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개
1. 개요
윤개는 중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 생활을 시작하여, 사간원 정언, 이조좌랑, 시강원문학 등을 거쳤다. 명나라에 여러 번 다녀왔으며, 연안부사, 충청도관찰사, 전라도관찰사를 역임했다. 예조판서로 재직하며 윤원로를 탄핵했고, 이후 우의정, 좌의정을 지냈다. 1558년 좌의정에서 면직되었으며, 1566년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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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6년 사망 -
쉴레이만 1세
쉴레이만 1세는 오스만 제국의 10대 술탄으로, 활발한 군사 활동과 법률 개혁을 통해 제국의 영토를 확장하고 행정 체계를 정비하여 오스만 제국의 전성기를 이끌었으며 예술의 황금기를 열었다. -
1566년 사망 -
디안 드 푸아티에
디안 드 푸아티에는 프랑수아 1세와 앙리 2세 시대에 영향력을 행사한 귀족 여성으로, 앙리 2세의 총애를 받으며 왕실 정책에 관여하고 건축 사업에 참여했으나, 앙리 2세 사후 권력에서 물러나 여생을 보냈으며, 그녀의 삶은 다양한 예술 작품의 소재가 되었다. -
1494년 출생 -
쉴레이만 1세
쉴레이만 1세는 오스만 제국의 10대 술탄으로, 활발한 군사 활동과 법률 개혁을 통해 제국의 영토를 확장하고 행정 체계를 정비하여 오스만 제국의 전성기를 이끌었으며 예술의 황금기를 열었다. -
1494년 출생 -
게오르기우스 아그리콜라
게오르기우스 아그리콜라는 독일의 의사이자 광물학자, 야금학자, 인문주의자로, 광산 및 야금술에 관한 저서 『데 레 메탈리카』를 통해 "광물학의 아버지"로 불리며 광산학 발전에 기여하고 지질학과 광물학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
조선의 좌의정 -
정유길
정유길은 조선 중기 문신으로, 중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 명종 때 왕의 총애를 받았으며, 윤원형 탄핵에 앞장서 훈구파, 소윤파, 사림파 모두에게 존경받아 좌의정에 이르렀다. -
조선의 좌의정 -
김홍집
김홍집은 조선 말기 온건 개화파 정치가로서 일본에 수신사로 다녀온 후 개화사상을 수용하고 갑오개혁과 을미개혁을 주도했으나, 친일 정책과 단발령으로 민심을 잃고 아관파천 때 살해당하며 조선 근대화에 기여했으나 일본 간섭을 초래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2. 생애
윤개는 중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기묘사화로 잠시 파직되기도 했으나 곧 복귀하여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는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윤원로의 전횡을 막기 위해 그를 탄핵하는 데 앞장섰으며, 예조판서, 호조판서, 이조판서 등 주요 관직을 역임하고 우의정과 좌의정까지 올랐다. 1558년(명종 13) 좌의정에서 물러나 영평부원군에 봉해졌고, 1563년에는 은퇴를 청했으나 허락받지 못했다. 1566년(명종 21) 사망했다.
2.1. 관직 생활
중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저작, 기사관, 주서, 사간원 정언을 지냈다. 사간원 정언 재직 중 기묘사화로 파직되었으나, 이조좌랑으로 다시 기용되어 시강원 문학으로 승진했다. 문학, 장령을 거쳐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세자시강원 필선으로 세자를 보좌했다. 종사관, 질정관, 감교관을 거쳐 예조참의가 된 후 성절사와 사은사로 다시 명나라에 다녀왔다. 연안부사로 외직에 있다가 어전통사를 거쳐 충청도관찰사로 발탁되어 중종의 총애를 받았다. 병조참의를 거쳐 전라도관찰사가 되고 선위사로 다시 명나라에 다녀온 뒤, 예조참판, 동지중추부사, 동지돈녕부사를 역임했다. 공조참판을 거쳐 특진관이 되고, 형조참판으로 다시 특진관이 되었다. 한성부 좌윤, 형조참판을 거쳐 예조판서가 되었는데, 윤원로가 전횡하자 영의정 윤인경, 좌의정 유관, 우의정 성세창, 영중추부사 홍언필 등과 윤원로를 탄핵하여 귀양 보냈다. 예조판서로 있다가 판중추부사가 되고 영평부원군에 봉해졌으며, 다시 예조판서로 특진관을 겸했다. 호조판서와 이조판서를 거쳐 우의정, 좌의정이 되었다.
2.3. 고위 관직 역임
중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저작으로 시작해서 여러 관직을 거쳤다. 기묘사화로 파직되기도 했지만, 이후 이조좌랑으로 다시 기용되어 명나라에 서장관으로 다녀오기도 했다. 이후 성절사와 사은사로 다시 명나라에 다녀온 뒤, 연안부사, 어전통사, 충청도관찰사, 병조참의, 전라도관찰사 등을 역임했다. 예조참판, 동지중추부사, 동지돈녕부사를 거쳐 공조참판, 특진관, 형조참판, 한성부좌윤을 지냈다. 예조판서가 되었을 때 영의정 윤인경 등과 윤원로를 탄핵하여 귀양을 보냈다.
이후 판중추부사가 되고 영평부원군에 봉해졌으며, 다시 예조판서로 특진관을 겸했다. 호조판서, 이조판서를 거쳐 우의정, 좌의정을 역임하였다.
1558년(명종 13) 양사의 청으로 좌의정에서 면직되고 영평부원군에 봉해졌으며, 1563년(명종 18) 70세가 되자 치사를 청했으나 윤허받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