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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유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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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윤유후는 1541년에 태어나 1606년에 사망한 조선 시대의 문신이다. 그는 음보로 관직에 올라 사과, 좌랑, 고양 군수 등을 역임했으며, 특히 성삼문의 문집인 '성근보유고'를 정리하여 간행하는 데 기여했다. 임진왜란 당시에는 자산 군수로 재직하며 선조의 의주 파천을 돕는 등 활약했다. 최종 관직은 한성부 서윤에 이르렀으며, 서성과 교류했다.

2. 생애

1541년(중종 36년) 1월 11일에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윤탕로이고, 할머니 전주이씨는 운산군 이계(雲山君 李誡)의 딸로 세종대왕의 서자 밀성군 이침의 손녀이다. 아버지 윤진(尹珍)은 통정대부 돈녕부도정을 지냈고, 어머니는 남양홍씨로 문희공 홍언필의 딸이며, 외할머니는 영의정 송질(宋軼)의 딸이다. 영의정 홍섬(洪暹)은 윤유후의 외삼촌이다.

정현왕후는 대고모 할머니였다. 선조의 형 하원군 정의 부인인 남양군부인은 외삼촌 홍섬의 딸로 윤유후의 외사촌 여동생이다. 중종이 내종숙부가 되기에 덕흥대원군 이초는 서6촌형이고, 하원군은 조카뻘이 된다.

그는 소정공 윤곤의 5대손으로, 고조부는 윤삼산이며, 종고조부 윤희제는 세종의 서녀 정현옹주의 부마 윤사로의 할아버지가 된다. 증조부 윤호는 성종의 제2계비 정현왕후의 친정아버지가 된다. 세종의 부마 윤사로는 그의 삼종조부가 된다.

아버지 윤진은 남효온, 김시습의 친구이자 점필재 김종직에게서 수학한 소총 홍유손(篠叢 洪裕孫)의 문인이다. 홍유손은 세조와 연산군에 저항한 조선 초기 죽림칠현(竹林七賢)의 한 사람으로 지목되었다.

친형 윤유곤(尹裕昆)은 충의위와 부사과를 지내고 사후 증 이조참판추증되고 파원군(坡原君)에 추봉되었으나 일찍 사망하였다. 그래서 자신의 차남 윤공(尹鞏)을 양자로 보냈다.[5]

음보로 관직에 올라 사과(司果)를 역임하였다. 1568년(선조 1년) 진사시에 2등으로 합격하였다.

이후 종부시주부, 장례원사의 등을 거쳐 1574년(선조 7년) 좌랑으로 재직 중 명나라에 파견되는 성절사(聖節使) 박희립의 수행원이 되어, 서장관(書狀官) 허봉 등과 함께 명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귀국했다. 시문을 잘 써서 명나라의 양응원(楊應元), 등계달(滕季達) 등으로부터 7자라는 칭찬을 들었다. 귀국 후 의장고낭청(儀仗庫郞廳) 겸 용양위 부사과(龍驤衛副司果), 1575년(선조 8년) 행용양위부사과(行龍驤衛副司果)가 되고 이후 공조정랑, 형조정랑, 호조정랑 등을 거쳐 고양 군수로 나갔다.

1575년에서 1590년 사이로 추정되는 어느 때에 그는 집안에 전해지던 성삼문의 문집 성근보유고와 기타 시문을 정리해 성삼문의 문집 2권을 간행한다. 문집에 실리지 못하고 각종 문헌 동문선, 청구풍아, 용재총화, 황화집, 대동시림 등에 전하던 성삼문의 시와 글들을 모아서 정리, 성근보선생집 (成謹甫先生集), 육선생유고(六先生遺稿) 등을 간행하였으며, 발문을 썼다. 윤유후는 자신이 성삼문의 문집을 정리하게 된 것에 대해 성근보집 발문에 누가 편집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필사본으로 베낀 성근보유고 (成謹甫遺稿) 1권이 집안에 대대로 가전(家傳)되어 왔기에, 문집에 실리지 못한 시문이 있을까 찾다가 자신이 동문선, 청구풍아, 용재총화, 황화집, 대동시림 등에 수록된 성삼문의 미수록 유작을 채집하여 시부(詩賦) 89수‚ 전(箋)‚ 찬(讚)‚ 함(箴)‚ 서(書)‚ 설(說)‚ 성삼문이 지은 타인의 묘비명(墓碑銘)‚ 대책(對策) 등 16편의 글을 찾아내 유집을 완성시켰다 하였다. 그의 성근보집과 육선생유고는 고종 때에 간행한 매죽헌선생문집 (梅竹軒先生文集) 등의 참고자료가 된다.

