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헌 (153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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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성헌(1534년)은 1534년 경기도 광주에서 태어난 조선 시대 문신이다. 1560년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주서 등을 지냈으나, 아버지 이감이 이량의 당여로 몰려 파직되면서 함께 파직과 복관을 반복했다. 선조 때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부장으로 참전하여 공을 세웠으며, 1601년 사망했다. 사후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묘소는 현재 강원도 원주시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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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이성헌은 1534년 2월 22일 아버지 이감(李戡)과 어머니 풍천 임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1560년(명종 15년)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주서 등을 지냈으나,[1] 1563년(명종 18) 아버지 이감이 이량의 당여로 몰려 파직, 유배될 때 함께 파직되었다. 이후 복관과 파직을 반복했다.
1555년 이전에 광원군 이구수의 딸 전주 이씨 이봉령(李奉令)과 혼인했다. 부인 전주 이씨 이봉령은 세종대왕의 서자 밀성군의 4대손이다.[1]
1570년(선조 3) 왕명으로 서용(敍用)되자, 양사의 반대가 있었으나 왕이 듣지 않았다.[7] 이후 복직하여 성균관전적, 승문원교리를 거쳐 판관에 이르렀다. 1574년(선조 7) 6월 7일 다시 파직되고, 문외출송(門外黜送)당했다.[9] 1576년(선조 9) 한재(旱災)로 소방할 때 풀려났으며, 양사가 여러 번 반대했으나 선조가 듣지 않았다.
1591년(선조 24) 진위장군(振威將軍)으로 호분위사정 겸 영서도찰방(虎賁衛司正兼迎曙道察訪)에 임명되었다.[13]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 때 부장(副將)으로 참전하여 경기도 광주에서 왜군과 교전하였고, 수안으로 내려온 선조비 의인왕후를 수행하였다. 의인왕후를 수행하고 왜군과 싸워 이긴 공로로 1599년(선조 32년) 7월 24일 1계급 승진하고[14], 아마 1필을 선물로 받았다.
이정암이 쓴 한고관외사(寒臯觀外史)에 의하면, 1599년(선조 32) 4월 11일 당시 이정암이 형의 상을 당했을 때 이성헌이 아들 이명남을 데리고 이정암을 방문했다고 한다.[15] 이후의 행적은 알려져 있지 않다. 1601년(선조 34년) 5월 8일에 사망하였다.
2. 1. 가계와 출생
이성헌은 1534년 2월 22일 경기도 광주군 낙생면 대장리(현 성남시 분당구 대장동)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참판, 대사헌, 대호군을 지낸 이감(李戡)이고, 어머니는 정헌공 임권(任權)의 딸 풍천 임씨이다. 증조부 이지방(李之芳)과 조부 이광식(李光軾)은 무과 출신 병마절도사였으나, 아버지 이감이 1543년 문과에 급제하며 문반 가문으로 성장했다.어머니 풍천 임씨는 조광조와 가깝게 지냈던 임권(任權)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공조판서와 지중추부사를 지낸 소간공 임유겸(任由謙)이고, 백부는 관찰사를 지낸 임추(任樞)이다. 친정어머니는 영산신씨(靈山辛氏)로, 진사 신제담(辛悌聃)의 딸이며 수문전대제학 신인손(辛引孫)의 손녀이다. 어머니 풍천 임씨는 1556년에 사망하였다.
계모 예천 윤씨(醴泉尹氏)에게서 이복동생 이희헌(李希憲), 이유헌(李有憲), 이의헌(李宜憲) 등이 태어났다. 이희헌은 선조~인조 대의 의원이었고, 이유헌 역시 의과에 급제한 의관이었다.
2. 2. 혼인
1555년 이전에 광원군 이구수의 딸 전주 이씨 이봉령(李奉令)과 혼인했는데, 부인 전주 이씨 이봉령은 세종대왕의 서자 밀성군의 4대손이다.[1] 또한 전실인지 후실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이한(李澣)의 딸 전주 이씨와도 혼인했다.2. 3. 관직 생활과 파직
1560년(명종 15년) 별시문과에 병과 10위로 급제하여 승문원 주서 등을 지냈다.[1] 1563년(명종 18) 아버지 이감이 이량의 당여로 몰려 파직, 유배될 때 함께 파직되었다. 그해 9월 복관되어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가 되었고[4], 예문관 검열 등을 역임했으나 파직되었다.1564년(명종 19년) 다시 서용되었으나 사헌부와 사간원 양사에서 여러번 논계를 하였고, 승문원 박사(博士)에 임명되었으나 사직했다. 1565년 1월 6일 양사에서 고경명 등을 공격, 문외출송을 청하였다.[5] 같은 날 양사에서 그를 이감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사판(仕版)에서 삭제할 것을 청하였으나 명종이 듣지 않았다.[6] 1월 7일 사판에서 삭제되고 문외출송되었다.
