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순공주
1. 개요
의순공주는 조선 효종 때 청나라 섭정왕 도르곤에게 정략 결혼으로 시집간 여성이다. 금림군 이개윤의 딸로, 효종의 양녀가 되어 의순이라는 봉작을 받고 청나라로 향했다. 도르곤 사후 정친왕 볼로에게 재가했으나 볼로가 사망하여 조선으로 귀국했다. 귀국 후에는 냉대받았으며, 1662년에 사망하여 양주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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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효종의 자녀 -
현종 (조선)
현종은 효종의 아들이자 조선의 제18대 왕으로, 재위 기간 중 예송 논쟁, 대동법 실시, 경신대기근, 안추원 사건 등을 겪었으며 34세에 사망하여 숭릉에 안장되었다. -
조선 효종의 자녀 -
숙휘공주
숙휘공주는 조선 효종과 인선왕후의 넷째 딸로, 정제현에게 하가하여 1남 1녀를 두었으며, 설매 사건, 도방군 동원 문제 등 논란과 사치스러운 생활로 비판을 받았고, 한글 편지를 모은 《숙휘신한첩》은 보물로 지정되었다. -
1635년 출생 -
윤지완
윤지완은 조선시대 외교관으로 1682년 숙종의 명령을 받아 일본에 파견되어 조선과 일본 간 무역을 위한 정치적 기반을 구축하고 양국 관계 정상화에 기여했으며, 이조판서 윤강의 아들이다. -
1635년 출생 -
헨리 모건
헨리 모건은 17세기 카리브해에서 스페인 제국을 공격하며 명성을 얻은 웨일스 출신의 사략선 선장이자 해적이며, 후에 자메이카의 부총독을 역임했고, 그의 이름은 럼주 브랜드 '캡틴 모건'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
청나라의 황족 -
아이신기오로 아민
누르하치의 조카인 아이신기오로 아민은 청나라 초기의 장군이자 호쇼이 버일러로, 사대 버일러로서 국정을 담당하고 정묘호란을 주도했으나 영평 점령 실패의 책임을 지고 유폐되어 사망했다. -
청나라의 황족 -
예허나라 완전
예허나라 완전은 청나라 말기의 인물로, 순현친왕 혁현의 부인이자 광서제의 생모이며, 서태후의 동생으로서 황실과의 복잡한 인척 관계를 통해 가문의 권력 확대에 기여하다가 1896년에 사망했다.
2. 일생
효종은 금림군의 딸 이애숙을 양녀로 삼아 의순(義順)공주로 봉하고 청나라로 보냈다. '의순'은 대의(大義)에 순종(順從)하였음을 뜻한다. 1650년 4월 22일, 의순공주가 청나라로 떠날 때 효종은 서대문 밖 모화관까지 나가 송별했으며, 백관들은 반으로 나누어 홍제원까지 수행했다. 의순공주의 오빠 두 명, 역관 5명, 시녀 16명, 유모, 몸종, 수모(首母), 의녀 등이 동행했다. 같은 해 5월 21일, 도르곤이 6만 명의 수행인을 이끌고 산해관 부근의 연산(連山)으로 마중나와 혼인의식과 초야를 치렀다.
1650년 12월 31일, 의순공주가 도르곤의 대복진(大福晉)이 된 지 약 7개월 만에 도르곤이 사냥 중에 갑자기 사망하였다. 1651년 1월, 청의 순치제는 도르곤을 성종의황제(成宗義皇帝)로 추존하였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황위 찬탈 혐의로 모든 작호와 영예가 박탈되고 부관참시되었다.
도르곤 사후 의순공주는 친왕 보로에게 재가하였지만, 1년 만에 보로가 사망하여 다시 홀로 지냈다. 조선에서는 의순공주의 재가가 도르곤에게 대역죄가 내려진 결과로, 그녀의 의지가 아니었음을 주장했다. 1656년 4월, 청의 봉명사신(奉命使臣)으로 온 아버지 금림군이 황제에게 요청하여 의순공주는 조선으로 귀국했다.
