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석훈 (19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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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석훈은 평안북도 정주 출신의 언론인이자 소설가, 극작가로, 일제강점기에는 《경성일보》 기자, 방송 아나운서, 월간지 편집자로 활동했다. 193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희곡으로 등단하여 문학 활동을 시작했으며, 극예술연구회 참여, 문예지 창간 등 연극 운동에도 참여했다. 일제강점기 말 친일 작품을 창작하고 친일 단체에서 활동한 행적으로 인해 친일 문학인 명단에 포함되었으며, 해방 후에는 해군 중위로 복무하다가 한국 전쟁 중 납북되어 실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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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훈 (1908년)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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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출생일 | 1908년 1월 27일 |
출생지 | 대한민국 평안북도 정주군 정주읍 (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평안북도 정주시) |
사망일 | ? (1950년 7월 9일에 실종됨) |
활동 기간 | 1929년 ~ 1950년 |
국적 | 대한민국 |
직업 | 작가, 언론인, 번역가, 예비역 대한민국 해군 소령 |
장르 | 소설, 희곡 |
2. 생애
이석훈은 평안북도 정주군 정주읍 출신으로, 평양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와세다 대학 노문학부에서 수학했다.[1] 1920년대부터 언론인으로 활동하며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경성일보》 기자, 경성방송국, 평양방송국 등에서 근무했다.[2] 193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희곡 〈궐녀는 왜 자살했는가〉로 등단하여 작가로도 활동했다.
1933년 극예술연구회에 참가하고 극단 문예좌를 조직하는 등 연극 운동에도 참여했으며, 1936년에는 문예지 《낙랑문고》를 창간해 발행했다. 일제 강점기 말기에는 친일 작품을 창작하고 친일 단체에서 활동했다.[3] 1943년 애국백인일수전(愛國百人一首展)을 주최하고 매출금을 조선군과 일본 제국 해군에 헌금하기도 했다.
1944년 만주국으로 건너가 《만선일보》에서 활동하다가,[4] 해방 후 귀국하여 1948년 대한민국 해군에 입대하여 해군본부 초대 정훈감 서리를 지냈다. 1950년 제대 직후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조선인민군에게 체포되어 서울형무소에 수감된 후 실종되었다.
2. 1. 초기 생애와 교육
평안북도 정주군 정주읍 출신이다. 평양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에 유학하여 와세다 대학 노문학부에서 수학했다.[1]2. 2. 언론 및 문학 활동 (일제 강점기)
1920년대부터 언론인으로 활동했다.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경성일보 기자, 경성방송국과 평양방송국 등에서 근무하며 한국 방송 초창기 아나운서 중 한 명으로 활동했다.[2] 잡지사 개벽사가 발행하던 월간지 《제1선》 편집자로도 일했다.193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희곡 〈궐녀는 왜 자살했는가〉로 등단했고, 〈황혼의 노래〉(1933), 〈이주민열차〉(1933) 등을 발표했다. 작품은 순수문학과 대중문학의 타협점을 찾는 경향을 보이며, 계몽적인 내용이나 남녀 간의 애정 등 다양한 소재를 다루었다.
1933년 극예술연구회에 참가하고 극단 문예좌를 조직하는 등 연극 운동에 참여했다. 1936년 문예지 《낙랑문고》를 창간해 발행했다. 1930년대 초반 안회남의 소개로 소설가 김유정을 만나 문단에 데뷔시킨 후 각별히 가깝게 지냈으며, 이 인연은 〈유정의 편모편편〉에 기록되어 있다.
2. 3. 친일 행적 (일제 강점기 말기)
일제 강점기 말기 이석훈은 친일 작품을 창작하고 〈성지참배통신〉(1942)과 같은 친일 기행문 등을 남겼다. 소설 3편, 소설집 1권을 포함하여 총 친일 작품 수는 19편으로 적지 않은 편이다.[3] 조선총독부 학무국의 지원을 받은 조선문인협회에서 간사, 상무간사, 상무로 활동했고, 국민총력조선연맹의 후원을 통해 결성된 시국강연부대에서 활동했다. 그 외에 부여신궁 어조영지 근로봉사대, 용산호국신사어조영지 근로봉사, 일본 현지에 위치한 신사·신궁 참배를 위한 성지순배사 활동에 참여했다.1943년에는 애국백인일수전(愛國百人一首展)을 주최하고 매출금을 조선군과 일본 제국 해군에 헌금했고, 같은 해부터 1944년까지 조선문인보국회 소설희곡부회 간사장을 역임했다. 이러한 경력으로 2002년 친일 문학인 42인 명단,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포함되었다. 해방 후인 1947년에 〈고백〉이라는 글에서 친일을 참회하는 글을 남겼다.[1]
2. 4. 해방 이후의 삶과 납북
1944년 만주국으로 건너가 《만선일보》에 합류했다. 당시 만선일보에는 염상섭, 안수길, 박팔양 등 유명 작가들이 근무[4] 하면서 일명 '만주문단'을 형성하고 있었다.이듬해 일본이 태평양 전쟁에서 패전하면서 귀국하여 러시아 문학 작품 번역으로 생계를 꾸려가던 중 1948년 대한민국 해군에 중위로 입대하였고, 해군본부 초대 정훈감 서리를 지냈다. 1950년 제대 직후 한국 전쟁이 발발했는데, 그해 7월 9일 서울을 점령하고 있던 조선인민군에게 체포되어 서울형무소에 수감되어 실종된 것을 마지막으로 행적을 알 수 없다.
3. 작품 목록
이석훈은 소설, 소설집, 희곡, 산문, 기행문 등 다양한 분야에서 작품을 남겼다.
