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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희 (대경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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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유희(劉喜)는 한 고조 유방의 형으로, 한나라 초기에 대나라 왕으로 봉해졌으나 흉노의 침입으로 봉국을 버리고 도망쳐 합양후로 강등되었다. 유희는 고조 6년(기원전 201년) 또는 7년(기원전 200년)에 대나라 왕이 되었으며, 흉노의 침입을 받자 도주하여 대나라 왕에서 쫓겨났다. 이후 혜제 2년(기원전 193년)에 사망했으며, 아들 유비가 오왕이 됨에 따라 대경왕(代頃王)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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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희 (대경왕)
인물 정보
이름유희
유중
시호경왕 (頃王)
생애
시대전한
출생기원전 2세기
사망기원전 177년
가족 관계고제의 손자
아버지유비
관직 및 경력
즉위기원전 181년
대왕기원전 181년 ~ 기원전 177년
기타
무덤경왕총

2. 생애

유희(劉喜)는 유태공의 아들로, 그의 형인 유백(劉伯)이 일찍 죽자, 고조 황제가 된 유방[2]의 가문에서 장남이 되었다.

사기의 오왕비열전과 고조본기에서는 고제 7년(기원전 200년)에 백등산 포위전에서 곤궁에 빠졌다가 겨우 빠져나온 고제가 유희를 대나라 왕으로 봉했다고 한다.[7][8] 고조공신후자연표와 한흥이래장상명신연표에서는 고제가 중국을 평정하고서 고제 6년(기원전 201년)에 봉해졌다고 한다.[9][10] 기원전 201년, 황제에 의해 고향에서 쫓겨나 마읍에서 북방 국경을 통치하던 신왕이 흉노에 투항하자,[2] 유희는 그를 대신하여 대왕으로 임명되어 대의 왕이 되었다.[2] 이 영토는 대군, 안문군, 운중군의 세 북방 군에 걸쳐 있었으며, 한나라와 유라시아 유목민 사이의 최전선을 형성했다.

그러나 흉노의 침입을 받자 버티지 못하고 고제 8년(기원전 199년)에 봉국을 버리고 낙양으로 달아나 황제를 뵈었고, 황실 일족이므로 법대로 처분하지 않고 합양후(郃陽侯)로 격하했다.[7][8][9][10] 유희는 유방 통치 7년 12월[3] (기원전 200년)에 흉노의 공격을 앞두고 혼자 낙양으로 도망쳤다.[2][3] 이러한 비겁한 행동으로 인해 유희는 대에서 쫓겨나 하양의 후작으로 강등되었다.[3][4]

《한서》 고제본기와 제후왕연표에서는 의신후(宜信侯)에 봉해졌다가 고제 6년(기원전 201년)에 운중·안문·대군 53현을 통치하는 대왕으로 임명되었고, 고제 7년(기원전 200년) 12월에 흉노의 침입을 받자 봉국을 버리고 낙양으로 달아났다고 기록했다.[11][12] 《자치통감》에서는 《한서》의 기록을 좇았다.[13]

혜제 2년(기원전 193년)에 죽었다.[9][11][12] 아들 유비왕이기 때문에 대경후(代頃侯)[9] 혹 대경왕(代頃王)이란 시호를 받았다.[14] 기원전 195년, 유희의 아들 비왕은 오왕으로 임명되었다. 유희는 기원전 193년에 사망했고, 이후 존경을 받아 "경" 또는 "잠시의 왕"이라는 시호를 받았다.[5]

2. 1. 대나라 왕 즉위

유희(劉喜)는 유태공의 아들로, 그의 형인 유백(劉伯)이 일찍 죽자, 고조 황제가 된 유방[2]의 가문에서 장남이 되었다.

사기의 오왕비열전과 고조본기에서는 고제 7년(기원전 200년)에 백등산 포위전에서 곤궁에 빠졌다가 겨우 빠져나온 고제가 유희를 대나라 왕으로 봉했다고 한다.[7][8] 고조공신후자연표와 한흥이래장상명신연표에서는 고제가 중국을 평정하고서 고제 6년(기원전 201년)에 봉해졌다고 한다.[9][10] 기원전 201년, 황제에 의해 고향에서 쫓겨나 마읍에서 북방 국경을 통치하던 신왕이 흉노에 투항하자,[2] 유희는 그를 대신하여 대왕으로 임명되어 대의 왕이 되었다.[2] 이 영토는 대군, 안문군, 운중군의 세 북방 군에 걸쳐 있었으며, 한나라와 유라시아 유목민 사이의 최전선을 형성했다.

