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종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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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승만은 1931년 평양에서 태어난 기독교인으로, 한국 전쟁 중 가족과 헤어진 후 미국으로 유학하여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는 미국 해병대에서 복무하고, 흑인 인권 운동에 참여했으며, 미국교회협의회(NCCUSA) 회장과 백악관 종교자문위원을 역임했다. 이승만은 북한을 방문하여 이산가족 상봉을 하고, 봉수교회를 세우는 등 남북 화해를 위해 노력했으며, 2015년 8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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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종교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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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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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이승만 |
출생 | 1931년 |
사망 | 2015년 |
직업 | 목사 |
종교 | 장로교 |
경력 | |
주요 활동 | 미국 장로교 총회장 에큐메니칼 운동 지도자 통일을 위한 북한 방문 (30여 차례) |
소속 | 미국 장로교 |
2. 유년기와 한국전쟁
이승만은 1931년 3월 25일 평양에서 태어났다.[1] 그의 할머니 김효신은 평양 서성리교회 전도사였고, 아버지 이태석은 경신중학교 재학 중 3.1 운동을 경험하며 민족 독립에 대한 소명을 가졌다. 이태석은 평양 숭실학교와 일본 동경중앙대학을 졸업한 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귀국하여 경성성서학원(현재 서울신학대학교)을 졸업했다. 이승만은 가난 속에서도 신앙을 지키는 할머니와 아버지를 보며 올바른 삶의 길에 대해 고민하는 유년 시절을 보냈다.[7]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목사였던 아버지 이태석은 공산당원에게 붙잡혀 순교했다.[7][2] 1950년 10월, 연합군의 평양 입성 후 가족들은 동평양 철도역 근처 방공호에서 다른 목사들과 함께 사살된 아버지의 시신을 확인했다.[7] 아버지의 비극적인 죽음은 어린 이승만에게 큰 충격과 분노를 안겨주었으며, "아버지가 못 다 이룬 일을 네가 이루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내면의 목소리를 듣고 신앙적 소명을 다지는 계기가 되었다.[8][9]
아버지의 장례 후, 이승만은 남동생과 함께 북한을 탈출하여 남쪽으로 향했다.[2] 어머니 이송희는 남은 네 딸과 함께 피난길에 오르며 자녀들에게 기도로 만날 것을 당부했다.[10] 이승만은 이후 어머니를 다시 만나지 못했지만, 수십 년이 흐른 1978년에 누이들과 재회했다.[2]
2. 1. 한국전쟁 이후의 삶과 신앙
한국 전쟁이 발발한 1950년, 평양에 살던 이승만은 남동생과 함께 북한을 탈출하여[2] 어머니와 네 명의 누이를 남겨두었다. 가족들은 그들이 2, 3주 안에 돌아올 것으로 생각했지만, 이것이 마지막이 되었다.[2] 이승만의 아버지 이태석 목사는 기독교 목사였는데, 전쟁 중 공산당원에게 붙잡혀 순교했다.[7][2]1950년 10월, 연합군의 평양 입성 후 이승만은 가족과 함께 아버지의 생사를 확인하기 위해 평양으로 돌아왔다. 어머니 이송희는 실성한 사람처럼 시체 구덩이를 뒤지며 남편을 찾았고, 마침내 동평양 철도역 근처 평천리 야구장 방공호 속에서 다른 목사들과 함께 사살된 아버지의 시신을 발견했다.[7] 이승만은 당시의 참담함과 분노를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어떻게든 복수하겠다. 이렇게 잔인한 자들을 용서해서는 안 된다! 고 이를 갈며 뜬 눈으로 지새던 밤들... 어머니와 동생들 때문에 차마 내지르지는 못했지만, 그래서 더 안으로 박혀 들어갔던 억울함과 분노는 과연 이 세상에 하나님의 정의가 있는가? 라는 질문으로 응어리졌다... 과연 하나님께서 살아 계십니까? 전능하십니까? 그런데도 이 고통을 두고만 보십니까!... 그런 가운데 마치 속삭이듯 들려오는 음성이 있었다. “아버지가 못 다 이룬 일을 네가 이루어야 하지 않겠느냐?”'''“[8][9]
아버지의 장례를 치른 후, 어머니 이송희는 남은 자녀들을 데리고 남쪽으로 피난길에 올랐다. 떠나기 전 어머니는 자녀들에게 "어디로 가든지 무슨 일을 당하든지 하나님께 기도함으로써 우리 기도 속에서 만나자!"라고 당부했다.[10] 이승만은 이후 어머니를 다시 보지 못했지만, 수십 년이 흐른 1978년에 누이들과 재회할 수 있었다.
