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산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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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유산탄은 1784년 영국 왕립 포병대의 샤프넬 중위가 개발한 대인 살상 무기로, 포탄이 발사된 후 일정 거리에 도달하면 용기 안의 탄환을 분산시켜 넓은 범위에 피해를 입히는 방식이다. 초기에는 산탄의 유효 사거리를 늘리는 데 기여했으며, 이후 설계 개선을 통해 영국군에 채택되어 반도 전쟁과 워털루 전투 등에서 사용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에서는 참호전 상황에서 철조망 절단 및 적 보병 제압에 활용되었지만, 고폭탄의 등장과 함께 점차 사용이 줄어들었다. 현대에는 벌집형 탄약 등 일부 특수한 경우에 유산탄의 원리가 적용되거나, 대전차 미사일 탄두에 유사한 기술이 사용되기도 한다.
1784년 영국 왕립 포병대(Royal Artillery)의 헨리 슈래프넬 중위는 대인 살상 무기를 개발하기 시작했다. 그는 산탄의 효과와 시간 신관을 결합하여, 포탄이 발사된 후 일정 거리에서 탄환을 분산시키는 포탄을 고안했다. 초기 유산탄은 탄환과 화약 혼합물로 채워진 주철 구체에 시간 신관을 장착한 형태였다.[1]
2. 개발
초기 설계는 화약 조기 점화 문제가 있었으나, 1852년 복서 대령이 격막을 사용하여 이 문제를 해결했다. 또한, 수지를 충전재로 사용하여 납탄 변형을 방지하고 포탄 파열 시 시각적 단서를 제공했다.[1]
영국 포병은 1803년에 유산탄(구형 탄피)을 채택했고, 헨리 슈래프넬은 같은 해 소령으로 진급했다. 영국은 1804년 수리남의 포트 니우-암스테르담에서 네덜란드군을 상대로 처음 유산탄을 사용했다.[3] 웰링턴 공작은 반도 전쟁과 워털루 전투에서 유산탄을 효과적으로 사용했다.
이후 1852년경 로열 아스널의 E. M. 복서 대위는 설계를 개선하여 강선포용 원통형 포탄을 도입했다. 1864년에는 신형 강선 머즐 로더(RML) 포탄용 유산탄 포탄을 생산했다.
이 포탄은 두꺼운 주철 벽, 포탄 기저부의 화약 장약, 중앙 튜브를 통해 노즈의 시간 신관에서 기저부 화약 장약으로 점화 플래시를 전달하는 구조였다. 화약 장약은 주철 포탄 벽을 파괴하고 탄환을 방출했지만, 파손된 포탄 벽은 파괴 효과가 거의 없었다. 철 포탄 벽 두께와 중앙 튜브 때문에 탄환 탑재량이 제한되었다.[5][6]
1870년대에 윌리엄 암스트롱은 머리 부분에 파열 장약을 넣고, 포탄 벽을 강철로 만들어 얇게 한 설계를 제공했다.
얇아진 포탄 벽과 중앙 튜브 부재로 탄환을 더 많이 실을 수 있었지만, 파열 장약 때문에 탄환 속도가 늦춰지는 단점이 있었다. 영국은 이 설계를 소구경(6인치 미만)에 채택했지만, 제1차 세계 대전까지는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1880년대의 최종 유산탄 설계는 헨리 슈래프넬의 원래 설계와 유사하지만, 노즈에 타이머 신관, 중앙 튜브, 얇은 단조 강철 포탄 케이스를 사용했다. 강철 사용으로 포탄 벽이 얇아져 더 많은 탄환을 넣을 수 있었고, 화약 장약 힘을 견뎌 탄환이 앞으로 발사되어 속도가 증가했다. 이 설계는 제1차 세계 대전 시작 시점에 표준으로 사용되었다.[6]
현대적인 얇은 벽의 단조 강철 설계는 곡사포용 유산탄 포탄을 만들 수 있게 했다.[7] 이상적인 설계는 포탄 기저부에 타이머 신관을 장착하는 것이었지만, 기술적 문제와 조기 점화 위험 때문에 초기에는 거부되었다.[7]
제1차 세계 대전 서부 전선 참호전에서 유산탄은 참호 위에서 산탄을 흩뿌려 적병을 살상하는 데 유용하게 사용되었으며, 철제 헬멧 대량 장비의 원인이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는 유탄에 시한 신관 또는 근접 신관을 장착하여 견인 포격을 실시하게 되면서, 유산탄은 더 이상 사용되지 않게 되었다.
