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길
1. 개요
이선길은 1898년 경성부에서 태어나 1971년 사망한 대한민국의 유도 선수이다. 1928년 일본 고도관에 입관하여 유도를 시작, 1930~40년대 조선과 일본 유도계에서 활약하며 여러 차례 우승을 차지했다. 해방 후에는 대구 무덕관에서 유도 선수들을 길렀으며, 1965년 대한유도회로부터 9단을 수여받았다. 그는 유도 선수 활동 외에도 아버지의 뜻에 따라 농업에 종사했으며, 이승만의 제안을 거절할 정도로 청렴한 면모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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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 | 이선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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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의 유도 선수 -
유약한
유약한은 코스프레, 육상, 경마 등 다양한 분야에서 수상 및 우승 기록을 보유한 뛰어난 개인 또는 단체를 지칭한다. -
대한민국의 유도 선수 -
한지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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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유도 선수 -
김대원 (격투기 선수)
1999년 종합격투기에 데뷔한 대한민국의 격투기 선수 김대원은 일본 프라이드에서 활동하며 2007년 HERO'S KOREA에서 마르셀로 가르시아를 TKO로 꺾었고, 유도를 기반으로 팀 윤 소속으로 활동했다. -
강원생명과학고등학교 동문 -
장기영 (1903년)
장기영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으로, 제헌 국회의원, 외무부 차관보, 체신부 장관, 서울특별시장을 역임했으며, 이승만 측근으로 활동하다 결별 후 독립운동에 참여했고,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
강원생명과학고등학교 동문 -
이건영 (1926년)
이건영은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육군 제3군사령관을 지낸 군인이자, 한국마사회 회장을 역임하며 경마의 국제화에 기여하고 제14대 국회의원을 지낸 정치인이다.
2. 생애
1898년 경성부에서 이규완과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화가 이영일이 그의 동생이다. 춘천공립보통학교와 춘천농림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 유학을 다녀왔다.
이후 유도에 뜻을 두고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1928년 고도관에 입관하여 본격적으로 유도를 수련하였다. 1930년대와 1940년대에 걸쳐 조선과 일본의 유도계에서 뛰어난 실력을 발휘하며 여러 차례 우승을 차지하는 등 당대 최고의 유도 선수 중 한 명으로 인정받았다. 특히 1935년에는 조선인으로서는 드물게 유도 5단으로 승단하기도 했다. 그는 경찰계에 투신하라는 권유를 거절하고 평생 유도인의 길을 걸었다.
해방 후에는 대구 무덕관 등에서 후진 양성에 힘썼으며, 유도 선수 활동 외에는 아버지 이규완의 뜻에 따라 춘천에서 농업에 종사하기도 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과거 아버지 이규완이 이승만 자신과 서재필의 미국 생활비를 송금하고 상하이 임시정부에 자금을 지원했던 것에 대한 보답으로 신신백화점 부지 불하를 제안했으나, 그는 분에 넘치는 것이라며 사양하였다.
평생 유도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1969년 11월 28일 대한유도회로부터 유도 9단증을 수여받았다. 만년에는 강원도 춘천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1971년 1월 2일 서울특별시 중구 신당동 자택에서 사망했다.
2.1. 유년 시절
1898년 (고종 35년) 경성부에서 아버지 이규완과 일본인 어머니 이매자 사이에서 태어났다. 화가 이영일은 그의 동생이다. 춘천공립보통학교를 거쳐 1915년 춘천농림고등학교(소양고등학교의 전신)에 진학했으며, 1919년 춘천농림고등학교를 졸업했다.
2.2. 일본 유학
일본 유학 경험이 있던 그는 유도에 뜻을 품고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1928년 고도관講道館일본어에 입관하여 본격적으로 유도를 수련하였다. 이후 1930년대와 1940년대에 걸쳐 조선과 일본의 유도계에서 뛰어난 실력을 발휘하며 여러 차례 우승을 차지했다. 당시 일본 심판들은 초반에는 자국 선수를 편애하는 경향을 보였으나, 이선길의 압도적인 실력과 왕성한 기세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어 결국 그의 승리를 선언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주변에서 경찰계에 투신하라는 권유도 받았지만 이를 거절하고 유도 선수로서의 길을 걸었다.