2.1. 배경
이애숙은 성종의 서자 익양군 이회의 3세손인 금림군 이개윤의 7남 4녀 중 한 명이다.
1649년 12월, 효종 즉위년에 청나라 섭정왕 도르곤(1612년 11월 17일~1650년 12월 31일)은 대복진 박이제길특씨(이후 황후로 추존됨)를 잃었다. 1650년 3월, 도르곤은 조선 왕 효종에게 친속 장수 파흘내 등을 사신으로 파견해 조선의 공녀를 계비로 맞이하겠다는 구혼 칙서를 전달했다. 이는 인조 시대에 조선 처녀를 첩이나 시녀 용도로 강제 차출해간 것과는 달리, 정실 부인인 비(妃)로 맞이하겠다는 정식 구혼이었다. 상대는 순치제의 섭정왕이자 계부로, 언제 황제로 등극해도 이상치 않을 도르곤이었다. 그의 정비(正妃)가 되는 것이었지만, 반청감정이 높았던 조선으로선 달갑지 않은 구혼이었다.
효종은 미혼인 공주는 2세에 불과하다고 거짓말을 했으며, 질녀인 소현세자의 딸들도 모두 숨겼다. 다른 왕족들과 대신들도 딸을 숨기기에 급급하였는데, 이때 자진하여 혼기의 아름다운 딸이 있음을 밝힌 자가 이애숙의 아버지인 금림군 이개윤이다.
2.2. 청나라와의 정략결혼
효종 즉위년인 1649년 12월, 청의 섭정왕 도르곤은 정실 부인(대복진) 박이제길특씨(博爾濟吉特氏)를 잃었다. 1650년 3월, 도르곤은 조선 왕 효종에게 사신을 보내 조선의 공녀(公女)를 자신의 계비(繼妃)로 맞이하겠다는 구혼 칙서를 전달했다. 이는 인조 시대에 조선 처녀를 첩이나 시녀 용도로 차출하던 것과는 달리, 정실 부인으로 맞이하겠다는 정식 구혼이었다. 상대는 순치제의 섭정왕이자 계부(繼父)인 도르곤으로, 언제 황제로 등극해도 이상하지 않을 인물이었다. 그러나 반청감정이 높았던 조선으로서는 달갑지 않은 구혼이었다.
효종은 미혼인 공주가 2세에 불과하다고 거짓말을 하고, 소현세자의 딸들도 모두 숨겼다. 다른 왕족과 대신들도 딸을 숨겼으나, 이때 금림군 이개윤이 자진하여 혼기에 이른 아름다운 딸 이애숙이 있음을 밝혔다. 이애숙은 성종의 서자 익양군 이회(李懷)의 3세손인 금림군 이개윤의 딸이었다.
효종은 금림군의 딸 애숙을 양녀로 삼아 의순(義順)공주라는 작위를 내리고 청으로 보냈다. '의순'은 대의(大義)에 순종(順從)하였음을 뜻한다. 1650년 4월 22일, 의순공주가 청나라로 출발하자 효종은 서대문 밖 모화관까지 나가 송별했으며, 백관들은 반으로 나누어 홍제원까지 수행토록 했다. 의순공주의 오빠 두 명, 우수한 역관 5명, 공노비 중에서 선발된 시녀 16명, 유모, 몸종, 수모(首母), 의녀 등이 그녀를 따랐다. 1650년 5월 21일, 도르곤이 6만 명의 수행인을 이끌고 산해관 부근의 연산(連山)으로 마중나와 혼인의식과 초야를 치렀다.
의순공주가 도르곤의 정실 부인(대복진)이 된 지 약 7개월 후인 1650년 12월 31일, 도르곤이 사냥 중에 갑자기 사망하였다. 이후 의순공주는 도르곤의 조카이자 장군인 정친왕 볼로에게 재혼하라는 요청을 받았지만, 볼로는 1년 만인 1652년에 사망했다.