대한민국에서 난민 생활을 하던 시기, 이승만은 교회 세계 봉사단(Church World Service)으로부터 음식과 담요 등 구호품을 받았다. 그는 이때의 경험이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큰 희망이 되었다고 회상하며, "그들의 자비로운 사역은 저에게 매우 깊은 감동을 주었습니다. 그것이 제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와 교회 세계 봉사단에서 매우 활발하게 활동했던 이유 중 하나입니다."라고 술회했다.
이후 이승만은 대한민국 해병대에 입대했고, 1953년에는 미국 버지니아의 퀀티코 해병대 기지(Marine Corps Base Quantico)에서 특별 훈련을 받았다. 그곳에서 만난 기독교인 미 해병대 장교들과 깊은 우정을 쌓았고, 이들의 도움으로 웨스트버지니아에 있는 데이비스 앤드 엘킨스 칼리지(Davis and Elkins College)에 유학할 기회를 얻었다. 그는 이 대학에서 영어와 종교학을 공부한 뒤, 켄터키 루이빌의 루이빌 장로교 신학대학(Louisville Presbyterian Theological Seminary)에 진학하여 1960년에 졸업했다. 같은 해 루이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고, 일주일 후 오랜 친구이자 의사인 이혜선과 결혼했다.
3. 군 복무와 도미 유학
1951년, 이승만은 동생 이승규와 함께 대한민국 해병대에 자원 입대하여 해병 6기가 되었다.[11][12][13] 해병학교에서 영어 번역병으로 발탁되었고, 1952년 군목실이 신설되자 그곳으로 옮겨 근무하며 신학 공부의 필요성을 느꼈다. 한때 탈영하여 부산 감리교신학대학교에 입학하기도 했으나, 해병대 군목실장 박창번 목사의 도움으로 부대에 복귀하고 학업을 병행할 수 있게 되었다.[11][12][13]
1953년 9월, 미국 해병대 연수 프로그램에 선발되어 버지니아 퀀티코 해병대 기지(Marine Corps Base Quantico)에서 6개월간 훈련을 받았다.[14] 이곳에서 만난 미국 해병대 장교들과의 인연은 이후 그의 유학 생활에 도움을 주었다. 1954년 귀국 후에는 미 해병대와 한국 해병대에 함께 배치되었다.[14]
군 복무 중 신학 공부에 대한 열망을 키운 이승만은 평양 성화 신학교 시절 스승이었던 박대선 목사의 도움으로 미국 웨스트버지니아 데이비스 앤드 엘킨스 칼리지(Davis and Elkins College)의 입학 허가와 장학금, 생활비 지원을 약속받고 1956년 1월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15] 당시 미국 교회들은 한국 전쟁 고아 돕기에 관심이 많았고, 이승만은 여러 교회에서 한국의 실상을 알리는 간증 활동을 했다. 특히 찰스턴 장로교회에서의 간증은 프레스톤 부인의 후원 약속으로 이어져, 이후 루이빌 장로교 신학대학(Louisville Presbyterian Theological Seminary)에 진학하는 계기가 되었다.[16][17] 그는 교회 세계 봉사단(Church World Service)의 구호 활동에 대해 "음식, 담요, 무엇보다도 절망적인 상황에서 고군분투하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가져다주었습니다. 그들의 자비로운 사역은 저에게 매우 깊은 감동을 주었습니다."라고 회고하며, 이것이 훗날 한국 기독교 교회 협의회(National Council of Churches)와 교회 세계 봉사단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배경 중 하나가 되었다고 밝혔다.
