쇄국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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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쇄국정책은 특정 국가가 외부 세계와의 교류를 제한하는 정책을 의미한다.
조선은 1636년 병자호란 이후 사대교린 정책을 유지하며 쇄국 정책을 고수했고, 흥선대원군 집권 이후 척양척왜를 주장하며 쇄국 정책을 강화했다. 이로 인해 병인양요와 신미양요가 발생했으며, 강화된 쇄국 정책은 1875년 운요호 사건을 계기로 강화도 조약을 통해 막을 내렸다.
중국은 명나라 시기 해금 정책을 시행했으며, 청나라 초기에는 정성공 세력의 저항을 우려하여 해금 정책을 강화했으나, 이후 쇄국 정책을 해제하고 무역을 허용했다.
일본은 1639년 포르투갈 선박의 입항을 금지하면서 쇄국 정책을 시작하여 1854년 미일화친조약 체결까지 유지했다. 쇄국 정책은 도쿠가와 막부의 종교 탄압, 다이묘의 세력 약화, 그리고 서구 열강의 침략을 막기 위한 시도로 평가된다. 쇄국 기간 동안 일본은 나가사키를 통해 제한적인 무역을 유지했으며, 1853년 페리 제독의 내항으로 쇄국 정책은 종말을 맞이했다.
쇄국 정책에 대한 평가는 긍정적, 부정적으로 나뉘며, 최근에는 쇄국이라는 용어 대신 해금 정책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쇄국 정책은 고립주의의 위험성과 국제 협력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역사적 사례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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쇄국정책 | |
---|---|
개요 | |
이름 | 쇄국 (鎖国) |
정의 | 에도 막부가 외국과의 교역을 통제한 일본의 대외 폐쇄 정책 (1633년~1853년) |
로마자 표기 | Sakoku |
배경 | |
주요 목표 | 기독교 확산 방지 및 막부의 권력 유지 |
정책 시작 | 1633년, 도쿠가와 이에미쓰 시기 |
무역 통제 | 외국과의 무역을 엄격히 제한하고 특정 항구(예: 나가사키)를 통해서만 허용 |
주요 내용 | |
외국인 입국 제한 | 외국인의 일본 입국을 원칙적으로 금지 |
일본인 해외 도항 금지 | 일본인의 해외 도항 및 귀국을 금지 |
무역 제한 | 특정 국가(예: 네덜란드, 중국)와의 제한적인 무역만 허용 |
나가사키 데지마 | 데지마를 통한 네덜란드와의 무역 |
예외 | |
아이누와의 교역 | 마쓰마에번을 통한 아이누와의 교역은 유지 |
쓰시마 | 쓰시마번을 통한 조선과의 외교 및 교역 |
사쓰마번 | 사쓰마번을 통한 류큐와의 교역 |
영향 | |
경제 | 국내 산업 발전 및 독자적인 문화 형성 |
사회 | 서양 문물에 대한 제한적인 접근 |
정치 | 막부 체제의 안정화 |
종결 | |
계기 | 미국 페리 제독의 흑선 내항 (1853년) |
결과 | 일본의 개항 및 근대화 |
관련 용어 | |
낭학 | 난학 (서양 학문) 발달 |
막부 | 에도 막부의 통치 체제 |
기타 | |
같이 보기 | 고립주의 |
2. 조선
조선 왕조는 1636년 병자호란 이후 수 세기 동안 사대교린 정책의 틀 안에서 쇄국정책을 유지해 왔다. 1863년 흥선대원군이 집권하면서 국정 전반에 걸쳐 과감한 개혁을 단행하였으나, 외교적인 면에서는 청나라를 제외하고는 척양척왜를 주장하며 쇄국정책을 고수하였다. 특히 천주교의 유입을 단호히 배격하여 1866년 병인양요와 1871년 신미양요 등 두 차례에 걸친 양요가 일어나기도 했으며, 이러한 양요와 열강의 문호 개방 요구에 대응하여 전국에 척화비(1871년)를 세워 적극적인 쇄국정책을 추진했다.
중국의 경우 주로 연안 지역의 왜구를 포함한 해적 방어와 해상에서의 밀무역을 금지하는 것이 해금의 목적이었다.