2.3. 도르곤의 죽음과 재가
1650년 12월 31일, 의순공주가 도르곤의 대복진(大福晉: 정실 중 으뜸 부인)이 된 지 약 7개월 만에 도르곤이 사냥 중에 갑자기 사망하였다. 이듬해인 1651년 1월, 청의 순치제는 도르곤을 성종의황제(成宗義皇帝)로 추존하여 태묘에 모셨고, 도르곤의 첫 대복진이었던 박이제길특씨를 경효충공의황후(敬孝忠恭義皇后)로 추숭하였으며, 도르곤의 다른 계복진이자 순치제의 생모인 효장문황후에게는 소성자수황태후(昭聖慈壽皇太后)라는 존호를 올렸다.
도르곤이 황제로 추증된 지 얼마 후, 그의 유품 중에 황포(皇袍)가 섞여 있다는 발고로 황위 찬탈 혐의가 일어나 그의 모든 작호와 영예가 박탈되고 태묘에서 쫓겨났으며, 죽은 그의 시체는 부관참시되었다.
도르곤 사후 의순공주는 친왕 보로에게 재가하였지만 1년 만에 보로가 사망하여 다시 홀로 지냈다. 조선에서는 의순공주의 재가에 대해, 도르곤에게 대역죄가 물어지자 다른 도르곤의 여인들과 함께 황족들에게 노비로 분배된 것으로, 그녀의 자의가 아님을 주장했다. 1656년 4월, 청의 봉명사신(奉命使臣)으로 온 아버지 금림군이 황제에게 요청해 의순공주는 다시 조선으로 귀국했다.
효종실록에는 의순공주가 백양왕(白陽王)의 아들에게 돌아갔다고(歸) 기록되어 있는데, 4개월 후인 6월 3일 기록에는 그녀가 보로에게 시집을 갔다는 기록이 있다. 여기서 보로는 박락(博洛, 중국어 발음: Bolo, 1613~1652)을 말한다. 반면 중국 기록에는 도르곤 사후 안친왕(安親王) 악락(岳樂, 중국어 발음: Yolo, 1625~1689)이 의순공주를 맡은 것(歸)으로 기록되어 있다.
보로와 요로는 누르하치의 7남인 요여민군왕 아파태(饒餘敏郡王 阿巴泰, 중국어 발음: Abatai)의 셋째 아들과 넷째 아들로, 아파태는 도르곤의 이복형이다. 효종실록에 의순공주의 재가 상대가 보로이며, 동국(東國)의 일을 주관하고 있으며, 재가한 친왕이 죽어 다시 혼자가 되었다는 기록은 청사고(淸史稿)에 기록된 보로(博洛)와 일치한다. 또, 의순공주의 재가 상대에 대해 황족의 아들, 도르곤의 장수, 군왕, 친왕이었다는 일치되지 않은 기록도 보로의 전력과 일치하는데, 보로는 부친 아파태와 마찬가지로 봉작에 차별을 받았으며 도르곤의 휘하 장수가 되어 자력으로 전공을 세워 군왕(郡王), 친왕(親王)으로 승봉되었다. 보로는 도르곤 사후에 도르곤의 소유를 범한 것으로 탄핵된 경력이 있고, 1652년 3월에 병사하였다. 따라서 보로 사후에 동생인 안친왕 요로가 의순공주의 거취를 맡았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풍습 상, 보로 사후에 의순공주가 다시 요로에게 재가했을 가능성도 없진 않으나 정확한 기록은 존재하지 않으며, 1656년의 실록 기록에도 의순공주의 재가 상대가 이미 사망하였다 하였고, 효종 7년(1656년) 의순공주를 귀국시키며 서신을 보낸 청의 순치제도 그녀가 홀로 되어 저(邸: 종친의 사저, 궁을 뜻한다)에 지내고 있다고 하였으니 확률은 낮은 편이다. 요로는 1689년에 사망했다.
