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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보 포고렐리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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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보 포고렐리치는 크로아티아계와 세르비아계 혼혈로, 1958년 유고슬라비아 베오그라드에서 태어난 피아니스트이다. 그는 모스크바에서 예브게니 티마킨,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베라 고르노스타예바에게 사사받았으며, 알리사 케제라제와 결혼했다. 1980년 몬트리올 국제 음악 콩쿠르에서 우승하고, 쇼팽 콩쿠르에서 심사위원 마르타 아르헤리치의 지지를 받았으나, 연주 스타일에 대한 비판도 존재한다. 그는 카네기 홀 데뷔 이후 세계적인 오케스트라와 협연했으며, 쇼팽, 베토벤 등의 곡을 녹음했다. 또한 쿠웨이트에서 공연한 최초의 클래식 음악가이며, 한국과도 인연이 깊다. 포고렐리치는 독창적인 연주 스타일로 호평과 비판을 동시에 받았으며, 사회 공헌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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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보 포고렐리치 - [인물]에 관한 문서

2. 생애

1958년 유고슬라비아 베오그라드에서 크로아티아계 아버지와 세르비아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14] 7세 때 피아노 레슨을 받기 시작하여 보이슬라브 부치코비치 음악원에서 수학하였다. 12세 때 소련 모스크바로 가서 예브게니 티마킨에게 사사받았고,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베라 고르노스타예바, 예브게니 말리닌에게 배웠다. 1976년부터 조지아 출신의 피아니스트이자 교사인 알리사 케제라제에게 사사받았으며, 1980년 그녀와 결혼하였다.

1978년 이탈리아 테르니의 알레산드로 카사그란데 국제 피아노 콩쿠르와 1980년 몬트리올 국제 음악 콩쿠르에서 우승했다.[15][16] 같은 해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개최된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 참가하였으나 3라운드에서 탈락하였다. 당시 심사위원이었던 마르타 아르헤리치는 이에 항의하며 심사위원직을 사퇴하고 포고렐리치를 "천재"라고 칭했다.[1]

1981년 미국 뉴욕카네기 홀에서 데뷔 공연을 치렀고, 이후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등 세계적인 관현악단들과 협연하였다. 도이치 그라모폰과 계약하여 쇼팽, 베토벤, 모차르트, 리스트 등의 곡을 녹음하였다.[7] 그는 쿠웨이트에서 공연한 최초의 클래식 음악가이기도 하다.[7]

1996년 아내 케제라제가 간암으로 사망하면서 큰 충격을 받아 한동안 연주 활동을 중단했다.[1] 이후 콘서트를 재개하여, 극동(중국, 대만, 일본)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다.

2. 1. 유년 시절과 교육

1958년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 베오그라드에서 크로아티아계 아버지와 세르비아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14] 7세 때 피아노 레슨을 시작하여 보이슬라브 부치코비치 음악원에서 수학하였다. 12세 때 소련 모스크바로 건너가 모스크바 중앙 음악 학교에서 예브게니 티마킨에게 사사받았다. 이후 모스크바 음악원에 입학하여 베라 고르노스타예바, 예브게니 말리닌에게 배웠다. 또한 피아니스트 미하일 플레트네프와도 함께 공부하며 우정을 쌓았다.

1976년부터 조지아 출신의 피아니스트이자 교사인 알리사 케제라제에게 집중적으로 사사받으며 프란츠 리스트-알렉산더 실로티 학파의 전통을 전수받았다. 1980년 케제라제와 결혼하였으며, 1996년 그녀가 간암으로 사망할 때까지 결혼 생활을 유지했다.

2. 2. 초기 경력과 쇼팽 콩쿠르

1978년 이탈리아 테르니의 알레산드로 카사그란데 국제 피아노 콩쿠르와 1980년 몬트리올 국제 음악 콩쿠르에서 우승했다.[15][16] 1980년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열린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 3라운드에서 탈락했는데, 심사위원 마르타 아르헤리치는 이에 항의하며 심사위원직을 사퇴하고 포고렐리치를 "천재"라고 칭했다.[1] 이 사건은 '포고렐리치 사건'으로 불리며 큰 화제를 모았다.

