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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기 (명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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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유기(劉基)는 1311년 중국 원나라 말기에 태어난 인물로, 학문과 병법에 능통하여 명나라 건국에 기여한 인물이다. 그는 원나라에서 관료로 활동하며 청렴함을 인정받았고, 주원장의 참모가 되어 진우량과 장사성 토벌 전략을 수립하는 등 군사적, 정치적으로 활약했다. 명나라 건국 후에는 태사령과 어사중승을 역임하며 기강 확립에 힘썼으나, 다른 신하들의 모함으로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갔다. 유기는 말년에 사망했으며, 호유용의 독살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그는 예언시 소병가(燒餅歌)를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대중문화에서 예언자, 군사 전략가로 묘사되며 숭배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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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기 (명나라)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류지
본명류기
백온(伯溫)
시호문성(文成)
출생일1311년 7월 1일
출생지저장성 원청현
사망일1375년 5월 16일
사망지저장성 원청현
별칭류백온(劉伯溫)
문성(文成)
자녀류련
류징
직업정치인, 군사 전략가, 철학자
작위성의백(诚意伯)
참고 문헌

2. 생애

유기(劉基)는 원나라 말기와 명나라 초기의 걸출한 인물로, 학자, 정치가, 군사 전략가, 그리고 작가로서 다방면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1356년 주원장이 남경을 함락하고 절강성 동부를 장악한 후, 유기는 송렴 등과 함께 "절동(浙東)의 네 선생"으로 불리며 주원장의 초빙을 받았다.[28] 모친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주원장의 초빙에 응한 유기는 그의 참모가 되었다.

주원장의 참모로서 유기는 시무십팔책(時務十八策)을 올려 주원장의 갈 길을 제시했다. 홍건적의 명목상 수령인 한림아에 대해 "목동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사람을 모시면 어떻게 되겠나?"라고 비판했다. 또한 주원장이 장사성을 먼저 공격하려 하자, 진우량을 먼저 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진우량이 명분이 약하고 상류에 위치해 있으며, 장사성은 진우량을 돕지 않을 것이므로 진우량을 먼저 제거하면 장사성은 고립되어 쉽게 공략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러한 전략은 주원장이 남방을 안정시키고 북쪽의 중원을 차지하는 데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고 평가받는다.[29]

주원장은 유기의 식견을 높이 사 그를 "우리의 장량"이라고 부르며 신뢰했다.[30]

명나라 건국 후 유기는 성의백(誠意伯)에 봉해지고, 태사령어사중승을 역임하며 조정 안정에 힘썼다. 그러나 엄격한 법 집행을 주장하여 이선장, 호유용 등 다른 신하들의 미움을 샀다. 유기는 이선장이 죄를 추궁받을 때 그를 보호하려 했으나, 1371년 좌승상 이선장이 사임한 후 홍문관학사였던 유기도 왕광양, 호유용 등의 압박을 느껴 사임하고 은퇴했다.

주원장은 유기에 대한 중상모략에도 그를 신뢰했지만, 유기는 주원장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 남경에 머물다가 근심으로 병을 얻었다. 1375년 주원장은 그를 고향으로 돌려보냈으나, 유기는 병을 이기지 못하고 한 달 만에 세상을 떠났다.

2. 1. 원나라 시기

1311년 절강성 남전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해 한 번 읽은 책은 다 외웠고 문장을 잘 썼다. 특히 경학에 능통하고 다양한 학설에도 밝았다. 14살 때 『춘추』를 배웠는데 줄줄 읽을 뿐 아니라 책 전부를 외워서 쓸 수도 있었다.[28]

원나라 말기 과거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고, 서주(徐州) 고안(高安)의 현승(縣丞)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강직함이 지나쳐 상관과 마찰 끝에 관직에서 물러났다. 얼마 후 다시 강절(江浙) 유학부제거(儒學副提擧)에 부임했으나, 역시 탄핵을 받아 사퇴한 후 고향에 은둔해서 노도원(盧道元), 우문공량(宇文公諒) 등 문인들과 어울려 서호(西湖) 유람으로 시간을 보냈다.

유기는 기인이었다. 천하를 이야기할 때는 신중하고 엄숙한 기색이 얼굴에 드러났고, 병법은 깊이를 재기 어려울 정도로 다양했고, 천문과 지리에 통달했으며, 미래를 정확하게 예측하는 재주까지 갖추었다. 『명사(明史)』 유기전(劉基傳)에는 “세상에는 그가 음양설을 이용하여 점 치는 기술이 능하다고 신기하게 여기지만, 그 정도에 머무는 것이 아니다."라고 적고 있다. 점을 쳐서 앞날을 내다보는 게 아니라 '치국평천하'라는 뚜렷하고 원대한 전략을 품고 미래를 예측했다는 뜻이다.

