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택
1. 개요
유택은 전한 고제의 친척으로, 진희의 난을 평정하는 데 기여하여 영릉후에 봉해졌다. 고황후 치세에 낭야왕이 되었으며, 여씨 세력을 타도하는 데 공을 세워 전한 문제의 옹립에 참여했다. 이후 연왕으로 봉해졌으나 2년 만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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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178년 사망 -
소섭도미
소섭도미는 정보 부족으로 위키백과에 상세 내용이 기록되지 않아 문서 작성이 어려운 인물입니다. -
전한 사람 -
전한 무제
전한의 제7대 황제인 전한 무제는 54년간 재위하며 유교 기반 중앙집권 강화, 흉노 정벌을 통한 영토 확장, 소금과 철의 전매제 등 경제 개혁을 추진하여 전한의 최전성기를 이끌었으나, 과도한 군사 지출, 사치스러운 생활, 무고의 난 등 부정적인 면모도 보였다. -
전한 사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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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기(緱起)는 전한 시대에 기후(騎虎)에 봉해지고 태상(太常)을 역임한 인물로, 기원전 32년 사망 후 그의 아들 구숭(求崇)이 기후 자리를 계승했다. -
전한의 관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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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기(緱起)는 전한 시대에 기후(騎虎)에 봉해지고 태상(太常)을 역임한 인물로, 기원전 32년 사망 후 그의 아들 구숭(求崇)이 기후 자리를 계승했다. -
전한의 관료 -
석편
석편은 전한 시대의 관료로, 기원전 138년에 내사에 임명되어 석경의 뒤를 이어 내사를 지냈으며, 정당시가 그의 후임자이다.
2. 일대기
고황후 치세에 제나라 사람 전자춘의 계책으로 낭야왕에 봉해졌고, 고황후 사후에는 제애왕 등과 함께 여씨 세력을 몰아내는 데 공을 세웠다. 문제 원년(기원전 179년)에는 여통을 대신해 연왕으로 옮겨 봉해졌으나, 재위 2년 만에 사망했다.
고황후 치세 기간, 여비가 떨어진 전자춘에게 금 200근을 주었고, 이후 그를 통해 고황후의 측근 장택과 교류하여 여씨 세력을 왕으로 세우는 데 영향을 주었다. 그 결과, 유택은 낭야의 왕으로 봉해졌다.
고황후 8년(기원전 180년), 고황후가 죽자 제애왕과 함께 여씨 타도를 내세우며 거병했다. 여산이 보낸 관영이 형양에 주둔하자 장안으로 들어가 유항을 황제로 추대했다. 다른 기록에는 제애왕의 내사 축오에게 속아 낭야의 군대를 빼앗겼으나, 제애왕을 황제로 추대하겠다고 설득하여 장안으로 가 유항을 황제로 옹립하는 데 참여했다고도 한다.
문제 원년(기원전 179년), 여씨가 제나라에서 빼앗은 땅을 돌려받고, 여통을 대신해 연왕으로 봉해졌다. 그러나 재위 2년 만에 사망하여 경(敬)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2.1. 초기 생애 및 군사적 공적
《사기》에서는 고제의 먼 친척이라고만 하고, 《한서》에서는 고제의 재종형제라고 한다. 한왕 3년(기원전 204년)에 낭중이 되었고, 고제 11년(기원전 196년) 진희의 난 진압에서 진희의 장수 왕황을 사로잡는 공을 세워 영릉후(營陵侯)에 봉해졌다. 고제의 공신 중에서는 88위지만, 봉읍은 1만 1천 또는 1만 2천 호로 가장 많다.
고조 3년 (기원전 204년)에 낭중이 되었다. 고조 11년 (기원전 196년)에 장군이 되어 진희를 토벌하고, 그 장수 왕황을 사로잡은 공으로 영릉후에 봉해졌다.
2.2. 여씨 집권기의 정치 활동
고제의 재종형제로서, 한왕 3년(기원전 204년)에 낭중이 되었고, 고제 11년(기원전 196년) 진희의 난 진압에서 진희의 장수 왕황(王黃)을 사로잡아 영릉후(營陵侯)에 봉해졌다. 고제의 공신 중에서는 88위지만, 봉읍은 1만 1천 또는 1만 2천 호로 가장 많았다.
고황후 치세 기간에, 유세하다 여비가 떨어진 제나라 사람 전자춘(田子春)에게 금 200근을 주었다. 이듬해 전자춘을 통해 고황후의 측근 장택(張澤)과 교류하여 장택으로 하여금 고황후가 여러 여씨들을 왕으로 세우려는 희망을 이뤄주게 했다. 전자춘의 계책으로 유택은 제나라에서 떼어낸 낭야의 왕으로 봉해졌다.
낭야왕 유택 2년(기원전 180년), 고황후가 죽자 제애왕, 관영, 주발, 진평, 유장 등과 함께 여씨 세력을 타도하는 데 공을 세웠다. 제애왕의 내사 축오에게 속아 제나라에 갔다가 억류당하고 낭야나라의 군대를 빼앗겼으나, 제애왕에게 자신을 장안으로 보내주면 제애왕을 황제로 추대하도록 힘을 쓰겠다고 말해 장안으로 갔다. 유장, 주발 등이 장안에서 여씨를 주멸했을 때 도착해 다음 황제를 정하는 모의에 참여했고, 대신들이 제애왕을 황제로 추대하자고 하자, 다른 대신들과 함께 제애왕의 외가 사씨(駟氏)의 횡포를 꺼려 대왕 유항을 황제로 추대했다.