다른 심사위원들도 포고렐리치의 연주 스타일에 대해 의견이 엇갈렸다. 유진 리스트는 "그는 음악을 존중하지 않는다. 그는 왜곡될 정도로 극단을 사용한다. 그리고 그는 너무 많은 연기를 한다"라고 비판했다.[2] 루이 켄트너는 "포고렐리치 같은 사람이 2차 예선에 진출한다면, 나는 심사위원으로 참여할 수 없다. 우리는 서로 다른 미적 기준을 가지고 있다"며 사임했다.[6][2]

이 사건은 포고렐리치가 국제적인 명성을 얻는 계기가 되었다.[31]

2. 3. 국제적 활동과 한국과의 인연

포고렐리치는 1981년 뉴욕 카네기 홀에서 데뷔 리사이틀을 열었고, 같은 해 런던에서도 데뷔했다.[1] 이후 베를린 필하모닉, 뉴욕 필하모닉, 런던 필하모닉, 빈 필하모닉 등 세계 유수의 오케스트라와 협연했다.[7] 도이치 그라모폰과 계약하여 쇼팽, 베토벤, 모차르트, 리스트 등 다양한 작곡가의 작품을 녹음했다.[7] 그는 쿠웨이트에서 공연한 최초의 클래식 피아니스트였다.[7]

포고렐리치는 한국과도 깊은 인연을 맺어 1981년 첫 내한 이후 여러 차례 한국을 방문하여 공연했다.
한국 방문 일지:

연도내용
1981년첫 내한, 전국 7개 공연
1983년당초 Aliza Kezeradze영어와의 조인트 콘서트도 예정되었으나, 그녀의 팔 상태가 좋지 않아 내한을 포기. 포고렐리치의 단독 공연.
1988년5년 만의 내한, 리사이틀 9회와 협주곡 1회
1989년6회 리사이틀
1991년7회의 솔로 리사이틀과 1회의 협주곡
1993년10회의 솔로 리사이틀과 2회의 협주곡 공연. 도쿄 공연 마티네 공연은 황후가 관람
1994년2회의 솔로 리사이틀, 양일 모두 산토리 홀에서의 공연
1995년7회의 리사이틀, 도쿄·미에에서 협주곡을 연주
1996년4월, NHK 교향악단 창립 70주년 기념 특별 연주회 (NHK 홀). 11월, 24일 산토리 홀 공연, 25일 호텔 오쿠라 "평안의 방"에서 약 400명의 청중 앞에서 96년도 자선 갈라 리사이틀 (세이브 더 칠드런 재팬 주최), 노리노미야 사야코 내친왕 방문.
1997년홋카이도를 포함한 전국에서 7회의 공연
1999년각지에서 9회의 리사이틀
2005년6년 만에 실현된 내한 공연. 아시아 공연의 일환으로 도쿄에서 단 한 번의 리사이틀
2007년도쿄·오사카에서의 리사이틀 외, 가루이자와 오가 홀에서, 7명의 수강생을 대상으로 일본에서 처음으로 마스터 클래스를 연다
2010년도쿄·후쿠오카에서의 리사이틀 외, 5월 3일에는 "열광의 날" 음악제 2010에 참가, 국제 포럼 홀 A에서 5000명을 앞에 두고 연주. 4월 28일에는 마르타 아르헤리치의 급거 대역으로 샤를 뒤투아 지휘 필라델피아 관현악단과 협연
2012년라 폴 쥐르네 가나자와에 첫 참가. 로쿠쇼무라도 처음 방문. 도쿄에서 심포니아 바르소비아 (지휘는 야마시타 카즈후미)와 쇼팽의 협주곡 두 곡을 하룻밤에 선보이는 협주곡의 밤과, 쇼팽·리스트를 다룬 리사이틀을 연속해서 연주. 나고야에서도 95년 이래의 리사이틀
2013년12월에 내한, 나고야(시라카와 홀)·가와사키(뮤자 가와사키)·도쿄(산토리 홀)에서의 솔로 리사이틀 3공연
2014년12월 14일 산토리 홀에서의 1공연
2016년도쿄, 도요타, 미토에서 3회의 솔로 리사이틀과 1회의 협주곡
2017년10월 20일 산토리 홀에서의 1공연
2018년(환갑 기념), 오사카, 나고야, 도쿄 등 4회의 솔로 리사이틀
2020년2월에 내한. 다카사키, 도쿄, 요코하마, 오사카에서 공연
2023년도쿄에서 2회의 솔로 리사이틀(산토리 홀[29]과 하마리큐 아사히 홀)과 2회의 협주곡(도쿄 예술 극장)


