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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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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경업은 당나라 초기의 무장으로, 측천무후의 섭정에 반발하여 684년에 반란을 일으킨 인물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기마술과 지략에 능했으며, 할아버지인 이세적의 작위를 상속받아 미주자사 등을 지냈다. 측천무후가 중종을 폐위하고 칭제하자, 동생 이경헌, 낙빈왕 등과 함께 양주에서 거병하여 중종 복위를 명분으로 내세웠다. 반란군은 10만 명으로 불어났으나, 당나라 군대에 의해 진압되었고, 이경업은 부하의 배신으로 살해되었다. 흑치상지 등 백제 유민들이 그의 반란에 가담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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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업 - [인물]에 관한 문서
인물 정보
이름이경업/서경업
원래 이름이경업
본명서경업
작위문신, 무신
다른 이름서경업
출생일636년
사망일684년
사망지장안성
재위? ~ 684년
가계
부친이진
친인척이세적
기타 정보
전임자이진
후임자이경헌

2. 생애

조주(曹州) 이고현(현 산동성 하택시 견성현 남서쪽)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기사(騎射)에 뛰어났고 재주와 지혜가 있었다. 그의 집안은 원래 서씨로 할아버지 이적이 두 차례에 걸친 고구려 원정에서 총관(總管)으로써 활약하는 등 당 왕조의 무장으로써 출세, 당의 국성(國姓)인 이씨 성을 사성 받았다. 이경업은 아버지 진(震)이 요절하면서 할아버지인 영공 이적의 작위를 그대로 물려받고 미주자사(眉州刺史)가 되었다가 후에 류주사마(柳州司馬)로 좌천되었다.

이경업의 출생 연도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아마도 이세적의 장남인 이진(李震)의 장남이었을 것이며, 이진은 이세적보다 먼저 사망했다. (이세적은 당시 당 태종(이름자)를 피하기 위해 이름을 이적(李勣)으로 바꾸었다.) 당 고종 재위 기간인 669년 이적의 사망 이후, 이경업은 이적의 장손으로서 이적의 작위인 영국공(英國公)을 상속받았다.

중종이 천후 무씨에 의해 폐해지고, 황족 단(旦)이 예종으로 즉위한 뒤, 천후는 황제 예종이 표문을 올려 스스로 물러나기를 청한 것을 계기로 조정에 나와 칭제(稱制)하게 되었다. 이경업은 동생 경헌(敬猷)과 당지기(唐之奇)、두구인(杜求仁)、낙빈왕 등과 함께 684년 9월에 양주(揚州)에서 거병하였다. 스스로를 광복부대장군(匡復府大將軍) 영양주대도독(領揚州大都督)이라 칭한 그는 천후에게 폐위당하고 노릉왕(盧陵王)으로 강등당한 중종을 복위시킨다는 명분을 내걸었고, 그에게 가담한 낙빈왕이 유명한 격문 《토무조격》(討武曌檄)을 지어 천하에 뿌렸다. 이경업이 거느린 군사는 삽시간에 10만이 넘는 수로 불어났다.

천후 무씨는 이경업이 가지고 있던 관직을 모두 깎아 없애고 그가 가진 이씨 성까지 몰수해 원래의 성인 서씨로 되돌렸다. 그리고 이경업 진압을 위해 양군공(梁郡公) 이효일(李孝逸)과 위원충(魏元忠)을 각각 원수와 부원수로 삼은 30만 군사를 급파했다. 한편 서경업(이경업)의 진중에서는 위사온(魏思溫)이 곧장 동도(東都, 낙양)으로 진격할 것을 청했지만 설장(薛璋)이 주장한 대로 먼저 남쪽으로 장강을 건너 상주(常州)、윤주(潤州, 지금의 강소 성 진강鎮江)을 차지하는 안이 채택되었다. 남쪽으로 윤주를 차지한 서경업은 다시 북쪽으로 진격해 고우(高郵) 땅에서 이효일의 군과 맞붙게 되었고, 초반에는 서경업이 우세했지만 차츰 병사들이 지치며 사기가 떨어져 갔고 마침내 11월에 이효일이 화공(火攻)으로 서경업의 군을 대패하는 데 성공, 서경업은 윤주로 달아나 배를 타고 신라로 달아나려다 부하의 배신으로 살해되고 말았다.