2. 1. 초기 개발
1784년, 영국 육군의 헨리 슈라프넬 포병 중위(Henry Shrapnel, 최종 계급은 중장)이 원거리 포격전에서 적의 보병이나 기병을 효과적으로 살상하기 위한 포탄을 개발하면서 유산탄이 시작되었다.
당시 포병대는 보병 또는 기병의 공격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산탄"을 사용했는데, 이는 일반적인 포탄 대신 작은 철 또는 납 탄환으로 채워진 주석 또는 캔버스 용기를 장전하는 방식이었다. 발사 시 용기는 포신을 통과하거나 포구에서 터져 거대한 산탄총 탄피와 같은 효과를 냈다. 최대 300m 거리에서는 산탄이 여전히 치명적이었지만, 이 거리에서는 탄환 밀도가 낮아져 인체 명중 확률이 낮았다. 더 먼 거리에서는 덩어리 포탄 또는 일반 포탄(흑색 화약으로 채워진 속이 빈 주철 구체)을 사용했지만, 포탄 조각이 매우 크고 수가 적어 파편 효과보다는 충격 효과가 더 컸다.
샤프넬의 혁신은 산탄의 다중 투사체 효과를 시간 신관("fuse"가 폭발물을 점화하는 장치에 대한 더 정확한 용어임)과 결합하여, 포탄이 포에서 발사된 후 일정 거리에 도달했을 때 용기를 열고 그 안에 들어 있는 탄환을 분산시키는 것이었다. 그의 포탄은 탄환("탄")과 화약 혼합물로 채워진 속이 빈 주철 구체였고, 조잡한 시간 신관이 장착되어 있었다. 신관이 제대로 설정되면 포탄은 의도된 목표물 앞이나 위에 터져 그 내용물(머스킷 탄환)을 방출했다. 샤프넬 탄환은 포탄의 "잔여 속도"를 유지하며 계속 날아갔다. 머스킷 탄환의 밀도가 높은 패턴 외에도, 샤프넬 포탄 전체가 개별 머스킷 탄환보다 더 높은 탄도 계수를 가질 수 있기 때문에 유지된 속도도 더 높을 수 있었다(외부 탄도학 참조).
포탄의 폭발 장약은 탄환을 모든 방향으로 흩뿌리는 것이 아니라 포탄 케이스를 파괴할 정도로만 충분해야 했다. 따라서 그의 발명품은 산탄의 유효 사거리를 300m에서 약 1100m로 늘렸다. 샤프넬은 자신의 장치를 '구형 케이스탄'이라고 불렀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의 이름을 따서 불리게 되었고, 1852년 영국 정부에 의해 공식화되었다.
초기 설계는 포신을 따라 내려가는 동안 탄환과 흑색 화약 간의 마찰로 인해 가속도가 높아져 때때로 화약이 조기에 점화되는 치명적인 문제를 겪었다. 다양한 해결책이 시도되었지만 성공은 제한적이었다. 그러나 1852년, 복서 대령은 탄환을 파열 장약으로부터 분리하기 위해 격막을 사용하는 것을 제안했고, 이는 성공적인 것으로 입증되어 이듬해 채택되었다. 납탄 변형을 방지하기 위한 완충재로 수지가 탄환 사이에 충전재로 사용되었다. 수지를 사용함으로써 얻은 유용한 부작용은 연소 시 수지가 먼지 구름으로 부서지면서 포탄이 파열될 때 시각적 단서를 제공한다는 것이었다.