3. 1. 미국 유학과 신앙 성장
대한민국 해병대에 자원 입대한 이승만은 1952년 군목실로 옮기면서 신학 공부의 필요성을 느꼈다.[11][12][13] 1953년 9월, 미국 버지니아 퀀티코 해병대 기지(Marine Corps Base Quantico)에서 6개월간 특별 훈련을 받았고,[14] 이곳에서 만난 기독교 해병대 장교들과의 교류는 대한민국 귀국 후에도 이어졌다. 이들은 이후 이승만의 유학을 후원하는 중요한 인연이 되었다.1956년 1월, 평양 성화 신학교 시절 스승인 박대선 목사의 도움과 퀀티코 친구들의 후원으로 미국 웨스트버지니아 데이비스 앤드 엘킨스 칼리지(Davis and Elkins College)에 입학하여 영어와 종교학을 공부했다.[15] 당시 미국 교회들은 한국 전쟁 고아 돕기에 적극적이었는데, 이승만은 유학 중 여러 교회에서 한국의 실상을 알리는 간증 활동을 했다. 특히 찰스턴 장로교회에서의 간증 후, 프레스톤 부인은 이승만의 삶과 고백에 감명받아 "승만군의 삶과 고백에 크나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괜찮다면 대학을 졸업한 후 신학교에 가면 그 3년간의 학비와 경비를 내가 부담하고 싶습니다. 허락해 주겠습니까?"라며 신학교 진학 시 학비와 경비 지원을 약속했다.[16][17]
이승만은 교회 세계 봉사단(Church World Service)의 구호 활동에 대해 "음식, 담요, 무엇보다도 절망적인 상황에서 고군분투하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가져다주었습니다. 그들의 자비로운 사역은 저에게 매우 깊은 감동을 주었습니다. 그것이 제가 한국 기독교 교회 협의회(National Council of Churches)와 교회 세계 봉사단에서 매우 활발하게 활동했던 이유 중 하나입니다."라고 회고했다.
데이비스 앤드 엘킨스 칼리지를 졸업한 후, 루이빌 장로교 신학대학(Louisville Presbyterian Theological Seminary)에 진학하여 1960년에 졸업하고 루이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일주일 후, 오랜 친구이자 대한민국의 의사인 이혜선과 결혼했다.
목사 안수 후 처음으로 루이빌 근처의 두 작은 교회를 섬기며 목회 경험을 쌓았다. 이승만은 이 시기에 대해 "그것은 저에게 멋진 경험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달았습니다."라고 말했다. 이후 루이빌 대학교에서 캠퍼스 사역자로 활동했으며, 1978년에는 미국 연합 장로교회의 중동 선교 코디네이터로 임명되어 7년간 활동했다.