원나라의 관료로 25년간 복무하면서 청렴하고 정직하다는 평판을 얻었고 뛰어난 학자이자 전략가로 알려졌다.[5] 1348년에는 군사 직책에 임명되어 왕조에 대한 남부 반란을 진압하는 임무를 맡았다. 반란 지도자는 유기에게 뇌물을 제공하여 자신을 구하려 했으나, 유기가 거절하자 반란군은 베이징으로 가서 뇌물을 써서 호의를 얻는 데 성공했다.[6]

분리주의자가 정권의 호의를 얻자, 공직과 봉급을 받았다. 이 사건 이후 유기와 원나라 정부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1349년과 1352년에 두 번이나 사임을 시도했고, 1358년에는 좌천되어 마침내 고향으로 돌아가 은퇴했다.[5]

2. 2. 명나라 건국과 활동

1356년 주원장이 남경을 함락하고 절강성 동부를 장악한 후, 유기는 장일, 섭침(葉琛), 송렴(宋濂) 등과 함께 "절동(浙東)의 네 선생"으로 불리며 주원장의 초빙을 받았다.[28] 모친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주원장의 초빙에 응한 유기는 그의 참모가 되어 시무십팔책(時務十八策)을 올리는 등 주원장의 길을 제시했다.[29]

유기는 홍건적의 명목상 수령이었던 한림아에 대해 "목동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사람을 모시면 어떻게 되겠나?"라며 부정적인 견해를 보였다.[29] 또한 주원장이 장사성을 먼저 공격하려 하자, 진우량을 먼저 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진우량이 명분이 약하고 상류에 위치해 있으며, 장사성은 진우량을 돕지 않을 것이므로 진우량을 먼저 제거하면 장사성은 고립되어 쉽게 공략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러한 전략은 주원장이 남방을 안정시키고 북쪽의 중원을 차지하는 데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고 평가받는다.[29]

주원장은 유기의 식견을 높이 사 그를 "우리의 장량"이라고 부르며 신뢰했다.[30] 유기는 명나라 건국 후 성의백(誠意伯)에 봉해지고, 태사령어사중승을 역임하며 조정 안정에 힘썼다.

유기는 원나라에 맞선 주원장의 반란에서 활약했다. 그는 통치술, 중국 철학, 학술 저작, 기술 등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가졌다. 회의적인 자연주의자였던 그는 중국 천문학, 역법, 자력, 그리고 풍수에 관심을 가졌다. 그는 수학자이자 연금술사인 조우친과 친하게 지냈으며, 교유와 협력하여 화약 무기 사용법을 설명하는 군사 기술 논문인 ''화룡경''을 편집하고 편찬했다. 그는 "천둥은 대포에서 쏘아진 불과 같다"고 말하기도 했다.[4]

유기는 주원장의 행정 업무뿐만 아니라 육상 및 해상 전투에서 지휘관으로 참전하여 초기 명나라 해군을 이끌었다. 주원장은 유기에게 원나라 군대로부터 저장성을 모두 정복하는 작전을 맡겼다.[8] 또한 적대적인 중국 반란군과 왜구에 대한 군사적 사업을 책임졌다.[8] 그의 군대는 화창 사용에 성공의 많은 부분을 기인했다.[8] 이 기간 동안 그는 ''백전기략''(百戰奇略)과 ''시무십팔책''(時務十八策)이라는 책을 저술했다.[9] 주원장은 유기 외에도 서달, 등우, 상우춘 등 유능한 장군들을 얻게 되면서 유기가 직접 군대를 지휘하는 경우는 드물었고, 유기는 전략적 조언을 구하는 경우가 가장 많았다.[1]

2. 3. 말년과 죽음

유기는 주원장의 의심을 피하고자 남경에 머물렀으나, 근심이 극에 달해 병을 얻었다. 1375년 주원장은 그를 고향으로 돌려보냈지만, 유기는 병을 이기지 못하고 한 달 만에 세상을 떠났다. 유기가 사망한 지 4년 후, 호유용이 유기를 독살했다는 의혹이 퍼졌다.[26] 유기의 장자인 유련(劉璉)이 호유용의 압박을 못 이기고 1377년 우물에 뛰어들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일도 의혹을 부채질했다. 그러나 호유용이 유기를 제거하려는 황제의 뜻을 알아채고 이 일을 저질렀다는 의혹도 있다. 어쨌든 이 일로 '호유용의 음모'로 불리는 대숙청이 시작됐고, 주원장은 개국공신과 그 가솔 수만 명을 학살했다. "덕을 쌓아 형벌을 줄여야 합니다. 성군은 정치에서 엄격함과 관대함을 함께 품어야 함을 유념하십시오."라는 유기의 마지막 충언도 소용없었다.