백제 무장이자 유민으로 당 왕조에 내투해 번장(藩將)으로 기용된 흑치상지가 이경업 반란에 참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구당서》에는 정원(貞元) 17년(801년) 토번군이 당 조정의 요청으로 염주(塩州)에 왔을 때, 토번군 장군 가운데 서 사인(徐舍人)이라는 한 장군이 스스로를 서경업의 5대 손으로 멸문지화를 피해 토번으로 달아나 살아남은 자손이라 소개했는데, 앞서 토번에 들어갔다가 포로로 잡혔던 승려 연소(延素)와 한인 포로 천백 인을 돌려보냈다고 한다.

2. 1. 측천무후에 대한 반란

중종이 천후 무씨에 의해 폐해지고, 황족 단(旦)이 예종으로 즉위한 뒤, 천후는 황제 예종이 표문을 올려 스스로 물러나기를 청한 것을 계기로 조정에 나와 칭제(稱制)하게 되었다. 이경업은 동생 경헌(敬猷)과 당지기(唐之奇)、두구인(杜求仁)、낙빈왕 등과 함께 684년 9월에 양주(揚州)에서 거병하였다. 스스로를 광복부대장군(匡復府大將軍) 영양주대도독(領揚州大都督)이라 칭한 그는 천후에게 폐위당하고 노릉왕(盧陵王)으로 강등당한 중종을 복위시킨다는 명분을 내걸었고, 그에게 가담한 낙빈왕이 유명한 격문 《토무조격》(討武曌檄)을 지어 천하에 뿌렸다. 이경업이 거느린 군사는 삽시간에 10만이 넘는 수로 불어났다.

천후 무씨는 이경업이 가지고 있던 관직을 모두 깎아 없애고 그가 가진 이씨 성까지 몰수해 원래의 성인 서씨로 되돌렸다. 그리고 이경업 진압을 위해 양군공(梁郡公) 이효일(李孝逸)과 위원충(魏元忠)을 각각 원수와 부원수로 삼은 30만 군사를 급파했다. 한편 서경업(이경업)의 진중에서는 위사온(魏思溫)이 곧장 동도(東都, 낙양)으로 진격할 것을 청했지만 설장(薛璋)이 주장한 대로 먼저 남쪽으로 장강을 건너 상주(常州)、윤주(潤州, 지금의 강소 성 진강鎮江)을 차지하는 안이 채택되었다. 남쪽으로 윤주를 차지한 서경업은 다시 북쪽으로 진격해 고우(高郵) 땅에서 이효일의 군과 맞붙게 되었고, 초반에는 서경업이 우세했지만 차츰 병사들이 지치며 사기가 떨어져 갔고 마침내 11월에 이효일이 화공(火攻)으로 서경업의 군을 대패하는 데 성공, 서경업은 윤주로 달아나 배를 타고 신라로 달아나려다 부하의 배신으로 살해되고 말았다.

백제 무장이자 유민으로 당 왕조에 내투해 번장(藩將)으로 기용된 흑치상지가 이경업 반란에 참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2. 1. 1. 봉기 준비

중종이 천후 무씨에 의해 폐해지고, 황족 단(旦)이 예종으로 즉위한 뒤, 천후는 황제 예종이 표문을 올려 스스로 물러나기를 청한 것을 계기로 조정에 나와 칭제(稱制)하게 되었다.[2] 이경업은 동생 경헌(敬猷)과 당지기(唐之奇)、두구인(杜求仁)、낙빈왕 등과 함께 684년 9월에 양주(揚州)에서 거병하였다.[3] 이들은 모두 양주(揚州, 대략 현대의 양저우, 장쑤)에서 만났으며 좌천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이들은 측천무후에 대항하는 반란을 계획하여 중종의 복위를 목표로 내세웠다.

이경업은 스스로를 광복부대장군(匡復府大將軍) 영양주대도독(領揚州大都督)이라 칭한 그는 천후에게 폐위당하고 노릉왕(盧陵王)으로 강등당한 중종을 복위시킨다는 명분을 내걸었고, 그에게 가담한 낙빈왕이 유명한 격문 《토무조격》(討武曌檄)을 지어 천하에 뿌렸다.