2. 2. 설계 개선
1784년, 영국 왕립 포병대(Royal Artillery)의 헨리 샤프넬 중위는 대인 살상 무기 개발을 시작했다. 샤프넬의 혁신은 산탄의 다중 투사체 효과를 시간 신관과 결합하여 포탄이 포에서 발사된 후 일정 거리에 도달했을 때 용기를 열고 그 안에 들어 있는 탄환을 분산시키는 것이었다. 그의 포탄은 탄환("탄")과 화약 혼합물로 채워진 속이 빈 주철 구체로, 조잡한 시간 신관이 장착되어 있었다. 신관이 제대로 설정되면 포탄은 의도된 목표물 앞이나 위에 터져 그 내용물(머스킷 탄환)을 방출했다. 샤프넬 탄환은 포탄의 "잔여 속도"를 유지하며 계속 날아갔다.[1]
초기 설계는 포신을 따라 내려가는 동안 탄환과 흑색 화약 간의 마찰로 인해 가속도가 높아져 때때로 화약이 조기에 점화되는 치명적인 문제를 겪었다. 1852년, 복서 대령은 탄환을 파열 장약으로부터 분리하기 위해 격막을 사용하는 것을 제안했고, 이는 성공적인 것으로 입증되어 이듬해 채택되었다. 납탄 변형을 방지하기 위한 완충재로 수지가 탄환 사이에 충전재로 사용되었다.[1]
2. 3. 영국 포병 채택
1784년, 영국 육군의 헨리 슈라프넬(Henry Shrapnel, 최종 계급은 중장)이 원거리 포격전에서 적의 보병이나 기병을 효과적으로 살상하기 위한 포탄을 개발하면서 유산탄이 시작되었다.
당시 영국 왕립 포병대(Royal Artillery)는 보병 또는 기병의 공격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산탄"을 사용했다. 이는 일반적인 포탄 대신 작은 철 또는 납 탄환으로 채워진 주석 또는 캔버스 용기를 장전하는 방식이었다. 발사 시 용기는 포신을 통과하거나 포구에서 터져 거대한 산탄총 탄피와 같은 효과를 냈다. 최대 300m 거리에서 산탄은 여전히 치명적이었지만, 이 거리에서는 탄환의 밀도가 훨씬 낮아져 인체에 명중할 확률이 낮았다. 더 먼 거리에서는 덩어리 포탄 또는 일반 포탄(흑색 화약으로 채워진 속이 빈 주철 구체)을 사용했지만, 포탄 조각이 매우 크고 수가 적어 파편 효과보다는 충격 효과가 더 컸다.
샤프넬의 혁신은 산탄의 다중 투사체 산탄 효과를 시간 신관( "fuse"가 폭발물을 점화하는 장치에 대한 더 정확한 용어임)과 결합하여 포탄이 포에서 발사된 후 일정 거리에 도달했을 때 용기를 열고 그 안에 들어 있는 탄환을 분산시키는 것이었다. 그의 포탄은 탄환("탄")과 화약 혼합물로 채워진 속이 빈 주철 구체로, 조잡한 시간 신관이 장착되어 있었다. 신관이 제대로 설정되면 포탄은 의도된 목표물 앞이나 위에 터져 그 내용물(머스킷 탄환)을 방출했다. 샤프넬 탄환은 포탄의 "잔여 속도"를 유지하며 계속 날아갔다. 머스킷 탄환의 밀도가 높은 패턴 외에도, 샤프넬 포탄 전체가 개별 머스킷 탄환보다 더 높은 탄도 계수를 가질 수 있기 때문에 유지된 속도도 더 높을 수 있었다(외부 탄도학 참조).
포탄의 폭발 장약은 탄환을 모든 방향으로 흩뿌리는 것이 아니라 포탄 케이스를 파괴할 정도로만 충분해야 했다. 따라서 그의 발명품은 산탄의 유효 사거리를 300m에서 약 1100m로 늘렸다.
그는 자신의 장치를 '구형 케이스탄'이라고 불렀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의 이름을 따서 불리게 되었고, 1852년 영국 정부에 의해 공식화되었다.
초기 설계는 포신을 따라 내려가는 동안 탄환과 흑색 화약 간의 마찰로 인해 가속도가 높아져 때때로 화약이 조기에 점화되는 치명적인 문제를 겪었다. 다양한 해결책이 시도되었지만 성공은 제한적이었다. 그러나 1852년, 복서 대령은 탄환을 파열 장약으로부터 분리하기 위해 격막을 사용하는 것을 제안했고, 이는 성공적인 것으로 입증되어 이듬해 채택되었다. 납탄 변형을 방지하기 위한 완충재로 수지가 탄환 사이에 충전재로 사용되었다. 수지를 사용함으로써 얻은 유용한 부작용은 연소 시 수지가 먼지 구름으로 부서지면서 포탄이 파열될 때 시각적 단서를 제공한다는 것이었다.