일본에서 '쇄국'은 1639년 포르투갈 선박의 입항 금지부터 1854년 미일화친조약 체결까지의 기간을 가리킨다.[126] '쇄국'이라는 용어는 에도 시대의 난학자 시즈키 타다오가 1801년에 쓴 《쇄국론》에서 처음 사용되었으며,[32][33] 메이지 유신 이후 널리 쓰이게 되었다.[129] 그러나 최근에는 제도로서의 '쇄국'은 없었다는 견해가 주류이다.[126]
흥선대원군의 강경한 태도로 인해 서구 열강은 통상 시도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으며, 일본에서는 정한론까지 대두하게 되었다. 당시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 정세는 문호 개방의 필요성과 열강으로부터의 국권 수호라는 상반된 과제를 안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1875년 고종 12년 운요호 사건으로 이어졌고, 그 결과 조선은 타의에 의해 문호를 개방하게 되었다.
쇄국정책을 유지하던 조선 정부는 1876년 '병자수호조약(丙子修護條約)'을 체결하면서 쇄국의 빗장을 풀었다. 1882년에는 '조미수호통상조약(朝美修好通商條約)'을 통해 외국인에게 자유를 보장하고, 1882년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으로 해금(海禁)을 풀었다. 1886년에 비준된 '조불수호통상조약(朝佛修好通商條約)'으로 프랑스 선교사들이 전교의 특권을 누리기 시작하였다.[124]
3. 중국
명나라 조정은 1567년(융경 원년)까지 거의 200년간 쇄국정책(海禁, 하이진)을 실시하였다. 이 해에 복건 순무 도택민이 해금을 풀어 줄 것을 청하여, "배를 유인하는"(船引) 제도의 실시를 허락받았다. 그러나, 명 조정은 단지 복건 장주의 월항 한 곳만을 교역항으로 개방했을 뿐이었다.
청나라 초기, 정성공의 정씨 왕국 등 청에 저항하는 세력이 외국 상인과 제휴할 것을 염려하여, 한층 해외 교역을 제한하는 쇄국정책(海禁, 하이진)이 강화되었다. 17세기 종반이 되면 삼번의 난 평정(강희 20년 1681년), 정씨 왕국의 귀순(강희 22년 1683년) 등 국내 안정화에 따라, 1684년 (강희 23년), 청나라 조정은 쇄국정책을 해제하고 정식으로 바다를 열어 해관(세관) 설치 등의 조치를 행함에 더하여, 외국과의 무역을 윤허하였다.[125] 당초에는 마카오 등 4개 항구가 외국과의 무역을 행하는 장소로 지정되었다. 일본 · 캄보디아를 시작으로 프랑스 · 네덜란드 등의 "무역"을 행하는 여러 나라는 종래의 조공국과는 달리, 중상(中商, 중국 상인)과 이상(夷商, 외국 상인)이 항구를 통하여 교역을 행하는 관계였다.
4. 일본
일반적으로 도쿠가와 막부는 스페인 제국과 포르투갈 왕국의 식민지 및 종교적 영향력을 제거하기 위해 쇄국 정책을 시행했다고 여겨졌으며, 이는 막부의 안정과 일본 열도의 평화를 위협하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남부 일본(주로 규슈)에서 증가하는 가톨릭 개종자 수는 그러한 위협으로 간주되는 중요한 요소였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이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유럽 선교사들에게 등을 돌리기 시작했고, 그곳에서 스페인의 점진적인 진전은 도쿠가와로부터 증가하는 적대감을 이끌어냈다.[4][5]
17세기 초 해상 금지령이 점차 강화된 동기는 도쿠가와 막부의 국내 의제를 고려해야 한다. 이 의제의 한 가지 요소는 일본의 외교 정책에 대한 충분한 통제력을 확보하여 사회적 평화를 보장할 뿐만 아니라, 특히 다이묘를 포함하여 국내의 다른 강력한 영주들에 대한 도쿠가와 지배권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이 다이묘들은 센고쿠 시대 동안 동아시아 무역 연계를 활용하여 수익을 창출했으며, 이를 통해 군사력을 강화할 수 있었다. 다이묘가 일본에 오는 외국 선박과의 교역이나 해외 무역 기회를 추구하는 능력을 제한함으로써, 도쿠가와 막부는 아무도 막부의 지배권에 도전할 만큼 강력해지지 않도록 보장할 수 있었다.
