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우옌푹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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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응우옌 푹 떤은 1648년부터 1687년까지 응우옌 주를 통치한 베트남의 군주이다. 1640년 전후 세자로 책봉되었으며, 찐 주와의 전쟁에 참여했다. 1648년 즉위 후 찐씨 정권과의 전투에서 수륙양용 작전을 펼쳐 승리했고, 북벌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이후 찐 주와의 휴전 협정을 통해 약 100년간의 평화를 이끌었으며, 캄보디아와의 긴장 관계 속에서 영토 확장에 집중했다. 1687년에 사망했으며, 사후 태종으로 추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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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우옌 푹 코앗은 베트남 응우옌 주의 제8대 군주로, 1744년 칭왕을 선포하고 독립적인 통치 체제를 구축하였으며, 캄보디아 내란 개입과 참파 속국화 등의 업적을 남겼으나, 사치와 과세로 서산당의 난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 응우옌 주 - 응우옌푹즈엉
응우옌푹즈엉은 응우옌푹하오의 아들이자 응우옌푹코앗의 손자로 현명하고 덕이 있다는 평을 받았으나, 떠이선 반란으로 1777년 처형당했으며 후에 자롱 황제에 의해 효혜왕으로 추존되었다. - 1620년 출생 - 존 이블린
존 이블린은 17세기 영국의 작가이자 왕립 학회 창립 멤버로, 방대한 일기는 당시 사회의 귀중한 역사적 자료이며, 『실바』를 통해 환경 보호와 산림 자원 관리에 큰 영향을 미쳤다. - 1620년 출생 - 장 피카르
장 피카르는 프랑스의 천문학자이자 측지학자로, 자오선 호의 길이를 정확히 측정하여 지구의 크기 계산에 기여하고, 망원경이 부착된 측량기 사용 및 관측 장비 개발, 우라니보르크 천문대 위치 정밀 측정 등 다양한 과학 분야에 공헌하여 그의 업적을 기리는 이름이 달의 크레이터와 태양 관측소에 사용되었다. - 1687년 사망 - 요하네스 헤벨리우스
폴란드 그단스크 출신의 천문학자이자 맥주 양조업자였던 요하네스 헤벨리우스는 직접 제작한 망원경으로 달을 관측하여 달 지형 연구의 선구자가 되었고, 혜성 관측 및 궤도 이론 제시, 새로운 별자리 정의 등으로 천문학 발전에 기여하여 그의 이름이 붙은 천체들이 존재한다. - 1687년 사망 - 르네 로베르 카벨리에 드 라 살
프랑스 탐험가 르네 로베르 카벨리에 드 라 살은 북아메리카 내륙 탐험과 프랑스령 루이지애나 선포, 미시시피 강을 따라 멕시코 만에 이르는 항해 등으로 알려졌으나, 텍사스 식민지 건설 실패 후 부하들의 반란으로 암살당했다.
2. 생애
1655년, 응우옌 푹 떤은 응우옌 흐우 젓(Nguyễn Hữu Dật)과 응우옌 흐우 띠엔(Nguyễn Hữu Tiến)을 선봉장으로 삼아 북벌을 감행했다. 이들은 북포정주(北布政州)를 점령하고 남강(藍江) 남쪽 7현을 복속시키는 등 큰 성과를 거두었다.[1] 1656년에는 응우옌 푹 떤이 직접 군대를 방문하여 사기를 높였으나, 찐 주의 군주 찐짱이 손자 찐깐을 보내 반격하면서 남강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1]
1660년, 응우옌 군의 선봉대장들 사이에 내분이 일어나 전력이 약화되고 병사들의 사기가 떨어지자, 찐깐의 군대가 이를 틈타 반격하여 응우옌 군은 남강에서 철수하고 북벌은 실패로 돌아갔다.[1]
1661년 윤 10월, 찐 주 군대가 다시 남쪽으로 진격하여 장육루(長育壘)에서 전투를 벌였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3개월 만에 철수했다. 이후 약 10년간 찐 주는 북쪽에, 응우옌 주는 남쪽에 집중하며 잠시 휴전 상태에 들어갔다.[1]