분야 | 제목 | 발표 연도/출판 연도 | 발표 지면/출판사 |
---|---|---|---|
소설 | 아버지를 찾아서 | 1929년 | 조선일보 |
소설 | 광인기 | 1934년 | |
소설 | 이주민 열차, 방랑아, 애증, 범인 | 1935년 | |
소설 | 결혼 | 1936년 | |
소설 | 카이제르와 이발사 | 1939년 | |
소설 | 유랑 | 1940년 | |
소설 | 고요한 폭풍 | 1941년 ~ 1942년 | 국민문학 |
소설 | 동(東)으로의 여행 | 1942년 | 녹기 |
소설 | 하늘의 영웅 | 1942년 | 야담 |
소설 | 북(北)으로의 여행, 돼지몰이놀이 | 1943년 | 국민문학 |
소설 | 최후의 가보 | 1943년 | 신시대 |
소설 | 어머니의 고백 | 1943년 | 조광 |
소설 | 새 시대의 모성 | 1944년 | 방송지우 |
소설집 | 황혼의 노래 | 1936년 | |
소설집 | 요모기섬 이야기 | 1945년 | 보문사 |
희곡 | 궐녀는 왜 자살했는가 | 1930년 | 동아일보 |
희곡 | 사비루의 달밤 | 1941년 | 문장 |
산문 | 〈반도의 신문화라는 것〉 | 1941년 11월 | 녹기 |
산문 | 〈문화인·지식인에게 격(激)함〉 | 1942년 2월 | 반도지광 |
산문 | 〈전진하자 일장기와 함께〉 | 1942년 3월 | 동양지광 |
산문 | 〈국민문학의 제 문제〉 | 1942년 4월 | 녹기 |
산문 | 〈새로운 것에 대하여〉 | 1942년 6월 | 동양지광 |
산문 | 〈징병·국어·일본정신〉 | 1942년 7월 | 조광 |
산문 | 〈사상전과 선전전〉 | 1942년 9월 19일 | 경성일보 |
산문 | 〈국어문제회담〉 | 1943년 1월 | 국민문학 |
산문 | 〈행군〉 | 1943년 7월 | 국민문학 |
산문 | 〈보도연습에 참가하여〉 | 1943년 7월 | 조광 |
산문 | 〈전시하의 만주〉 | 1944년 11월 | 조광 |
기행문 | 〈함흥일기〉, 〈부여기행〉 | 1941년 2월 | 신시대 |
기행문 | 〈새로운 결의 - 성지 참배에서 돌아와〉 | 1941년 12월 9일 ~ 12월 12일 | 경성일보 |
기행문 | 〈성지참배통신〉 | 1942년 1월 | 조광 |
기행문 | 〈성지순배록〉 | 1942년 3월 | 국민문학 |
3. 1. 소설
제목 | 발표 연도 | 발표 지면 |
---|---|---|
아버지를 찾아서 | 1929년 | 조선일보 |
광인기 | 1934년 | |
이주민 열차 | 1935년 | |
방랑아 | 1935년 | |
애증 | 1935년 | |
범인 | 1935년 | |
결혼 | 1936년 | |
카이제르와 이발사 | 1939년 | |
유랑 | 1940년 | |
고요한 폭풍 | 1941년 ~ 1942년 | 국민문학 |
동(東)으로의 여행 | 1942년 | 녹기 |
하늘의 영웅 | 1942년 | 야담 |
북(北)으로의 여행 | 1943년 | 국민문학 |
돼지몰이놀이 | 1943년 | 국민문학 |
최후의 가보 | 1943년 | 신시대 |
어머니의 고백 | 1943년 | 조광 |
새 시대의 모성 | 1944년 | 방송지우 |
3. 2. 소설집
출판 연도 | 소설집 제목 | 출판사 |
---|---|---|
1936년 | 황혼의 노래 | |
1945년 | 요모기섬 이야기 | 보문사 |
3. 3. 희곡
3. 4. 산문
제목 | 발표 지면 | 발표 연도 |
---|---|---|
〈반도의 신문화라는 것〉 | 《녹기》 | 1941년 11월 |
〈문화인·지식인에게 격(激)함〉 | 《반도지광》 | 1942년 2월 |
〈전진하자 일장기와 함께〉 | 《동양지광》 | 1942년 3월 |
〈국민문학의 제 문제〉 | 《녹기》 | 1942년 4월 |
〈새로운 것에 대하여〉 | 《동양지광》 | 1942년 6월 |
〈징병·국어·일본정신〉 | 《조광》 | 1942년 7월 |
〈사상전과 선전전〉 | 《경성일보》 | 1942년 9월 19일 |
〈국어문제회담〉 | 《국민문학》 | 1943년 1월 |
〈행군〉 | 《국민문학》 | 1943년 7월 |
〈보도연습에 참가하여〉 | 《조광》 | 1943년 7월 |
〈전시하의 만주〉 | 《조광》 | 1944년 11월 |
3. 5. 기행문
4. 평가 및 논란
(빈 문서)
참조
[1]
뉴스
소양강 모던뽀이 이석훈 그 사라진 삶과 문학
https://web.archive.[...]
문화통신
2006-01-23
[2]
웹사이트
아나운서 - ‘붕’이냐 ‘팽’이냐, 팽대도 맞습니다.
http://museum.kbs.co[...]
[3]
저널
친일문학 작품목록
https://web.archive.[...]
2007-09-21
[4]
웹인용
안수길(安壽吉)
https://web.archive.[...]
예술로
2008-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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