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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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교문은 전라남도 보성 출신의 성리학자로, 아버지 이지용과 할아버지 이기대로부터 학문적 영향을 받았다. 갑신정변 실패로 외가 친척인 서재필 일가가 몰락하는 아픔을 겪었으나, 이교문과 그의 아들 이일, 손자 이용순 등은 살아남아 항일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이교문은 노사 기정진에게 학문을 배우고 기우만과 교류했으며, 을사조약 체결 후 최익현과 함께 의병 활동을 펼쳤다.
전라남도 보성군 출신의 저명한 유교 성리학자 이지용(李志容)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이지용은 60세에 석성현감을 역임하였다. 성주 이씨 문경공 이직의 후손으로 증조부 이유원이 전라남도 보성군 문덕면에 정착하였고, 할아버지 이기대는 보성군의 갑부로 가세를 일으켰다. 그러나 배다른 고모의 아들인 서재필, 서재창이 갑신정변 실패로 화를 당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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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서재필 외가의 태교철학 담긴 보성
http://www.ohmynews.[...]
오마이뉴스
2. 생애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인연으로 노사 기정진에게 학문을 배웠고, 노사의 손자 기우만과 교류하였다. 갑신정변 실패 이후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성리학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에 힘썼다.
을사조약 체결 이후, 면암 최익현과 함께 충청도에서 의병을 일으키려 하였으나 실패하고, 화순 쌍봉사를 거점으로 호남의병창의소에서 활동하였다.[2] 대마도에서 순절한 면암을 기리며 "河海(하해)가 마른다 해도 그 節義(절의)는 없어지지 않으리"라고 하였다. 보성 출신 '담살이' 의병장 안규홍을 지원하다 일본군에 체포되어 고문을 받았다.[2]
서재필은 망명 생활과 인종 차별을 견디다 못해 유일한 생존 친척인 이기대 일족에게 편지를 보냈으나, 집안 사람들은 서재필의 편지를 찢거나 불태웠다. 해방 직후까지도 가내마을에서는 서재필의 편지를 받으면 찢거나 불태웠다고 한다. 유일하게 서재필의 편지를 보관한 것은 그의 아들 이일이었다.[2]
2. 1. 가계 배경
성주 이씨 이직의 후손으로, 증조부 이유원이 전라남도 보성군 문덕면에 정착하였다. 할아버지 이기대는 보성군의 갑부로 가세를 일으켰다.[2] 그러나 배다른 고모의 아들들인 서재필, 서재창이 갑신정변 실패로 몰락하는 아픔을 겪었다.[3]
할아버지 이기대는 추사 김정희가 쓴 서재 현판이 걸린 서재를 짓고 수천 권의 책을 소장하여, 면암 최익현을 비롯하여 노사 기정진 등 당대의 명사들과 교류하였다.[2] 그의 다섯째 사위는 서광언이었다.[2]
아버지 이지용(李志容) 역시 저명한 학자로 노사 기정진과 교분이 있었으며, 석성현감을 역임하였다. 1876년 흉년에는 24개 마을 사람들에게 곡식을 나누어주기도 했다.[2]
갑신정변의 실패로 가산이 탕진되고 가족이 흩어지는 참변을 당했다.[3] 서재필 일가의 몰살 소식이 보성군 문덕면 가내마을에 전해지자, 이교문의 친척들은 금부도사나 포졸들이 나타날까 두려워 오랫동안 전전긍긍했다 한다.
망명 생활과 인종 차별을 견디다 못한 서재필은 유일한 생존 친척인 이기대 일족에게 편지를 보냈으나, 그의 집안 사람들은 서재필의 편지를 찢거나 불태웠다. 해방 직후까지도 가내마을에서는 서재필의 편지를 받으면 찢거나 불태웠다고 한다. 서재필의 편지를 받아 유일하게 보관한 것은 그의 아들 이일이었다.[2]
2. 2. 학문 수련과 의병 활동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인연으로 노사 기정진에게 학문을 배웠고, 노사의 손자 기우만과 교류하였다. 갑신정변 실패 이후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성리학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에 전념하였다. 훗날 기우만은 단발령 이후 의병을 주도했던 인물로, 이교문은 1894년 시국 타개책을 상소하기도 했다.[2] 을사조약 체결 이후, 이교문은 면암 최익현과 함께 충청도에서 의병을 일으키려 하였으나 실패하고, 화순 쌍봉사를 거점으로 호남의병창의소에서 활동하였다.[2] 대마도에서 순절한 면암을 기리며 "河海(하해)가 마른다 해도 그 節義(절의)는 없어지지 않으리"라고 하였다. 보성 출신 '담살이' 의병장 안규홍을 지원하다 일본군에 체포되어 고문을 받았다.[2]
2. 3. 서재필과의 관계
서재필은 망명 생활과 인종 차별을 견디다 못해 유일한 생존 친척인 이기대 일족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서재필이 편지를 보낼 때마다 그의 집안 사람들은 서재필의 편지를 찢어버리거나 불에 태워버렸다.[2] 해방 직후까지도 가내마을에서는 서재필이 편지를 보내면, 보낸 편지들을 찢어버리거나 불에 태웠다. 서재필의 편지를 받아서 유일하게 보관하던 것은 그의 아들 이일이었다. 이교문의 장남 이일(李鎰·1868~1927)도 독립운동에 나섰다. 미국에 있던 서재필과 주고 받았던 서신은 한국전쟁 때 집과 함께 불타 없어졌다고 한다.[2]
3. 가족 관계
관계 이름 출생 사망 비고 조부 이기대(李箕大) 1792년 1858년 참판 역임, 다른 이름은 이영석 조모 장흥 임씨 1남 5녀, 5녀가 서재필, 서재창 형제의 어머니[1] 조모 경주 김씨 1남 부 이지용 1825년 1891년 현감 역임 모 미상 아들 이일(李鎰) 1868년 1927년 손자 이용순 독립운동가 아들 이름 미상
참조
[2]
뉴스
서재필 선생의 외가, 보성 '성주 이씨'
http://www.chosun.co[...]
조선일보
2008-06-29
[3]
뉴스
서재필 외가의 태교철학 담긴 보성
http://www.ohmynews.[...]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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