3. 1. 1. 흑인 인권 운동 참여
루이빌 신학교에서 신학석사(M.Div.) 과정을 마치고 1960년 미국 연합 장로교회(PCUSA)에서 목사 안수를 받은 이승만은 루이빌 웨스트민스터 장로교회의 담임목사로 부임하며 목회 활동을 시작했다. 동시에 모교인 루이빌 신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목으로도 활동했다.1960년대 초반 미국 사회는 남부의 인종 분리 정책에 맞선 프리덤 라이드 운동, 불매 운동, 연좌 농성 등 흑인 인권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던 시기였다. 이승만은 이러한 시대적 흐름 속에서 자연스럽게 흑인 인권 운동에 참여하게 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운동의 중심인물인 마틴 루터 킹 목사를 만나게 되었다.[18] 이승만은 마틴 루터 킹 목사가 루이빌을 방문했을 때, 그와 함께 시위대와 손을 잡고 '우리는 행진하리(We Shall Overcome)'를 부르며 가두 행진을 벌였다. 이 경험은 그의 인생에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19]
이승만은 400년 넘게 인권 유린의 고통을 겪어온 흑인들이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비폭력 저항 운동을 통해 백인과 동등한 자유를 누리는 과정을 목격하며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는 이 경험을 통해 일제 강점기 36년의 아픔, 분단된 조국의 현실, 그리고 아버지의 죽음과 관련된 북한 정권에 대한 개인적인 적대감과 분노를 '용서'로 승화시키는 법을 배웠다. 이는 그가 이후 남북 화해를 위한 활동에 헌신하는 비전을 갖게 된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20] 마틴 루터 킹 목사는 당시 연설에서 용서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용서는 얻어맞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행동입니다. 피해를 당한 사람은 화해의 주도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보복을 할지, 용서를 해줄지는 가해자의 권리가 아니라 피해자의 권리입니다. 우리가 싸우는 대상은 가해자가 아닙니다. 그 마음속에 있는 불신과 의심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용서를 통해서만 이 싸움을 끝낼 수 있습니다. 용서를 통해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에게 진정한 자유를 주자는 것입니다. '''“'''[21]
::-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연설 중
이승만은 처음으로 루이빌 근처의 두 작은 교회를 섬기는 소명을 받았고, "그것은 저에게 멋진 경험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달았습니다."라고 회고했다.
이후 이승만은 13년 동안 루이빌 대학교에서 장로교 캠퍼스 사역자로 봉사했다. 그는 1960년대 초에 캠퍼스 사역을 시작했으며, 마틴 루터 킹 주니어가 캠퍼스를 여러 번 방문했다고 회상했다. 이승만은 "그와 루이빌의 흑인 학생들과 함께 행진했던 기억이 납니다."라고 말하며, "그 경험은 저에게 인종 정의를 위한 사역에 참여하는 것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었습니다."라고 덧붙였다.
1978년, 이승만은 루이빌 대학교를 떠나 당시 미국 연합 장로교회의 중동 선교 코디네이터가 되었다. 그는 7년 동안 그 기관에서 일했다.
4. 선교 활동과 남북 화해 운동
이승만은 1960년대 초 루이빌 대학교에서 장로교 캠퍼스 사역자로 활동하며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의 영향을 받아 인종 정의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26] 이 경험은 이후 그의 인종 간 화해와 협력을 위한 활동의 기초가 되었다.
