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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종 (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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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의종은 고려 인종의 장남으로, 1146년에 즉위하여 고려의 제18대 왕이 되었다. 그는 유흥에 빠져 정사를 소홀히 하고 무신을 푸대접하여 무신들의 불만을 샀으며, 측근 세력의 전횡을 간과하여 무신정변의 원인을 제공했다. 1170년 무신정변으로 폐위되어 거제도로 유배되었으며, 이후 김보당의 복위 운동이 실패로 돌아간 후 1173년 이의민에게 살해당했다. 의종의 치세는 문벌 귀족과 무신 간의 갈등이 심화되어 무신정권의 발흥을 가져온 시기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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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종 (고려)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고려 의종 어진
고려 의종 어진
왕위고려 제18대 국왕
재위 기간1146년 ~ 1170년
즉위1146년, 개경 대광전
이전 국왕인종
다음 국왕명종
존호
시호강과장효대왕 (剛果莊孝大王)
묘호의종 (毅宗)
개인 정보
출생명왕철 (王徹), 후에 왕현 (王晛)으로 개명
일승 (日升)
출생일1127년 5월 23일
출생지개경 연덕궁
사망일1173년 11월 7일 (향년 46세)
사망지동경 곤원사 북쪽 연못
능묘희릉 (禧陵)
가족 관계
왕조
가문고려 왕족
아버지인종
어머니공예왕후
배우자장경왕후
장선왕후
자녀아들:
효령태자
아들 3명
딸:
경덕궁주
안정궁주
화순궁주
딸 9명

2. 생애

의종은 인종과 공예왕후 임씨의 다섯 아들 중 맏이로 태어났다. 아버지 인종은 그가 땅에 떨어진 왕실의 위상을 회복할 수 있을지 걱정했고, 어머니는 둘째 아들 대령후 경을 더 좋아하여 그를 태자로 앉히려 했지만 정습명의 강력한 지원으로 1133년에 태자가 되었고, 정습명을 사부로 삼아 수학했다.[7][8][9]

1146년 인종이 죽자 장남인 의종이 즉위했다.[10] 즉위 후 유희에 빠져 정사를 소홀히 하고 문신을 우대하며 무신을 푸대접하여 무신들의 불만이 높아졌다. 또한 총애하던 환관들의 전횡을 간과하여 환관이 정치에 개입하는 일이 잦았다.

의종은 이자겸의 난, 묘청의 난 등으로 땅에 떨어진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고 왕권을 강화하고자 노력했다. 재위 초반에는 국가 전복을 꾀하려다 처벌받는 등[10] 신변에 위협을 느껴 무신들을 등용해 친위군을 강화했고, 이 과정에서 정중부, 이의방, 이고, 이의민 등이 중앙 정계로 진출했다. 또한, 대령후를 유배보냈다.[11]

그의 재위기간에는 《편년통록》, 《상정고금례》 등이 편찬되었으며,[12] 격구 등 잦은 군사 활동을 벌였다.[13] '관악(觀樂)'이라는 형태로 당악 요소 강화를 목적으로 한 음악 정책을 추진했고,[14][15] 유교, 불교, 도교를 아우르는 사상 정책을 추진했다.[16] 주요 측근으로는 김존중[17], 영의, 이복기[18], 정함, 왕광취, 백자단 등이 있다.

1170년 음력 8월 30일 정중부, 이의방 등이 무신정변을 일으켰다.[21] 왕광취, 백자단 등 측근 세력의 폐단이 커지자 의종은 이들을 견제하고자 김돈중, 이공승 등 문벌 세력을 등용하고자 했으며, 이는 무신들이 의종을 향한 관심에서 멀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김돈중의 유시(流矢) 사건으로 애먼 군인들이 처벌받자[19] 무신들 사이에서는 자신들이 의종의 왕권 강화 과정에서 두 번이나 선택받지 못했다는 박탈심을 느꼈고, 지배 세력이 내시, 환관 등의 측근에서 문벌 귀족으로 바뀌더라도 자신들의 상황은 나아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더 나빠질 것이라는 위기의식이 팽배했다. 이 위기의식이 결국 무신정변이라는 사건으로 나타난 것이다.[20] 음력 9월 2일 무신들에게 폐위당해 3년간 거제도의 둔덕기성에 유폐되었다.[21]

1173년 김보당무신정권에 항거하여 의종 복위 거병을 일으키고, 유배 중인 의종을 경주로 모셔와 봉기를 일으켰으나, 무신 정권이 보낸 군대에 진압되었다.[22] 같은 해, 의종은 자신이 발탁했던 장수 이의민에게 살해당했다. 시체는 경주의 한 연못에 수장되었다.[6] 이때 의종의 나이는 47세였다.

