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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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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성삼문은 1418년 충청남도 홍성에서 태어난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세종 시대 집현전 학사로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했다. 1438년 문과에 급제한 후 관료 생활을 시작하여 세종의 총애를 받았으며, 1455년 수양대군이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르자 단종 복위 운동을 계획했다. 그러나 거사가 실패로 돌아가 아버지 성승, 박팽년, 이개, 하위지 등과 함께 처형되었으며, 사육신으로 불리며 충절의 상징으로 추앙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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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삼문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성삼문의 묘
직책조선의 사간원 우사간
임기1447년 8월 18일 ~ 1447년 9월 6일
임금조선 세종
대리청정세자 이향
출생일1418년
출생지조선 충청도 홍주
사망지조선 한성부에서 사형(거열형) 집행됨.
사망일1456년 6월 8일 (38세)
거주지조선 충청도 홍주
조선 한성부
국적조선
시호충문(忠文)
성별남성
학력1447년 중시에 장원
본관창녕
배우자초취 신씨 부인
재취 김차산
자녀성맹첨
성맹평
성맹종
성헌
성택
성효옥
아버지성승
어머니죽산 박씨
형제성삼빙
성삼고
성삼성
친인척조부 성달생
조카 성한
고모부 조숭문
사돈 유자미
사돈 유성원
웹사이트생육신/사육신

2. 생애

성삼문은 1418년 충청남도 홍주(현재의 홍성군)에서 장녕 성씨 양반 가문의 아들로 태어났다. 1438년 식년시에 합격한 후 세종대왕의 총애를 받아 집현전 학사로 등용되었다. 1442년부터 1446년까지 신숙주, 박팽년 등과 함께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하였으며, 1447년 문과 중시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세종 사후 문종을 섬겼으나, 문종은 즉위한지 얼마 되지 않아 승하하였다. 이후 어린 단종이 왕위에 올랐으나, 1455년 수양대군(세조)이 계유정난을 일으켜 단종을 강제로 폐위시키고 왕위에 올랐다. 성삼문은 세조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고, 아버지 성승박팽년 등과 함께 단종 복위 운동을 도모하였으나, 1456년 김질의 밀고로 발각되어 체포 후 처형되었다.

성삼문은 세조에게 끝까지 충절을 지킨 사육신 중 한 명으로, 후대에 충신으로 추앙받았다.

성삼문의 주요 관직
연도관직
1438년생원, 문과 급제
1445년성균관 주부 (종6품), 집현전 수찬 (정6품)
1450년집현전 직전 (정4품)
1451년경연청 검토관 (정6품) 겸임
1453년
1454년
1455년


2. 1. 생애 초반

1418년 충청남도 홍주(洪州, 현재의 홍성군) 홍북면 노은동(魯恩洞) 외가에서 태어났다. 전설에 의하면, 성삼문을 낳으려고 할 때 공중에서 "낳았느냐?"라고 세 번 묻는 소리가 났다고 한다. 그래서 하늘이 세 번 물었다 하여 이름을 삼문(三問)이라 지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성승(成勝)이고, 형제로는 동생 삼빙(三聘), 삼고(三顧), 삼성(三省)이 있었다.[4]

1435년(세종 17)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1438년(세종 20)에는 생원 신분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아갔다. 집현전 학사로 신숙주, 박팽년 등과 함께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하였다. 뒷날 생사를 같이 한 하위지 등은 그의 과거 급제 동기생이다. 집현전 학사로 뽑힌 뒤 수찬을 지냈다.

관료 생활 초기, 집현전에서 주로 활동하면서 세종대왕의 명을 받아 신숙주와 함께 훈민정음 정리 작업에 참여하였다.[5] 이 과정에서 명나라 한림학사 황찬의 도움을 얻고자 신숙주와 함께 13차례나 요동에 다녀오기도 했다.[5] 1447년 최고 등급의 문과 시험에 합격하였다.

2. 2. 집현전 학사 시절

성삼문은 1438년(세종 20년) 식년시(式年試)에 합격하여 세종의 총애를 받아 집현전에 등용되었다. 1442년부터 1446년까지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하였는데, 한자음을 표기하기 위해 명나라 음운학자에게 자문을 구하고자 여러 차례 파견되기도 하였다.[1] 1447년에는 문과 중시(重試)에서 장원(狀元)으로 급제하였다.