1672년, 찐 주가 다시 남정을 시작하자 응우옌 주에서는 응우옌 푹 투언이, 찐 주에서는 찐깐이 선봉에 섰다. 응우옌 군은 찐 군에게 큰 타격을 주었고, 결국 찐 주는 휴전을 제안했다. 응우옌 주는 이를 받아들여 정강(淨江) 지류를 경계로 휴전 협정을 맺었고, 이후 약 100년간 평화가 지속되었다.[1]
휴전 후 응우옌 주는 남쪽 영토 확장에 집중할 수 있었다. 캄보디아와 긴장이 고조되었으나 군사적 충돌은 없었다.[1]
1687년 4월 30일, 응우옌 푹 떤은 68세(만 66세)의 나이로 서거하였다.[1]
2. 1. 초기 생애 및 즉위
1640년 전후에 세자로 책봉되었으며, 군주 즉위 전부터 찐 주와의 전쟁에 투입되었다.[1]푹타이 6년 2월 26일(1648년 3월 19일) 전란 중에 부군 응우옌 푹 란이 서거하여 군주의 자리에 올랐다.[1]
즉위 전후에 장육루 전투(長育壘戰鬪)가 일어나고 있었으며, 이 전투에서 수륙양용(水陸兩用)을 펼쳐 찐 주의 군대를 몰살시켰다.[1] 이 전투를 시작으로 응우옌 주의 군대가 반격하기 시작하여, 북벌을 준비하게 되었다.[1]
2. 2. 찐-응우옌 전쟁
1640년 전후, 응우옌 푹 떤은 세자로 책봉되었으며, 군주 즉위 전부터 찐 주(찐씨 정권)와의 전쟁에 투입되었다.[3] 1648년 3월 19일(푹타이 6년 2월 26일), 전란 중에 부친 응우옌 푹 란이 서거하여 군주의 자리에 올랐다.[3]즉위 전후에 장육루 전투(長育壘戰鬪)가 일어나고 있었으며, 이 전투에서 수륙양용(水陸兩用) 작전을 펼쳐 찐 주의 군대를 몰살시켰다. 이 전투를 시작으로 응우옌 주의 군대가 반격하기 시작하여, 북벌을 준비하게 되었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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찐 뜨랑은 응우옌을 상대로 마지막 공세를 시작했으나, 뜨롱 득 전투에서 왕실(찐) 군대는 괴멸되었다. 때마침 레 황제(레 찬 통)가 사망했는데, 아마도 전투에 참여한 결과였을 것이다. 이 패배는 찐에게는 엄청난 타격이었고, 응우옌 가문의 장군들은 승세를 몰아 황실 수도를 정복할 계획을 세웠다.
4년 후, 응우옌 군대는 찐 영토로 자체 공세를 시작, 1653년에 왕실(찐) 군대를 꽝빈성에서 몰아냈다. 다음 해 응우옌 군대는 하띤성을 점령했다. 이때 늙은 찐 영주 찐 뜨랑이 사망하고 그의 아들인 찐 딱이 뒤를 이었다.
5년 동안의 휴식과 재정비 후, 1661년 찐 딱은 벽을 상대로 작은 공세를 펼쳤지만, 벽은 굳건히 지켜졌고 공격은 중단되었다.
그 다음 10년 동안 찐 딱은 북쪽에 집중했고, 응우옌 푹 떤은 남쪽에 집중하며 참파를 상대로 사이공 주변으로 영토를 확장했다.
2. 2. 1. 북벌 시도 (1655년 ~ 1660년)
1655년, 응우옌 푹 떤은 응우옌 흐우 젓(Nguyễn Hữu Dật|응우옌흐우졋vi)과 응우옌 흐우 띠엔(Nguyễn Hữu Tiến|응우옌흐우띠엔vi)을 선두로 하여 북벌을 시작하였다. 북포정주(北布政州)를 장악한 뒤, 계속 진격하여 남강(藍江)의 남쪽 7현을 복속시켰다.[3]1656년, 응우옌 푹 떤은 직접 군대를 찾아가 사기를 진작시켰으나, 찐 주의 군주 찐짱(Trịnh Tráng)은 남강을 수복하기 위해 손자 찐깐(Trịnh Căn)에게 군사를 주어 보냈다. 이로써 찐 주와 응우옌 주의 전쟁은 남강에서 승패를 가르게 되었다.[3]
1660년, 응우옌 푹 떤이 보낸 선봉대장들 사이에서 내분이 생겨 전력이 약화되었고, 5년간 전투를 벌였던 병사들의 사기가 저하되었다. 이 틈을 타 찐깐의 군대가 반격하여 응우옌 군은 후퇴하였다. 이 전투에서 응우옌 군은 남강에서 철수하였으며, 북벌은 실패로 돌아갔다.[3]
2. 2. 2. 찐 주의 남정 및 휴전 (1661년 ~ 1672년)
1660년, 응우옌푹떤이 보낸 선봉대장들 사이에서 내분이 생겨 전력이 약화되었고, 5년간 전투를 벌였던 병사들의 사기가 저하되었다. 이 틈을 노려 찐깐의 군대가 반격을 시도하여, 응우옌 주의 군대는 남강(藍江)에서 철수하였으며, 북벌이 실패하였다.[1]1661년 윤 10월, 찐 주의 군대는 다시 남정하여 장육루(長育壘)에서 전투를 시작하였지만, 크게 성공하지 못하고 3달 만에 북쪽으로 철수하였다. 이 전투 이후로 약 10년 동안 찐 주는 북쪽으로, 응우옌 주는 남쪽으로 눈을 돌려 잠시 휴전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1]