현대 학자들은 유기의 정확한 사망 원인에 대해 불확실하다고 보고 있다. 1375년 1월 말, 유기는 감기에 걸렸고, 주원장은 호유용을 보내 유기에게 어의를 찾게 했다. 그러나 유기는 어의의 약을 복용한 후, 마치 울퉁불퉁한 돌들이 위에서 짓눌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고, 이로 인해 더욱 고통스러워했다. 유기는 주원장에게 호유용의 어의의 약을 복용한 후 더욱 고통스러워졌다고 말했다. 주원장은 이 말을 듣고 유기에게 위로의 말만 건넸고, 유기는 이에 마음이 상했다. 3월 말, 유기는 이미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집에 돌아온 그는 모든 약을 거부하고 정상적인 식단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결국 4월에 유기는 사망했다. 일부 학자들은 유기가 황제에게 독살되었다고 믿는다.[3]

유기가 사망한 지 5년 이내에, 유기를 모함하여 관직을 얻었던 호유용은 스스로 홍무 황제에 반역을 꾀한 혐의를 받았다. 이후 황제의 편집증적인 음모 제거 노력으로 3만에서 4만 명이 처형되었다.[12]

3. 사상과 업적

유기는 원나라에 맞선 주원장의 반란에 참여하여 활약했다. 그는 통치술, 중국 철학, 학술 저작, 기술 등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가졌다. 그의 철학적 견해는 회의적인 자연주의자였으며, 중국 천문학, 역법, 자력, 풍수 등에 관심을 가졌다. 그는 수학자이자 연금술사인 조우친과 친하게 지냈으며, 동시대의 장군이자 학자인 교유와 협력하여 다양한 화약 무기의 사용법을 설명하는 군사 기술 논문인 ''화룡경''을 편집하고 편찬했다. 그는 화약 무기에 매우 관심이 많았으며, "천둥은 대포에서 쏘아진 불과 같다"고 말하기도 했다.[4]

유기가 주원장에게 읊은 가장 유명한 예언시는 소병가(燒餅歌)라고 불린다.[3][13][14] 이 시는 암호 같은 구절로 쓰여 있어서 이해하기 어렵다. 일부 사람들은 이 소병가가 1449년의 토목의 변과, 중화민국으로 이어진 1911년의 신해 혁명을 포함한, 중국의 미래 사건들을 예언했다고 믿는다.[3]

주원장을 섬겨 명나라 건국에 큰 공을 세웠으며, 이후 명나라를 안정시키는 데 헌신했다. 송렴과 함께 당대 최고의 문필가로 알려져 있다. 저서로는 『울리자(郁離子)』 10권, 『복부집(覆瓿集)』 24권, 『사정집(写情集)』 4권, 『려미공집(犁眉公集)』 5권이 있다. (『려미공집(犁眉公集)』 5권은 유기의 사후 그의 장남인 유련이 아버지의 초고를 모아 이름 붙인 것이다). 중국에서는 마술사적인 군사로 숭배받고 있으며, 삼국 시대제갈량과 비견되며, 명나라 초기를 배경으로 하는 소설, 희곡 등에 자주 등장한다. 소설이나 희곡에서는 주로 자(字)로 불리므로, 역사상의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자를 딴 '''유백온'''이 더 친숙하게 불린다. 차남은 유경이다.