2. 2. 1. 집현전과 훈민정음

1442년 박팽년, 신숙주, 하위지, 이석형, 김문기 등과 함께 한양 삼각산 진관사(津寬寺)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고, 세종의 명으로 신숙주와 함께 《예기대문언독》(禮記大文諺讀)을 편찬하는 데 참여하였다.

세종대왕이 정음청(正音廳)을 설치하고 훈민정음을 창제할 때, 정인지, 신숙주, 박팽년, 이개, 최항, 김문기 등과 함께 참여했다. 세종의 명으로 당시 성균관 주부로 재직 중이던 집현전 교리 신숙주, 행사용(行司勇) 손수산(孫壽山) 등과 함께 요동에 귀양 가 있던 명나라의 한림학사 황찬을 찾아갔다. 13번이나 요동과 조선을 직접 왕래하여 음운(音韻)에 관한 것을 의논하였다.[1]

또한 명나라에 사신이 파견될 때는 사신을 따라 명나라에 가서 학자들을 만나 음운과 교장(敎場)의 제도를 연구해와 이를 보고하는 등 1446년 훈민정음 반포에 기여하였다. 1446년 안견안평대군의 꿈 이야기를 듣고 몽유도원도를 그리자 이에 대한 찬시를 써서 헌정했다. 1447년 중시(重試)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1]

2. 2. 2. 관료 생활

1447년 경연시강관(侍講官), 사간원 우사간, 집현전 부제학(副提學)을 지냈다. 그 후 왕명으로 신숙주와 함께 《예기대문언두(禮記大文諺讀)》를 편찬하는데 참여하였고 경연관(經筵官)이 되어 학문을 강론하였다.[5]

세종이 만년에 숙환으로 온천에 갈 때 박팽년, 신숙주, 최항, 이개, 김문기 등과 함께 성삼문을 항상 대동하고 고문으로 삼았다. 1451년 명나라 사신 예겸 등이 조선에 당도하자 왕명으로 신숙주와 함께 시짓기에 나서 동방거벽(東方巨擘, 동방에서 가장 학식이 뛰어난 사람)이라는 찬사를 얻기도 했다.[5] 이후 예조 참의, 동부승지(同副承旨), 우부승지와 좌부승지 등을 역임했다.

1438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세종집현전에 들어갔으며, 1446년 훈민정음, 1448년 동국정운 제정에 크게 기여하였다. 1447년 문과 중시(重試)에서 장원(狀元)이 되었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관료 생활 동안 다음과 같은 직책을 역임했다.

날짜직책
1445년 1월 7일성균관 주부(종육품)
1445년 9월 29일집현전 수찬(정육품)
1450년 7월 15일집현전 직전(정사품)
1451년 4월 15일경연청 검토관(정육품) 겸임
1453년 4월 10일집현전 직제학(종삼품)
1453년 4월 20일사헌부 집의(종삼품) 겸 집현전 직제학
1453년 5월 7일춘추관 기주관(정오품) 겸임
1453년 5월 24일경연청 시강관(정사품) 겸임
1453년 10월 15일계유정난 공신 3등, 사간원 우사간(종삼품), 집현전 직제학 유임
1453년 11월 8일계유정난 공신 3등, 사간원 좌사간(종삼품), 집현전 직제학 유임
1454년 1월 28일해관
1454년 6월 27일집현전 부제학(정삼품당상)
1454년 8월 5일예조 참의(정삼품당상)
1455년 1월 24일통정대부(정삼품당상) 예조 참의
1455년 윤6월 10일승정원 동부승지(정삼품당상)
1455년 윤6월 23일승정원 우부승지(정삼품당상)
1455년 9월 5일좌익공신(佐翼功臣) 3등
1455년 9월 20일승정원 좌부승지(정삼품당상)
1455년 11월 3일경연청 참찬관(정삼품당상) 겸임
1456년해관


2. 3. 정치 활동

성삼문은 1438년 식년시(式年試, 3년마다 치러지는 정기 과거 시험)에 합격하여 세종대왕의 총애를 받아 집현전에 등용되었다. 1442년부터 1446년까지 집현전 학사들과 함께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하여 한글이 세상에 나오는데 기여하였다. 1447년에는 최고 등급의 문과(文科) 시험에 합격하였다.