이후 동생 명종이 희릉(禧陵)을 조성하였으나, 현재 위치는 알 수 없고 개성 동쪽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의종의 치세는 문벌 귀족과 무인 집단의 반목이 심화되어 그 조절에 실패한 결과 무신정권의 발흥으로 이어진, 고려 왕조의 분수령이 되는 시기였다.

2. 1. 출생과 태자 시절

의종은 인종과 임원후의 딸 공예왕후 임씨의 다섯 아들 중 맏이로 태어났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가 땅에 떨어진 왕실의 위상을 회복할 수 있을지 걱정했고, 어머니는 그보다는 둘째 아들 대령후 경을 유난히 좋아해 그를 태자로 앉히려고 했지만 정습명의 강력한 지원으로 그러지는 못했다.[7] 1133년에 태자가 되었으며[8] 정습명을 사부로 삼아 수학했다.[9]

2. 2. 즉위 이후

1146년 인종이 죽자 그의 장남인 의종이 즉위했다.[10] 인종공예왕후 임씨의 장남으로, 태자 시절부터 왕위 계승 자질을 의심받아 폐태자 논의까지 있었다. 즉위 후에도 유희에 빠져 정사를 소홀히 하고 문신을 우대하며 무신을 푸대접하여 무신들의 불만이 높아졌다.[10] 또한 총애하던 환관들의 전횡을 간과하여 환관이 정치에 개입하는 일이 잦았다.

1170년 8월, 정중부, 이의방 등 평소 소외되었던 무관들이 무신정변을 일으켰다. 이들은 문신과 환관들을 살해하고, 의종과 태자를 유배 보낸 후 의종의 동생인 명종을 왕위에 앉혔다. 이후 약 100년 동안 고려는 무신들이 정사를 담당하는 무신정권이 이어진다.

1173년, 김보당이 무신정권에 반감을 품고 반란을 일으켜 의종 복위 운동을 추진했다. 김보당에 호응한 반란군 일부는 거제도에 유폐되어 있던 의종을 경주로 옮겼으나, 김보당이 패하면서 복위 계획은 실패했다. 같은 해 10월, 의종은 이의방이 보낸 자객 이의민에 의해 살해되었다. 왕의 유해는 큰 솥에 넣어 연못에 버려졌다고 한다.[10]

1174년, 서경 유수 조위총이 의종 살해의 죄를 추궁한다는 명분으로 조정에 반기를 들자, 이의방을 살해하고 정권을 장악한 정중부는 민심을 회유할 목적으로 의종의 국상을 준비했다. 경주에 가매장되었던 의종의 유해는 수습되어 개경으로 보내졌고, 이듬해 5월에는 희릉에 안장되었다.[10]

의종의 치세는 문벌 귀족과 무인 집단의 반목이 심화되어 그 조절에 실패한 결과 무신정권의 발흥으로 이어진, 고려 왕조의 분수령이 되는 시기였다.

2. 2. 1. 불안한 출발과 친위군 강화

의종은 즉위 후 아버지 인종 때 일어난 이자겸의 난, 묘청의 난 등으로 땅에 떨어진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고 왕권을 강화하고자 노력했다. 재위 초반에는 몇몇 사람들이 다른 나라와 연계해 국가 전복을 꾀하려다 사전에 발각되어 처벌받는 등[10] 자신의 신변에 위협을 느꼈다. 그래서 무신들을 등용해 친위군을 강화해 나갔다. 이 과정에서 정중부, 이의방, 이고, 이의민 등이 중앙 정계로 진출할 수 있었다.

2. 2. 2. 경쟁자 제거

대령후를 유배라는 형식으로 숙청하였다.[11]

2. 2. 3. 편찬 사업

그의 재위기간에는 《편년통록》, 《상정고금례》 등이 편찬되었다.[12]

2. 2. 4. 다양한 정책 추진

의종은 재위 초반에 열병, 격구 등 잦은 군사 활동을 벌였다.[13] '관악(觀樂)'이라는 형태로 음악 정책을 추진했는데,[14] 이는 당악 요소의 강화를 목적으로 한 것으로 보인다.[15] 유교, 불교, 도교를 아우르는 사상 정책을 추진했다.[16]

2. 2. 5. 새로운 측근 세력 육성

주요 인물로는 김존중[17], 영의, 이복기[18], 정함, 왕광취, 백자단 등이 있다.