이 집단의 전략가인 위사온(魏思溫)은 당시 어사였던 그의 동료 설중장(薛仲璋)에게 양주에서 그곳의 사건들을 조사하도록 임무를 요청하게 했다. 또 다른 동료인 위초(韋超)는 양주 지사의 군사 고문인 진경지(陳敬之)를 반역을 꾀한다는 혐의로 공개적으로 고발했고, 설은 이를 핑계로 진을 체포했다. 며칠 후, 이경업은 관청의 급행 우편 서비스를 통해 도착하여 자신이 양주 지사의 새로운 군사 고문으로 임명되었고, 측천무후로부터 토착 부족장 풍자유(馮子猷)에 대한 군사 작전을 준비하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후 군사 창고를 열고 그의 조수 이종신(李宗臣)에게 양주의 황실 조폐창의 죄수와 노동자들을 징집하도록 했다. 그는 또한 진과 또 다른 관리인 소처행(蘇處行)을 처형했다. 다른 관리들은 감히 그에게 반대하지 못했고, 그는 양주를 장악했다.

2. 1. 2. 봉기

중종(中宗)이 천후 무씨에 의해 폐해지고, 황족 단(旦)이 예종으로 즉위한 뒤, 천후는 황제 예종이 표문을 올려 스스로 물러나기를 청한 것을 계기로 조정에 나와 칭제(稱制)하게 되었다. 이경업은 동생 경헌(敬猷)과 당지기(唐之奇)、두구인(杜求仁)、낙빈왕(駱賓王) 등과 함께 684년 9월에 양주(揚州)에서 거병하였다.[4] 스스로를 광복부대장군(匡復府大將軍) 영양주대도독(領揚州大都督)이라 칭한 그는 천후에게 폐위당하고 노릉왕(盧陵王)으로 강등당한 중종을 복위시킨다는 명분을 내걸었고, 그에게 가담한 낙빈왕이 유명한 격문 《토무조격》(討武曌檄)을 지어 천하에 뿌렸다. 이경업이 거느린 군사는 삽시간에 10만이 넘는 수로 불어났다.

이경업은 양주(揚州)의 군대를 동원하여 중종(中宗)의 ''사성(Sisheng)'' 연호 부활을 선언하여 중종의 복위를 꾀함을 보여주었다. 그는 스스로 복위대장군(匡復府上將, ''Kuangfu Fu Shangjiang'')을 자처했다. 그는 10일 만에 10만 명이 넘는 군사를 빠르게 모았다. 그는 또한 뤄빈왕에게 무측천(武則天)을 비판하는 선언문을 작성하게 하여 다른 주(州)에 배포했다.

이경업은 또한 외모가 중종의 형인 이현과 비슷한 사람을 찾아냈다. 이현은 이전에 황태자였지만 680년에 폐위되었고, 무측천에 의해 684년 초에 자결하도록 강요당했는데, 이경업이현이 아직 살아 있으며 반란을 승인했다고 주장했다.

한편, 위사문(魏思溫)은 이경업에게 무측천의 정권을 빨리 파괴하려는 의도를 보여주기 위해 즉시 낙양(洛陽)으로 향할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설충장(薛仲璋)은 먼저 상주(常州, 대략 현대의 장쑤성 창저우), 윤주(潤州, 대략 현대의 장쑤성 전장))를 공격한 다음 금릉을 점령하여 양쯔강을 천연 방어선으로 삼을 것을 주장했다. 위사문은 그렇게 하는 것은 이경업이 이미 패배 후 숨을 곳을 찾고 있으며 반란에 가담하는 사람들을 낙담시킬 것이라고 간청했지만, 이경업은 설의 제안을 받아들여 윤주를 공격하기 위해 남쪽으로 향했다. 그는 당시 윤주의 태수였던 숙부 이사문(李思文)의 방어 노력에도 불구하고 재빨리 점령했다.

천후 무씨는 이경업이 가지고 있던 관직을 모두 깎아 없애고 그가 가진 이씨 성까지 몰수해 원래의 성인 서씨로 되돌렸다. 그리고 이경업 진압을 위해 양군공(梁郡公) 이효일(李孝逸)과 위원충(魏元忠)을 각각 원수와 부원수로 삼은 30만 군사를 급파했다. 한편 서경업(이경업)의 진중에서는 위사온(魏思溫)이 곧장 동도(東都, 낙양)으로 진격할 것을 청했지만 설장(薛璋)이 주장한 대로 먼저 남쪽으로 장강을 건너 상주(常州)、윤주(潤州, 지금의 강소 성 진강鎮江)을 차지하는 안이 채택되었다. 남쪽으로 윤주를 차지한 서경업은 다시 북쪽으로 진격해 고우(高郵) 땅에서 이효일의 군과 맞붙게 되었고, 초반에는 서경업이 우세했지만 차츰 병사들이 지치며 사기가 떨어져 갔고 마침내 11월에 이효일이 화공(火攻)으로 서경업의 군을 대패하는 데 성공, 서경업은 윤주로 달아나 배를 타고 고구려(신라?)로 달아나려다 부하의 배신으로 살해되고 말았다.