영국 포병이 유산탄(구형 탄피)을 채택하는 데는 1803년까지 걸렸다. 헨리 슈래프넬은 같은 해에 소령으로 진급했다. 영국이 유산탄을 사용한 최초의 기록은 1804년 수리남의 포트 니우-암스테르담에서 네덜란드군을 상대로 한 것이었다.[3] 웰링턴 공작의 군대는 반도 전쟁과 워털루 전투에서 이 포탄을 사용했으며, 그는 그 효과에 대해 칭찬하는 글을 썼다.
3. 제1차 세계 대전
제1차 세계 대전 초기에 유산탄은 대인용 무기로 널리 사용되었다. 특히 개활지에 있는 병력에게 효과적이었지만, 참호전이 시작되면서 대부분의 군대는 고폭탄을 선호하게 되었다. 영국군은 여전히 높은 비율의 유산탄 포탄을 사용했으며, 철조망 절단과 "이동 사격" 등의 새로운 전술적 역할에 활용했다.
이동 사격은 공격자들이 전진함에 따라 사격을 이동시켜 적을 제압하는 전술이었다. 공격자들은 유산탄에 최대한 가깝게 접근하여 적의 반격을 저지하려 했다. 유산탄은 솜 전투에서 영국군이 철조망을 효과적으로 절단하지 못해 큰 피해를 입는 원인 중 하나가 되기도 했다. 또한, 강철 헬멧의 등장으로 유산탄의 효과가 감소하기도 했다.
하지만, 유산탄은 고폭탄에 비해 몇 가지 단점을 가지고 있었다. 유산탄 포탄은 고폭탄 포탄보다 더 비쌌고, 포탄 몸체에 더 고급 강철이 필요했으며, 정확한 신관 작동 시간을 맞추기가 더 어려웠다.
3. 1. 기술적 고려 사항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유산탄 탄환 크기는 두 가지를 고려하여 결정되었다. 첫 번째는 약 60ftlbf의 발사체 에너지가 적 병사를 무력화하는 데 필요하다는 것이었다.[8][9] 일반적인 1차 세계 대전의 약 7.62cm 야포 포탄은 최대 사거리에서 초당 250피트의 속도로 이동하며, 유산탄 파열 장약에서 추가적인 속도(초당 약 150피트)를 더하면 개별 유산탄 탄환의 속도는 초당 400피트, 에너지는 60ftlbf가 된다. 이는 약 170gr의 반 인치 납-안티모니 탄환 하나가 갖는 최소 에너지이며, 41~42개의 탄환이 1파운드를 구성한다.[10] 따라서 이것이 일반적인 야포 유산탄 탄환 크기였다.
최대 사거리는 일반적으로 7000yards를 넘었지만, 정확도가 떨어지고, 극단적인 사거리에서는 발사체가 가파르게 하강하여 탄환의 "원뿔"이 작은 면적만 덮었기 때문에 유용한 유산탄 전투 사거리를 벗어났다.
3000yards의 일반적인 전투 사거리에서는 탄도가 비교적 평평하여 탄환에 긴 "사격 범위"를 제공했다. 일반적인 3인치 또는 75mm 야포 유산탄 포탄은 약 초당 900피트의 속도를 가졌다. 파열 장약은 초당 150피트를 더해 탄환 속도는 초당 1,050피트가 된다. 이는 각 탄환에 약 418피트 파운드의 에너지를 부여하며, 이는 한 명을 무력화하는 데 필요한 에너지의 7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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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도가 더 낮은 더 큰 포의 경우, 각 탄환이 치명적인 수준의 에너지를 갖도록 더 큰 탄환을 사용했다.
이 크기 범위의 포를 사용한 대부분의 교전은 1500yards에서 3000yards 떨어진 적에게 직접 사격을 가했으며, 이러한 사거리에서는 잔류 포탄 속도가 더 높았다. 적어도 1차 세계 대전 초기 단계에서는 그랬다.