세종 사후 문종을 섬겼으나, 문종은 젊은 나이에 승하하였다. 문종의 뒤를 이은 어린 단종의 숙부인 수양대군(세조)이 1455년 왕위에 올랐다. 성삼문은 아버지 성승과 동지 박팽년 등과 함께 단종 복위 운동을 도모하였으나, 세조 살해 계획이 발각되어 체포 후 처형되었다.

성삼문은 세조를 정통 왕으로 인정하지 않고 충절을 지킨 사육신 중 한 명으로, 후대에 충신으로 추앙받았다.

성삼문의 주요 관직
연도관직
1438년생원, 문과 급제
1445년성균관 주부 (종6품), 집현전 수찬 (정6품)
1450년집현전 직전 (정4품)
1451년경연청 검토관 (정6품) 겸임
1453년
1454년
1455년


2. 3. 1. 계유정난 전후

1453년(단종 1) 수양대군(세조)이 계유정난을 일으켜 황보인·김종서를 사살하고 집현전 여러 신하들을 정난공신(靖難功臣)으로 책록했다.[1] 수양대군은 집현전 학사들을 포섭하기 위해 정인지, 신숙주, 박팽년, 김문기집현전 학사 36명과 함께 성삼문을 집현전 관원으로서 직숙(直宿)한 공이 있다고 하여 공신 칭호를 주었다.[1] 모두들 순번으로 축하연을 베풀었으나, 성삼문, 김문기 등은 이를 수치로 여기고 참여하지 않았다.[1]

1453년 사간원 좌사간, 1454년 집현전 부제학, 예조 참의를 거쳐 1455년 예방승지가 되었다.[2] 1455년 여름에는 동부승지가 되었다.[2]

1455년, 수양대군은 조카인 단종을 강제로 폐위시키고 세조로 즉위하였다.[3] 성삼문은 아버지 성승의 비밀 명령에 따라 박팽년, 박중림 등과 함께 새 왕을 암살하고 단종을 복위시키려는 계획을 세웠으나 발각되어 처형되었다.[3] 처형 전, 성삼문은 세조를 난신(亂臣)이라고 규탄하였다.[3] 세조를 정통 왕으로 인정하지 않고 충절을 지킨 사육신(死六臣)과 생육신(生六臣)은 후대에 충신으로 추앙받았다.[3]

성삼문의 주요 관직 (계유정난 전후)
연도관직
1453년계유정난 공신 3등 책록, 사간원 우사간 (종3품), 집현전 직제학 겸임
1453년사간원 좌사간 (종3품), 집현전 직제학 겸임
1454년집현전 부제학 (정3품 당상)
1454년예조 참의 (정3품 당상)
1455년승정원 동부승지 (정3품 당상)
1455년승정원 우부승지 (정3품 당상)
1455년좌익공신(佐翼功臣) 3등 책록
1455년승정원 좌부승지 (정3품 당상)


2. 3. 2. 단종의 양위 직후

1455년 수양대군이 어린 조카인 단종에게 양위를 받아 즉위하자, 성삼문은 이를 찬탈로 규정했다. 수양대군이 왕위에 오르자 성삼문 등은 예방승지로서 국새(國璽)를 안고 통곡하였다. 성삼문 등은 "국새는 옮겨졌지만 주상(主上)이 아직 계시고 우리가 있으니 복위를 도모하다가 실패하면 그때 죽어도 늦지 않다"며 단종복위운동을 결심했다. 이후 성삼문은 받은 녹봉을 월별로 표시하여 취하지 않고 집 근처의 곡간에 별도로 쌓아두고 손도 대지 않았다.

2. 3. 3. 세조와의 갈등

수양대군의 집권 과정에서 성삼문은 특별한 배려를 받아 집현전 학사들과 함께 등용되어 자문 역할을 맡았지만, 수양대군의 왕권 강화 정책에는 부정적인 입장이었다.[1] 그는 단종 복위를 주장했고, 집현전 학사들과 조정의 일부 신하들이 그의 주장에 동조했다.[1]

성삼문과 집현전 학사들이 단종 복위 운동에 나선 것은 단종에 대한 충절이라는 유교적 명분 외에도, 세조의 독단에 반대하고 관료 지배 체제를 이상으로 여겼기 때문이었다.[1] 특히 세조가 즉위 직후 육조직계제를 실시하여 왕의 권한을 강화하자 집현전 출신 유신들은 크게 반발하였다.[1]