2.4. 조선으로의 귀환
1650년 12월 31일, 도르곤이 사냥 중에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의순공주는 대복진(大福晉: 정실 중 으뜸 부인)이 된 지 약 7개월 만에 과부가 되었다. 이듬해인 1651년 1월, 청나라 순치제는 도르곤을 성종의황제(成宗義皇帝)로 추존하고 태묘에 모셨다. 도르곤의 첫 대복진이었던 박이제길특씨는 경효충공의황후(敬孝忠恭義皇后)로 추존되었고, 순치제의 생모인 효장문황후는 소성자수황태후(昭聖慈壽皇太后)라는 존호를 받았다.
도르곤 사후, 의순공주는 친왕 보로에게 재가하였으나 1년 만에 보로가 사망하여 다시 혼자가 되었다. 조선에서는 의순공주의 재가가 도르곤에게 대역죄가 내려지자 다른 도르곤의 여인들과 함께 황족들에게 노비로 분배된 것으로, 그녀의 의지가 아니었음을 주장하였다. 1656년 4월, 청의 봉명사신(奉命使臣)으로 온 아버지 금림군이 황제에게 요청하여 의순공주는 다시 조선으로 귀국하게 되었다.
1655년 겨울, 이계윤은 베이징으로 파견되는 외교 사절단의 일원으로 파견되었다. 이계윤은 조공을 바치고 연회에 참석했는데, 그 자리에서 의순공주가 한국으로 돌아오기를 눈물로 청원했고, 그의 소원은 받아들여졌다. 의순공주는 1656년 여름에 조선으로 돌아왔고, 효종은 그녀가 돌아오자 남은 생애를 지원하기 위해 공주에게 매달 연금을 지급했다. 그러나 이계윤이 국왕과 사전에 상의 없이 그녀의 귀환을 요청한 결정은 다른 조정 관리들로부터 심한 비판을 받았다. 조정의 압력으로 이계윤은 일련의 탄핵을 거쳐 관직을 잃었다.
의순공주는 1662년 병으로 사망했고, 그녀의 장례는 현종에 의해 치러졌으며, 현종은 그녀의 운명을 가엾다고 표현했다.
2.5. 귀국 후의 삶과 죽음
1650년 12월 31일, 도르곤이 사냥 중에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의순공주는 약 7개월 만에 과부가 되었다. 이듬해인 1651년 1월, 순치제는 도르곤을 성종의황제(成宗義皇帝)로 추존하고 태묘에 모셨다. 도르곤의 첫 대복진(大福晉)이었던 박이제길특씨는 경효충공의황후(敬孝忠恭義皇后)로 추존되었고, 도르곤의 다른 계복진이자 순치제의 생모인 효장문황후는 소성자수황태후(昭聖慈壽皇太后)라는 존호를 받았다. 의순공주가 황후로 격상되지 않은 것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추존 황제의 살아있는 정실 부인을 황후로 책봉하지 않는 것이 관례였고, 청나라에 우호적이지 않은 조선의 공주였기 때문에 황태후로 격상하거나 순장 후 황후로 추존하기도 어려웠을 것으로 보인다.
도르곤 사후, 의순공주는 친왕 보로에게 재가했지만 1년 만에 보로가 사망하여 다시 혼자가 되었다. 조선에서는 도르곤에게 대역죄가 내려지자 다른 여인들과 함께 황족들에게 노비로 분배된 것으로, 의순공주의 의지가 아니었음을 주장했다. 1656년 4월, 아버지 금림군 이개윤이 청나라 봉명사신(奉命使臣)으로 가서 황제에게 요청하여 의순공주는 조선으로 귀국하게 되었다.