다른 요인은 탄도였다. 유산탄 탄환은 일반적으로 파열 후 일반 야포에서 약 300yards, 중야포에서 400yards 이상에서 치명적이었다. 이러한 거리를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서는 평탄한 탄도, 즉 고속 포가 필요했다. 유럽에서는 고속 포를 가진 군대가 포탄당 탄환 수가 적을 수 있었기 때문에 더 무거운 탄환을 사용하는 경향이 있었다.[11]
1차 세계 대전에서 최종적으로 개발된 유산탄 포탄과 탄환에 대해 주목해야 할 중요한 점은 다음과 같다.
1917년 제3차 이프르 전투에서 영국군의 성공적인 방어 유산탄 배치에 대한 직접적인 설명이 있다. ... 하늘은 약 30피트 위에서 터져 땅을 향해 쏘는 노란색 연기 덩어리로 가득하다. - 이 노란색 연기 덩어리 앞쪽에는 흙이 채찍질된 구름으로 솟아오른다. - 유산탄 - 그리고 얼마나 아름답게 배치되었는가 - 긴 쓸림이 그 경사를 따라 날아가 각 파열 지점에서 200야드 정도의 흙을 채찍질한다.[12]
3. 2. 전술적 사용
제1차 세계 대전 초기에 유산탄은 모든 측에서 대인용 무기로 널리 사용되었다. 1914년 10월까지 영국 야포 (13파운더, 15파운더, 18파운더)에 사용할 수 있는 유일한 종류의 포탄이었다. 유산탄은 특히 집단 보병(전진 또는 후퇴)과 같이 개활지에 있는 병력에게 효과적이었다. 그러나 1914년 말부터 참호전이 시작되면서 대부분의 군대는 유산탄 사용을 줄이고 고폭탄을 선호하게 되었다. 영국은 여전히 높은 비율의 유산탄 포탄을 사용했다. 새로운 전술적 역할에는 철조망 절단과 자체 공격 병력을 엄호하고 적 방어병이 공격자에게 사격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이동 사격" 제공이 포함되었다.
이동 사격에서 공격자들이 전진함에 따라 사격은 한 '선'에서 다음 '선'으로 '이동'했다. 이러한 선은 일반적으로 약 91.44m 간격이었고, 이동 간격은 일반적으로 4분 간격이었다. 이동은 시한 신관 설정을 변경해야 함을 의미했다. 공격자들은 사격이 그들을 넘어 이동하고 적이 참호로 돌아가기 전에 터지는 유산탄에 가능한 한 가깝게(때로는 25야드) 유지하려고 했다.
3. 3. 장점
1784년 영국 육군의 헨리 슈라프넬이 개발한 유산탄은 원거리의 적 보병이나 기병을 효과적으로 살상하기 위한 포탄이었다.[13] 당시 사용되던 구형 포탄은 사선 축상의 적만 살상할 수 있었고, 산탄은 근거리에서만 유효했기 때문에 유산탄은 이러한 단점을 보완했다.
초기 유산탄은 구형 포탄에 산탄과 장약을 넣어 사방으로 흩뿌리는 방식이었으나, 이후 포신에 강선이 새겨지면서 포탄 모양이 바뀌었고, 내장된 산탄을 전방으로 투사하는 방식으로 개선되었다. 이를 통해 전방의 넓은 범위를 산탄으로 휩쓸 수 있게 되어 널리 보급되었다.[13]
특히 제1차 세계 대전의 참호전에서는 참호 위에서 산탄을 흩뿌려 적병을 살상하는 데 유용하게 사용되었으며, 이는 철제 헬멧이 대량으로 보급되는 계기가 되었다.[13]
유산탄은 영국군에게 적 보병을 제압하고 참호 방어벽 점령을 저지하는 데 효과적인 무기로, 공격을 지원하는 포병의 주요 임무가 되었다. 공격하는 보병에게 고폭탄보다 덜 위험했고, 반격, 작업반 및 기타 노출된 병력에게도 유용했다.[13]
영국군은 유산탄을 사용하여 철조망을 절단하고, 흑색 화약 폭발탄의 연막으로 "차폐" 효과를 얻는 등 다양한 전술을 활용했다.[13]
3. 4. 단점
