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강우 (정치인)
1. 개요
이강우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이자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진주 출신으로 사립 산기고등측량학교, 한성외국어학교, 상해대학교, 일본대학 등을 졸업했다. 1919년 진주에서 독립만세 시위를 주도하여 투옥되었으며,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되어 제헌 국회의원과 헌법 기초 위원을 지냈다. 한국 전쟁 중 납북되어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 한글 | 이강우 |
|---|---|
| 한자 | 李康雨 |
| 로마자 표기 | I Gang-u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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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병희는 조선 말 동학의 지도자이자 대한제국의 종교인, 독립운동가로서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하고 3·1 운동을 주도한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이며 인내천 사상을 강조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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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영호 (정치인)
허영호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에 참여하고 신간회 활동을 했으나, 중일전쟁 이후 친일로 전향하여 해방 후 혜화전문학교 교장과 동국대학교 학장을 역임했으며, 제헌 국회의원 재보궐선거에서 당선되었지만 한국 전쟁 중 납북되어 사후 친일 행적이 드러나 건국훈장이 취소되고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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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의 국회의원 -
허영호 (정치인)
허영호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에 참여하고 신간회 활동을 했으나, 중일전쟁 이후 친일로 전향하여 해방 후 혜화전문학교 교장과 동국대학교 학장을 역임했으며, 제헌 국회의원 재보궐선거에서 당선되었지만 한국 전쟁 중 납북되어 사후 친일 행적이 드러나 건국훈장이 취소되고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되었다.
2. 생애
경상남도 진주시 출신이다. 사립 산기고등측량학교, 관립한성외국어학교, 중국 상해대학교, 일본 니혼 대학 법과 등 국내외 여러 학교에서 수학하였다. 보성전문학교(현 고려대학교) 재학 중에는 반일 활동으로 중국에 망명하기도 했다.
니혼 대학 재학 중이던 1919년 3.1 운동 당시, 고향 진주에서 만세 시위를 주도하다 체포되어 1년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학업을 마치고 귀국하여 1923년 관동 대지진 당시 재일 조선인 구호 활동에 참여했으며, 1925년에는 경상남도청 이전 반대 운동에 참여하는 등 사회 활동을 이어갔다. 이후 진주고등보통학교 등 여러 학교에서 교원으로 근무하며 교육계에 종사하기도 했다.
광복 후 1948년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 진주 선거구 무소속 후보로 당선되어 정계에 입문했다. 제헌 국회에서 헌법 및 정부조직법 기초 위원으로 활동했으며, 내각책임제 개헌을 추진하는 등 활발한 의정 활동을 펼쳤다.
한국 전쟁 발발 후 북한에 의해 납북되었다. 납북 이후 황해도 수안목장에서 노동자로 일했으며, 1956년 재북 평화 통일 촉진 협의회 중앙위원으로 활동하고, 1958년 이후에는 평안북도 의주군의 농업 협동조합원으로 보내진 것으로 알려졌다. 그 이후의 행적은 불명확하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2.1. 독립운동과 투옥 (1919년)
니혼 대학 법과에 재학 중이던 1919년 3월 초, 고향인 진주에서 김재화(金在華) 등 동지들과 함께 3·1 운동의 일환으로 독립 만세 시위를 계획했다. 이를 위해 독립선언문과 교유문(敎喩文) 수백 매를 인쇄하고, 태극기를 직접 만들어 시민들에게 미리 나누어 주었다. 1919년 3월 18일, 진주 장날을 기하여 시장에 모인 수천 명의 군중을 규합하여 독립 만세를 외치는 시위를 주도하였다. 이 사건으로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으며,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6개월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2.2. 교육 및 사회 활동
사립 산기고등측량학교 광산과와 관립한성외국어학교를 졸업하였다. 이후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상해대학교 무역과를 졸업하였다. 귀국 후 보성전문학교(현 고려대학교) 법과에 입학하였으나, 재학 중 반일 연설로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다가 탈출하여 다시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니혼 대학 법과를 졸업하였다.
니혼 대학 재학 중이던 1919년 3월 초, 고향인 진주에서 김재화(金在華) 등과 함께 독립 만세 시위를 계획하였다. 독립선언문과 교유문(敎喩文) 수백 매를 인쇄하고 태극기를 제작하여 시민들에게 미리 나누어 준 뒤, 1919년 3월 18일 진주 장날에 모인 수천 명의 군중을 이끌고 독립 만세 시위를 주도하였다. 이 사건으로 체포되어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6개월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니혼 대학에 복학하여 학업을 마쳤다.
대학 졸업 후 귀국하여 사회 활동에 참여하였다. 1923년 9월 관동 대지진 발생 당시에는 피해를 입은 재일 조선인들을 돕기 위한 '재일 조선인 진재 동포 구제회' 발기회 간사장을 맡아 구호 활동을 전개하였다. 1925년 1월에는 일제가 추진하던 경상남도청 이전 계획에 반대하는 운동에서 조선인 대표로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교육계에서는 여러 학교에서 교원으로 근무하며 후학 양성에 힘썼다. 또한 교원 생활 중 광업에 종사하기도 하였다.
2.3. 제헌 국회의원 활동 (1948년 ~ 1950년)
1948년 5월 10일 실시된 제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경상남도 진주부 선거구에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같은 해 6월, 대한민국 헌법 및 정부조직법 기초 위원으로 활동하였으며, 국회 상임위원회 중 내무 치안 위원회에 소속되었다.
1949년 6월, 주한미군 군사고문단 설치를 환영하는 성명에 다른 의원들과 함께 참여하였다. 같은 해 10월 27일 발생한 빨치산에 의한 진주군청 습격 사건 당시, 국회 조사 위원으로 위촉되어 사건을 조사하고 그 결과를 본회의에 보고하였다. 1949년 12월에는 일민구락부, 신정회, 대한노동농민당, 무소속 의원들이 연합하여 대한국민당을 발족할 때 무소속 의원으로서 참여하였다.
1950년 1월, 책임 내각제로의 헌법 개정을 골자로 하는 헌법 개정안을 발의하고 개헌 추진을 주도하였다. 같은 해 3월에는 탄핵 예비 재판관으로 선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