나가사키를 통해 주로 무역을 함으로써, 막부는 세금과 부과금을 통해 자체 재정을 강화할 수 있었다.[6] 서구와 기독교의 영향력을 일본 열도에서 제거하는 데 초점을 맞춘 것은 해금의 주된 동력으로, 일본 역사를 다소 유럽 중심적으로 해석하는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지만, 이는 일반적인 인식이다.[7]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와 그와 가장 강하게 연관된 두 식민 세력은 도쿠가와 막부에 의해 진정한 위협으로 여겨졌다. 메이쇼 천황 역시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신세계를 침략하고 식민지화하는 것을 듣고 일본이 곧 그들의 소유 중 하나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심각한 의문을 가졌다.
개신교 영국인과 네덜란드인 무역상들은 스페인인과 포르투갈인 선교사들이 아시아 국가를 문화적으로 지배하고 식민지화하려는 주장된 정책의 일부로 종교를 체계적으로 전파한다고 비난함으로써 이러한 인식을 강화했다.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및 다이묘 개종자와 같은 선교사들의 노력으로 일본의 기독교인 수가 꾸준히 증가하고 있었다. 쇄국을 촉발한 것으로 알려진 직접적인 방아쇠는 시마바라의 난 (1637–38)이었다. 그 후 막부는 선교사들이 반란을 선동했다고 비난하고, 그들을 국외로 추방했으며, 사형에 처하는 엄격한 조항으로 종교를 금지했다. 남아있는 일본 기독교인들은 주로 나가사키에 있었으며, 지하 공동체를 형성하여 숨은 크리스천으로 불리게 되었다.
외부 세계와의 모든 접촉은 막부 또는 이 임무를 맡은 영지(쓰시마, 마쓰마에, 사쓰마)에 의해 엄격하게 규제되었다. 네덜란드 무역상들은 선교 활동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데 동의함으로써 일본에서 상업 활동을 계속할 수 있었다. 오늘날, 일본의 기독교인 비율(1%)은 중국 (3%), 베트남 (7%) 및 대한민국 (29%)과 같은 다른 동아시아 국가보다 훨씬 낮다.[8]
쇄국 정책은 또한 일본과 다른 국가 간의 상업을 통제하고, 동아시아 계층에서 새로운 지위를 주장하는 방법이었다. 도쿠가와는 일본이 의약품과 같은 필수 상품을 계속 접근할 수 있고, 중국 조공 시스템 내에서 종속적 지위에 동의하지 않고 중국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한 필수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자체적인 소규모 국제 시스템을 만들려고 했다.
일본과 조선의 일반적으로 건설적인 공식 외교 관계는 한국이 일본에 정기적인 사절단(통신사)을 파견할 수 있게 했다. 쓰시마 후추 번과 한국 간의 활발한 무역과 부산 왜관의 일본인 존재와 더불어, 일본은 에도 시대 내내 중국의 문화, 지적 및 기술 발전을 이용할 수 있었다. 해상 금지령의 가장 엄격한 버전이 공포될 당시 명나라는 중국의 대부분에 대한 통제력을 잃었고, 황실의 정통성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일본이 명나라 또는 청나라 정부와 공식적인 외교 관계를 맺는 것은 불필요하고 어쩌면 바람직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일본은 네덜란드와의 중개 무역과 류큐 제도를 통해 필요한 수입품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일본은 실제로 류큐 왕국의 통치자들이 중국과의 조공 관계를 유지하도록 장려했는데, 이는 시마즈 씨가 류큐 제도에서 은밀하게 막대한 정치적 영향력을 확립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랬다.[6] 청나라는 대만이 명나라 충신들에게 패배한 후 무역에 훨씬 더 개방적이 되었고, 따라서 일본의 통치자들은 중국과 공식적인 관계를 맺을 필요성을 덜 느꼈다.
쇄국에 대한 자유화 도전은 18세기에 일본 엘리트 내부에서 나왔지만,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10] 그 후 쇄국 정책은 일본의 은과 구리와 같은 광물 자원이 외부 세계에 완전히 고갈되는 것을 막는 주요 방어 수단이었다. 그러나 나가사키를 통한 은 수출은 막부에 의해 모든 수출을 중단할 정도로 통제되었지만, 한국을 통한 은 수출은 비교적 많은 양으로 계속되었다.