솜 전투에서 영국군이 막대한 사상자를 낸 주요 요인 중 하나는 유탄이 철조망을 무인지대에서 효과적으로 절단할 것이라는 잘못된 믿음 때문이었다.[1] (비록 솜 전투에서 철조망 절단용으로 유탄을 사용한 이유는 영국이 충분한 고폭탄 포탄을 제조할 능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추측되기도 한다).[1] 이러한 인식은 1915년 뇌브 샤펠 전투에서 독일의 철조망에 대한 유탄 포탄의 성공적인 배치로 강화되었지만, 그 전투 이후 독일군은 철조망의 굵기를 두껍게 했다.[1] 그 결과, 유탄은 나중에 적 병력 살상에만 효과적이었으며, 심지어 하강 각도가 철조망을 관통하는 총알 수를 최대화하기 위해 평평한 경우에도, 유탄이 가느다란 철조망에 명중하여 성공적으로 절단할 확률은 극히 낮았다.[1] 총알 또한 파괴력이 제한적이어서 모래주머니에 막혔으므로 보호막 뒤나 벙커에 있는 병사들은 일반적으로 안전했다.[1] 또한 독일 강철 헬멧과 영국 브로디 헬멧을 포함한 강철 헬멧은 유탄 총알을 막아 착용자를 머리 부상으로부터 보호할 수 있었다.[1]
> ... 갑자기, 쨍그랑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이마를 맞고 참호 바닥으로 날아갔다... 유탄 총알이 내 헬멧에 큰 충격으로 명중했지만 뚫지는 못하고 찌그러뜨렸다. 만약 며칠 전까지 그랬던 것처럼 모자를 쓰고 있었다면, 연대는 한 명의 사망자를 더 냈을 것이다.[2]
유탄 포탄은 고폭탄 포탄보다 더 비쌌으며, 포탄 몸체에 더 고급 강철이 필요했다.[3] 또한 정확한 퓨즈 작동 시간을 얻는 것이 포탄을 올바른 위치에서 폭발시키는 데 중요했기 때문에 올바르게 사용하기가 더 어려웠다.[3] 이는 움직이는 표적을 공격할 때 관측 장교의 상당한 기술을 필요로 했다.[3]
추가적인 복잡성은 실제 퓨즈 작동 시간이 기상 조건에 영향을 받았고, 포구 속도의 변화가 추가적인 복잡성으로 작용했다는 점이다.[3] 그러나 영국군은 각 총에 퓨즈 지시기를 사용하여 포구 속도에 맞춰 보정된 정확한 퓨즈 작동 시간(길이)을 결정했다.[3]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유산탄은 더 이상 사용되지 않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3. 5. 고폭탄으로의 대체
비교적 둔감한 고성능 폭약이 포탄의 장약으로 사용되면서, 적절하게 설계된 고폭탄의 탄피가 효과적으로 파편화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예를 들어, 평균적인 105mm 포탄의 폭발은 수천 개의 고속(1,000~1,500m/s) 파편, 치명적인 근거리 과압력, 그리고 지표면 또는 지하 폭발 시 유용한 크레이터 형성 및 대물 효과를 발생시킨다. 이는 훗날의 산탄 포탄보다 훨씬 단순한 구조의 탄약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 파편화는 포탄이 연약한 지면에 관통될 때 종종 사라졌으며, 일부 파편이 모든 방향으로 흩어져 공격 병력에게 위험을 초래했다.
이러한 결점 때문에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 설계된 화포에는 유산탄이 준비되는 일이 없어졌고, 견인 포격을 할 때에는 유탄에 시한 신관 또는 근접 신관을 장착하여 실시하게 되었다.