1973년부터는 미국 장로교 선교부 중동지역 총무를 맡아 활동하면서, 대한민국의 민주화 운동을 지원하고 박정희 정부의 인권 문제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다. 특히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 취임 시기에는 한국 정부의 인권 탄압 상황을 알리며 개선을 촉구하는 활동을 벌였다.[22] 이후 아시아 지역 담당 선교총무를 맡아 한국의 민주화 운동을 지속적으로 지원했다.[24]
1978년에는 이집트 카이로에서 북한 대사관과 접촉하여 한국 전쟁 이후 헤어진 가족의 생사를 확인하고, 당시 조선그리스도교연맹 위원장이자 국가부주석이었던 강량욱의 도움으로 북한 방문을 성사시켰다. 동독과 소련을 거쳐 북한에 도착한 그는 여동생들과 이산가족 상봉을 했으며, 평양에 봉수교회 설립을 지원하며 남북 종교 교류의 가능성을 열었다.[22][23]
1991년 11월, 한국인 및 동양인 최초로 미국 내 최대 개신교 연합 기구인 미국 교회 협의회(NCCUSA) 회장에 선출되었다. 회장으로서 그는 한반도 분단 문제 해결에 미국의 책임과 역할을 강조하며, 이산가족 문제 해결을 위한 미국 정부와 의회의 노력을 촉구하는 선언문 채택을 주도했다. 1992년 8월에는 NCCUSA 대표단을 이끌고 남북한을 방문하여 김일성 주석과 면담하는 등 한반도 평화와 화해를 위한 실질적인 노력을 기울였다.[25]
또한 1992년 로스앤젤레스 폭동 당시에는 한인 사회와 아프리카계 미국인 사회 간의 갈등 해소와 화합을 위한 중재 역할을 수행했다.[26] 1993년 제1차 북핵 위기 국면에서는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을 만나 군사적 대응 대신 대화를 통한 평화적 해결을 설득했으며, 이는 이후 제네바 합의 도출 과정에 영향을 미쳤다. 이 공로로 클린턴 행정부의 백악관 종교자문위원으로 위촉되기도 했다.[26]
1998년 미국장로교회 선교부에서 25년간의 사역을 마치고 은퇴한 후에도, 유니온 장로교 신학교와 콜럼비아 신학 대학원에서 선교학 교수로 활동하며 후학 양성에 힘쓰다 2015년 1월 14일 별세했다.[27][28]
4. 1. 북한 방문과 봉수교회 설립
1973년부터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 중동지역 총무를 맡아 활동하며 한국의 민주화 운동을 지원하였다. 미국 카터 대통령 취임 시기에는 한국 정부의 인권 탄압에 항의하는 시위에 참여하기도 했다. 1978년 카이로에 머물던 중, 미국 선교사의 도움을 받아 북한 대사관을 통해 북한에 두고 온 가족의 생사를 확인하였다. 이후 아버지와 친분이 있었던 강량욱 당시 조선그리스도교연맹 위원장 겸 국가부주석의 도움으로 북한 방문 초청을 받았다.[22]이승만은 동독과 소련을 경유하여 1978년 북한에 도착했으며, 그곳에서 여동생들을 만나 이산가족 상봉을 하였다. 특히 강량욱 부주석의 지원을 받아 평양에 봉수교회를 설립하는 데 기여하였다.[23]
4. 2. 미국교회협의회(NCCUSA) 회장 활동
1991년 11월, 이승만은 한국인 최초이자 동양인 최초로 NCCUSA 회장에 선출되었다. 당시 NCCUSA는 35개 기독교 교단과 약 5,000만 명의 교인을 아우르는 미국 내 최대 기독교 연합 기관이었다.회장 취임 후 첫 통합 총회에서 이승만은 한반도 분단 문제에 미국과 소련의 역사적 책임이 있음을 강조하며, 미국이 한반도의 화해와 통일을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쳐 참석자들의 지지를 얻었다. 이를 바탕으로 남북의 천만 이산가족 문제 해결을 위해 미국 정부와 의회가 나설 것을 촉구하는 선언문을 통과시켰다. 이후 1992년 8월에는 NCCUSA 대표 15명과 함께 대한민국과 북한을 방문하여 평양에서 김일성 주석과 면담하기도 했다.[25]
1992년 4월 28일 발생한 LA 흑인 폭동 당시에는 인종 갈등 해소를 위해 노력했다. 그는 흑인 교회 지도자들과 한인 교회 대표들을 만나 양측 간의 갈등을 해소하고 공존 방안을 모색했으며, 이를 위한 방법 중 하나로 마라톤 대회를 제안하기도 했다.