1455년, 수양대군(세종의 아들)은 조카인 단종을 강제로 폐위시키고 세조로 즉위하였다.[4] 성삼문은 아버지 성승의 비밀 명령에 따라 박팽년, 박중림 등과 함께 세조를 암살하고 단종을 복위시키려는 계획을 세웠으나 발각되어 처형되었다.[4] 성삼문은 처형 전, 세조를 난신(亂臣)이라고 규탄하였다.[4]

2. 4. 거사와 최후

1455년, 수양대군(세조)이 조카 단종을 강제로 폐위시키고 왕위에 오르자, 성삼문은 아버지 성승과 함께 박팽년, 박중림 등과 단종 복위 계획을 세웠으나, 음모가 발각되어 처형되었다. 성삼문은 처형 전 세조를 난신(亂臣)이라 규탄하였으며, 후대에 사육신 중 한 명으로 충절을 인정받았다.

투옥 중과 처형 전에 지은 여러 편의 시가 전해진다. 다음은 사형 전 시이다.



둥둥 북소리가 내 목숨을 재촉하고,

고개를 돌리니 해는 서산으로 기울어지려 한다.

저승길에는 주막 하나 없다는데,

오늘밤 나는 누구 집에서 잠을 잘까?



감옥에서 지은 또 다른 시조 형식의 시는 다음과 같다.[1]

구한글번역
이 몸이 주거 가서 무어시 될고 하니,내가 죽고 나면 무엇이 될까?
봉래산 제일봉에 낙락장송 되야 이셔,봉래산 꼭대기에 우뚝 솟은 긴 소나무가 되어,
백설이 만건곤할 제 독야청청 하리라.온 세상이 하얀 눈으로 덮일 때에도 홀로 푸르르리라.



다음은 각 줄에 7음절을 사용한 또 다른 시이다.[2]

한자음독현대 한국어번역
食人之食衣人衣식인지식의인의임금님의 밥과 옷을 입고 먹으며주상의 밥과 옷을 입고 먹으며
素志平生莫有違소지평생막유위한평생 마음 변할 줄이 있으랴평생 변치 않을 마음이었는데
一死固知忠義在일사고지충의재이 죽음은 충절과 의로움을 위함이기에이 죽음이 충성과 의로움을 위한 것이기에
顯陵松栢夢依依현릉송백몽의의현릉의 푸른 소나무와 잣나무 꿈속에서도 그리워라현릉의 푸른 소나무와 잣나무, 꿈속에서도 그리워라


2. 4. 1. 단종 복위 운동

단종 복위 운동은 집현전 출신 관료들과 그 주변 무인들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이들은 세조를 제거하고 단종을 복위시키기 위한 구체적인 계획을 세웠다. 성삼문은 아버지 성승, 박중림, 박팽년, 김문기 등과 함께 이 계획에 참여했다.[1]

1456년 6월, 명나라 사신이 한성부에 도착하여 세조단종과 함께 창덕궁에서 연회를 열기로 한 정보를 입수하고, 이 기회를 틈타 세조와 그 측근을 처치하려 했다. 그러나 이 정보는 한명회에게 누설되었다.[1]

거사 당일, 한명회신숙주의 권고로 운검의 입장이 폐지되자 성삼문은 거사를 중지했다. 그러나 김질이 정창손의 권고와 회유로 세조에게 밀고하여 성삼문은 다른 모의자들과 함께 의금부에 체포, 투옥되었다.[1]

2. 4. 2. 단종 복위 실패와 투옥

1455년, 수양대군(세종의 아들)이 조카인 단종을 강제로 폐위시키고 세조로 즉위하였다. 성삼문은 아버지 성승과 함께 박팽년, 박중림 등과 단종 복위 계획을 세웠으나, 음모가 발각되어 모두 체포되었다.[1] 성삼문과 그의 아버지를 포함한 다른 음모자들은 처형되었으며, 처형 전 성삼문은 세조를 난신(亂臣)이라고 규탄하였다.[1]