4.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1930년대 초, BL 60 파운더포를 위해 760개의 탄알을 포함하는 새로운 영국식 유선형 유산탄 Mk 3D가 개발되었다. 영국군은 제2차 세계 대전 초 동아프리카와 북동아프리카 작전에서 18파운드포와 약 11.43cm 곡사포에 유산탄을 사용했다. 제2차 세계 대전에는 엄밀한 의미의 유산탄은 사용되지 않았으며, 마지막으로 기록된 유산탄 사용은 1943년 버마 전역에서 발사된 60파운더 포탄이었다. 1945년 영국은 VT 신관이 장착된 유산탄에 대한 성공적인 시험을 실시했으나,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새로운 영국 포병 모델의 탄약으로는 개발되지 않았다.[22]
4. 1. 베트남 전쟁
엄밀히 말하면 파편탄은 아니지만, 1960년대 무기 프로젝트를 통해 90mm 및 106mm 무반동포와 105mm 곡사포용 탄이 생산되었으며, 이는 "벌집" 탄으로 불렸다. 파편탄의 탄알과 달리 이 탄에는 플레셰트가 들어 있었다. 그 결과 1966년 베트남 전쟁에서 처음 사용된 105mm M546 APERS-T(대인용-연막탄) 탄이 개발되었다. 이 탄은 약 8,000개의 0.5g 플레셰트가 5층으로 배열되어 있었고, 시한 신관, 몸체 절단 폭약, 중앙 섬광 튜브, 염료 마커가 바닥에 포함된 무연 추진제, 연막탄으로 구성되었다. 작동 방식은 다음과 같다. 시한 신관이 점화되면 섬광이 섬광 튜브를 따라 이동하고, 절단 폭약이 터져 앞쪽 몸체가 4조각으로 쪼개진다. 몸체와 처음 4층은 발사체의 회전에 의해, 마지막 층과 시각적 마커는 화약 자체에 의해 분산된다. 플레셰트는 터진 지점에서 발사체의 이전 궤적을 따라 점점 넓어지는 원뿔 형태로 회전에 의해 주로 확산되었다. 이 탄은 제조하기는 복잡했지만 매우 효과적인 대인용 무기였다. 병사들은 벌집탄이 포위 공격 중에 발사된 후 많은 적의 시신이 총의 나무 개머리에 손이 못 박혔으며, 이 시신들을 총으로 질질 끌어다 공동 묘지에 묻었다고 보고했다. 벌집탄이라는 이름은 플레셰트가 공중을 통과하는 소리가 벌떼의 소리와 비슷해서 붙여졌다고 한다.[1]4. 2. 현대
유산탄은 현재 벌집형 탄약을 제외하고는 거의 사용되지 않지만, 유산탄 원리를 사용하거나 사용했던 다른 현대식 탄약들이 있다.- 근거리 대공 방어에 사용되는 DM 111 20mm 기관포 탄약
- 플레셰트가 채워진 40mm HVCC (40 x 53mm HV 유탄)
- 35mm 기관포 (35 × 228mm) AHEAD 탄약 (152 × 3.3g 텅스텐 원통)
- RWM 스위스 30 × 173mm 공중 폭발 탄약
- 5인치 (127mm) 샷건 발사체 (KE-ET)
- 120mm M256 전차포의 XM1028 탄약 (약 1150개의 텅스텐 볼이 1400m/s)
일부 탄도탄 요격 미사일(ABM)은 더 흔한 파편형 폭발 방식 대신 유산탄과 유사한 탄두를 사용한다. 파편형 폭발 탄두와 마찬가지로, 이 유형의 탄두를 사용하면 직접적인 충돌이 필요하지 않으므로 추적 및 조향 정확도 요구 사항이 크게 줄어든다. 재진입체(RV)가 접근하는 정해진 거리에서 폭발성 방출 전하에 의해 ABM 탄두의 경우, 주로 막대 모양의 부탄들이 RV의 비행 경로로 방출된다. 파편형 폭발 탄두와 달리 방출 전하는 부탄을 주 탄두에서 분리하는 데에만 필요하며, 높은 속도로 가속할 필요는 없다. RV의 케이스를 관통하는 데 필요한 속도는 유산탄의 원리와 유사하게 탄두의 높은 종말 속도에서 얻어진다. 이 유형의 탄두를 파편형 폭발 방식 대신 사용하는 이유는 파편형 폭발 탄두에서 생성된 파편이 RV의 케이스 관통을 보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막대 모양의 부탄을 사용하면 훨씬 더 두꺼운 재료를 관통할 수 있어 접근하는 RV의 파괴 가능성을 크게 높일 수 있다.
스타스트릭 미사일은 충격 전에 미사일에서 3개의 금속 다트가 분리되는 유사한 시스템을 사용하지만, 스타스트릭의 경우 이러한 다트는 미사일 유도되며 폭발물을 포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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