(샘 존스)와 싸웠다. 하니는 1838년 1월 제2차 로하해치 전투에서 아비아카와 처음으로 싸웠으며, 1839년 7월에는 칼루사해치 전투에서 아비아카의 전사들에게 공격을 받았다.3. 4. 멕시코-미국 전쟁 (1846년 ~ 1848년)
멕시코-미국 전쟁 동안 하니는 대령으로 임명되어 제2 용기병대를 지휘했다. 그들은 존 E. 울의 지휘 아래 치와와 원정과 부에나 비스타 전투에 참전했다. 하니는 베라크루스 포위전에서 기병대 선임 장교로서 윈필드 스콧의 군대에 합류했다. 그러나 하니의 고집 세고 반항적인 성격은 문제를 일으키기도 했다. 하니가 몬테레이를 떠나라는 명령을 거부하자 에드윈 V. 섬너 소령으로 교체되었고, 명예 소장 윌리엄 J. 워스는 하니를 군법회의에 회부하여 결국 유죄 판결을 받았다.[3]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임스 K. 포크 대통령은 하니를 지휘에서 해임하라는 스콧의 판결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하니의 유일한 잘못은 민주당 소속이라는 점이라고 판단했다. 이 사건은 스콧 장군과 최고 사령관인 포크 대통령 사이의 관계를 악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4]이후 데이비드 트윅스 사단의 제1여단을 임시로 지휘하게 된 하니는 세로 고르도 전투에서 뛰어난 활약을 보여 명예 준장으로 진급했다. 그는 콘트레라스 전투, 추루부스코 전투, 멕시코 시티 전투에서 다시 기병 지휘관으로 복귀하여 전투를 이끌었다. 하지만 전쟁 중 세인트 패트릭 대대 소속으로 체포된 포로들, 즉 미 육군 탈영병과 탈출한 노예들을 학대했다는 혐의를 받기도 했다. 한편, 하니는 멕시코에서 복무한 미국 장교들이 모여 만든 1847년 아즈텍 클럽의 창립 멤버가 되었다.
3. 5. 제1차 수 전쟁 (1855년 ~ 1856년)
1854년, 네브래스카 준주에서 미 육군 소규모 부대가 살해된 그래튼 학살 사건 이후, 윌리엄 S. 하니는 수 족에 대한 징벌 원정을 지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11] 그는 오리건 트레일에서 이주민들과 충돌했던 브룰레 라코타를 목표로 삼았다.1855년 9월 2일과 3일, 하니의 부대는 애쉬 할로우 전투에서 리틀 선더가 이끄는 브룰레 라코타 마을을 공격했다. 이 전투는 네브래스카 서부의 블루 워터 크릭(현재의 애쉬 할로우 주립 역사 공원)에서 벌어졌다. 하니의 군대는 리틀 선더 추장과의 협상을 지연시키는 동안 기습적으로 마을을 공격하여, 보병의 사격으로 라코타족을 기병 쪽으로 몰아넣어 큰 피해를 입혔다.[14][15] 이 공격으로 마을 주민 약 250명 중 절반 가량이 학살되었으며, 희생자 중에는 동굴에 숨어 있던 여성과 어린이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11][14][15] 초기 보고에 따르면 86명이 사망하고 70명의 여성과 어린이가 포로로 잡혔으나, 이후 추가 사상자가 발견되면서 총 사망자 수는 더 늘어난 것으로 확인되었다. 하니의 군대는 마을의 티피를 약탈하고 불태웠다.[14][15]
이 잔혹한 행위로 인해 하니는 수 족 사이에서 "여자 살해자"(Woman Killer영어)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을 얻었다.[14] 또한, 전투 후 다코타 준주의 피에르 요새까지 진군하여 라코타족에게 겨울 전투를 제안한 그의 무모한 행동 때문에 "미친 곰"(Mad Bear영어)이라는 라코타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다.[11] 이 군사 작전의 성공 이후 하니는 이동 부대가 영구적인 군사 기지를 대체할 수 있다고 제안하기도 했다.[11]
3. 6. 기타 군 경력 (1849년 ~ 1861년)
1849년 5월 14일, 명예 소장 윌리엄 J. 워스가 사망하자, 하니는 텍사스 정착지 대부분을 포함하는 군사 부서 넘버 5의 지휘를 맡게 되었다. 그는 제1차 수 전쟁의 배경이 된 인디언 습격을 통제하는 임무를 받았으나, 실제로는 1849년 7월 7일까지, 1851년 3월 9일부터 9월 15일까지, 그리고 1852년 12월 3일부터 1853년 5월 11일까지 세 차례의 짧은 기간 동안만 해당 부서를 지휘했다. 그 사이에는 조지 N. 브루크 대령과 퍼시포어 N. 스미스 대령이 지휘권을 넘겨받았다.1854년, 하니는 네브래스카 준주에서 발생한 그래튼 학살 이후 수 족에 대한 징벌 원정을 이끌도록 소환되었다. 그는 오리건 트레일에서 이주민들과 충돌했던 브룰레 라코타 부족을 공격 대상으로 삼았다. 1855년 9월 2일과 3일에 벌어진 애쉬 할로우 전투(블루 워터 크릭 전투)에서, 하니의 부대는 네브래스카 서부 블루 워터 크릭(현재 애쉬 할로우 주립 역사 공원)에 있던 리틀 선더 추장의 마을을 공격하여 약 250명 중 절반 가량을 살상했다. 희생자 중에는 동굴에 숨어 있던 여성과 아이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전투 후 하니는 다코타 준주의 피에르 요새로 이동하여 라코타족에게 겨울 전투를 제안했고, 이로 인해 '미친 곰'이라는 라코타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 원정의 성공 이후 하니는 영구적인 군사 기지 대신 이동 부대를 활용할 것을 제안하기도 했다.