2. 4. 아내의 죽음과 이후 활동

1996년 아내 알리사 케제라제가 간암으로 사망하면서, 이보 포고렐리치는 큰 충격을 받아 한동안 연주 활동을 중단했다.[1] 이후 유럽과 극동(중국, 대만, 일본)을 중심으로 콘서트를 재개했다. 특히 일본을 자주 방문하여 공연했으며, 2016년에는 제1회 맨해튼 국제 음악 콩쿠르(미국) 심사 위원장을 맡기도 했다.[18] 2019년에는 21년 만에 새 앨범을 발매했다.[1]

3. 연주 스타일과 평가

이보 포고렐리치의 연주 스타일은 독창적인 해석으로 유명하지만, 비평가들 사이에서는 상반된 평가를 받으며 때때로 논란의 중심에 서기도 한다. 영국의 클래식 피아니스트 피터 도노호는 포고렐리치의 경력 전반에 걸쳐 비평가들로부터 일련의 "굴욕적인 공격"이 있었다고 언급하며, 그의 스타덤은 재능보다는 "기발함에 기초한 팝 스타일의 선전 덕분"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33]

3. 1. 독창적인 해석

이보 포고렐리치의 연주는 전통적인 해석에서 벗어나 독창적이고 개성적인 것으로 평가받는다. 그의 연주는 콘서트 관객들에게는 호평을 받았지만, 모든 평론가들에게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의 이름은 인쇄 매체에서 종종 "논란"과 "기이함"과 함께 언급된다.[2]

1980년 바르샤바에서 열린 제10회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서 포고렐리치가 3차 경연에서 탈락하자 심사위원들 사이에서 큰 논란이 일었다. 마르타 아르헤리치는 그를 "천재"라고 칭하며 항의의 표시로 심사위원직을 사임했고, 다른 두 심사위원도 "그런 아티스트가 결승에 진출하지 못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라고 선언했다. 그러나 다른 심사위원들은 포고렐리치의 기이한 행동에 불만을 표했다. 유진 리스트는 "그는 음악을 존중하지 않는다. 그는 왜곡될 정도로 극단을 사용한다. 그리고 그는 너무 많은 연기를 한다."라며 매우 낮은 점수를 주었다.[19] 루이스 켄트너는 1차 경연에서 자신의 모든 학생들이 탈락한 후, "포고렐리치와 같은 사람들이 2차 경연에 진출한다면 심사위원 일에 참여할 수 없다. 우리는 다른 미적 기준을 가지고 있다."라며 사임했다.[20] 이러한 스캔들은 오히려 포고렐리치가 경력을 시작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21]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피아노 소나타 6번 초기 녹음은 ''펭귄 가이드 to 녹음된 클래식 음악''에서 로제트 상을 받는 등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뉴욕 타임스 평론가 해럴드 C. 쉔버그는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32번(Op. 111) 연주에서 포고렐리치의 유난히 느린 템포를 비판하며, "포고렐리치는 낭만주의 피아니즘의 글렌 굴드가 되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것 같다(굴드의 기이함은 있지만, 그의 특정한 종류의 천재성은 없다)"라고 평했다.[8] 20년 후, 또 다른 뉴욕 타임스 비평가인 앤서니 토마시니는 같은 작품의 공연을 보고 "비극적으로 길을 잃은 엄청난 재능이 있다. 뭐가 잘못됐어?"라고 평했다.[9]