1672년, 찐 주는 다시 남정을 시작하였다. 응우옌 주에서는 응우옌 푹 투언을, 찐 주에서는 다시 찐깐이 선봉으로 세워 전투를 시작하였다. 이후 응우옌 주는 찐 주에 패배의 설욕을 안겨주었으며, 이 결과로 찐 주는 공식적인 휴전 협정을 제안했다. 응우옌 주는 그 제안을 받아들여 정강(淨江)의 지류를 경계로 휴전 협정이 체결되었으며, 약 100년간 평화로운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1]
휴전 협정 이후, 응우옌 주는 다시 남쪽 영토 확장에 집중할 수 있었다. 캄보디아와의 전쟁의 고조가 보이고 있었지만, 군사적인 충돌은 없었다.[1]
2. 3. 남방 영토 확장
1672년 찐 주(鄭主)와 휴전 협정을 맺은 후, 응우옌 푹 떤은 남쪽으로 눈을 돌려 영토 확장에 집중하였다. 비록 캄보디아와의 긴장이 고조되고 있었지만, 이 시기에 군사적인 충돌은 발생하지 않았다.[1] 응우옌 푹 떤의 군대와 정부 관료들은 최남단 지방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는 데 힘썼다.[1]1640년경 찐, 응우옌, 막, 참파가 통치하는 지역을 대략적으로 보여주는 베트남 지도는 다음과 같다.
2. 4. 사망
賢王|히엔브엉중국어 응우옌푹떤은 1687년 4월 30일에 서거하였으며, 향년 68세(만 66세)였다. 그의 사후, 아들인 응우옌 푹 쩐이 뒤를 이었다.3. 봉호, 시호, 능호
후 레 왕조에서 받은 초기 봉호는 부장(副將) 겸 '''용례후'''(Dương Lễ Hầu|勇禮侯vie)이며, 즉위 후에 받은 봉호는 절제수보제영(節制水步诸营) 겸 총내외평장군국중사(總內外平章軍國重事) 겸 태보(太保) 겸 '''용군공'''(Dương Quận Công|勇郡公vie)이었다. 틴득(盛德) 원년(1653년) 태부(太傅) 겸 '''용국공'''(Dương Quốc Công|勇國公vie)으로 진봉되었다.
사후 추존된 시호는 대원수총국정 공고덕후'''용철왕'''(Đại Nguyên Soái Thống Quốc Chính Công Cao Đức Hậu Dũng Triết Vương|大元帥總國政 功高德厚勇哲王vie)이다. 까인흥(景興) 5년(1744년) 칭왕 후 묘호는 '''의조'''(Nghị Tổ|毅祖vie), 시호는 선위건무영명장정성덕신공'''효철왕'''(Tuyên Uy Kiến Vũ Anh Minh Trang Chính Thánh Đức Thần Công Hiếu Triết Vương|宣威建武英明莊正聖德神功孝哲王vie)으로 재추존되었다. 응우옌 왕조 건국 후 자롱(嘉隆) 5년(1806년)에는 묘호 '''태종'''(Thái Tông|太宗vie), 시호 선위건무영명장정성덕신공'''효철황제'''(Tuyên Uy Kiến Vũ Anh Minh Trang Chính Thánh Đức Thần Công Hiếu Triết Hoàng Đế|宣威建武英明莊正聖德神功孝哲皇帝vie)로 다시 추존되었다.
능호는 '''장흥릉'''(Trường Hưng Lăng|長興陵vie)이다.
4. 가족 관계
4. 1. 후비
4. 2. 공자
4. 3. 공녀
5. 기년
대남실록(大南實錄)을 기준으로 정리하였다.
참조
[1]
인물
찬국정부인(Tán Quốc Chinh Phu Nhân/贊國正夫人)
[2]
인물
응우옌푹코앗(阮福濶)
[3]
인물
똥 푹 캉(Tống Phúc Khang/宋福康)
[4]
인물
응우옌푹코앗(阮福濶)
[5]
인물
응우옌 푹 한(Nguyễn Phúc Hán/阮福漢)
[6]
인물
[7]
인물
응우옌 푹 응언(Nguyễn Phúc Ngàn/阮福彥)
[8]
인물
응우옌 푹 후옌(Nguyễn Phúc Huyền/阮福玄)
[9]
인물
[10]
인물
응우옌 푹 히엡(Nguyễn Phúc Hiệp/阮福協)
[11]
인물
똔 텃 히엡(Tôn Thất Hiệp/尊室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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