1993년 3월 24일에는 NCCUSA 대표단과 함께 백악관을 방문하여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과 면담했다. 당시 제1차 북핵 위기로 미국과 북한 간의 긴장이 고조되어 북한 영변 핵시설에 대한 미군의 군사 공격 가능성까지 거론되는 상황이었다. 이승만은 클린턴 대통령에게 대화를 통한 평화적 해결을 설득했고, 클린턴 대통령은 이를 받아들여 무력 사용 대신 협상을 통해 문제를 다루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 일을 계기로 클린턴 대통령은 이승만을 백악관 종교자문위원으로 공식 임명했다. 이후 미국과 북한은 제네바 합의를 통해 북한이 핵 개발을 포기하는 대가로 미국이 경수로를 제공하기로 합의했다.[26]
4. 3. 클린턴 행정부 백악관 종교자문위원 활동
1992년 4월 28일 LA 흑인 폭동이 발생했을 때, 이승만은 인종차별 극복을 위해 노력했다. 그는 흑인교회와 한국교회 대표들을 만나 민족 간의 갈등 해소와 공존 방안으로 마라톤 대회 개최 등을 모색했다.[26]이후 1993년 3월 24일, 이승만은 미국 교회 협의회 대표단과 함께 백악관을 방문하여 빌 클린턴 당시 미국 대통령을 만났다. 이 시기는 제1차 북핵 위기로 미국과 북한 간의 긴장이 고조되던 때였으며, 미국 내에서는 북한 영변 핵시설에 대한 군사적 폭격 주장까지 제기되고 있었다. 이승만은 클린턴 대통령에게 무력 사용보다는 대화와 협상을 통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설득했다. 클린턴 대통령은 이승만의 의견을 받아들여 협상을 우선적으로 고려하겠다는 입장을 밝혔고, 이를 계기로 이승만을 백악관 종교자문위원으로 공식 임명했다. 이후 미국과 북한은 제네바 합의를 통해 북한이 핵 개발을 중단하는 대가로 미국 등이 경수로를 제공하는 데 합의했다.[26]
4. 4. 로스앤젤레스 폭동 이후 한인-흑인 사회 화해 중재
1992년 4월 28일 로스앤젤레스 폭동이 발생했을 때, 당시 미국교회협의회(NCCUSA) 회장이었던 이승만은 인종차별 극복과 민족 간 화해를 위해 노력했다. 그는 한인 사회와 아프리카계 미국인 사회 양측의 갈등을 해소하고 공존의 길을 찾기 위해 흑인 교회와 한국 교회 대표들을 만났다. 이 과정에서 민족 간 화합을 위한 방안으로 마라톤 대회를 개최하는 것을 모색하기도 했다.[26]5. 은퇴 이후와 죽음
1998년 버지니아주 리치먼드로 이주한 후 이승만은 리치먼드 한인 중앙 장로교회(RKCPC)에 출석했다.[3] 2014년 말 조지아주 애틀랜타로 이주하기 전까지 버지니아주 리치먼드에 있는 연합 장로교 신학교에서 아시아계 미국 연구 센터 소장을 역임했다.[3] 이후 조지아주 데카터에 있는 컬럼비아 신학대학교에서 세계 리더십 개발 분야의 석좌 방문 교수로 재직했다.[3]
2015년 1월 14일, 공격적인 형태의 암 진단을 받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짧은 투병 끝에 향년 83세로 사망했다.[3][4]
6. 약력
학위 | 학교 |
---|---|
학사 | 데이비스 앤 앨킨스 대학 |
신학석사(STM) | 예일 대학교 신학부 |
목회학석사(M.Div) | 루이빌 신학교 |
종교학박사(D.Rel) | 시카고 신학교 |
시기 | 내용 |
---|---|
- | 해병대 근무 |
- | 루이빌 대학 강사 및 교목 역임 |
- | 마틴 루터 킹 목사와 함께 민권운동 참여 |
25년간 | 미국장로교(PCUSA) 선교부 부총무, 중동 및 아시아 지역 총무 역임 |
1978년부터 | 여러 차례 평양을 방문하여 남북화해운동을 주도하고 북한 교회 재건에 기여 |
- | 미주한인동포전국협회(NAKA) 회장 역임 |
- | 미국교회협의회(NCCUSA) 회장 역임 |
- | 미국 클린턴 대통령 백악관 종교자문위원 역임 |
2000년-2001년 | 한국인 최초로 미국장로교(PCUSA) 제212대 총회장 역임 |
- | 버지니아 유니온 신학교 교수 역임 |
- | 콜럼비아 신학 대학원 방문교수 역임 |
1998년 버지니아주 리치먼드로 이주한 후 리치먼드 한인 중앙 장로교회(RKCPC)에 출석했다. 2014년 말 애틀랜타로 이주하기 전까지 버지니아주 리치먼드에 있는 연합 장로교 신학교에서 아시아계 미국 연구 센터의 소장을 역임했다. 이후 조지아주 데카터에 있는 컬럼비아 신학대학교에서 세계 리더십 개발 분야의 석좌 방문 교수로 재직했다. 짧은 투병 끝에 2015년 1월 14일 별세했다.[3]
7. 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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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 | 제목 (원제) | 출판 정보 |
---|---|---|
1947 | 우리가 추구해야하는 목표 (The Goal We Seek영어) | Vital Speeches of the Day, Vol. 14 Issue 1, p27 (ISSN: 0042-742X) |
1950 | 우리는 어디에 서있나: 아시아 자유국가들의 연합 저항 (Where Do We Stand Today: UNITED RESISTANCE OF FREE COUNTRIES OF ASIA영어) | Vital Speeches of the Day, Vol. 16 Issue 11, p346 (ISSN: 0042-742X) |
1952 | 한국 대통령이 지원을 구하다 (Korean president seeks aid영어) | Christian Century, Vol. 69 No. 1, p 6-7 (ISSN: 0009-5281) |
1952 | 한국은 분단된 반쪽으로 살수없다 (Korea Cannot Live Divided and Half-Occupied영어) | Vital Speeches of the Day, Vol. 18 Issue 22, p703 (ISSN: 0042-742X) |