2015년, 오랜 공백 끝에 로열 페스티벌 홀에서 열린 포고렐리치의 리사이틀은 평론가들로부터 혹평을 받았다.[33][31] 가디언의 앤드루 클레멘츠는 "기술적 탁월함이 명백히 사라지고 조잡함만 남았다"며 그의 연주를 강하게 비판하고, 그의 피아노 연주가 "너무 크고 조잡하여 [...] 스타인웨이는 그의 폭행으로 고통 받고있었다."라고 묘사했다.[36]

3. 2. 비평가들의 상반된 평가

이보 포고렐리치의 연주는 종종 논란의 대상이 되며, 비평가들 사이에서도 상반된 평가를 받는다. 1980년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 3라운드에서 탈락했을 때, 심사위원이었던 마르타 아르헤리치는 그를 "천재"라고 칭하며 항의의 표시로 심사위원직을 사임했다.[31] 다른 심사위원들도 포고렐리치가 결승에 진출하지 못한 것에 대해 유감을 표했다.[31] 그러나 일부 심사위원들은 그의 연주 방식에 불만을 표하기도 했다.[31]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피아노 소나타 6번 초기 녹음은 ''펭귄 가이드 to 녹음된 클래식 음악''에서 로제트 상을 받는 등 높은 평가를 받았다.[8] 하지만 베토벤의 Op. 111 소나타에 대한 해석은 비판을 받았다. 뉴욕 타임스 평론가 해럴드 숀버그는 포고렐리치가 "낭만주의 피아노계의 글렌 굴드가 되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것 같다(굴드의 기이함은 있지만, 그의 특정한 종류의 천재성은 없다)"라고 비판했다.[8]

2015년 로열 페스티벌 홀 리사이틀에서 포고렐리치의 연주는 가디언의 앤드루 클레멘츠에게서 "기술적 탁월함이 명백히 사라지고 조잡함만 남았다"는 혹평을 받는 등, 비평가들로부터 널리 폄하되었다.[36]

4. 사회 공헌 활동

1986년, 포고렐리치는 고국 출신의 젊은 연주자들의 경력을 지원하기 위해 유고슬라비아에 재단을 설립했다. 1988년, 유네스코는 그를 친선 대사로 임명했는데, 이는 클래식 피아니스트로서는 최초였다.[3]

1989년부터 1997년까지, 바트 뵈리스호펜에서 열린 이보 포고렐리치 페스티벌은 젊은 예술가들에게 유명한 예술가들과 함께 공연할 기회를 제공했다. 1993년 12월, 포고렐리치는 캘리포니아주 패서디나에서 대사 재단과 협력하여 "국제 솔로 피아노 콩쿠르"를 설립했다.[3] 이 콩쿠르는 젊은 음악가들이 100000USD의 상금을 통해 경력을 개발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1994년 그는 자선 콘서트를 기획하는 재단을 설립하여 사라예보 시민들을 위한 의료 지원을 제공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그는 사라예보 재건, 적십자 지원, 암 및 다발성 경화증과 같은 질병과의 싸움을 위한 기금 모금에 기여했다.