당시 성삼문을 비롯한 이들은 명나라 사신의 송별 연회에서 세조를 죽이고 한명회, 정인지, 권남 등을 제거하려 했다. 그러나 연회 당일 세조가 자리가 좁다는 이유로 운검(雲劍)을 중단시켰다. 운검은 임금 앞에 칼을 들고 서는 사람으로, 성삼문의 아버지 성승이 운검으로 내정되어 있었다. 계획이 변경되자, 함께 모의하던 김질이 밀고하여 체포되었다.[1]

이후 성삼문은 아버지 성승, 박팽년 등과 함께 단종 복위를 꾀하다가 세조의 직접 심문과 고문을 받고, 박팽년, 이개, 하위지, 유성원, 김문기와 함께 군기시(軍器寺, 지금의 태평로 근처)에서 처형되었다. 이들을 사육신이라 한다.[1]

2. 4. 3. 형문과 최후

6월 2일 체포된 다음 날 달군 쇠로 다리의 살을 뚫고 팔이 잘리는 고문을 당하면서도 세조의 불의를 나무라고 신숙주를 배신자, 반역자라며 꾸짖는 등 고집을 꺾지 않는 기개를 보였다. 6월 8일 성승, 이개, 하위지, 박팽년, 박중림, 김문기, 박쟁 등과 함께 군기감 뒤에서 거열형을 당했다.[6][7] 그는 처형 직전 마지막 가는 길에 술 한잔을 마셨다고 한다.

2. 5. 사후

김시습 등이 거열형에 처해진 성삼문의 시신과 그의 일가족의 시신 일부를 수습하여 노량진에 매장하였다. 이 묘는 후에 누군가 비석을 세워 성씨지묘라 하였다. 한편 팔도로 보내진 시신 중 한쪽 다리 부분은 충청남도 연산군 은진 양촌리(현 충청남도 논산시 가야곡면 양촌리 산 58)에 안장되었다. 이후 비석이 없던 논산의 묘소는 숙종 때 가서 비석과 신도비가 세워지고 사당이 세워져 제향되었다.

또한 그의 고향인 충청남도 홍성군 홍북면 노은리 그의 부모 묘소 근처에도 성삼문의 유품을 동리 선비들이 묻고 제사를 지내던 가묘가 전한다. 그의 유품을 모신 묘소 근처에는 1668년(현종 9년) 송시열의 문인이자 관찰사로 왔던 민유중이 추모표를 세우고, 뒤이어 숙종 때 우암 송시열이 묘소의 실전을 막기 위해서 친필로 쓴 유허비가 세워졌다.[8]

단종 복위 운동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거사 관련자 70여 명은 각각 죄명에 따라 혹형, 처형, 유배 등을 당했고 그 관련자 500여 명도 처형당했으며 부녀자들은 관비나 기생, 공신의 여종, 첩으로 분배되었다. 그 중 성삼문은 멸문(滅門)의 참화를 당했다. 아버지 성승을 비롯하여 동생 성삼빙(成三聘), 성삼고(成三顧), 성삼성(成三省)과 아들 등 남자는 젖먹이까지도 살해되어 일가족은 몰살당하고 만다.

2. 6. 복권

1691년(숙종 17년) 사육신의 관직이 복구될 때 성삼문도 관작이 복구되었고, 충청남도 홍성군 노은동(魯恩洞)에 있는 그의 옛집은 녹운서원(綠雲書院)이 되었다. 영조 때인 1758년(영조 34) 이조판서에 추증되었고 충문(忠文)의 시호를 받았다. 1791년(정조 15)에는 단종충신어정배식록(端宗忠臣御定配食錄)에 올랐다.[4]

단종의 능인 장릉(莊陵) 충신단(忠臣壇)에 배향되었으며, 노량진 민절서원, 의절사(義節祠), 영월군의 창절서원(彰節書院), 홍성군 노은서원, 논산시의 사당, 의성군의 학산 충렬사(鶴山忠烈祠), 창녕군 물계세덕사(勿溪世德祠), 연산 충곡서원(忠谷書院), 공주시동학사 숙모전(東鶴寺 肅慕殿) 등에 사육신 및 단종 때의 순절신들과 함께 배향되었다.[4]