백제 무장이자 유민으로 당 왕조에 내투해 번장(藩將)으로 기용된 흑치상지(黑齒常之)가 이경업 반란에 참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2. 1. 3. 진압과 죽음

중종(中宗)이 천후 무씨에 의해 폐해지고, 황족 단(旦)이 예종으로 즉위한 뒤, 천후는 황제 예종이 표문을 올려 스스로 물러나기를 청한 것을 계기로 조정에 나와 칭제(稱制)하게 되었다. 이경업은 동생 경헌(敬猷)과 당지기(唐之奇)、두구인(杜求仁)、낙빈왕(駱賓王) 등과 함께 684년 9월에 양주(揚州)에서 거병하였다. 스스로를 광복부대장군(匡復府大將軍) 영양주대도독(領揚州大都督)이라 칭한 그는 천후에게 폐위당하고 노릉왕(盧陵王)으로 강등당한 중종을 복위시킨다는 명분을 내걸었고, 그에게 가담한 낙빈왕이 유명한 격문 《토무조격》(討武曌檄)을 지어 천하에 뿌렸다. 이경업이 거느린 군사는 삽시간에 10만이 넘는 수로 불어났다.

천후 무씨는 이경업이 가지고 있던 관직을 모두 깎아 없애고 그가 가진 이씨 성까지 몰수해 원래의 성인 서씨로 되돌렸다. 그리고 이경업 진압을 위해 양군공(梁郡公) 이효일(李孝逸)과 위원충(魏元忠)을 각각 원수와 부원수로 삼은 30만 군사를 급파했다. 한편 서경업(이경업)의 진중에서는 위사온(魏思溫)이 곧장 동도(東都, 낙양)으로 진격할 것을 청했지만 설장(薛璋)이 주장한 대로 먼저 남쪽으로 장강을 건너 상주(常州)、윤주(潤州, 지금의 강소 성 진강鎮江)을 차지하는 안이 채택되었다. 남쪽으로 윤주를 차지한 서경업은 다시 북쪽으로 진격해 고우(高郵) 땅에서 이효일의 군과 맞붙게 되었고, 초반에는 서경업이 우세했지만 차츰 병사들이 지치며 사기가 떨어져 갔고 마침내 11월에 이효일이 화공(火攻)으로 서경업의 군을 대패하는 데 성공, 서경업은 윤주로 달아나 배를 타고 고구려(신라?)로 달아나려다 부하의 배신으로 살해되고 말았다.

이경업은 이소의가 도착할 예정이라는 소식을 듣고 윤주에서 양주로 돌아와 하아(下阿, 현대 천장시)에 진을 치고 고우시에서 이소의의 공격에 대비하는 한편, 이경우를 보내 회음(淮陰, 현대 화이안시, 장쑤성)을 공격하게 하고 위초와 위지소를 보내 도량산(都梁山, 현대 화이안)을 방어하게 했다. 이소의가 도착하자 그의 부하 뢰인지가 공격을 감행했지만 초반에 저항군에게 실패하여 이소의는 주저하며 진격을 멈추었다. 그는 부하 위원충이 진격을 멈추는 것은 반란이 실제보다 더 심각한 위협으로 인식될 수 있고, 무후가 그를 대체할 다른 장군을 보낼 수도 있다고 경고한 후에야 진격을 재개했다. 곧 마경신은 전투에서 위지를 죽일 수 있었다. (무후는 실제로 이경업을 상대로 흑치상지를 임명했지만, 흑치가 도착하기 전에 이경업은 패배했다.)

