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반 아센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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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반 아센 1세는 제2차 불가리아 제국을 건설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불가리아의 통치자이다. 출생 연도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으며, 튀르크 기원을 가진 것으로 추정된다. 1185년 형 페터르 4세와 함께 비잔티움 제국에 반기를 들었고, 쿠만족과의 동맹을 통해 비잔티움 제국에 대항했다. 1189년 공동 황제가 되었으며, 영토를 확장하고 군사적 승리를 거두었으나 1196년 암살당했다. 그는 불가리아의 독립을 쟁취한 영웅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그의 아들 이반 아센 2세 또한 불가리아 황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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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아센 1세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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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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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호 | 불가리아의 차르 |
공동 통치자 | 페터르 2세 |
통치 기간 | 1187/1188년 – 1196년 |
이전 통치자 | 페터르 2세 |
다음 통치자 | 칼로얀 |
배우자 | 엘레나 |
자녀 | 이반 아센 2세 알렉산더르 |
왕조 | 아센 왕조 |
사망일 | 1196년 |
사망 장소 | 타르노보 |
이름 | |
불가리아어 | Иван Асен I |
로마자 표기 | Ivan Asen I |
2. 초기 생애
이반 아센 1세의 출생 연도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차르 보릴의 시노디콘』에는 "이반 아센 벨군"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릴라의 이반의 생애에 관한 기록에 따르면, 이반(또는 이오안)은 그의 세례명이다. 그의 다른 두 이름은 튀르크어족에서 유래했는데, '아센'은 "건강한", '벨군'은 "현명한"을 의미한다.
역사가 앨리샤 심슨은 아센과 그의 형제인 테오도르가 유력한 가문 출신이라고 보았다.[1] 역사가 알렉산드루 마제아루는 그들의 아버지가 발칸 산맥에서 가축을 기르는 부유한 사람이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아센과 그 형제의 민족적 기원에 대해서는 역사가들 사이에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12세기 말과 13세기 초의 연대기들은 그들을 블라흐인이라고 묘사했지만, 아센이라는 이름이 튀르크어에서 유래했다는 점은 그들이 쿠만족 또는 페체네그인 혈통일 가능성을 시사한다.
로베르 드 클라리는 아센(클라리는 그를 동생 칼로얀과 혼동했다)이 "한때 황제의 기병대 장교였으며, 황제의 말 목장 중 하나를 관리했다"고 기록했다.[2] 그는 아센이 황제의 명령에 따라 60마리에서 100마리의 말을 황실 군대에 보내야 했다고 언급했다. 심슨은 클라리의 보고가 아센이 토지 소유자가 아니라 유목민이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고 주장한다.
1185년 가을, 비잔티움 제국 황제 이삭 2세 앙겔로스는 트라키아에서 시칠리아 노르만족에 대항하는 원정을 펼치던 중 킵셀라(현재 터키의 이프살라)에 진을 쳤다. 테오도르와 아센 형제는 황제를 만나기 위해 진영으로 찾아왔다. 비잔틴 역사가 니케타스 코니아테스는 그들이 봉기를 위한 구실을 만들기 위해 왔다고 암시한다. 클라리는 아센이 황실 말 목장의 관리자로서 "일 년에 한 번" 황실에 와야 했다고 말한다.[2]
테오도르와 아센은 황제에게 프로노이아를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코니아테스의 기록에 따르면, 그들은 ''프로노이아''(황실 영지의 수입)를 신청했다. 그러나 현대 학자들은 형제들이 더 큰 것, 예를 들어 구역의 통치권, 또는 반독립 영토의 행정을 요구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황제가 형제들의 요청을 거부하자, 그들은 감히 그의 결정에 반박했다. 코니아테스는 "둘 중 더 무례하고 야만적인" 아센이 특히 주제넘었고, 이삭 2세의 삼촌인 요한 두카스의 명령에 따라 "얼굴을 맞고 무례함으로 꾸짖음을 받았다"[3]고 묘사했다.