3. 저서


  • 《성근보집》
  • 《매죽헌집》

4. 가족 관계

관계이름비고
조부성달생(成達生)
조모풍양 조씨(豐壤趙氏)조운개(趙云价)의 딸
고모부조숭문(趙崇文)
아버지성승(成勝)? - 1456년
어머니죽산 박씨(竹山朴氏)박첨의 딸
계모미치(未致)계림군(雞林君) 이흥상(李興商)의 노비가 됨[9]
서모이름 미상
동생성삼빙(成三聘)? - 1456년
제수의정(義貞)판종부시사(判宗簿寺事) 권개(權愷)의 노비가 됨[9]
동생성삼고(成三顧)? - 1456년
제수김사금(金四今)한림(翰林) 김수손(金首孫)과 재혼[10]
동생성삼성(成三省)? - 1456년
제수명수(命守)홍달손(洪達孫)의 노비가 됨[9]
이복 여동생성성금(成性今)신숙주(申叔舟)의 노비가 됨[11]
이복 여동생성옥동(成玉童)박원형(朴元亨)의 노비가 됨[11]
본처신씨
후처김차산(金次山)연안 김잉(仍)의 딸, 박종우의 노속에서 성삼문 제사를 지냄
장남성맹첨(成孟瞻)? - 1456년
자부현비(現非)전균(田畇)의 노비가 됨[9]
차남성맹년(成孟年)? - 1456년
손녀성씨성맹년의 딸, 유자미의 며느리
삼남성맹종(成孟終)? - 1456년
장녀성효옥(成孝玉)사육신 처형 당시 미혼으로, 노비가 됨
차녀성씨(成氏)1439 ~ 1489
사위박림경(朴臨卿)1436 ~ 1485
삼녀성씨(成氏)? ~ ?
사위엄정구(嚴鼎耉)
외손자엄찬
사돈유자미(柳自湄)사육신의 한 사람인 유성원의 친척



성담수, 성담년 등은 성삼문의 6촌 형제간이다. 아내 김차산과 미혼의 장녀 성효옥은 박종우의 노비가 되었다. 석방 시점은 알 수 없으며 김차산(연안 김씨)은 성삼문의 위패를 만들어서 제사지냈다 한다. 김씨 부인이 죽은 후 성삼문의 제사는 차녀의 둘째 아들 박호가 승계했으나 후손이 없고, 임진왜란 때 인왕산에 성삼문과 그 외손 내외의 신주를 묻었는데 1672년 사태난 골짜기에서 신주 3위가 발견되어 송시열 등이 다시 묻지 않고 홍주로 이봉하였다.

성삼문의 아버지 성승이 처형당할 무렵 박림경에게 시집간 성삼문의 차녀와 엄정구에게 시집간 3녀는 연좌되지 않았다. 둘째 아들 맹년의 딸은 유성원의 일족인 서산공 유자미가 비밀리에 피신시켜 길러서 자신의 일곱째 며느리(유집(柳輯) 부인)로 삼았다 한다.

5. 성삼문이 등장한 작품


  • 成三問|성삼문중국어이 등장한 작품은 다음과 같다.

작품명방송사방영년도배우
파천무KBS1980년임혁
설중매MBC1984년~1985년임채무
파천무KBS1990년이문환
한명회KBS1994년백윤식
왕과 비KBS1998년~2000년박진성
사육신KBS2007년박성욱
대왕세종KBS2008년박철호
공주의 남자KBS2011년박철호
뿌리깊은 나무SBS2011년현우
인수대비JTBC2011년~2012년김세민
작품명공연 단체공연년도배우
2005년이광후, 신현종
전하의 봄2012년박상석


6. 성삼문의 부인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성삼문의 처 차산(김씨)은 1456년 9월 7일 딸 효옥과 함께 운성 부원군(雲城府院君) 박종우(朴從愚)의 노비로 끌려갔고[12], 뒤에 석방되었으나 성종 때인 1475년 5월 7일 딸 효옥과 함께 다시 박종우의 노비가 되었다.[13]

이후 차산의 행적은 알려져 있지 않다. 성삼문의 부인 연안 김씨의 묘는 충청남도 홍성군 홍북면 대인리, 성승 장군 묘 앞산에 있다. 숙종송시열, 민유중 등이 성삼문 유허지를 정비할 때 연안 김씨 부인의 묘소도 함께 단장, 정비하였다.