1585년(선조 18년) 4월 16일 고양 군수 재직 중, 구황(救荒)을 삼가지 않았다 하여 암행어사 유근(柳根)의 탄핵을 받고 파면당했다.[1]

이후 삭녕군수를 거쳐 1591년(선조 24) 3월 2일 영월 군수로 부임하고, 그해 10월 12일 체직되었다. 1592년(선조 25) 자산 군수(慈山郡守)로 재직 중 그해 4월 27일 탄금대가 함락되고 일본군이 경기도로 상륙하자, 4월 30일 선조는 어가를 이끌고 파천하였다. 6월 12일 선조의 어가를 맞이하고, 3천 병사를 이끌고 자산군의 장경문(長慶門)을 지켰다. 병력이 소수이기에, 그는 빽빽한 숲 사이 소나무에 사람의 옷을 걸어두어 사람처럼 보이게 했다.[2][3] 이후 그는 선조의 어가가 평양성을 탈출하여 의주로 갈 수 있도록 길목을 지켰다. 최종 관직은 통훈대부 한성부서윤(漢城府庶尹)에 이르렀다.

그밖에 가깝게 지낸 인물로는 약봉 서성 등이 있어 서성의 문집인 《약봉문집》의 사우록 편에도 그의 이름이 실려 있다. 1606년(선조 36년) 8월 13일 사망했다.

2. 1. 출생과 가계

1541년(중종 36년) 1월 11일에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윤탕로이고, 할머니 전주이씨는 운산군 이계(雲山君 李誡)의 딸로 세종대왕의 서자 밀성군 이침의 손녀이다. 아버지 윤진(尹珍)은 통정대부 돈녕부도정을 지냈고, 어머니는 남양홍씨로 문희공 홍언필의 딸이며, 외할머니는 영의정 송질(宋軼)의 딸이다. 영의정 홍섬(洪暹)은 윤유후의 외삼촌이다.

정현왕후는 대고모 할머니였다. 선조의 형 하원군 정의 부인인 남양군부인은 외삼촌 홍섬의 딸로 윤유후의 외사촌 여동생이다. 중종이 내종숙부가 되기에 덕흥대원군 이초는 서6촌형이고, 하원군은 조카뻘이 된다.

그는 소정공 윤곤의 5대손으로, 고조부는 윤삼산이며, 종고조부 윤희제는 세종의 서녀 정현옹주의 부마 윤사로의 할아버지가 된다. 증조부 윤호는 성종의 제2계비 정현왕후의 친정아버지가 된다. 세종의 부마 윤사로는 그의 삼종조부가 된다.

아버지 윤진은 남효온, 김시습의 친구이자 점필재 김종직에게서 수학한 소총 홍유손(篠叢 洪裕孫)의 문인이다. 홍유손은 세조와 연산군에 저항한 조선 초기 죽림칠현(竹林七賢)의 한 사람으로 지목되었다.

친형 윤유곤(尹裕昆)은 충의위와 부사과를 지내고 사후 증 이조참판추증되고 파원군(坡原君)에 추봉되었으나 일찍 사망하였다. 그래서 자신의 차남 윤공(尹鞏)을 양자로 보냈다.[5]

2. 2. 관료 생활과 성삼문 문집 복원, 간행

음보로 관직에 올라 사과(司果)를 역임하였다. 1568년(선조 1년) 진사시에 2등으로 합격하였다.

이후 종부시주부, 장례원사의 등을 거쳐 1574년(선조 7년) 좌랑으로 재직 중 명나라에 파견되는 성절사(聖節使) 박희립의 수행원이 되어, 서장관(書狀官) 허봉 등과 함께 명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귀국했다. 시문을 잘 써서 명나라의 양응원(楊應元), 등계달(滕季達) 등으로부터 7자라는 칭찬을 들었다. 귀국 후 의장고낭청(儀仗庫郞廳) 겸 용양위 부사과(龍驤衛副司果), 1575년(선조 8년) 행용양위부사과(行龍驤衛副司果)가 되고 이후 공조정랑, 형조정랑, 호조정랑 등을 거쳐 고양 군수로 나갔다.