2.3. 여씨의 난과 문제 옹립
고황후 치세 기간에, 유세하다 여비가 떨어진 제나라 사람 전자춘에게 금 200근을 주어 귀국하게 했다. 이듬해 사람을 보내 전자춘에게 자신과 함께하도록 권했다. 전자춘은 장안으로 왔으나 유택을 바로 만나지 않았고, 고황후의 측근 장택과 교류하여 장택으로 하여금 고황후가 여러 여씨들을 왕으로 세우려는 희망을 이뤄주게 했다. 그러고는 장택이 자신에게 내주는 금을 거절하고 여씨가 왕이 된 것에 불만을 품은 대신들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유택을 왕으로 세우도록 권해 유택은 제나라에서 떼어낸 낭야의 왕으로 봉해졌다. 유택은 전자춘과 함께 본국으로 돌아갔는데, 전자춘이 유숙하지 말고 급히 가도록 권해 고황후의 추격을 뿌리칠 수 있었다.
낭야왕 유택 2년(기원전 180년), 고황후가 죽자 제애왕, 관영, 주발, 진평, 유장 등과 함께 여씨 세력을 타도하는 데 공을 세웠다. 자전(사기 형연세가 · 한서 형연오전)과 제애왕의 전기(사기 제도혜왕세가 · 한서 고오왕전)의 기록에 차이가 있다. 자전에서는 여씨 타도를 내세우고 제애왕과 함께 거병해 상국 여산의 봉국 양나라까지 진격했다가, 여산이 보낸 관영이 형양에 주둔했다는 말을 듣고 홀로 빠르게 장안으로 들어갔다. 마침 장안에 대왕 유항이 오자, 장상들과 함께 의논하고 대왕을 황제로 추대했다. 제애왕의 전기에서는 제애왕의 내사 축오가 제나라와 낭야나라의 군대를 함께 지휘해 관중으로 들어가도록 속이는 편지를 받고 속아서 제나라로 갔다가 억류당하고 낭야나라의 군대를 도리어 빼앗겼다. 유택은 제애왕에게 자신을 장안으로 보내주면 제애왕을 황제로 추대하도록 힘을 쓰겠다고 말해 장안으로 갔고, 마침 유장 · 주발 등이 장안에서 여씨를 주멸했을 때 도착해 다음 황제를 정하는 모의에 참여했다. 여기에서 대신들이 제애왕을 황제로 추대하자고 하자, 다른 대신들과 함께 제애왕의 외가 사씨(駟氏)의 횡포를 꺼려 대왕 유항을 황제로 추대했다.
2.4. 연왕 시절과 죽음
사기에서는 고제의 먼 친척이라고만 하고, 한서에서는 고제의 재종형제라고 한다. 한왕 3년(기원전 204년)에 낭중이 되었고, 고제 11년(기원전 196년) 진희의 난 진압에서 진희의 장수 왕황(王黃)을 사로잡는 공을 세워 영릉후(營陵侯)에 봉해졌다. 고제의 공신 중에서는 88위지만, 봉읍은 1만 1천 또는 1만 2천 호로 가장 많았다.
고황후 치세 기간에, 유세하다 여비가 떨어진 제나라 사람 전자춘(田子春)에게 금 200근을 주어 귀국하게 한 일이 있었다. 이듬해 사람을 보내 전자춘에게 자신과 함께하도록 권했다. 전자춘은 장안으로 왔으나 유택을 바로 만나지 않았고, 고황후의 측근 장택(張澤)과 교류하여 장택으로 하여금 고황후가 여러 여씨들을 왕으로 세우려는 희망을 이뤄주게 했다. 그러고는 장택이 자신에게 내주는 금을 거절하고 여씨가 왕이 된 것에 불만을 품은 대신들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유택을 왕으로 세우도록 권해 유택은 제나라에서 떼어낸 낭야의 왕으로 봉해졌다. 유택은 전자춘과 함께 본국으로 돌아갔는데, 전자춘이 유숙하지 말고 급히 가도록 권해 고황후의 추격을 뿌리칠 수 있었다.
낭야왕 유택 2년(기원전 180년), 고황후가 죽자 제애왕, 관영, 주발, 진평, 유장 등과 함께 여씨 세력을 타도하는 데 공을 세웠다. 자전(사기 형연세가 · 한서 형연오전)과 제애왕의 전기(사기 제도혜왕세가 · 한서 고오왕전)의 기록에 차이가 있다. 자전에서는 여씨 타도를 내세우고 제애왕과 함께 거병해 상국 여산의 봉국 양나라까지 진격했다가, 여산이 보낸 관영이 형양에 주둔했다는 말을 듣고 홀로 빠르게 장안으로 들어갔다. 마침 장안에 대왕 유항이 오자, 장상들과 함께 의논하고 대왕을 황제로 추대했다. 제애왕의 전기에서는 제애왕의 내사 축오가 제나라와 낭야나라의 군대를 함께 지휘해 관중으로 들어가도록 속이는 편지를 받고 속아서 제나라로 갔다가 억류당하고 낭야나라의 군대를 도리어 빼앗겼다. 유택은 제애왕에게 자신을 장안으로 보내주면 제애왕을 황제로 추대하도록 힘을 쓰겠다고 말해 장안으로 갔고, 마침 유장 · 주발 등이 장안에서 여씨를 주멸했을 때 도착해 다음 황제를 정하는 모의에 참여했다. 여기에서 대신들이 제애왕을 황제로 추대하자고 하자, 다른 대신들과 함께 제애왕의 외가 사씨(駟氏)의 횡포를 꺼려 대왕 유항을 황제로 추대했다.
문제 원년(기원전 179년), 여씨가 제나라에서 빼앗은 땅을 돌려주는 한편, 여씨 일족으로 주살된 연왕 여통을 대신해 유택을 연왕으로 옮겨 봉하고 낭야국은 제나라에 돌려주었다. 유택은 재위 2년 만에 죽어 시호를 경(敬)이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