2. 1. 아센과 페터르의 난
1185년 아센은 그의 형인 토도르와 함께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 이사키오스 2세에게 킵셀라 지역의 프로노이아(조세 징수권)를 요구하였다. 그들의 요구는 거절당하였고, 아센이 황제의 결정을 반박하려 하자 그는 뺨을 맞았다.[21] 격분한 형제는 집으로 돌아와 당시 시칠리아와의 전쟁과 이사키오스 2세의 결혼으로 인한 무거운 세금에 대한 불만을 이용하여 비잔티움 제국의 지배에 대한 반란을 일으켰다.이사키오스 2세 앙겔로스와 헝가리 공주 마르기트의 결혼으로 인해 불가리아인과 블라흐인에게 특별세와 노역이 부과되어 반란 직전에 이르렀다. 그러나 형제는 처음에는 봉기에 신중했다. 제국군과 싸워 승산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해 노르만족이 테살로니키를 점령하는 사건이 발생했고, 도시의 수호성인으로 여겨지던 성 디미트리오스의 이콘이 불가리아로 빼앗긴 것이 봉기의 호기가 되었다. 형제는 '기도하는 자의 집'을 짓고,[14] 불가리아인과 블라흐인 샤먼을 불러들였다. 형제는 이들에게 군중 앞에서 '신이 그들의 자유를 승인했다'고 선언하게 했고, 성 디미트리오스가 테살로니키에서 '와서', 비잔틴 제국과의 싸움에서 그들을 '돕고 지원할' 것이라고 선언하게 했다.
비록 아센이 봉기에 더 적극적이었지만, 그의 형인 토도르가 페터르 4세라는 이름으로 불가리아인의 황제로 즉위하였다. 이는 페테르와 아센 형제가 제1차 불가리아 제국의 후계자로서 국가를 건설했음을 보여주는 시위였다. 그들은 불가리아 제국의 옛 수도 프레슬라프를 공격했지만, 함락시키지 못했다. 1185년과 1186년 사이 불가리아는 모에시아의 대부분을 장악하였고 발칸산맥 이남의 트라키아를 공격하였다.
1186년 초, 형제는 트라키아를 황폐하게 만들고 많은 포로와 소를 얻었다. 이사키오스 2세 앙겔로스는 토벌군을 보냈다. 불가리아군은 산지의 '들어가기 어려운 곳'을 선택하며 침입자를 격퇴해 갔지만,[15] 1186년 4월 21일 일식을 틈타 기습해 온 제국군에게 패배를 겪었다. 페테르와 아센은 고향을 떠나 도나우강을 건너 도망쳐 쿠만족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이사키오스 2세 앙겔로스는 이 승리로 일이 해결되었다고 판단하고 파리스트리온의 방어 체제를 강화하지 않고 콘스탄티노플로 귀환했다. 그러나 페테르와 아센은 몇몇 쿠만족 족장과 손을 잡고 그들의 지원을 받아 가을에는 비잔틴 제국 영토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 동맹 협상에 대한 코니아테스의 기록은 논란을 불러일으킬 만한 미묘한 기술을 담고 있다. 그는 표면적으로는 형제와 쿠만족의 동맹을 페테르의 공로로 돌리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아센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귀국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형제는 파리스트리온을 손에 넣고 테마 트라케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아센은 목적지를 급습하여 약탈하고 즉시 철수하는 일격이탈 전술을 펼쳐 제국군의 반격을 무위로 돌렸다. 코니아테스가 강조하는 바에 따르면, 형제는 더 이상 '미시아'(파리스트리온)를 수탈하는 것을 멈추고, 그곳과 불가리아에서 세력을 예전과 같은 하나의 제국이라는 정치 세력으로 묶어 말했다.[16] 즉, 여기에 이르러 그들은 제1차 불가리아 제국의 부흥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3. 봉기
1185년 아센은 그의 형 토도르와 함께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 이사키오스 2세에게 프로노이아를 요구했으나 거절당했다.[21] 이에 형제는 비잔티움 제국의 지배에 대한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은 성 디미트리오스의 성상이 불가리아로 옮겨졌다고 주장하며, "악령에 사로잡힌" 자들에게 신이 "그들의 자유를 허락했다"고 선포하게 했다.