4. 평가 및 의의

유기는 여러 책을 남기고 문장으로도 유명했지만, 후세 사람들은 그의 학문적 성과보다 군사 전략을 더 높이 평가했다. 명나라 말기 문인 초굉(焦竤)은 『옥당총어(玉堂叢語)』에서 "유기는 문인으로 비범한 기상이 있어 사람들 상상을 초월했다. 특히 천문과 병법에서 핵심을 꿰뚫는 통찰력이 뛰어났다."라고 칭찬했다.[28]

명나라 말기의 유명한 문인 장대(張岱)는 유기의 삶에 대해 "유백온은 큰 공을 세웠지만 그 보답은 크지 않았다. 그는 배운 재주로 출세했고, 그 재주로 인해 불행해졌다. 평생 성품이 강직하여 일에 조금도 망설임이 없었다."라고 평가했다.[32]

중국에서 유기는 주원장과 비견되거나 그 이상의 지명도를 자랑하며, 이선장이나 서달과 같은 다른 주원장의 공신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이는 명대 소설이나 강담에서 유기가 주역으로 다루어진 것이 요인이며, 소설이나 강담에 등장하는 유기는 예언자로 묘사된다. 유기에 의해 쓰여졌다고 하는 예언서 중에서 유명한 것이 燒餅歌|소병가중국어이다.

『소병가』의 전설에 따르면, 어느 날 주원장이 소병[19]을 먹고 있을 때 유기가 배알을 청하여 궁중을 방문했다. 주원장은 먹다 남은 소병을 사발에 숨겨 놓고 그것을 유기에게 점으로 맞추게 했고, 유기는 "반은 해 같고 반은 달 같네. 일찍이 금룡에게 한 입 베어 물렸네. 이것은 음식이네."라고 대답했다고 전해진다.

이 대답에 놀란 주원장이 유기에게 간청하여 명나라의 미래를 점치게 했고, 유기는 이에 대해 암유로 가득 찬 시로 점친 결과를 말했다고 한다. 그중에는 원자 폭탄의 발명까지 예언했다고 하는 것조차 있다.[20]

유기 자신은 유학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마법사적인 군사의 이미지가 증폭되었기 때문에, 점복서의 저자에게 가탁되기도 했다.[21] 유기의 인기는 현대에도 매우 높으며, 유기를 주역으로 한 TV 드라마[22]·게임 등이 만들어지고 있다.

서촉의 인사 조천택은 강좌의 인물을 논할 때, 으뜸으로 유기를 칭찬하며, 제갈공명의 동료라고 평했다.[23]

삼국지연의』의 적벽 대전의 화계 묘사는 유기의 진언에 의해 진우량을 화계로 격파했을 때(파양호 전투)의 묘사를 나관중이 참고했다고 전해지며, 또한 연의 속의 제갈량의 인물 묘사도 유기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고 한다.

5. 대중문화 속 유기

유기(劉基)는 명나라 건국자 주원장에게 소병가(燒餅歌)라는 예언시를 읊은 것으로 가장 유명하다.[3][13][14] 이 시는 암호와 같은 구절로 쓰여 있어 이해하기 어렵지만, 일부 사람들은 토목의 변(1449년)과 신해 혁명(1911년) 등 중국의 미래 사건들을 예언했다고 믿는다.[3]

주원장을 섬겨 명나라 건국에 큰 공을 세운 유기는 송렴과 함께 당대 최고의 문필가로 알려져 있다. 중국에서는 마술사적인 군사로 숭배받으며, 삼국 시대제갈량과 비견된다. 명나라 초기를 배경으로 하는 소설, 희곡 등에 자주 등장하며, 주로 자(字)인 '유백온'으로 불린다.

어느 날 주원장이 소병[19]을 먹고 있을 때 유기가 찾아왔다. 주원장은 소병을 사발에 숨겨 놓고 유기에게 점을 치게 했다. 유기는 "반은 해 같고 반은 달 같네. 일찍이 금룡에게 한 입 베어 물렸네. 이것은 음식이네."라고 답했다. 이 대답에 놀란 주원장은 유기에게 명나라의 미래를 점치게 했고, 유기는 암유로 가득 찬 시, 즉 소병가로 점친 결과를 말했다고 한다. 소병가는 원자 폭탄의 발명까지 예언했다고 해석되기도 한다.[20]

유기는 유학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마법사적인 군사 이미지가 강해 점복서의 저자로 언급되기도 했다.[21] 현대에도 인기가 높아 TV 드라마[22]와 게임 등이 만들어지고 있다.

2006년 8월 23일부터 2008년 3월 12일까지 TTV에서 방영된 404부작 텔레비전 드라마 《신기묘산 유백온》(神機妙算劉伯溫|Shénjī Miàosuàn Líu Bówēn|신출귀몰 유백온중국어)은 유백온을 다룬 드라마로, 황사오치(黃少祺)가 유백온 역을 맡았다.[15]

서촉의 인사 조천택은 강좌의 인물을 논할 때 유기를 으뜸으로 칭찬하며, 제갈량의 동료라고 평했다.[23]삼국지연의』의 적벽 대전 화계 묘사는 유기가 진우량을 화계로 격파한 파양호 전투를 나관중이 참고한 것이며, 제갈량의 인물 묘사도 유기를 바탕으로 한다고 전해진다.