이 기간 동안 일본이 서구 기술을 따라잡은 방법은 데지마를 통해 얻은 네덜란드어로 된 의학 및 기타 텍스트를 연구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18세기 말에 란가쿠 (네덜란드 학문)로 알려진 번창하는 분야로 발전했다. 국교가 개방되고 쇄국 정책이 붕괴된 후에는 쓸모없게 되었다. 그 후 많은 일본 학생들(예: 기쿠치 다이로쿠)이 외국에서 유학하도록 파견되었고, 많은 외국인 고용인들이 일본에서 고용되었다.
쇄국과 관련된 정책은 1854년 매튜 페리 제독의 요구에 대한 응답으로 가나가와 조약으로 끝났다. 쇄국 시대에는 무역이 번성했으며, 관계와 무역이 특정 항구로 제한되었지만, 일본은 완전히 닫힌 국가는 아니었다. 쇼군이 포르투갈인을 추방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동시에 네덜란드 및 한국 대표들과 논의하여 전체 무역 규모가 줄어들지 않도록 했다.[13]
따라서, 최근 수십 년 동안 연구에서는 이 시기의 외교 정책을 완전히 고립되고 폐쇄된 국가를 의미하는 쇄국이 아닌, 당시 문서에서 사용되었고 중국의 유사한 개념 해금에서 유래된 해금이라는 용어로 지칭하는 것이 점점 더 일반화되고 있다.[11]
4. 1. 배경
1549년 프란치스코 하비에르가 일본에 온 이후, 기독교(당시에는 기리시탄으로 불림)가 규슈 지역을 중심으로 확산되었다. 오다 노부나가는 기독교를 방임했고, 도요토미 히데요시도 처음에는 묵인했으나, 1587년 바테렌 추방령을 내려 기독교 선교를 제한하려 했다. 그러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포르투갈과의 무역 중단을 우려하여 추방령을 제대로 시행하지 않았고, 1590년대에는 기독교가 다시 부활하기도 했다.[68] 히데요시 본인이 추방령을 무시하고 예수회 선교사들을 통역 및 포르투갈 상인과의 무역 중개인으로 중용했다는 기록도 있다.[71]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초기에는 무역 이익을 중시하여 기독교를 묵인했다. 그러나 개신교 국가인 네덜란드는 포교 없이 무역이 가능하다는 점을 내세웠고, 1612년 오카모토 다이하치 사건을 계기로 1613년 기독교 금지령이 명문화되었다.
도쿠가와 막부는 국내 기독교인의 증가와 단결을 위협으로 간주했다. 당시 가톨릭 세력은 종교 개혁 이후 개신교 세력의 확장으로 유럽 내 입지가 좁아져 해외에서 활로를 찾고 있었고, 반면 스페인으로부터 독립 전쟁 중이던 네덜란드는 가톨릭에 대한 적대감이 강해 막부에 협력적이었다.
1637년 시마바라의 난은 막부가 쇄국 정책을 강화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막부는 난의 원인을 기독교로 지목하고, 1639년 포르투갈 선박의 입항을 금지했다. 1641년에는 네덜란드 상관을 히라도에서 데지마로 이전시키고, 막부에 포교를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았다.[101]
이러한 일련의 조치들은 단순히 종교적인 이유뿐만 아니라, 도쿠가와 막부가 국내 통제력을 강화하고, 서구 열강의 침략을 막기 위한 복합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4. 2. 과정
히데타다와 이에미쓰의 통치 기간 동안 쇄국 체제가 완성되었다. 주요 사건들은 다음과 같다.