아센이 봉기에 더 적극적이었지만, 그의 형 토도르는 페터르 4세라는 이름으로 불가리아인의 황제로 즉위했다. 1185년과 1186년 사이 불가리아는 모에시아의 대부분을 장악하고 발칸산맥 이남의 트라키아를 공격했다.
1186년 초, 형제들은 트라키아를 약탈했고, 1186년 4월 21일 일식 때 제국 군대가 반란군을 격퇴했다. 페테르와 아센은 도나우 강 하류로 건너가 쿠만족에게 군사적 지원을 요청했다.
1186년 여름, 이사키오스 2세는 모에시아를 침공했다. 페터르 4세는 협상하려 했으나, 아센은 도나우 강을 넘어 쿠만족의 부대를 모집하고 형을 도우러 돌아왔다. 아센은 트라키아 침공을 재개했고, 비잔티움 군대에 맞서 능숙하게 전투를 피했다.
이사키오스 2세는 파리스트리온 방어를 확보하지 않고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갔다. 페테르와 아센은 쿠만족과 동맹을 맺고 가을에 비잔틴 제국으로 돌아왔다. 아센의 군사 전술 덕분에 제국군은 성공적인 반격을 하지 못했다.
3. 1. 반란의 발발
1185년 아센은 그의 형인 토도르와 함께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 이사키오스 2세에게 킵셀라 지역의 프로노이아를 요구하였다. 그들의 요구는 거절당하였고, 아센이 황제의 결정을 반박하려 하자 그는 뺨을 맞았다.[21] 격분한 형제는 집으로 돌아와 당시 시칠리아와의 전쟁과 이사키오스 2세의 헝가리 공주와의 결혼으로 인한 무거운 세금에 대한 불만을 이용하여 비잔티움 제국의 지배에 대한 반란을 일으켰다.이사키오스 2세 앙겔로스와 헝가리 공주 마르기트의 결혼으로 인해 불가리아인과 블라흐인에게 특별세와 노역이 부과되어 반란 직전에 이르렀다. 그러나 형제는 처음에는 봉기에 신중했다. 제국군과 싸워 승산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불만에도 불구하고 형제들은 처음에는 반란을 일으킬 수 없었는데, 그들의 동료들이 제국군에 맞서 승산이 있다고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테오도르와 아센은 노르만족의 테살로니카 약탈을 이용하여 이 사건에서 테살로니카의 수호성인인 성 디미트리오스의 성상이 불가리아로 옮겨졌다. 그들은 "기도의 집"을 짓고,[4] 불가리아와 블라흐 주술사들을 그곳으로 불렀다. 형제들은 이 "악령에 사로잡힌" 자들(코니아테스가 불렀던 명칭)에게 무리 앞에서 신이 "그들의 자유를 허락했다"고 선포하고 성 디미트리오스가 테살로니카에서 그들에게 와서 비잔틴인에 맞서 "그들의 조력자이자 보조자"가 될 것이라고 선언하도록 지시했다.
비록 아센이 봉기에 더 적극적이었지만, 그의 형인 토도르는 페터르 4세라는 이름으로 불가리아인의 황제로 즉위하였다. 제1차 불가리아 제국의 고도였던 프레슬라프를 점령하는데 실패하자, 반란의 중심지였던 터르노보를 수도로 삼았다. 테오도르는 대관식을 치르고 페테르라는 이름을 채택하여 10세기 불가리아 차르(또는 황제)의 이름을 따랐다. 테오도르의 대관식과 새로운 이름은 형제들이 처음부터 제1차 불가리아 제국의 정치적 계승국인 국가를 세웠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증거이다. 1185년과 1186년 사이 불가리아는 모에시아의 대부분을 장악하였고 발칸산맥 이남의 트라키아를 공격하였다.
