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산 (전한)
1. 개요
여산은 전한 초기의 인물로, 고황후 여치의 오라버니 여택의 아들이자 여태의 아우이다. 여택의 공으로 작위를 받아 교후가 되었으며, 혜제 사후 고황후가 섭정하면서 여태, 여록과 함께 남북군을 통령했다. 고황후의 명으로 여왕에 봉해졌으나, 양나라 왕으로 임명된 후에도 장안에 머물며 태부로 소제를 보좌했다. 고황후 사후에는 상국이 되어 여록과 함께 권력을 휘둘렀으나, 제후들의 반란 시도와 주발, 유장의 공격으로 살해당하며 여씨 일족 몰락의 원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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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의 재상 -
조참
조참은 전한 초기의 장군이자 정치가로, 유방을 도와 진나라 멸망과 초한쟁패 승리에 기여했으며, 한나라 건국 후 제나라 상국과 한나라 승상을 역임하며 안정적인 통치를 펼쳤고, 특히 소하의 법제를 따라 '소규조수' 고사를 남겼다. -
한나라의 재상 -
진평
진평은 초한전쟁기에 유방을 도와 한나라 건국에 공을 세웠고 혜제와 여태후 시대에 승상을 지냈으며, 뛰어난 계책으로 유방을 도왔고 여씨의 난을 평정하여 한 왕조 안정에 기여한 인물이다. -
살해된 정치인 -
홍언박
홍언박은 고려 충숙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문하시중을 지냈고 홍건적의 침입 때 공민왕을 호종했으며, 김용의 흥왕사 변 당시 절개를 지키다 살해되어 사후 정승에 추증된 고려 후기의 문신이다. -
살해된 정치인 -
무삼사
무삼사는 무측천의 조카로서 무주와 당나라의 정치에 관여하며 권세를 누렸으나, 당 중종 복위 후에도 권력을 남용하다가 이중준의 정변으로 아들과 함께 살해된 인물이다. -
기원전 180년 사망 -
여록
여록은 전한 고황후 시기에 고황후의 신임을 받아 군권을 장악하고 조왕에 봉해지는 등 막강한 권력을 누렸으나, 고황후 사후 여씨 일족이 몰락하는 과정에서 주살된 여씨 일족의 핵심 인물이다. -
기원전 180년 사망 -
고황후
고황후 여치는 전한 고조 유방의 황후이자 혜제 유영의 어머니로, 섭정으로 권력을 장악하고 여씨 일족을 중용하는 등 전횡을 일삼다 사후 여씨 일족이 몰살당한 비극적인 인물이다.
2. 생애
여산의 딸이 조왕 유회의 왕후가 되었으나, 조왕은 이 왕후 때문에 자유를 잃었고 사랑하는 첩이 왕후에게 짐살당해 자결했다. 고황후는 조왕의 후사를 끊고 대왕 유항을 대신 세우려 했으나 대왕이 사양했다. 여산은 승상 진평과 함께 여록을 조왕으로 천거했고 고황후의 승인을 받았다.
고황후 8년(기원전 180년), 고황후의 병이 심해지자 그녀의 명령으로 남군을 지휘했으며, 북군을 지휘하는 여록과 함께 군권을 장악했다. 고황후는 임종 전에 이들에게 경계를 내렸고, 고황후 사후 여산은 상국이 되었다.
여산은 여록과 함께 중앙 조정을 장악하여 전권을 휘둘렀다. 제왕 유양이 여씨 타도를 명분으로 거병하자 관영을 보내 유양을 토벌하게 했다. 그러나 관영은 형양에 이르러 유양과 짜고 더 이상 진격하지 않았다. 여산은 여록 등과 함께 변란을 일으키려 했으나, 조정 안의 태위 주발과 주허후 유장, 그리고 조정 밖의 관영과 제나라 · 초나라를 꺼려 함부로 결행하지 못했다.
그러던 중 주발이 여록의 친구 역기의 아버지 역상을 협박해, 역기는 여록에게 가서 여록과 여산이 모두 봉국으로 돌아가도록 설득했다. 여산은 여록에게 이 소식을 들었으나, 여러 여씨들과 함께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8월, 낭중령 가수가 여산을 찾아와 봉국으로 가지 못하게 말리고, 관영이 제나라 · 초나라와 연합해 여씨들을 칠 것이라고 경고했다. 여산은 급히 궁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여록이 역기에게 속아 북군의 지휘권을 내놓고 떠나갔고, 주발이 이 군대를 손에 넣었다. 여산은 이를 미처 알지 못한 채 미앙궁으로 향했으나 들어가지 못하고 배회했다. 그러다 군사 1천을 거느리고 입궁하는 유장을 만났고, 유장의 공격을 받아 달아났으나 결국 살해당했다. 여산의 죽음을 기점으로 여씨들은 모두 제거되었다.