1656년 4월 26일, 의순공주는 조선으로 돌아왔다. 순치제는 칙서를 통해 "의순공주가 과부가 되어 종친의 집에 살며 부모 형제와 멀리 떨어져 있어 측은하게 여겼는데, 아버지 이개윤이 딸을 보고자 요청하니 더욱 안쓰러워 의정대신과 함께 귀국시켜 친지와 살도록 하니 조선은 따르라"고 전했다. 효종은 호조에 명하여 의순공주에게 매달 쌀을 지급하여 평생을 지원하도록 했다.
하지만 오랑캐에게 시집갔다가 남편 사후 수절하지 않고 재가까지 한 의순공주와 그 가족에 대한 조선의 시선은 곱지 않았다. 정치적 가치가 사라진 의순공주에 대한 조정의 태도도 돌변했다. 1656년 윤5월 1일, 사헌부는 의순공주를 데려온 금림군 이개윤을 탄핵하여 파직시켰고, 윤5월 10일에는 사간원이 파직만으로는 부족하다 하여 이개윤을 삭탈관작하고 성 밖으로 쫓아냈다. 의순공주의 칭호는 '이개윤의 딸(女 혹은 女子)'로 격하되었으며, 현종실록에는 의순공주가 정식으로 공주 봉호를 받은 것이 아니라 단지 공주로 일컬어졌을 뿐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의순공주는 공주의 예우도 받지 못하여 청나라에서 황족의 예우를 받았던 시절보다 처지가 나빠졌다. 이개윤은 청나라의 눈치를 살펴 다시 서용되어 청나라 사신으로 활동했다.
영조 때 만들어진 연려실기술에는 금림군 이개윤이 나라를 위해 딸을 보낸 것이 아니라 청나라에서 보내는 비단을 탐냈기 때문이며, 섭정왕 도르곤이 의순공주를 소박하여 하졸에게 시집보낸 것을 이개윤이 데려오자 사람들이 침을 뱉고 욕했다는 기록이 있다.
민간에는 의순공주가 청나라로 시집가는 도중 평안도 정주에서 오랑캐에게 몸을 더럽힐 수 없다며 벼랑 아래로 몸을 던져 자살했고, 시체가 떠오르지 않아 족두리만으로 무덤을 만들었다는 전설이 있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1662년 8월 18일, 의순공주는 사망하여 경기도 양주군 양주면 금오리(현 의정부시 금오동)에 안장되었다.
3. 논란과 평가
의순공주에 대한 평가는 주로 외모 논란과 관련이 있다. 청으로 보내질 당시 동행했던 원두표는 도르곤이 처음에는 의순공주를 보고 기뻐했지만, 이후 의순공주와 시녀들의 외모를 폄하하며 조선의 정성이 부족하다고 힐난했다고 전한다.
그러나 도르곤의 이러한 발언은 조선이 북벌을 준비한다는 의혹을 제기하던 상황과 맞물려, 조선에 대한 불만을 표현한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성해옹의 《연경재집》에는 도르곤이 의순공주를 매우 기뻐하며 백송골(白松鶻)이라 칭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의순공주의 뛰어난 자태를 칭찬한 것이다.
3.1. 외모 논란
의순공주의 청국행(淸國行)을 동행한 호행사 원두표는 귀국하여 도르곤의 반응에 대해, 도르곤이 처음 의순공주를 보고 기뻐하였으며 수행원들을 후하게 대우하였지만, 북경에 도착해서는 공주가 아름답지 않고 시녀들이 못생겼다며 조선이 정성이 없다고 힐난하였다고 전한다. 그러나 도르곤이 이러한 말을 할 당시에 조선이 북벌을 준비하는 것에 대한 의혹을 제기했던 것이나, 성해옹의 《연경재집》에 "도르곤이 의순공주를 매우 기뻐하여 백송골(白松鶻)이라 하였으니 백송골이란 그 자태가 뛰어나다는 말이었다."라고 수록된 것으로 미루어, 의순공주가 아닌 조선에 대한 불만을 비춘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