연도 | 사건 |
---|---|
1616년 | 명나라 이외의 선박 입항을 나가사키와 히라도섬으로 제한.[43] |
1623년 | 영국, 실적 부진으로 히라도 상관 폐쇄.[43] |
1624년 | 스페인과의 국교 단절.[43] |
1628년 | 타이오완 사건으로 네덜란드와의 교역 4년간 단절.[43] |
1631년 | 봉서선 제도 시작, 주인선에 주인장 외 로주의 봉서 필요.[43] |
1633년 | 제1차 쇄국령: 봉서선 외 도항 금지, 해외 5년 이상 거류 일본인 귀국 금지.[43] |
1634년 | 제2차 쇄국령: 제1차 쇄국령 재확인, 나가사키 데지마 건설 시작.[43] |
1635년 | 제3차 쇄국령: 명나라, 네덜란드 등 외국 선박 입항을 나가사키로 제한, 동남아시아 방면 일본인 도항 및 귀국 금지.[43] |
1636년 | 제4차 쇄국령: 무역 관련 없는 포르투갈인과 그 처자(일본인 혼혈 포함) 287명 마카오 추방, 나머지 데지마 이동.[43] |
1637년-1638년 | 시마바라의 난 발생, 네덜란드 막부 지원.[43] |
1639년 | 제5차 쇄국령: 포르투갈 선박 입항 금지.[43] |
1640년 | 마카오 통상 재개 요청 포르투갈 선박 내항, 도쿠가와 막부 사신 61명 처형.[43] |
1641년 | 네덜란드 상관 히라도섬에서 데지마로 이동.[43] |
1643년 | 브레스켄스 호 사건 발발, 도쿠가와 이에야스 주인장 부정됨.[43] |
1644년 | 중국 명나라 멸망, 청나라 중국 본토 진출, 명나라 부흥 세력 지원 요청 막부 거절.[43] |
1647년 | 포르투갈 선박 국교 회복 요청, 도쿠가와 막부 거부, 이후 포르투갈 선박 내항 단절.[43] |
1673년 | 리턴 호 사건으로 영국과 교역 재개 거부, 이후 100년 이상 네덜란드 외 유럽 선박 내항 두절.[43] |
4. 3. 쇄국 중의 무역
쇄국 하에서도 일본은 외국과의 무역을 완전히 단절하지 않고, 제한적으로나마 교류를 유지했다. 이러한 무역 창구는 '네 개의 입'(四口)이라고 불렸다.[12]- 나가사키 구(口): 나가사키는 막부 직할지로, 네덜란드와 중국과의 무역이 이루어졌다. 나가사키 회소(会所)를 통해 막부가 관리하는 무역이었다.
- 쓰시마 구(口): 쓰시마 번을 통해 조선과의 무역이 이루어졌다. 쓰시마 번의 소씨 일족은 중세부터 조선과의 외교와 무역 중계를 담당했으며, 에도 시대에도 그 권한을 인정받았다. 부산의 왜관을 통한 교역과 막부의 대조선 외교 중계 역할을 했다.
- 사쓰마 구(口) (류큐 구(口)): 사쓰마 번을 통해 류큐 왕국과의 무역이 이루어졌다. 사쓰마 번이 류큐 왕국을 지배하면서 류큐를 통한 무역이 인정되었다.
- 에조 구(口): 마쓰마에 번을 통해 아이누와의 무역이 이루어졌다. 마쓰마에 씨는 에조에서 북방 무역을 담당해 왔으며, 에도 시대에도 그 권한을 인정받았다. 마쓰마에 번 수입의 대부분은 북방 무역에 의존했다.
이처럼 일본은 쇄국 중에도 네덜란드, 중국, 조선, 류큐 왕국 등과 제한적인 무역을 유지하며, 필요한 물품을 확보하고 국제 정세에 대한 정보를 얻었다.[12]
4. 4. 쇄국 정책에 대한 도전과 종말
18세기 후반부터 러시아 제국, 영국, 프랑스, 미국 등의 군함이 일본에 내항하여 교섭을 벌였으나, 대부분 거부되었다. 그러나 1853년 7월 8일 우라가에 미국의 매튜 페리가 이끄는 흑선이 내항했고, 이듬해 1854년 3월 31일 미일 화친 조약이 체결되어 "개국"에 이르렀다. 그 후 미일 수호 통상 조약(1858년)을 시작으로 하는 불평등 조약이 잇따라 체결되면서 쇄국 체제가 붕괴되었다.[45]- 1778년(안에이 7년), 야쿠츠크의 상인 파벨 레베데프-라스토치킨이 아케시 장소에 내항. 마쓰마에 번에 교역을 요구했지만 거부당했다. 막부에는 보고되지 않았다.[51]
- 1787년(텐메이 7년), 프랑스 왕국의 라 페루즈 탐험대가 일본 근해를 항해, 쿠릴 열도, 류큐 열도를 탐험했다. 소야 해협의 국제 명칭 라 페루즈 해협은 그에게서 유래되었다.[52]
- 1791년(간세이 3년), 미국의 탐험가 존 켄드릭이 2척의 배와 함께 기이 오시마에 도착하여 11일간 체류했다. 일본을 방문한 최초의 미국인.[53][54]
- 러시아에 의한 개국 요구
- 1792년(간세이 4년) 아담 락스만이 표류민 다이코쿠야 코다유 등 3명을 데리고 네무로에 내항하여 상륙, 통상 교섭을 요구했으나 도쿠가와 막부는 거부했다. 그러나 나가사키 입항 허가증인 신패를 주었다.