1186년 초, 형제들은 트라키아에 대한 약탈 공격을 감행하여 포로와 가축을 붙잡았다. 이사악 2세는 반란군에 맞서 직접 반격을 이끌었지만, 그들은 산속의 "접근 불가능한 장소"에 숨어 침략자들에게 저항했다. 1186년 4월 21일 일식만이 제국 군대가 예상치 못한 공격을 가하여 폭도들을 물리칠 수 있게 했다. 페테르와 아센은 고국에서 도망쳐 하류 도나우강을 건너 쿠만족에게 군사적 지원을 요청했다.
1186년 여름 이사키오스 2세는 대군을 이끌고 모에시아를 침공하였다. 페터르 4세가 비잔티움 제국과 협상하려는 태도를 보인 반면 아센은 도나우강을 넘어 쿠만족의 강력한 부대를 모집한 후 그의 형을 돕기 위해 그들과 함께 돌아왔다. 이사키오스 2세는 이미 페터르 4세의 복종 맹세에 만족스러워 하면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갔다. 그의 새로운 부대와 함께 아센은 트라키아 침공을 재개하였고, 숫적으로 우세한 비잔티움 군대에 대항하여 능숙하게 불리한 전투를 피하였다.
이사악 2세는 자신의 승리가 결정적이라고 생각하고 파리스트리온의 방어를 확보하지 않고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갔다. 페테르와 아센은 쿠만족 족장들과 동맹을 맺어 가을에 비잔틴 제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코니아테스는 형제들과 쿠만족 사이의 협상에 대해 상반된 보고서를 썼다. 공식 연설에서 그는 이 동맹을 페테르의 노력으로 돌렸고, 연대기에서는 아센의 역할을 강조했다. 그들이 돌아온 직후, 형제들은 파리스트리온을 장악하고 트라키아에 대한 약탈 원정을 시작했다. 아센의 군사 전술(갑작스러운 기습과 빠른 철수)은 제국군이 성공적인 반격을 하지 못하게 했다. 코니아테스는 형제들이 단순히 파리스트리온을 점령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제1차 불가리아 제국을 재건하려는 시도를 언급하면서 "파리스트리온과 불가리아의 정치적 권력을 옛날처럼 하나의 제국으로 통합"하기로 결정했다고 강조했다.
3. 2. 쿠만족과의 동맹
1186년 여름, 이사키오스 2세가 이끄는 비잔티움 제국 군대가 모에시아를 침공하자, 페터르 4세는 협상하려는 태도를 보였다. 반면, 아센은 도나우강을 건너 쿠만족에게 군사적 지원을 요청했다.[21] 쿠만족의 강력한 부대를 모집한 후, 아센은 그의 형을 돕기 위해 그들과 함께 돌아왔다. 이사키오스 2세는 이미 페테르 4세의 복종 맹세에 만족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갔고, 아센은 쿠만족의 지원에 힘입어 트라키아 침공을 재개하며 비잔티움 군대에 맞서 능숙하게 전투를 이끌었다.4. 제2차 불가리아 제국
Иван Асен Ibg는 페터르 4세와 함께 제2차 불가리아 제국을 건국한 황제(재위: 1187년/1188년~1196년)이다. 그는 "바실레우스(황제)" 칭호를 사용하며 제국의 기틀을 다졌다.[17] 비잔티움 제국의 계속된 공격에도 불구하고, 아센 형제는 파리스트리온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확고히 했다.[17]
1189년, 프리드리히 1세가 이끄는 제3차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진군할 때, 페터르 4세와 아센의 사절단은 니시와 아드리아노폴리스에서 십자군에게 군사적 원조를 제공하며, 이사키오스 2세에 대항하는 동맹을 제안했다.[21]