1570년(선조 3) 왕명으로 서용(敍用)되자, 5월 16일부터 양사의 논계를 받았으나 왕이 듣지 않았다.[7] 이후 복직하여 성균관전적, 승문원교리를 거쳐 판관에 이르렀다. 1574년(선조 7) 6월 6일 삼공육경이 이성헌 등을 등용할 것을 의논하였다. 이에 양사는 이들이 권간과 결탁하여 사류들을 모해한 자들이라며 다시 서용해서는 안된다고 반대하였다.[8] 6월 7일 다시 파직되고, 문외출송(門外黜送)당했다.[9]
1574년 6월 8일 홍문관에서 차자를 올려 그와 김여부 등은 음험하고 사류를 모해한 자들이라며 임용을 반대하였고[10], 6월 11일 사간원에서 언급된 인물들의 등용에 반대하여 차자(箚子)를 올렸다.[11] 1576년(선조 9) 한재(旱災)로 소방할 때 풀려났으며, 양사가 여러 번 반대했으나 선조가 듣지 않았다. 이후 관직생활을 계속하였지만 어느 직책에 임명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2. 4. 임진왜란 참전과 사망
1591년(선조 24) 이성헌은 진위장군(振威將軍)으로 호분위사정 겸 영서도찰방(虎賁衛司正兼迎曙道察訪)에 임명되었다.[13] 이는 아들 이명남의 생원시험 입격 기록에 아버지 이름과 직책을 적는 칸을 통해 고증되었다.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 때 부장(副將)으로 참전하여 경기도 광주에서 왜군과 교전하였다. 그해 수안으로 내려온 선조비 의인왕후를 수행하였다. 의인왕후를 수행하고 왜군과 싸워 이긴 공로로 1599년(선조 32년) 7월 24일 1계급 승진하고[14], 아마 1필을 선물로 받았다.
이정암이 쓴 한고관외사(寒臯觀外史) 68권의 "己亥正月初一日哭奠几筵而還舎弟佐郞往墓山" 편에 의하면, 1599년(선조 32) 4월 11일 당시 이정암이 형의 상을 당했을 때 이성헌이 아들 이명남을 데리고 이정암을 방문했는데, 이때 '十日哭辭伯氏與未子早發投宿子安山金珞家珞即吾同年故察訪金得齡子也待余極款金叅議㯋男持服在隣遣子弟吊慰甚至ㅊ李成憲生貟李命男座首金湛來訪'이라고 하여 전 판관(前 判官)이었다고 한다.[15] 그러나 그가 언제 어느 부서의 판관을 지냈는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이후의 행적은 알려져 있지 않다. 1601년(선조 34년) 5월 8일에 경기도 광주군 낙생면 대장리에서 사망하였다.
3. 사후
경기도 광주군 낙생면 대장리(현,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대장동 산 19번지) 사동(절골부락) 후산에 안장되었다.[1]
후일 증 통정대부 승정원도승지 지제교 겸 경연참찬관 춘추관수찬관 예문관직제학 상서원정에 추증되었다가 다시 증 가선대부 이조참판 겸 동지경연 의금부 춘추관 성균관사 오위도총부 부총관에 추증되었다.[1] 뒤에 거듭 증직되어 증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1] 호주 채유후가 쓴 그의 증손 이가우의 묘갈명(채유후의 문집 6권에 수록된 이군묘갈명)에는 증 이조판서로 나타났으나, 뒷날 강작되어 그의 다른 증손 이서우가 쓴 그의 다른 아들 이길남의 묘갈명인 선조고 증좌승지부군묘갈에는 증 이조참판으로 되어 있다.[1]
2017년 6월의 성남 판교대장 도시개발사업으로 2017년 8월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대장동 산 19번지에서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 단강1리 작실로 이장되었다.[1] 근처에는 그의 증손 송곡 이서우의 사당인 영정각이 있다.[1] 그의 묘소 오른쪽 옆에는 둘째아들 이길남 내외의 묘소가 같이 이장, 조성되었다.[1]
4. 가족 관계
5. 기타
그는 아버지 이감이 이량, 윤원형 등과 가깝게 지낸 일로, 1563년(명종 18) 이후 연좌되어 여러 번 파직과 복관을 반복했다.[3]
참조
[1]
실록
송찬·유창문·성의국·윤현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1563-01-04
[2]
실록
오상·기대항·이관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1563-05-21
[3]
실록
양사에서 이양·이감 등의 죄가 잘못 적용되어 여론이 격분함을 아뢰다
1565-01-06
[4]
실록
김홍윤·이문형·윤위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1563-09-29
[5]
일기
미암일기
1574
[6]
실록
양사에서 이양·이감 등의 죄가 잘못 적용되어 여론이 격분함을 아뢰다
1565-01-06
[7]
실록
대간이 김개의 직첩 환수, 이성헌의 서용 명령 환수를 청하다
1570-05-16
[8]
일기
미암일기
1574-06-06
[9]
실록
파직되어 문외 출송되었던 사람들의 명단
1574-06-07
[10]
일기
미암일기
1574-06-08
[11]
일기
미암일기
1574-06-11
[12]
실록
헌부가 사대부가 대경의 예를 모른다고 문안을 조사하여 아뢰다
1582-08-03
[13]
방목
이명남 생원시 입격 기록
성균관대학교 존경각
[14]
실록
중전이 수안에 있을 때 공을 세운 최흥원 등에게 상을 내리다
1599-07-24
[15]
역사서
己亥正月初一日哭奠几筵而還舎弟佐郞往墓山
[16]
서적
한양위 묘갈편
경기도 편역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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