한편, 이소의는 위원충과 설극구의 제안에 따라 먼저 위초와 이경우를 공격하여 저항군의 사기를 꺾기로 결정했다. 그는 성공하여 위초와 이경우는 도주했다. 그는 이경업의 주력 부대를 공격했으나 처음에는 실패했고, 부하 소효상이 첫 공격에서 전사했다. 이소의의 여러 차례의 추가 공격도 실패했다. 그러나 저항군이 지쳐 나가자 이소의는 유지유의 제안에 따라 유리한 바람을 이용하여 이경업 부대 방향으로 주변 풀밭에 불을 지른 다음 불길과 함께 공격했다. 이경업의 군대는 패배했고, 7,000명이 전투에서 죽었으며, 많은 사람들이 도주하다가 익사했다. 이경업과 그의 측근들은 강도(江都, 양주의 수도)로 도주하여 가족과 함께 윤주 남쪽으로 피신하여 바다로 나가 한반도로 향할 계획을 세웠다. 이소의는 빠르게 강도를 점령하고 이경업을 추격하기 위해 군대를 보냈다. 이경업 일행이 해령으로 도주하다 역풍을 만나자 그의 부하 왕나상은 도주하려는 마음을 바꿔 이경업, 이경우, 나빈왕을 죽이고 그들의 머리를 정부군에 항복했다. 당지기와 위사문은 체포되어 참수되었다.

백제 무장이자 유민으로 당 왕조에 내투해 번장(藩將)으로 기용된 흑치상지(黑齒常之)가 이경업 반란에 참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3. 평가

3. 1. 한국과의 관계

4. 일화

당의 유속이 지은 《수당가화》(隋唐嘉話)에는 이경업의 일화 한 가지가 수록되어 있다. 고종 때에 남쪽에서 만족(蠻族)들이 모여 노략질하는데 이를 좀처럼 막지 못하자 조정은 이경업을 자사로 삼아 보냈다. 이경업은 주(州)에서 뽑은 병졸들도 마다하고 말 한 필만 탄 채 적진으로 들어갔다. 태연히 다른 일을 마친 뒤 적은 모두 어디 있느냐고 물었고, 남쪽 물가에 있다는 말에 가까운 관리 한두 사람만 데리고 적이 있는 곳으로 갔다. 처음에는 무기를 들고 경계하며 맞았던 만족들은 이경업이 탄 배 안에 아무것도 없자 스스로 군영을 버리고 숨어버렸고, 경업은 곧장 적의 영내로 들어가서 "국가는 너희들이 탐욕스런 관리에게 고통 받은 것뿐 다른 악이 없음을 안다. 그러니 이제 모두 각자의 생업으로 돌아가라. 늦게 가는 자는 적으로 간주한다."고 선언, 만족의 수괴만 따로 불러 꾸짖고 장 수십 대를 쳐서 보냈다. 이렇게 경내의 소란은 진정되었지만, 이경업의 행동을 전해 들은 할아버지 영공 이적은 손자의 담력과 지략을 장하게 여기면서도 자신이었다면 이렇게까지는 하지 않을 거라는 우려를 비치고, "우리 집안이 망한다면 필시 이 녀석 때문일 것이다."라고 하였다. 해당 일화는 훗날 의 풍몽룡(馮夢龍)이 지은 《지낭전집》(智囊全集)에도 수록되었다.

또한 단성식이 쓴 《유양잡조》(酉陽雜俎)에는 이적이 이경업을 데리고 사냥을 나갔을 때의 일화가 수록되어있다. 이경업이 풀숲으로 가서 짐승을 몰도록 보내놓은 사이에 풀숲 사이에 불길이 일었고, 이경업이 이를 눈치챘을 때는 이미 불길이 사방에서 이경업을 에워싸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경업은 자신이 타고 있던 말을 죽여서 배를 가르고 피를 뒤집어쓴 다음 말의 뱃속으로 들어가 웅크려 있다가, 불길이 사그라들었을 때 바깥으로 나와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고 한다.

5. 가계

이세적의 손자이자 이진의 아들이다. 동생으로는 이경헌이 있었다.

참조

[1] 웹사이트 兩千年中西曆轉換 http://www.sinica.ed[...]
[2] 문서
[3] 문서
[4] 문서 Declaration on Xu Jingye's Behalf Against Wu Zhao
[5] 문서
[6] 문서
[7] 문서
[8] 서적 Chinese History Dictionary: Volume of Historical Geography (中国历史大辞典·历史地理卷) Shanghai Lexicographical Publishing Hou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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