이사키오스 2세는 제3차 십자군이 지나간 후, 불가리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대규모 원정을 계획했다. 비잔티움 군대는 터르노보를 포위했지만, 페터르 4세가 프레슬라프로 은퇴하고 이반 아센 1세에게 공동 황제 직위를 수여한 상황이었다. 아센 1세는 터르노보 방어를 맡아 쿠만족 지원군이 온다는 소문을 퍼뜨려 이사키오스 2세를 퇴각시켰다. 퇴각하는 비잔티움 군대는 아센 1세의 매복에 걸려 대패했고, 이사키오스 2세는 간신히 탈출했다(트랴브나 전투).[18]
불가리아 군은 계속 승리하여 1191년에는 스레데츠와 니시, 1195년에는 베오그라드, 1196년에는 멜니크와 프로세크를 점령했다. 기습 부대는 남쪽의 세레스까지 진출하여 비잔티움 군대를 다시 격파했다.[18]
1192년경 페터르 4세와 이반 아센 1세는 제국을 분할하여 통치했는데, 이반 아센 1세는 터르노보와 그 주변 지역을 다스리며 쿠만족과의 연합을 통해 군사 작전을 주도했다.[21]
4. 1. 공동 통치
1187년 또는 1188년, 이반 아센 1세는 페터르 4세의 공동 황제로 즉위했다.[17] 그는 "바실레우스(황제)" 칭호를 사용하며 제2차 불가리아 제국의 기틀을 다졌다.[17] 비잔티움 제국의 계속된 공격에도 불구하고, 아센 형제는 파리스트리온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확고히 했다.[17] 1188년 봄, 로베치 전투에서 비잔티움 제국은 이반 아센 1세의 아내 엘레나 에프게니아와 동생 칼로얀(훗날 칼로얀 아센)을 포로로 잡았지만, 요새 점령에는 실패했다.[17] 이후 수 년 동안 칼로얀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인질로 억류되었다.[17]4. 2. 십자군과의 관계
1189년, 프리드리히 1세가 이끄는 제3차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진군할 때, 페터르 4세와 아센의 사절단은 니시와 아드리아노폴리스에서 십자군에게 군사적 원조를 제공하며, 잠재적인 적이었던 이사키오스 2세에 대항하는 동맹을 제안했다.[21] 십자군과의 협상 기록에는 주로 페터르 4세가 언급되지만, 이는 그가 불가리아 제국의 대표자로 인식되었기 때문으로 보인다.4. 3. 비잔티움과의 전쟁
1189년 제3차 십자군이 지나간 후, 이사키오스 2세는 불가리아 문제를 해결하기로 결정하고 대규모 원정을 계획했다. 비잔티움 군대는 터르노보를 포위했지만, 페터르 4세가 프레슬라프로 은퇴하고 이반 아센 1세에게 공동 황제 직위를 수여한 상황이었다. 아센 1세는 터르노보 방어를 맡아 쿠만족 지원군이 온다는 소문을 퍼뜨려 이사키오스 2세를 퇴각시켰다. 퇴각하는 비잔티움 군대는 아센 1세의 매복에 걸려 대패했고, 이사키오스 2세는 간신히 탈출했다(트랴브나 전투).[18]불가리아 군은 계속 승리하여 1191년에는 스레데츠와 니시, 1195년에는 베오그라드, 1196년에는 멜니크와 프로세크를 점령했다. 기습 부대는 남쪽의 세레스까지 진출하여 비잔티움 군대를 다시 격파했다.[18] 비잔티움 제국 내부의 갈등은 아센 형제에게 유리하게 작용했으며, 이들은 지속적으로 영토를 넓혀갔다. 이사키오스 2세는 알렉시오스 기두스와 바실레이오스 바타체스에게 대응을 명령했지만, 아센 1세는 아르카디오폴리스 전투에서 제국군을 거의 전멸시켰다. 이후 페터르 4세와 아센 1세는 플로브디프를 비롯한 트라키아 지역을 점령했다.
이사키오스 2세는 트라키아 탈환을 위해 직접 군대를 이끌었으나, 1195년 4월 8일 동생 알렉시오스 3세에게 붙잡혀 실명당했다. 알렉시오스 3세는 평화를 제안했지만, 아센 형제는 이를 거절하고 알렉시오스 아스피에테스를 격파했다. 아센 1세는 스트루마 강을 따라 비잔티움 요새를 점령하고 블라흐인과 불가리아인을 수비병으로 배치했다.