7. 약력

8. 평가

성삼문은 신숙주와 달리 정치적인 것보다는 학문적이며 유교적인 성향이 강한 인물이었다. 그는 정치적 경륜보다는 충군, 절의, 학문을 중요하게 생각했다.[19] 성삼문은 이상을 중요시하고 남는 것은 대의라고 여겼으며, 이러한 생각은 죽음과도 바꿀 수 없을 만큼 굳건했다. 반면 신숙주는 현실과 인간의 업적을 중시하여 단종의 폐위와 죽음을 목숨을 걸 만한 일로 여기지 않았다.[19] 그러나 현실이 중요하다는 이유로 조카의 보험금을 가로채는 행위는 정당화될 수 없다. 성삼문은 죽음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올바른 현실을 추구하다 실패하여 죽음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8. 1. 긍정적 평가

남효온의 사육신전을 통해 그는 충절과 절의의 상징처럼 여겨졌다.[19]

중종 때 조광조 일파가 집권하면서 그를 절의의 상징으로 여기는 시각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숙종 때의 송시열, 김수항 등은 성삼문을 비롯한 사육신을 충절과 절의의 상징으로 추앙하였다. 조선이 멸망한 뒤에도 그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는 계속되었다.

일제강점기 작가 이광수단종애사는 널리 읽히는 소설이었고, 광복 이후 한국의 교과서에 실리기도 했다. 단종애사의 유행은 신숙주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를 확산시키는데 기여했는데, '단종애사를 읽으며 많은 사람들은 눈물을 훌쩍거린 적도 있다. 특히 ‘단종애사’는 어린 시절 깊은 감동과 함께 역사학에 대한 관심을 일깨워 주었다. 단종애사를 읽은 대부분의 독자들은 비분강개할 수밖에 없다. 독자들은 성삼문을 비롯한 사육신의 절의에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반면 수양대군과 그의 추종자였던 신숙주에 분노한다.[19]'는 것이다.

신숙주는 현실이 중요하며 남는 것은 인간이 성취해 놓은 업적이라고 생각했고, 성삼문은 이상이 중요하고 남는 것은 대의라고 생각했다.[19] 성삼문의 이러한 생각은 죽음과도 맞바꿀 수 있을 만큼 꿋꿋한 것이었다. 성삼문은 죽어가면서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으며, 신숙주는 단종의 폐위와 죽음이 목숨을 걸 만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죽지 않고 살아남아 자신의 길을 갔다.[19] 현실이 중요하다고 해서 조카의 보험금을 삼촌이 가로채는 짓을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죽음과 바꾸려고 해서 바꾼 것이 아니라 실패해서 바꾸어진 것일 뿐이다. 올바른 현실을 위해서, 잘못된 현실은 현실로 보지 않았다.

신숙주와 달리 성삼문은 정치적인 것보다는 학문적이며 유교적인 성향을 더 짙게 갖춘 인물이었다. 그에게 정치적 경륜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그의 궁극적인 관심은 충군, 절의, 그리고 학문이었다.[19]

후세에는 성삼문의 일생을 단종도요토미 히데요리, 세조를 도쿠가와 이에야스, 성삼문을 이시다 미쓰나리에 비유하기도 한다. 성삼문과 이시다 미쓰나리의 이름에 같은 글자가 있다는 점도 이러한 비유를 뒷받침한다.

8. 2. 부정적 평가

유응부는 성삼문에게 꾀와 지모가 없다고 비판했다. 국문을 받던 중 유응부는 성삼문을 향해 "너는 글을 읽었지만 꾀가 없으니 짐승과 다를 바 없다!"라고 한탄했고, "더벅머리 겁쟁이 선비 놈들과 거사를 치른 것이 내 일생일대의 실수다!"라고 일갈했다 한다.[15] 유응부의 한탄은 구전되어 남효온의 사육신 일대기인 《육신전》에도 수록되었다.

9. 기타

집현전 학자로 글씨와 문장에 뛰어났으며 세종에게 앞날을 축복받았다. 정음청에서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하였다. 단종 복위에 가담한 하위지최만리, 정창손 등과 함께 훈민정음 창제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후손으로는 장녀 효옥, 박림경에게 시집간 차녀와 유성원의 일족인 은사 유자미의 며느리가 된 손녀딸 등이 유일하게 살아남았다. 맏딸 효옥은 박종우의 노비가 되었고, 둘째 딸은 무안 박씨 박림경에게 시집가서 성삼문의 제사는 둘째 외손자 박호가 봉사하였다. 둘째아들 성맹년의 어린 딸은 유자미가 구출하여 몰래 먼 곳에서 믿을만한 사람을 시켜 길렀으며 뒤에 자신의 며느리로 삼았다.