1932년에는 제3회 전일본유도선수권대회 선사권(選士權) 대회 일반 장년부에서 우승하였고, 이후 춘천경찰서 실업팀 소속으로 활동하며 전일본 유도대회에 꾸준히 출전하였다. 1935년 11월 27일에는 고도관 조선지부講道舘朝鮮支部일본어에서 열린 승단 심사에서 합격하여 유도 5단이 되었다. 당시 조선인으로서는 드물게 5단에 오른 인물 중 한 명이었으며, 춘천경찰서 소속이었다.
그의 주요 전일본선수권대회 성적은 다음과 같다.
2.3. 유도 선수 활동
일본 유학 후 유도에 뜻을 두고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1928년 일본 고도관(講道館)에 입관하였다. 이후 1930년대부터 1940년대까지 조선과 일본 유도계에서 활약하며 여러 차례 우승을 차지했다. 당시 일본 심판들은 처음에는 일본 선수를 편드는 경향이 있었으나, 이선길의 실력이 워낙 뛰어나 그의 승리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고 전해진다. 그는 주변에서 경찰이 되라는 권유도 있었지만 이를 거절하고 유도 선수로 활동하는 길을 택했다.
1930년대에 들어서도 그의 활약은 계속되었다. 1932년 제3회 전일본유도선수권대회 선사권(選士權) 대회 일반 장년부에서 우승하였고, 이후 춘천경찰서 실업팀에 소속되어 활동하며 전일본 유도대회에 꾸준히 출전하였다. 1935년 11월 27일에는 강도관 조선지부(講道舘朝鮮支部)에서 열린 심사에서 유도 5단으로 승단했다. 당시 그는 춘천경찰서 소속으로, 5단을 획득한 몇 안 되는 조선인 유도인 중 한 명이었다.
이후 1936년, 1937년, 1938년 3년 연속으로 전일본선수권 유도대회 일반장년부에서 우승하였다. 또한, 1933년과 1935년에는 같은 대회에서 준우승을 차지하는 등 일본 유도계를 무대로 뛰어난 성적을 거두었다. 훗날 그의 제자 중 한 명인 유도 선수 박정준은 "제8회 전일본선수권대회에서 그의 기세는 그야말로 무인지경을 가듯 세 번의 승부 시간을 합해 10분이 넘지 않았다"고 회상했으며, "일본 선수들은 그의 괴력을 무서워하여 손과 발을 댈 수 없는 형편이었다"고 평가했다.
2.4. 해방 이후
해방 후에는 대구 무덕관에서 유도 선수들을 길러냈다. 대구 무덕관은 당시 유도와 검도 도장을 겸하였다. 그는 평생 유도 선수 활동과 후진 양성에 힘쓰며 유도인으로 살았다.
그는 아버지 이규완의 뜻에 따라 춘천의 황무지를 개간하여 농업에 종사하기도 했다. 한때 춘천에서 스케이트 선수들의 연습 장소로 쓰였던 연못이 그의 땅 안에 있었는데, 그는 연습하는 학생들에게 어떠한 대가도 받지 않고 장소를 내주었다고 한다.
1953년, 이승만 대통령은 과거 이선길의 아버지 이규완이 자신과 서재필의 미국 생활비를 지원하고 상하이 임시정부에 자금을 보냈던 것에 대한 보답으로 신신백화점 부지와 주변 토지를 무상으로 주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이선길은 자신에게 과분한 것이라며 이를 사양하였다.
평생 유도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1969년 11월 28일 대한유도회로부터 유도 9단증을 수여받았다. 그의 문하생이었던 유도 선수 박정준은 생전 이선길의 압도적인 실력과 기세를 회고하기도 했다.
만년에는 강원도 춘천에서 여생을 보냈으며, 1971년 1월 2일 서울특별시 중구 신당동 자택에서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