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재 (18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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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경재는 조선 순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영의정에 오른 인물이다. 그는 성균관 대사성, 이조참의, 대사간, 이조참판, 홍문관 부제학, 경상도관찰사, 공조판서, 형조판서, 한성부판윤, 예조판서, 병조판서 등을 역임했다. 평안도관찰사로 외직에 나갔다 돌아와 좌참찬, 호조판서를 거쳐 규장각 제학을 지냈으며 우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이르렀다. 영의정 시절 흥선대원군과 함께 경복궁 중건에 앞장섰으며,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이경재는 순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대사성, 이조참의, 사간원대사간, 이조참판, 홍문관부제학, 경상도관찰사, 사헌부대사헌, 공조판서, 형조판서, 한성부판윤, 예조판서, 병조판서, 평안도관찰사, 판의금부사, 의정부좌참찬, 호조판서, 규장각제학, 우의정, 판돈녕부사, 영의정 등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흥선대원군과 야합하여 경복궁 중건에 앞장서기도 하였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2. 생애
2. 1. 관직 생활
순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겸설서, 응교, 대촉을 거쳐 성균관대사성을 지냈다. 이후 검교직각, 이조참의를 역임하고, 사간원대사간, 이조참판, 홍문관부제학을 거쳐 경상도관찰사로 부임하였다. 사헌부대사헌을 하다가 공조판서가 되었고, 이후 사헌부대사헌, 형조판서를 거쳐 다시 대사헌을 지낸 후 형조판서로 있었다. 반송사로 중국에 다녀온 후 원임 직각, 형조판서, 한성부판윤, 예조판서, 병조판서를 역임하였다. 평안도관찰사로 외직에 나갔다가 돌아와 병조판서, 한성부판윤, 판의금부사, 의정부좌참찬, 호조판서를 지냈다. 다시 판의금부사와 호조판서를 한 뒤 판의금부사, 형조판서를 거쳐 규장각제학을 지내다가 우의정에 올랐다. 판돈녕부사로 물러났다가 영의정에 임명되었고, 이후 다시 판돈녕부사로 물러났다.
2. 2. 흥선대원군과의 관계 및 경복궁 중건
영의정 시절 흥선대원군과 야합하여 경복궁 중건에 앞장섰다.
3. 가족 관계
관계 이름 출생 사망 비고 증조부 이태중(李台重) 조부 이학영(李學永) 부 이희선(李羲先) 1775년 1818년 직산현감 모 반남 박씨 1774년 1811년 박홍수(朴泓壽)의 딸, 정부인 누나 한산 이씨 (韓山 李氏) 미상 미상 한산부부인 매형 김조근 (金祖根) 1793년 1844년 영흥부원군 효간공 외질녀 효현왕후 김씨 1828년 1843년 헌종의 정비 형 이창재(李昌在) 1797년 1863년 공조참판, 증 좌찬성 형수 안동 김씨(安東 金氏) 1798년 1871년 정경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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