생육신성담수, 성담년은 그의 6촌 동생들로 아버지 성승의 사촌 형제인 성희의 아들들이었다.[16] 성종 때 6촌 동생 성담년이 관직에 다시 진출하게 된다.

성삼문은 백일홍을 사랑하였다.[17]

신숙주는 현실이 중요하며 남는 것은 인간이 성취해 놓은 업적이라고 생각했고, 성삼문은 이상이 중요한 것이고 남는 것은 대의라고 생각했다.[19] 그는 죽어가면서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으며, 신숙주는 단종의 폐위와 죽음이 목숨을 걸 만한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죽지 않고 살아남아 자신의 갈 길을 갔다.[19]

신숙주와 달리 성삼문은 정치적인 것보다는 학문적이며 유교적인 성향을 더 짙게 갖추고 있는 인물이었다. 그에게 정치적 경륜은 그리 중요할 것이 없었다. 그의 궁극적 관심은 충군과 절의, 그리고 학문이었다.[19]

9. 1. 성삼문의 시



봉래산 제일봉에 낙락장송 되었다가,

백설이 온 세상에 가득할 때 홀로 푸르리라.[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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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양산 바라보며 이제를 한하노라

굶주려 죽을지언정 고사리를 꺾어 먹어서야 되겠는가

비록 풀이라고 한들 그것이 누구 땅에서 났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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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소리가 사람의 목숨을 재촉하는데

머리 들어 뒤돌아보니 해가 서산을 넘네

황천길엔 주막도 없을 터인데

오늘밤은 뉘 집에서 쉬어 갈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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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이 주신 녹을 먹고 임금이 주신 옷을 입었으니

본래의 지조 평생 동안 어기고 싶지 않다오.

한 목숨 바치는데 충의가 있음을 알겠거니

현릉의 소나무와 잣나무가 꿈속에 아련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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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년에 말고삐 잡고 감히 그르다 했으니

대의는 당당하여 해와 달처럼 빛났건마는

풀 나무도 주나라의 비이슬에 자랐거니

부끄럽다 그대 수양산 고사리는 왜 먹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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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참조

[1] 웹사이트 Analysis on a sijo by Seong Sammun http://sams.ghetto.c[...]
[2] 웹사이트 Of Sayuksin, "Seong Sam-mun" http://www.chunghyo.[...] 2006-06-01
[3] 문서 성삼문의 친족 관계
[4] 문서 성한의 급제
[5] 서적 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들녘 1998
[6] 웹사이트 조선왕조실록 검색 결과 (성달생) http://sillok.histor[...]
[7] 웹사이트 조선왕조실록 검색 결과 (성삼문) http://sillok.histor[...]
[8] 문서 성삼문 비문 제작자
[9] 간행물 의금부의 난신 연좌된 부녀 분배 세조실록 1456-09-07
[10] 간행물 옥리의 창원 부사 권유순 체포 시도와 그의 아내 김씨 자결 세조실록 1463-06-23
[11] 간행물 조석문, 강맹경, 박종우 등에게 계집종 하사 세조실록 1457-08-21
[12] 간행물 의금부의 난신 연좌된 부녀 분배 세조실록 1456-09-07
[13] 간행물 박종우 석방과 성삼문의 아내와 딸 하사, 조경명 양이 성종실록 1475-05-07
[14] 간행물 훈민정음 어제와 정인지 서문에서의 집현전 수찬 직함 언급 세종실록 1446-09-29
[15] 뉴스 이한우의 事理分別 〈10〉 孔子, “禮란 일을 다스리는 것이다” http://monthly.chosu[...] 월간조선 2018-09
[16] 문서 성희의 유배 및 사후, 성담수와 성담년의 벼슬 거부
[17] 뉴스 성삼문이 사랑한 백일홍…마음을 다하여 산 그의 삶을 닮았네 http://www.hani.co.k[...] 한겨례 2013-10-27
[18] 문서 해당화를 읊다
[19] 뉴스 신복룡교수의 한국사 새로보기6: 성삼문과 신숙주 http://news.donga.co[...] 동아일보 2013-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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