- 1804년(분카 원년) 9월, 발트 독일인인 아담 요한 폰 크루젠슈테른이 이끄는 러시아의 세계 일주 탐험대가 표류민 쓰다유 등 4명을 데리고 신패를 가지고 나가사키에 내항. 특사 니콜라이 레자노프가 통상을 요구했지만, 이듬해 봄까지 막부와 교섭했으나 최종적으로 거부당했다.
- 1806년(분카 3년) "분카의 급수 급여령"이 내려졌다.
- 1806년(분카 3년)~1807년(분카 4년), 레자노프의 부하인 흐보스토프가 통상을 거부당한 보복으로 사할린오도마리의 쿠슌코탄이나 리시리, 이토토루 섬샤나의 회소나 나이호의 번옥을 습격(흐보스토프 사건, 분카로구), 아이누 어린이 여러 명이 러시아인에게 납치되어 나카가와 고로지와 사헤이는 시베리아로 강제 연행된다. 러시아 제국 정부는 관여하지 않지만, 이 사건으로 인해 일러 간의 긴장이 고조되었고, 막부가 에조치를 막부 직할령으로 하고 경고(방위)에 나서는 계기가 되었다. 급수 급여령은 1년 만에 취소되었다.
- 1811년(분카 8년) 바실리 골로프닌 대위가 쿠나시리 장소가 관할하는 쇄국 중인 쿠나시르 섬에 불법 상륙, 경고를 하고 있던 아이누와 일본인에게 체포되어 이후 2년간 구류되었다.(골로프닌 사건)[55]
- 1812년(분카 9년) 8월, 디아나호가 쿠나시르 섬에 내항한다. 일러 간에 신병 교환 교섭이 이루어졌지만, 일본 측의 납치 피해자인 나카가와 고로지와 간키마루 표류민 6명이 탈주했기 때문에 교섭이 결렬. 귀로, 디아나호 함장 피요트르 리코드는 보복으로 부근을 항해하던 칸세이마루를 습격하여 다카다야 카헤이와 아이누 선원 여러 명을 납치, 캄차카 반도에 강제 연행하여 이듬해 6월까지 억류한다. 아이누 선원 여러 명은 억류지에서 목숨을 잃고 돌아오지 못했다.
- 1813년(분카 10년) 9월, 디아나호가 골로프닌의 석방 교섭을 위해 일본인 표류민 큐조를 동반하여 하코다테에 내항한다. 이때 러시아로 귀화한 표류민 젠로쿠가 러시아 측 통역으로 사절단에 동행했다.[56]
- 프랑스 혁명 전쟁과 나폴레옹 전쟁의 여파[57]
- 1797년(간세이 9년)부터 1809년(분카 6년)에 걸쳐 본국이 프랑스에 점령당했기 때문에, 네덜란드 상관장 헨드릭 도우프의 의뢰로 수 척의 미국 배가 네덜란드 국기를 게양하고 데지마에서 무역을 했다.[58][59][60]
- 1808년(분카 5년), 네덜란드와 적대 관계에 있던 영국의 프리깃·페이튼호가 네덜란드 국기를 게양하고 나가사키에 입항. 페이튼호 사건을 일으킨다. 그 후에도 영국 선박 출현이 잇따랐다.
- 1825년(분세이 8년), 도쿠가와 막부는 이국선 타격령을 내려 강경 정책으로 전환.
- 1830년(분세이 13년), 도쿠가와 막부가 영유를 선언했지만 무인도였던 오가사와라 제도의 지치지마에 나다니엘 세이버리가 상륙, 이주했다.[61]
- 1837년(덴포 8년) 상선 모리슨호가 오토키치를 포함한 표류민을 일본에 송환하기 위해 우라가에 내항했지만, 이국선 타격령에 따라 일본 측 포대가 포격했다.(모리슨호 사건) 이 사건 이후, 막부 내부에서도 이국선 타격령에 대한 비판이 강해졌다.
