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철 (1411년)
1. 개요
이사철은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1411년에 태어나 1456년에 사망했다. 세종 시대에 집현전 박사, 부수찬을 거쳐 한글 창제에 참여했으며, 사헌부 장령, 지사간원사, 승정원 동부승지 등을 역임했다. 정치적으로는 수양대군의 계유정란에 가담하여 정난공신 1등에 책록되었으며, 우의정, 좌의정까지 올랐다. 사후에는 문안이라는 시호가 추서되었으며, 1872년 파성군으로 작위가 개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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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1년 출생 -
근녕군
조선 태종의 서자 근녕군은 세종을 도와 익사공신에 녹훈되었고 단종 선위 시 절식하며 통곡하는 등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에 항거한 충절로 세조에게 인정받아 예우를 받았다. -
1411년 출생 -
박원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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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민정음 -
신숙주
신숙주는 조선 전기의 문신, 학자, 언어학자, 외교관, 정치인으로,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하고 세조 즉위 후 주요 관직을 역임하며 외교와 국방에 기여했으며, 《해동제국기》, 《동국정운》 등의 저술을 남기고 영의정을 지냈다. -
훈민정음 -
정인지
정인지는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하고 고려사 등을 편찬했으며, 계유정난에 가담하여 영의정을 역임했으나 단종 폐위에 가담한 행적으로 비판받았다. -
1456년 사망 -
한확
한확은 조선 초 문신으로, 명나라 외교에서 활약하며 세종 대에 사신으로 공물 면제를 주청하고, 세조의 즉위를 도운 공으로 정난공신에 책록되어 우의정에 올랐으며, 세조의 명나라 책봉을 성사시키는 데 기여했으나 명나라로 가는 길에 사망했다. -
1456년 사망 -
순평군
순평군은 조선 정종의 서자로 순평군에 봉해졌으며, 순창 설씨와 혼인하여 자녀를 두고 유배, 파면, 복권 등의 사건을 겪었으며, 학문을 시작하여 효경을 배우고 사망하여 시호는 충간이다.
2. 생애
이사철은 조선 태조의 사촌형인 영성군 이천계의 손자였다. 아버지는 밀양군에 추증된 이조판서 이란이고, 어머니는 정경부인 증 부부인 파평 윤씨로 제학 윤사우(尹師愚)의 딸이다. 1432년(세종 14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신숙주, 정인지, 성삼문, 김질 등과 함께 세종의 한글 창제를 보좌하였다.
1442년(세종 24년) 사헌부장령 등을 거쳐 지사간원사(知司諫院事)를 역임하고, 의방유취 편찬에 편수관으로 참여하였다. 1450년(세종 32년) 이조참판, 1451년(문종 1년) 예조판서, 이조판서를 역임하였다. 1453년(단종 1) 계유정란에 가담하여 정난공신 1등에 책록되고, 견성군(甄城君)에 봉해졌으며, 의정부좌찬성으로 승진하였다.
1455년(세조 1) 좌찬성에 임명되었고, 함길도 도체찰사가 되어 함길도 주현 연혁의 편리 여부를 살펴보고 돌아왔다. 같은 해 단종이 수양대군에게 양위할 때 적극 협력하여 세조 즉위 후 의정부우의정으로 승진하고, 좌익공신 2등 및 견성부원군(甄城府院君)에 봉해졌다. 홍문관 제학을 세 번 역임하였고, 명나라에 선위사(宣慰使)로 파견되어 연경에 다녀왔다. 1456년(세조 2) 의정부좌의정이 되었다. 체격이 크고 음식을 많이 먹는 것으로도 유명했다고 한다. 1456년 11월 병으로 사직하였고, 12월 16일에 사망하였다.
2.1. 초기 활동
조선 태조의 사촌형 영성군 이천계(李天桂)의 손자였다. 아버지는 개국좌명공신으로 밀양군에 추증된 보국숭록대부 이조판서 이란이고, 어머니는 정경부인 증 부부인 파평 윤씨로 제학 윤사우(尹師愚)의 딸이다. 형제로는 이양덕(李陽德), 이사명(李思明) 등이 있었다. 1432년(세종 14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집현전 박사가 되고 1434년(세종 16년)에 집현전 부수찬으로 승진되었다. 이후 신숙주, 정인지, 성삼문, 김질 등과 함께 세종의 한글 창제를 보좌하였다.
1442년(세종 24년) 사헌부장령, 사헌부 집의를 거쳐 지사간원사(知司諫院事)를 역임하고, 이때 집현전 학사를 겸직하여 의방유취 편찬에 편수관으로 참여하였다.
2.2. 정치 활동
1450년(세종 32년) 이조참판이 되고, 1451년(문종 1년) 예조판서, 이조판서를 역임하였다. 1453년(단종 1) 수양대군이 안평대군 일파와 김종서, 황보인 등을 제거하는 계유정란에 가담하였다. 계유정란 성공 후 정난공신 1등에 책록되고, 견성군(甄城君)에 봉해졌으며, 의정부좌찬성으로 승진하였다. 그해 집현전 대제학, 지경연 성균관사 겸 판예조사를 겸직하였다.
1455년(세조 1) 좌찬성에 임명되었다. 좌찬성 재직 중 함길도 도체찰사가 되어 함길도 주현 연혁의 편리 여부를 살펴보고 돌아왔다.
2.3. 생애 후반
1455년 단종이 수양대군에게 양위할 때, 수선(受禪, 양위 작업)에 적극 협력하여 세조 즉위 후 의정부우의정으로 승진하고, 좌익공신 2등 및 견성부원군(甄城府院君)에 봉해졌다. 문재(文才)도 갖췄던 그는 홍문관 제학을 세 번 역임하였다.
이후 세자부(世子傅)를 겸하고, 같은 해 명나라에 선위사(宣慰使)로 파견되어 연경에 다녀왔다. 1456년(세조 2) 병으로 사직했다가 복직하였으며, 그해 의정부좌의정이 되었다. 체격이 크고 음식을 많이 먹는 것으로도 유명했다고 한다. 1456년 11월 병으로 사직하였고, 12월 16일에 사망하였다.
3. 사후
문안(文安)이라는 시호가 추서되었다. 장지는 경기도 양주군 발산 가마동 산 자좌원에 부인 최씨와 함께 합장되었고, 세덕사에 배향되었다. 부인은 부부인 화순 최씨(和順崔氏)로 찬성 최예(崔睿)의 딸이다. 1872년(고종 9년)에 파성군으로 작위가 개봉되고 종정경에 추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