하니는 유타 전쟁 중 잠시 군대를 지휘했으며, 이후 피 흘리는 캔자스의 게릴라전에 대처하기 위해 파견된 부대의 지휘를 맡았다.
그 후 오리건 관구의 지휘관으로 임명된 하니는 조지 E. 피켓 대위와 군대를 샌 후안 섬으로 보내 영국과의 돼지 전쟁을 촉발시켰다. 이 사건으로 대영 제국과의 갈등이 불거지자 육군은 하니를 세인트루이스로 소환했다.
1858년 6월 14일, 하니는 준장으로 진급했다. 당시 57세였던 그는 윈필드 스콧, 존 울, 데이비드 트윅스 등 1812년 전쟁 참전 용사들과 함께 정규군 장군 4명 중 가장 젊었다 (당시에는 정년 제도가 없었으며, 다음으로 젊은 장군은 70세였다).
4. 미국 남북 전쟁 (1861년 ~ 1865년)
미국 남북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하니는 여전히 미주리주 세인트루이스의 제퍼슨 배럭스에 있는 육군 서부 사령부의 지휘관이었다. 당시 미주리 주지사 클레이본 잭슨은 분리주의를 지지했지만, 주 내 다수는 연방 잔류를 선호했다. 서머 요새 포격 이후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이 군대를 소집하자, 잭슨 주지사는 이를 거부하고 미주리의 연방 탈퇴를 위해 남부 연합과 비밀리에 협력하기 시작했다.
1861년 5월 10일, 세인트루이스 조병창 사령관 나다니엘 라이언 대위는 하니의 허가 없이 비공식 연방주의자 부대를 이끌고 조병창을 점령하려던 주 방위군을 체포했다. 이 캠프 잭슨 사건은 세인트루이스에서 유혈 폭동으로 번졌고, 하니는 이 사태에 충격을 받았다.
주 의회는 방위군을 미주리 주 방위군으로 재편하고 연방군의 침략에 저항할 권한을 부여했다. 하니는 상황을 안정시키기 위해 노력했고, 주 방위군 사령관이자 하니의 조카사위인 스터링 프라이스와 프라이스-하니 휴전을 맺었다. 이 협정은 주 방위군이 미주리 대부분을 통제하고 연방군은 세인트루이스 인근에 머무르기로 하는 내용이었다. 분리주의 성향이었지만 연방에 충성을 맹세했던 클레이본 잭슨 주지사도 이 합의에 관여했다.
그러나 이 휴전은 미주리의 연방주의자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특히 공화당 지도자 프랜시스 프레스턴 블레어 주니어는 프라이스가 친남부 연합 세력의 조직화를 막거나 연방주의자들을 보호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게다가 하니가 테네시주 출신이라는 점 때문에 그의 연방에 대한 충성심에 의문이 제기되기도 했다. 블레어는 이 모든 상황을 워싱턴 D.C.의 링컨 행정부에 보고했고, 하니를 라이언으로 교체할 권한을 얻어 5월 30일 하니를 해임했다.
하니는 상황 논의를 위해 워싱턴으로 소환되던 중, 1861년 4월 25일 하퍼스 페리에서 남부 연합군에게 체포되었다.[8] 남부 연합의 로버트 E. 리 장군으로부터 지휘관직을 제안받았으나 거절했다. 테네시 출신이라는 점 때문에 남부 연합군은 그를 석방하여 워싱턴으로 갈 수 있도록 허락했다.