- 1842년(덴포 13년) 아편 전쟁에서의 청나라의 패배에 의한 난징 조약의 체결에 경악한 도쿠가와 막부는 정책을 전환하여, 조난당한 배에 한해 급여를 인정하는 덴포의 급수 급여령을 발령했다.
- 1844년(덴포 15년), 포니엘 뒤플랑 대령이 이끄는 프랑스 해군의 원정대가 류큐 왕국에 내항하여 통상을 요구했지만 거부되었다. 그러나 테오도르 폴카드 신부와 통역이 나하에 남았다.
- 1844년 8월 14일(고카 원년 7월 2일), 네덜란드 군함 팔렘방호가 네덜란드 국왕 빌렘 2세의 쇼군 앞 친서를 지참하고 나가사키에 입항. 이 친서는 지볼트의 기안에 의한 것으로, 개국을 요구했지만 막부는 이를 거부했다.[62]
- 1845년(고카 2년), 포경선 맨해튼호가 22명의 일본인 표류민을 구조했고, 마케이터 쿠퍼 선장은 우라가에의 입항을 허가받아 우라가 봉행과 대면했다.[63]
- 1846년 7월 20일(고카 3년 윤5월 27일), 미국 동인도 함대 사령관 제임스 비들준장은 전열함콜럼버스 및 전투 슬루프 빈센스를 이끌고 개국 교섭을 위해 우라가에 입항했다. 그러나 조약 체결은 우라가 봉행에 의해 거부당했고, 며칠 체류 후 퇴거했다. 우라가에 미국의 군함이 나타난 것을 받아, 막부에서는 무이념 타격령의 부활이 검토되었다.
- 1846년 7월 24일(고카 3년 6월 2일), 프랑스의 세실 제독(Jean-Baptiste Cécille)이 클레오파트르호로 나가사키에 내항했지만 상륙을 거부당했다. 이때, 나하에 머물고 있던 폴카드 신부를 동반했다.[64]
- 1848년(고카 5년 / 가에이 원년), 라날드 맥도널드가 일본인에게 영어를 가르치고 싶다는 자신의 의지로 조난을 가장하여 리시리 섬에 상륙했다. 그 후 나가사키로 보내져 소후쿠지 다이힌안에 수감되어 본국으로 송환될 때까지 6개월 동안 여기서 통역 14명에게 영어 회화를 가르쳤다. 귀국 후 일본의 정보를 미국 본토에 전했다.[65]
- 1849년 4월 17일(가에이 2년 3월 27일), 제임스 글린대위이 함장을 맡고 있는 미국의 전투 슬루프 프레블(USS ''Preble'')이, 미국 포경 선원을 구출하기 위해 나가사키에 내항, 군사 개입 가능성을 암시하면서 교섭을 벌였다. 결과, 선원과 라날드 맥도널드가 석방되었다. 귀국 후, 글린은 미국 정부에 대해 일본을 외교 교섭을 통해 개국시킬 것, 또한 필요하다면 "강함"을 보여야 한다는 건의를 제출했다. 그의 이 제안은 매튜 페리에 의한 일본 개국으로 가는 길을 열었다.
- 1849년(가에이 2년), 영국 해군의 브리그 마리너호가 우라가에 내항하여 지리적 조사를 실시했다. 마리너호에는 오토키치가 통역으로 승선했다. 오토키치는 일본과의 트러블을 피하기 위해 중국인이라고 속였다.
- 1853년(가에이 6년) 매튜 페리가 이끄는 미국 함대가 내항. 개국을 요구했다. 증기선의 내항은 이때가 처음이다.
- 1854년(가에이 7년 / 안세이 원년) 페리가 재내항하여 미일 화친 조약을 체결. 시모다와 하코다테를 개항하고, 쇄국 체제가 붕괴되었다.
- 1858년(안세이 5년) 타운센드 해리스와 에도 막부가 미일 수호 통상 조약을 체결. 쇄국 정책이 완전히 철폐되었다.
서양 문명을 배우고, 조약을 개정하며, 외국과의 무역을 위해 도시와 항구의 개방을 늦추기 위해 여러 사절단이 바쿠후에 의해 해외로 파견되었다.