1953 | 인간의 동등성과 자유 (The Equality and Liberty of Man영어) | Vital Speeches of the Day, Vol. 19 Issue 21, p646 (ISSN: 0042-742X) |
1955 | 좀 더 믿는 미국 (America, Trust Yourselves a Little More영어) | Vital Speeches of the Day, Vol. 21 Issue 12, p1138 (ISSN: 0042-742X) |
1955 | 평화의 상태 (The Status quo Peace영어) | Vital Speeches of the Day, Vol. 21 Issue 23, p1476 (ISSN: 0042-742X) |
1957 | 회계의 날 (The day of Accounting영어) | Vital Speeches of the Day, Vol. 23 Issue 13, p401 (ISSN: 0042-742X) |
1994 | 누가 낯선 사람인가? (Who Are the Strangers? Personal stories lead to a plea to welcome the stranger in many ways영어) | Church & Society, Vol. 85 No. 2, p 21-25 (ISSN: 0037-7805) |
2000 | 열왕기하 6:8-23 해석 (Second Kings 6:8-23영어) | Interpretation: A Journal of Bible & Theology, Vol. 54 No. 2, p 183-185 (ISSN: 0020-9643) |
2000 | 문맥과 설교사이 (Korea Cannot Live Divided and Half-Occupied영어) | Interpretation: A Journal of Bible & Theology, Vol. 54 Issue 2, p183 (ISSN: 0020-9643) |
2012 | 기도속에서 만나자 | 쿰란 출판사 (ISBN 978-89-6562-266-6) |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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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열매 이승만(9) 어머니 누이들 평양에 남겨두고 동생과 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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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열매 이승만(11) 성경을 읽으며 해병대 혹독한 훈련 견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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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열매 이승만(18) 마틴 루터 킹 목사와 손잡고 ‘우리 승리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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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열매 이승만(19) 흑인 인권운동에서 깨친 화해자의 사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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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열매 이승만(24) 떨리는 마음으로 북한의 가족생존 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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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열매 이승만(25) 아! 오마니.. 이불효자를 용서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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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열매 이승만(26) 방북후 ‘친북’딱지 한국방문 어려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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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열매 이승만(27) 김일성 ‘어릴적 어머니 따라 칠골교회에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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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열매 이승만(28)클린턴에 북핵 무력으로 해결안된다 설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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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열매 이승만(29)6.25아픔이 일군 화해와 평화의 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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