참조

[1] 뉴스 A Confrontation With Music: Ivo Pogorelich's First Album In 21 Years https://www.npr.org/[...] 2019-08-22
[2] 간행물 Pogorelich at the Chopin: Towards a sociology of competition scandals http://chopinreview.[...] Fryderyk Chopin Institute 2021-07-29
[3] 백과사전 Pogorelich, Ivo https://www.oxfordmu[...] Oxford University Press
[4] 뉴스 Ich möchte gern mein Publikum sein http://www.zeit.de/1[...] 2015-06-30
[5] 뉴스 The key to survival https://www.theguard[...] 2010-05-05
[6] 웹사이트 The 10th International Fryderyk Chopin Piano Competition https://konkursy.nif[...] 2021-07-29
[7] 웹사이트 Ivo Pogorelić http://www.inyourpoc[...] 2012-07-28
[8] 뉴스 Do Today's Pianists Have The Romantic Touch? https://www.nytimes.[...] 1986-07-06
[9] 뉴스 After a Decade Away, an Elusive Figure Returns https://www.nytimes.[...] 2006-10-28
[10] 뉴스 Intense and sensitive ABC Radio 24 Hours 2000-04
[11] 웹사이트 Manuel Brug: Drinking from a different spring (14/09/2006) http://www.signandsi[...] 2024-10-20
[12] 웹사이트 Ivo Pogorelich - der Pianist - Klangpoet der Gegensätze https://www.ivopogor[...] イーヴォ・ポゴレリチ 公式サイト 2018-09-07
[13] 웹사이트 Ivo Pogorelich - Artist Page on Deutsche Grammophon https://www.deutsche[...] ドイツ・グラモフォン 2018-09-07
[14] 서적 ピアニストガイド 青弓社 2006-02-10
[15] 웹사이트 Montreal International Music Competition/Concours international de musique de Montréal https://www.thecanad[...] 2024-04-30
[16] 웹사이트 Montreal International Music Competition/Concours international de musique de Montréal https://archie.libra[...] 2024-04-30
[17] 서적 Pianisuto ga kataru https://www.worldcat[...] Arufabētabukkusu 2017
[18] 웹사이트 エマニュエル ・ リモルディ 日本公式ウェブサイト http://www.emanuelri[...] 2018-09-30
[19] 간행물 Pogorelich at the Chopin: Towards a sociology of competition scandals http://chopinreview.[...] Fryderyk Chopin Institute 2018
[20] 간행물 Pogorelich at the Chopin: Towards a sociology of competition scandals http://chopinreview.[...] Fryderyk Chopin Institute 2018
[21] 간행물 Pogorelich at the Chopin: Towards a sociology of competition scandals http://chopinreview.[...] Fryderyk Chopin Institute 2018
[22] 뉴스 Was the Chopin jury not right to eliminate Pogorelich https://slippedisc.c[...] 2005-04-12
[23] 뉴스 Do Today's Pianists Have The Romantic Touch? https://www.nytimes.[...] 1986-07-06
[24] 뉴스 After a Decade Away, an Elusive Figure Returns https://www.nytimes.[...] 2006-10-28
[25] 간행물 Pogorelich at the Chopin: Towards a sociology of competition scandals http://chopinreview.[...] Fryderyk Chopin Institute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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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웹사이트 Ivo Pogorelich review – a wretched, profoundly unmusical affair https://www.theguard[...] The Guardian 2022-01-27
[28] 웹사이트 I see myself as the servant of the composer. https://archive.is/H[...] ivopogorelich.com 2019-11-26
[29] 웹사이트 IVO POGORELICH PIANO RECITAL https://www.suntory.[...] 2024-04-17
[30] 웹사이트 BEETHOVEN; RACHMANINOV Piano Sonatas (Pogorelich) https://www.gramopho[...] www.gramophone.co.uk 2019-11-27
[31] 간행물 Pogorelich en Chopin: Hacia una sociología de los escándalos de la competencia http://chopinreview.[...] Instituto Fryderyk Chopin 2022-0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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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뉴스 After a Decade Away, an Elusive Figure Returns https://www.nytimes.[...] 2006-10-28
[36] 웹인용 Ivo Pogorelich review – a wretched, profoundly unmusical affair https://www.theguard[...] The Guardian 2015-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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