워싱턴 D.C.에 머물면서 하니는 여러 행정 직책을 수행했다. 더 이상 야전 지휘를 맡을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해지자 1863년에 퇴역하여 세인트루이스에서 여생을 보냈다. 그의 길고 뛰어난 군 경력을 인정받아 1865년에는 소장으로 명예 진급했다.
5. 은퇴 후 활동 및 사망
앤드루 존슨 대통령은 하니를 인디언 평화 위원회 위원으로 임명했고, 이에 따라 하니는 1865년과 1867년에 조약을 협상하기 위해 대평원으로 돌아갔다. 그는 미국 의회에 과거 아메리카 원주민과의 조약들을 존중할 것을 촉구하기도 했다. 하니는 1865년 코만치 및 카이오와 부족과의 리틀 아칸소 조약, 1867년 메디신 로지 조약, 그리고 1868년 브룰레족과의 포트 라라미 조약 체결 과정에 참여했다. 1868년에는 미주리 강 유역의 웨트스톤 크릭, 샤이엔 강, 그랜드 강 세 곳에 수 부족 에이전시(관리 기관)를 설립했다.[1]
이후 하니는 미시시피주의 걸프 연안에 위치한 패스 크리스티안으로 은퇴했다. 그곳에서 오랜 친구였던 제퍼슨 데이비스와 포트 크로포드에서 함께 복무했던 시절과 거의 결투 직전까지 갔던 일 등을 회상하며 시간을 보냈다. 두 사람은 미국 남북 전쟁 당시 서로 다른 편에서 싸웠던 과거를 뒤로하고 교류했다.[9] 데이비스가 사망한 후, 하니는 플로리다주 올랜도 지역으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사망했다.
6. 유산
(내용 없음)
6. 1. 사적지
윌리엄 S. 하니 소장 여름 별장은 미국 미주리주 설리번, 크로포드군에 위치해 있으며, 하니 저택 재단이 사유하고 있다. 설리번 상공 회의소는 재단과 협력하여 이 집의 방문을 주선할 수 있으며, 이 집은 국가 사적지 등록부에 등재되어 있다.[16]6. 2. 지명
7. 개인사
1833년, 세인트루이스에서 그는 존 뮬란피의 딸인 메리 뮬란피와 결혼했다. 존 뮬란피는 아일랜드 이민자로 볼티모어와 세인트루이스에서 활동한 부유한 상인이었으며, 세인트루이스 최초의 백만장자였다. 하니는 결혼 후 가톨릭으로 개종했으며, 부부는 존 뮬란피 하니(1847–1905)를 포함하여 세 자녀를 두었다.
그러나 하니는 1850년 이후 아내를 단 두 번만 만났고, 메리 뮬란피는 1853년 자녀들과 함께 프랑스로 이주하여 1860년에 사망했다. 그녀의 자녀들은 이후 세인트루이스로 돌아왔다. 손녀 중 한 명인 마리 앙투아네트 하니 보레가르(1868–1940)는 남부 연합 장군 피에르 보레가르의 아들과 결혼했다.
1884년, 하니는 메리 세인트 시르(1826–1907)와 재혼했다.
8. 평가
하니는 거친 이분법의 시대에 고립된 개인주의자를 대표하는 인물로 평가받는다.[13] 한때 유명한 "인디언 사냥꾼"이었던 그는 아메리카 원주민에 대한 지식 덕분에 인디언 평화 위원회에서도 활동했다. 그러나 이 임명은 그가 원주민을 옹호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을 상대로 성공적으로 전쟁을 수행한 몇 안 되는 인물 중 하나였고 그들의 관심을 끌 수 있었기 때문에 이루어진 것이었다.[13]
특히 1855년 블랙힐스 남쪽 블루 워터 크릭에서 벌인 학살(일명 "하니 학살")로 인해 수족 사이에서는 "여자 살해자"라는 악명으로 불렸다.[14][15] 당시 하니는 리틀 썬더 추장과의 협상을 지연시키는 동안, 그의 군대는 몰래 마을로 접근했다. 보병이 먼저 사격을 시작했고, 도망치는 원주민들을 기병 쪽으로 몰아넣어 큰 피해를 입혔다. 초기 보고에 따르면 원주민 86명이 사망하고 여성과 어린이 70명이 포로로 잡혔으나, 이후 추가 사상자가 발견되어 총 사망자 수는 더 늘어났다. 하니의 군대는 원주민의 티피를 약탈하고 불태웠다.[14][15]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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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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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ttle of Blue Wa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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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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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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