2. 3. 무신정변과 폐위

1170년 음력 8월 30일 정중부, 이의방, 이고 등의 무신들이 반란을 일으켜 무신정변이 일어났다.[21] 왕광취, 백자단 등 측근 세력의 폐단이 커지자 의종은 이들을 견제하고자 김돈중, 이공승 등 문벌 세력을 등용하고자 했으며, 이는 무신들이 의종을 향한 관심에서 멀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게다가 김돈중의 유시(流矢) 사건으로 애먼 군인들이 처벌받자[19] 무신들 사이에서는 자신들이 의종의 왕권 강화 과정에서 두 번이나 선택받지 못했다는 박탈심을 느꼈고, 지배 세력이 내시, 환관 등의 측근에서 문벌 귀족으로 바뀌더라도 자신들의 상황은 나아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더 나빠질 것이라는 위기의식이 팽배했다. 이 위기의식이 결국 무신정변이라는 사건으로 나타난 것이다.[20] 음력 9월 2일 무신들에게 폐위당해 3년간 거제도의 둔덕기성에 유폐되었다.[21]

2. 4. 김보당의 난과 최후

1173년 김보당무신정권에 항거하여 의종 복위 거병을 일으키고, 유배 중인 의종을 경주로 모셔와 봉기를 일으켰으나, 무신 정권이 보낸 군대에 진압되었다.[22]

같은 해, 의종은 자신이 발탁했던 장수 이의민과 곤원사(坤元寺) 연못가에서 술을 마시다가 이의민에게 등뼈가 꺾이고 온 몸의 마디와 관절이 부러지는 방식으로 살해당했다. 시체는 경주의 한 연못에 수장되었다.[6]

이때 의종의 나이는 47세였다. 이후 동생 명종이 희릉(禧陵)을 조성하였으나, 현재 위치는 알 수 없고 개성 동쪽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3. 가족 관계

의종은 고려 인종과 공예왕후의 아들이며, 고려 예종과 순덕왕후의 손자이다. 외조부는 임원후, 외조모는 진한국대부인 부평 이씨이다.

의종은 장경왕후 김씨, 장선왕후 최씨, 후궁 무비 등 세 명의 부인을 두었다.

3. 1. 부모

구분이름생몰년비고
인종1109년 ~ 1146년고려 제17대 국왕
공예태후 임씨1109년 ~ 1183년
조부고려 예종1079년 ~ 1122년
조모순덕왕후 (경원이씨)1094년 ~ 1118년
외조부임원후1089년 ~ 1156년
외조모진한국대부인 부평 이씨1090년 ~ ?


3. 2. 왕후 및 후궁

의종의 왕후 및 후궁
시호생몰년부모비고
장경왕후 김씨[23]미상강릉공 왕온
김씨
의정왕후, 선정왕후의 언니
장선왕후 최씨미상최단
미상
의종 2년(1148년) 왕비 책봉
미상무비3남 9녀를 출생


3. 3. 자녀

의종의 자녀
이름생몰년생모배우자비고
효령태자1149년 - 미상장경왕후 김씨태자비 왕씨[24]무신정변으로 폐위
경덕궁주미상장경왕후 김씨연창공 왕평[25]
안정궁주미상장경왕후 김씨함녕백 왕박[26]
화순궁주미상장경왕후 김씨광릉공 왕면[27]



의종은 장경왕후 김씨와의 사이에서 효령태자경덕궁주, 안정궁주, 화순궁주를 낳았다. 효령태자는 1153년에 태자에 책봉되었으나, 1170년 무신정변으로 인해 폐위되어 유배되었다.

4. 의종이 등장하는 작품

2003년부터 2004년까지 KBS에서 방영된 드라마 ''무인시대''에서 김규철이 연기했다.

참조

[1] 뉴스 "[Why] 고려 의종 때 '무신(武臣)의 난' 간신(奸臣) 무참하게 도륙했지만 문극겸 등 충신(忠臣)은 화 면해" https://www.chosun.c[...] 2009-09-06
[2] 뉴스 "[Why] 고려 의종 때 '무신(武臣)의 난' 간신(奸臣) 무참하게 도륙했지만 문극겸 등 충신(忠臣)은 화 면해" https://www.chosun.c[...] 2009-09-06
[3] 뉴스 http://www.geojenews[...] 2012-11-07
[4] 문서 인종 11년 2월 17일, 율리우스력 3월 25일
[5] 서적 고려사 1127-04-11
[6] 서적 고려사 1173-10-01
[7] 서적 고려사
[8] 서적 고려사
[9] 서적 고려사 1146-01-08
[10] 서적 고려사 1147-11-16
[11] 서적 고려사 1157-02-12
[12] 논문 고려 의종대 다원적 사상지형과 『編年通錄』·『詳定古今禮』 편찬 한국사학사학회
[13] 논문 의종 초기 정국의 동향과 군사 활동의 목적 역사교육학회
[14] 서적 고려사 1188-02-06
[15] 논문 충렬왕대의 시대상황과 음악정책 고려사학회
[16] 서적 고려사 1168-03-26
[17] 서적 동국이상국집·전집
[18] 문서 김존중 묘지명
[19] 서적 고려사
[20] 논문 고려 의종 대 정국의 추이와 무신난의 배경 인문 사회 21
[21] 서적 고려사 1170-09-02
[22] 서적 고려사 1173-09-13
[23] 문서 모계 성씨를 사용
[24] 문서
[25] 문서
[26] 문서
[27]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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