6. 저작


  • 백전기략|백전기략중국어 - 병법서이다.
  • 적천수|적천수중국어 - 오늘날에도 명리학의 교과서로 쓰일 정도로 유명한 명리학 관련 이론 서적이다.
  • 郁離子|울리자중국어 10권
  • 覆瓿集|복부집중국어 24권
  • 写情集|사정집중국어 4권
  • 犁眉公集|여미공집중국어 5권 (유기의 사후 그의 장남인 유련이 아버지의 초고를 모아 이름 붙인 것이다.)

참조

[1] 서적 The Great Ming Code: 大明律 University of Washington Press 2005
[2] 서적 Pioneer of the Chinese Revolution: Zhang Binglin and Confucianism https://books.google[...] Stanford University Press 1990-07
[3] 서적 Tong Sing The Chinese Book of Wisdom Kyle Cathie Limited 1999
[4] 간행물 Needham
[5] 뉴스 劉伯溫是被神化了嗎? http://news.xinhuane[...] 2005-05-25
[6] 서적 Mastering the Art of War Shambhala Publications, Inc. 2005
[7] 서적 Mastering the Art of War Shambhala Publications, Inc. 2005
[8] 간행물 Needham
[9] 웹사이트 劉伯溫是被神化了嗎? https://web.archive.[...] 2008-09-19
[10] 서적 Mastering the Art of War Shambhala Publications, Inc. 2005
[11] 웹사이트 劉伯溫是被神化了嗎?. Page 3 https://web.archive.[...] 2008-09-19
[12] 서적 Mastering the Art of War Shambhala Publications, Inc. 2005
[13] 서적 燒餅歌與推背圖 Bai Shan Shu Fang Publishing Company 2004
[14] 웹사이트 燒餅歌 https://web.archive.[...] 2008-09-19
[15] 웹사이트 神機妙算劉伯溫 http://www.ttv.com.t[...] 2008-09-20
[16] 문서 中でも[[至正]]19年(1359年)に招聘した「浙東の四先生」が名高い。四先生とは、浦江の[[宋濂]]・竜泉の章溢・麗水の葉琛、そして、青田の劉基をいう。
[17] 문서 つまり朱元璋は自分を[[劉邦]]になぞらえているわけである。劉基は朱元璋に「劉邦のようにすれば天下を取ることができる」と進言している。
[18] 문서 劉基の死因は胡惟庸による毒殺であるという説が有力である。
[19] 문서 日本でいう[[おやき|お焼き]]のようなもの。油を加えて軟らかく練った小麦粉で作った皮で、ひき肉や野菜のアンを包んで鉄板の上で焼いたもの。
[20] 문서 [[ミシェル・ノストラダムス師の予言集]]の中国版であるが、中国にはこのような予言詩集が複数伝わっている。『[[推背図]]』は日本でもその存在が良く知られている。
[21] 문서 有名なものに、[[四柱推命]]の古典である「滴天髄」がある。
[22] 문서 日本の水戸黄門のように、腕利きの供を連れて諸国を漫遊し各地で悪を懲らしめるという『劉伯温伝奇』が有名。
[23] 문서 『明史』巻一百二十八、列伝第十六
[24] 웹사이트 '[네이버 지식백과] 유기 [劉基] (역사 따라 배우는 중국문학사, 2010. 3. 24., 이수웅)' https://terms.naver.[...]
[25] 문서 『이미공집』은 유기 사후, 그의 장남이 아버지가 남긴 초고를 집성해서 펴낸 것이다。
[26] 웹사이트 '[네이버 지식백과] 유기 [劉基] (중국역대인명사전, 2010. 1. 20., 임종욱, 김해명)' https://terms.naver.[...]
[27] 웹사이트 '[네이버 지식백과] 적천수 [滴天髓] (역학사전, 2006. 2. 10., 노영준)' https://terms.naver.[...]
[28] 서적 관료로 산다는 것 더봄 2020
[29] 서적 2020
[30] 웹사이트 '[네이버 지식백과] 유기 [劉基, liú jī] (중국역대인물 초상화)' https://terms.naver.[...]
[31] 서적 2020
[32] 서적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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