- 1860년, 간린마루를 타고 일본 미국 사절단이 파견되었다.
- 1861년 쓰시마 사건에서 러시아 함대는 외국과의 공식적인 무역이 개방되지 않은 항구를 강제로 개방하려 했지만, 영국의 도움으로 격퇴되었다.
- 1862년에는 유럽 사절단이 파견되었고, 1863년에는 두 번째 사절단이 파견되었다. 일본은 또한 대표단을 파견하여 1867년 파리 만국 박람회에 참가했다.
쇼군의 사절단과는 별개로 조슈 파이브와 사쓰마 번의 사절단과 같이 다른 사절단들도 유럽으로 파견되었다.
5. 쇄국 정책에 대한 평가와 현대적 의의
쇄국 정책에 대한 평가는 논자에 따라 다르다. 애초에 "쇄국"이 아니라고 평가하는 것에 대해서는 아래의 #「쇄국」개념의 재검토를 참조한다.
- 일본 특유의 문화를 형성하고, 자급자족 경제 체제를 구축할 수 있었다.[108]
-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침공을 막았다.[109]
- "국내에는 끊임없는 평화가 이어져, 그리하여 세계에서도 드물게 볼 정도로 행복한 국민이다. 해외 세계와의 교류는 일절 끊어져 완전한 폐쇄 상태에 놓여 있는 현재의 일본만큼, 국민의 행복이 더 잘 실현되고 있는 시대는 없다" (쇄국론 저자 엥겔베르트 켐페르)[110]
- 세계 정세와 단절되었기 때문에 해외 사정에 어두워졌다.[111]
- 남방 진출의 기회를 놓쳤다(기쿠치 칸).[112]
- 최종적으로 태평양 전쟁의 패배로까지 이어졌다. 이미 일본은 내전 상태(센고쿠 시대)였으므로, 선교가 정복 목적이었다면 벌써 정복했을 것이다.(와츠지 테츠로)[113]
위에 언급된 바와 같이, "쇄국"은 '''외국과의 교류를 제한하는 것'''으로 해석되어 왔다.
그러나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기존의 "쇄국" 개념을 폐지하고, 일련의 정책은 '''도쿠가와 막부가 중세의 대외 관계 질서를 재편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제기되었다.[114] 더욱이 2000년대에 들어, '쇄국되지 않았던 도쿠가와 일본을 "쇄국"이라고 불러온 역사'를 역사화하고, 그것을 일본인의 정체성과 밀접하게 관련된 담론으로 파악하여, 그 형성사를 해명하는 연구가 등장했다.[115] 또한, 그 연장선상에서 "쇄국"뿐만 아니라 "개국"도 담론으로 파악하여, 그 형성사를 추구하는 시도도 전개되고 있다.[116]
이러한 배경에서 2017년 2월에는 2020년도부터 사용될 중학교의 차기 학습 지도 요령 개정안에서 "쇄국"이라는 표현이 삭제되어,[117] 초등학교에서는 "막부의 대외 정책", 중학교에서는 "에도 막부의 대외 정책"으로 표기될 예정이라고 발표되었다. 그러나, 여론 수렴(의견 공모)에서 비판이 많았기 때문에, 막말의 "개국"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쇄국 등의 막부의 대외 정책"과 같은 표기가 이루어지게 되었다.[118][119]
덧붙여, 해외와의 교류·무역을 제한하는 정책은 도쿠가와 일본에서만 나타난 정책이 아니며, 동시대의 동북아시아 제국에서도 "해금 정책"이 채택되었고, 현대의 역사학에서는 "쇄국"이 아닌, 동북아시아사를 시야에 넣어 이 "해금"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경향이 보인다. 그 이유로는, 1) "쇄국"이라는 어감이 너무 강하다, 2) 대(對) 유럽·미국 제국 중심의 시각에 너무 기반하고 있다, 3) 부정적인 이미지가 있다는 점이 꼽힌다. 그러나 "해금" 자체의 연구가 충분하지 않다는 지적도 있으며,[120] 기존 용어를 변경하는 것에 대한 비판도 있다.[121][122]
현대 사회에서 쇄국 정책은 고립주의의 위험성과 국제 협력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역사적 사례로 평가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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