1575년에서 1590년 사이로 추정되는 어느 때에 그는 집안에 전해지던 성삼문의 문집 성근보유고와 기타 시문을 정리해 성삼문의 문집 2권을 간행한다. 문집에 실리지 못하고 각종 문헌 동문선, 청구풍아, 용재총화, 황화집, 대동시림 등에 전하던 성삼문의 시와 글들을 모아서 정리, 성근보선생집 (成謹甫先生集), 육선생유고(六先生遺稿) 등을 간행하였으며, 발문을 썼다. 윤유후는 자신이 성삼문의 문집을 정리하게 된 것에 대해 성근보집 발문에 누가 편집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필사본으로 베낀 성근보유고 (成謹甫遺稿) 1권이 집안에 대대로 가전(家傳)되어 왔기에, 문집에 실리지 못한 시문이 있을까 찾다가 자신이 동문선, 청구풍아, 용재총화, 황화집, 대동시림 등에 수록된 성삼문의 미수록 유작을 채집하여 시부(詩賦) 89수‚ 전(箋)‚ 찬(讚)‚ 함(箴)‚ 서(書)‚ 설(說)‚ 성삼문이 지은 타인의 묘비명(墓碑銘)‚ 대책(對策) 등 16편의 글을 찾아내 유집을 완성시켰다 하였다. 그의 성근보집과 육선생유고는 고종 때에 간행한 매죽헌선생문집 (梅竹軒先生文集) 등의 참고자료가 된다.

2. 3. 생애 후반

1585년(선조 18년) 4월 16일 고양 군수 재직 중, 구황(救荒)을 삼가지 않았다 하여 암행어사 유근(柳根)의 탄핵을 받고 파면당했다.[1]

이후 삭녕군수를 거쳐 1591년(선조 24) 3월 2일 영월 군수로 부임하고, 그해 10월 12일 체직되었다. 1592년(선조 25) 자산 군수(慈山郡守)로 재직 중 그해 4월 27일 탄금대가 함락되고 일본군이 경기도로 상륙하자, 4월 30일 선조는 어가를 이끌고 파천하였다. 6월 12일 선조의 어가를 맞이하고, 3천 병사를 이끌고 자산군의 장경문(長慶門)을 지켰다. 병력이 소수이기에, 그는 빽빽한 숲 사이 소나무에 사람의 옷을 걸어두어 사람처럼 보이게 했다.[2][3] 이후 그는 선조의 어가가 평양성을 탈출하여 의주로 갈 수 있도록 길목을 지켰다. 최종 관직은 통훈대부 한성부서윤(漢城府庶尹)에 이르렀다.

그밖에 가깝게 지낸 인물로는 약봉 서성 등이 있어 서성의 문집인 《약봉문집》의 사우록 편에도 그의 이름이 실려 있다. 1606년(선조 36년) 8월 13일 사망했다.

3. 사후

묘소는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마북동 도장곡부락에 있으며 부인 우계이씨의 묘소가 뒤에 있다.[1] 증 통정대부 승정원좌승지 겸 경연참찬관에 추증되었다.[1] 뒤에 묘소는 용인시 기흥구 마북동 산 216번지로 이장하였다.[1]

용인 마북동 현조사(顯祖祠)에서 매년 음력 10월 8일 아버지 윤진, 형 파원군 윤유곤 등과 함께 제사를 지낸다.[1]

4. 가족 관계

구 분내용
증조부윤호 (1424년 ~ 1496년 4월 9일)
증조모연안부부인 담양 전씨(延安府夫人 潭陽 田氏)
대고모정현왕후 윤씨(貞顯王后尹氏, 1462년 7월 21일 (음력 6월 25일)~1530년 9월 13일 (음력 8월 22일))
종조부윤은로(尹殷老)
할아버지윤탕로(尹湯老, 1466년 ~ 1508년)
할머니전주이씨, 운산군 이계(雲山君 李誡)의 딸, 세종대왕의 서자 밀성군 이침의 손녀
아버지윤진(尹珍, 1498년 11월 24일 ~ 1545년 2월 23일)[4]
어머니남양홍씨(1505년 ~ 1587년), 홍언필(洪彦弼)의 딸
윤유곤(尹裕昆, 1526년 3월 13일 ~ 1549년? 1월 21일)
형수전주이씨(1528년 ~ 1590년 10월 18일), 양녕대군의 증손
아들윤공(尹鞏, 1561년 ~ 1629년), 형 윤유곤의 양자로 출계
부인우계이씨(羽溪李氏, 1541년 12월 1일 ~ 1607년 5월 17일), 이감(李戡)의 딸
아들윤조(尹肇, 1558년 ~ ?)
외할아버지홍언필(洪彦弼, 1476년 ~ 1549년)
외할머니여산송씨, 송질의 딸
외삼촌홍섬(洪暹, 1504년 ~ 1585년)
외사촌여동생남양군부인, 덕흥대원군의 며느리
외외종조부이자 6촌매부송인(宋寅), 남곤(南袞)의 외손자


참조

[1] 서적 선조실록 19권, 1585년(선조 18년, 명 만력 13년) 4월 16일 정사 4번째기사 1585-04-16
[2] 서적 연려실기술 제15권
[3] 서적 재조번방지 제1권
[4] 간행물 호음유고 제7권, 有明朝鮮國通政大夫敦寧府都正尹公墓碣銘 幷序
[5] 문서 1921년의 파평윤씨 족보에는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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