알렉시오스 3세의 사위 이사키오스 코메노스가 반격에 나섰지만, 아센 1세는 세레스 전투에서 그를 포위하여 대파했다. 쿠만 전사들이 이사키오스 코메노스를 붙잡아 몸값을 요구하려 했으나, 아센 1세가 이를 알고 신병을 넘겨받았다.
4. 4. 제국 분할과 내분
1189년 페테르 4세는 아센에게 공동 황제 직위를 수여하고, 자신은 퇴위하지 않은 채 프레슬라프로 은퇴하였다.[21] 1192년경 페테르 4세와 이반 아센 1세는 제국을 분할하여 통치했는데, 이반 아센 1세는 터르노보와 그 주변 지역을 다스리며 쿠만족과의 연합을 통해 군사 작전을 주도했다.[21]비잔티움 제국의 기록에는 아센 형제 간의 갈등이 언급되어 있는데, 이는 비잔티움의 이간책에 의한 것일 수도 있다.[21]
5. 암살
1196년, 이반 아센 1세는 보야르(귀족) 이반코에게 암살당했다. 이 암살의 동기는 명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19] 코니아테스는 두 가지 설을 제시했다.[19] 첫 번째는 이사키오스 2세가 포로를 통해 이반코에게 접촉하여 차르를 죽이면 자신의 딸을 아내로 주겠다고 꼬드겼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이반코가 "아센의 아내의 자매와 은밀한 육체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것이다.[19]
그러나 그 관계가 이반 아센 1세에게 알려지자, 이반 아센 1세는 가문의 명예를 더럽혔다는 이유로 처제를 처형하려 했다. 이에 그의 아내가 자신의 자매가 아니라 이반코를 벌하도록 설득했고, 이반 아센 1세는 심야에 이반코를 자신의 천막으로 불렀다. 하지만 차르의 의도를 알아차린 이반코는 방어구 아래에 칼을 숨기고 차르와의 면담 중에 그를 찔렀다.
코니아테스는 이반코가 이반 아센 1세의 "무엇이든 칼로 다스리려는 정치"보다 "더 정의롭고 평등한" 통치를 원했다고 주장한다.[20] 현대 역사가 스테판슨은 이 코니아테스의 기록에서 이반 아센 1세가 쿠만 용병을 배경으로 공포 정치를 펼쳤음을 짐작할 수 있다고 보았다. 한편 바샤리는 이반코가 비잔티움 제국의 사주를 받아 암살을 감행했다는 설을 주장한다. 이반 아센 1세 사후, 이반코는 비잔틴 제국의 지원을 받아 트르노보를 지배하려 했으나 페터르 4세에게 쫓겨 비잔티움 제국으로 도망쳤다. 페타르 4세는 동생 칼로얀을 트르노보의 지배자로 세웠다.
6. 가족 관계
이반 아센 1세는 두 번 결혼했다. 첫 번째 부인은 체르벤 요새에 묻힌 마리아였고, 두 번째 부인은 엘레나(세례명 에브게니아)였다. 엘레나는 종종 세르비아의 스테판 네마냐의 딸로 여겨지지만, 이 관계는 불확실하며 자녀들의 혼인 관계에 대한 의문을 야기한다.
엘레나와의 사이에서 이반 아센 1세는 최소 두 명의 아들을 두었다.
이름 | 생몰년 | 비고 |
---|---|---|
이반 아센 2세 | 1193년경 출생 ~ 1241년 | 1218년 ~ 1241년 불가리아 황제 |
알렉산더 | ? ~ 1232년 이후 사망 | 세바스토크라토르 칭호, 아들 칼리만 아센 2세는 1256년 불가리아 황제 |
참조
[1]
서적
Simpson
2016
[2]
서적
The Conquest of Constantinople: Robert of Clari
[3]
서적
O City of Byzantium, Annals of Niketas Choniates
[4]
서적
O City of Byzantium, Annals of Niketas Choniates
[5]
서적
O City of Byzantium, Annals of Niketas Chonia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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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O City of Byzantium, Annals of Niketas Choniates
[7]
서적
The History
[8]
서적
The History of the Expedition of the Emperor Frederick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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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 City of Byzantium, Annals of Niketas Chonia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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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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