2.1. 초기 생애와 관직 임명
고황후의 오라버니인 여택의 아들이며 여태의 동생이다. 여택이 장수로서 공을 세웠기에 여택이 죽으면서 형과 함께 작위를 받아 교후(交侯)가 되었다. 다만 《사기》 혜경간후자연표에서는 고황후 원년(기원전 187년)이 교후(郊侯) 여산 원년이라고 하고, 《한서》 외척은택후표에서는 효(洨)와 비슷하게 생긴 문(汶)을 써 문후(汶侯)로 나온다.
혜제 7년(기원전 188년), 혜제가 죽고 고황후가 임조칭제하면서 여태 · 여록과 함께 장수가 되어 남북군을 통령했다.
2.2. 왕으로 봉해지다
고황후 6년(기원전 182년), 여나라 왕(여가)이 교만하다는 이유로 고황후에게 폐위된 후, 그를 대신하여 여왕이 되었다. 고후 7년(기원전 181년), 고황후는 조, 양, 연 세 제후국의 유씨 왕통을 끊고 여씨에게 주었는데, 그 중 양나라의 원래 왕 유회를 조왕 유우를 대신하게 하고 여산을 양왕에 봉했다. 여나라 왕은 여태가 맡았다. 그러나 여산은 양나라로 가지 않고 장안에 남아 황제의 태부를 맡았다. 그리고 고황후는 양나라의 이름을 여나라로 고쳤고, 여나라의 이름을 제천(濟川)나라로 고쳤다.
2.3. 권력 장악과 몰락
고황후의 오라버니인 여택의 아들이자 여태의 동생이다. 여택이 장수로서 공을 세워 작위를 받았기에, 여택이 죽자 형과 함께 작위를 받아 교후(交侯)가 되었다. 다만 《사기》 혜경간후자연표에서는 고황후 원년(기원전 187년)이 교후(郊侯) 여산 원년이라고 하고, 《한서》 외척은택후표에서는 효(洨)와 비슷하게 생긴 문(汶)을 써 문후(汶侯)로 나온다.
혜제 7년(기원전 188년), 혜제가 죽고 고황후가 임조칭제하면서 여태 · 여록과 함께 장수가 되어 남북군을 통령했다. 고후 6년(기원전 182년), 여나라 왕[呂王] 여가가 교만하다 하여 고황후가 폐한 후 그 대신 여왕으로 봉해졌다. 고후 7년(기원전 181년), 고황후는 조 · 양 · 연 세 제후국의 유씨 왕통을 끊고 여씨에게 주었는데, 그 중 양나라가 처음으로 원래의 양왕 유회는 고황후가 죽인 조왕 유우를 대신했고 여산이 양왕에 봉해졌다. 여나라 왕은 유태가 맡았다. 그러나 여산은 양나라로 가지 않고 장안에 남아서 황제의 태부를 맡았다. 그리고 고황후는 양나라의 이름을 여나라로 고쳤고, 여나라의 이름을 제천(濟川)나라로 고쳤다. 또 여산의 딸이 조왕 유회의 왕후가 되었으나, 조왕은 이 왕후로 인해 자유를 잃었고 사랑하는 첩이 이 왕후에게 짐살당해 자결했다. 고황후는 조왕의 후사를 끊고 대왕 유항으로 대신하려 했으나 대왕이 사양했다. 여산은 승상 진평과 함께 여록을 조왕으로 천거했고 고황후의 승인을 받았다.
고황후 8년(기원전 180년), 고황후의 병이 심해지자 고황후의 명령으로 남군을 지휘하며, 북군을 지휘하는 여록과 함께 군권을 장악했다. 고황후 임종 전에 경계를 받았고, 고황후 사후 상국이 되었다.
여산은 여록과 함께 중앙 조정을 장악하여 전권을 휘둘렀는데, 제왕 유양이 여씨를 타도하겠다며 거병하자 관영을 보내 유양을 토벌하게 했다. 그러나 관영은 형양에 이르러서는 유양과 짜고 서로 더 진격하지 않았다. 여산은 여록 등과 함께 변란을 일으킬 뜻을 품었으나 조정 안의 태위 주발과 주허후 유장, 그리고 조정 밖의 관영과 제나라 · 초나라를 꺼려 함부로 결행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직위만 태위지 실상 군권을 행사하지 못하던 주발이 여록의 친구 역기의 아버지 역상을 협박해, 역기는 그에 따라 여록에게 가서 여록과 여산이 모두 봉국으로 돌아가도록 말했다. 여산은 여록에게 이 소식을 전해 들었으나, 여러 여씨들과 같이 결단하지 못했다. 8월, 낭중령 가수가 여산을 찾아와서 봉국으로 가지 못하게 말리고, 관영이 제 · 초나라와 연합해 여씨들을 칠 것이라고 말했다. 여산은 급히 궁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여록이 역기에게 속아 북군의 지휘권을 내놓고 떠나갔고, 주발이 이 군대를 손에 넣었다. 여산은 이를 미처 알지 못한 채 미앙궁으로 향했으나 들어가지 못해 배회했고, 그러다가 군사 1천을 거느리고 입궁하는 유장을 만났다. 여산은 유장의 공격을 받아 달아났으나 결국은 살해당했다. 여산의 죽음을 기점으로 결국 여씨들은 모두 제거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