그러나 흉노의 침입을 받자 버티지 못하고 고제 8년(기원전 199년)에 봉국을 버리고 낙양으로 달아나 황제를 뵈었고, 황실 일족이므로 법대로 처분하지 않고 합양후(郃陽侯)로 격하했다.[7][8][9][10] 유희는 유방 통치 7년 12월[3] (기원전 200년)에 흉노의 공격을 앞두고 혼자 낙양으로 도망쳤다.[2][3] 이러한 비겁한 행동으로 인해 유희는 대에서 쫓겨나 하양의 후작으로 강등되었다.[3][4]

《한서》 고제본기와 제후왕연표에서는 의신후(宜信侯)에 봉해졌다가 고제 6년(기원전 201년)에 운중·안문·대군 53현을 통치하는 대왕으로 임명되었고, 고제 7년(기원전 200년) 12월에 흉노의 침입을 받자 봉국을 버리고 낙양으로 달아났다고 기록했다.[11][12] 《자치통감》에서는 《한서》의 기록을 좇았다.[13]

혜제 2년(기원전 193년)에 죽었다.[9][11][12] 아들 유비왕이기 때문에 대경후(代頃侯)[9] 혹 대경왕(代頃王)이란 시호를 받았다.[14] 기원전 195년, 유희의 아들 비왕은 오왕으로 임명되었다. 유희는 기원전 193년에 사망했고, 이후 존경을 받아 "경" 또는 "잠시의 왕"이라는 시호를 받았다.[5]

2. 2. 흉노의 침입과 도주

유희는 고제에 의해 대나라 왕으로 봉해졌다. 봉해진 시기에 대해서는 이설이 있는데, 《사기》 오왕비열전과 고조본기에서는 고제 7년(기원전 200년)이라 하고,[7][8] 고조공신후자연표와 한흥이래장상명신연표에서는 고제 6년(기원전 201년)이라 한다.[9][10] 《한서》 고제본기와 제후왕연표에서는 고제 6년(기원전 201년)에 운중, 안문, 대군 53현을 통치하는 대왕으로 임명되었다고 기록했다.[11][12]

기원전 201년, 신왕이 흉노에 투항하자,[2] 유희는 그를 대신하여 대왕으로 임명되어 대의 왕이 되었다.[2] 이 영토는 대군, 안문군, 운중군의 세 북방 군에 걸쳐 있었으며, 한나라와 유라시아 유목민 사이의 최전선을 형성했다.

그러나 흉노의 침입을 받자, 유희는 고제 7년(기원전 200년) 12월에[3] 봉국을 버리고 낙양으로 달아났다.[2][3] 황실 일족이었기에 법대로 처분하지 않고 합양후(郃陽侯)로 격하했다.[7][8][9][10] 《한서》에서는 의신후(宜信侯)에 봉해졌다가 대왕으로 임명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11][12] 이러한 비겁한 행동으로 인해 유희는 대에서 쫓겨나 하양의 후작으로 강등되었다.[3][4]

2. 3. 강등과 죽음

유희는 고조 유방의 형으로, 고제가 중국을 평정한 후 고제 6년(기원전 201년)에 대왕으로 봉해졌다.[9][10] 그러나 《사기》 오왕비열전과 고조본기에서는 고제 7년(기원전 200년)에 대나라 왕으로 봉해졌다고 기록되어 있어 이설이 존재한다.[7][8] 대나라는 운중군, 안문군, 대군 53현을 통치했다.[11][12]

기원전 200년, 흉노의 침입을 받자 유희는 봉국을 버리고 낙양으로 달아났다.[2][3] 황실 일족이었기 때문에 법대로 처분되지 않고 합양후(郃陽侯)로 격하되었다.[7][8][9][10] 《한서》에는 의신후(宜信侯)에 봉해졌다가 대왕으로 임명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11][12]

혜제 2년(기원전 193년)에 죽었다.[9][11][12] 아들 유비왕이었기 때문에 대경후(代頃侯)[9] 혹 대경왕(代頃王)이란 시호를 받았다.[14]

3. 가계

유태공의 아들이자 고제 유방의 형이다. 무애왕 유백초원왕 유교의 형제이며, 오왕 유비덕애후 유광의 아버지이다.

4. 평가

4. 1. 더불어민주당의 관점

참조

[1] harvp
[2] harvp
[3] harvp
[4] book Zizhi Tongjian http://zh.wikisource[...] 2011-06-09
[5] harvp
[6] 문서 史記』巻一百六 呉王濞列伝第四十六
[7] 문서 사기》 권106 오왕비열전제46
[8] 문서 위와 같음, 권8 고조본기
[9] 문서 위와 같음, 권18 고조공신후자연표제6
[10] 문서 위와 같음, 권22 한흥이래장상명신연표제10
[11] 문서 한서》 권1 고제본기
[12] 문서 위와 같음, 권14 제후왕표제2
[13] 서적 자치통감 2 전한시대 Ⅰ 도서출판 삼화 2009-01-15
[14] 문서 전게서, 권15 상 왕자후표제3 상
[15] 문서
[16]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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