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언 커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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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언 커쇼는 1943년 영국에서 태어난 영국의 역사가로, 20세기 독일사, 특히 나치즘과 아돌프 히틀러에 대한 연구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리버풀 대학교와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수학했으며, 중세사에서 현대 독일 사회사 연구로 전공을 변경했다. 커쇼는 '히틀러 신화', '제3제국의 여론과 정치적 반대', '나치 독재' 등 주요 저서를 통해 나치 독일의 사회, 정치, 히틀러 개인 숭배 현상 등을 분석했다. 그는 히틀러를 "약한 독재자"로 보고 "지도자를 향해 일한다"는 이론을 제시했으며, 기능주의와 의도주의 논쟁에서 기능주의에 더 가까운 입장을 취했다. 커쇼는 독일 연방 공화국 공로 훈장, 울프슨 역사상, 기사 작위 등을 수상했으며, 다양한 학술 단체의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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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언 커쇼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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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이안 커쇼 |
원어명 | Ian Kershaw |
출생일 | 1943년 4월 29일 |
출생지 | 랭커셔주 울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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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 | 베티 커쇼 |
자녀 | 2명 |
국적 | 영국 |
학력 | |
학사 | 리버풀 대학교 (문학사) |
박사 | 옥스퍼드 대학교 머턴 칼리지 |
박사 논문 제목 | 볼턴 수도원, 1286–1325: 경제 연구 |
박사 논문 년도 | 1969년 |
경력 | |
직업 | 역사가 |
주요 관심사 | 나치 독일 |
영향 | 마틴 브로샤트 티모시 메이슨 |
영향 받은 인물 | "퓌러를 향한 노력" 이론 |
학문적 전통 | 일상사 |
수상 | |
수상 내역 | FBA, FRHistS |
2. 생애와 학문적 배경
이언 커쇼는 1943년 영국 랭커셔 올덤에서 태어나, 카운트힐 문법 학교, 세인트 베데스 칼리지, 맨체스터, 리버풀 대학교, 머튼 칼리지, 옥스퍼드에서 교육을 받았다. 제프리 버크 신부[6]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그의 부인 데임 베티 커쇼는 셰필드 대학교 간호학 교수이자 간호학부 학장이었다.[8]
2. 1. 유년 시절과 교육
이언 커쇼는 1943년 4월 29일 영국 랭커셔 올덤에서 조셉 커쇼와 앨리스 (로빈슨) 커쇼 사이에서 태어났다.[4][5] 그는 카운트힐 문법 학교, 세인트 베데스 칼리지, 맨체스터에서 교육받았으며, 제프리 버크 신부[6]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이후 리버풀 대학교 (문학사)와 머튼 칼리지, 옥스퍼드 (DPhil)에서 공부했다. 원래 중세사를 전공했지만, 1970년대에 현대 독일 사회사 연구로 전환했다. 처음에는 볼턴 수도원의 경제사에 관심을 가졌다. 맨체스터에서 중세사 강사로 재직하면서 중세 시대 독일 농민을 연구하기 위해 독일어를 배웠다. 1972년 바이에른을 방문했고, 뮌헨의 한 카페에서 만난 노인으로부터 "당신 영국인들은 정말 어리석었어요. 우리와 손을 잡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함께라면 우리는 볼셰비즘을 물리치고 지구를 지배할 수 있었을 텐데요!"라는 말을 듣고 충격을 받았다. 그는 또한 "유대인은 이!"라고 덧붙였다. 이 사건으로 인해 커쇼는 독일의 평범한 사람들이 어떻게, 왜 나치즘을 지지할 수 있었는지 알고 싶어 했다.[7]2. 2. 나치즘 연구로의 전환
이언 커쇼는 1970년대에 현대 독일의 사회사 연구로 전환했다.[4][5][6][7] 처음에는 볼턴 수도원의 경제사에 주로 관심을 가졌다. 맨체스터에서 중세사 강사로 재직하면서 커쇼는 중세 시대의 독일 농민을 연구하기 위해 독일어를 배웠다. 1972년 바이에른을 방문했고, 뮌헨의 한 카페에서 만난 노인으로부터 "당신 영국인들은 정말 어리석었어요. 우리와 손을 잡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함께라면 우리는 볼셰비즘을 물리치고 지구를 지배할 수 있었을 텐데요!"라는 말을 듣고 충격을 받았다. 그는 또한 "유대인은 이!"라고 덧붙였다. 이 사건으로 인해 커쇼는 독일의 평범한 사람들이 어떻게, 왜 나치즘을 지지할 수 있었는지 알고 싶어 했다.[7]2. 3. 학문적 경력
이언 커쇼는 1943년 4월 29일 영국 랭커셔 올덤에서 태어났다.[4][5] 카운트힐 문법 학교, 세인트 베데스 칼리지, 맨체스터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리버풀 대학교 (문학사)와 머튼 칼리지, 옥스퍼드 (DPhil)에서 공부했다. 원래 중세사를 전공했지만, 1970년대에 현대 독일의 사회사 연구로 전환했다.[7] 맨체스터에서 중세사 강사로 재직하면서 중세 시대의 독일 농민을 연구하기 위해 독일어를 배웠다.[7] 현재는 셰필드 대학교 명예 교수이다.커쇼는 기능주의와 의도주의 논쟁에서 기능주의 학파에 더 기울어져 있지만, 두 학파의 종합을 주장한다. 그는 히틀러가 대량 학살 정책의 발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주장했지만, 홀로코스트로 이어진 많은 조치들이 히틀러의 직접적인 명령 없이 많은 하위 관리들에 의해 취해졌으며, 그러한 조치가 그들에게 호의를 얻을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다고 주장했다.[53] 커쇼는 나치의 반유대주의를 부인하지 않으면서도, 나치 엘리트 내의 끊임없는 관료적 권력 투쟁과 점점 더 급진적인 반유대주의로의 전환에 의해 야기된 나치 독일의 "누적된 급진화"로 인해 홀로코스트가 발생했다는 견해를 지지한다.
커쇼는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히틀러에 대한 자신의 설명이 게르하르트 바인베르크, 휴 트레버-로퍼, 루시 다비도비츠 및 에버하르트 잭켈과 같은 의도주의 역사학자들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음을 인정한다.[18] 커쇼는 의도주의 역사학자들이 그린 히틀러의 모습, 즉 사회적 다윈주의, ''푈키쉬'' 반유대주의, 군국주의, 그리고 ''생존권''에 대한 인지된 필요성에 사로잡힌 열광적인 이데올로그라는 점을 받아들인다.[18]
1992년 에세이 "즉흥적인 대량 학살?"에서 커쇼는 1939년 폴란드에서 독일로 병합된 바르테가우 지역의 ''가울라이터'' 아르투르 그라이저의 민족 청소 캠페인이 1941년까지 어떻게 대량 학살 캠페인으로 이어졌는지 추적하면서, 그 과정은 마스터 플랜의 완성이 아닌 "즉흥적인 대량 학살"이라고 주장했다.[54] 커쇼는 홀로코스트를 의도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계획이 아닌, 기능주의자들이 설명하는 나치 국가의 "누적된 급진화"로 인한 과정으로 본다.
3. 주요 연구 및 이론
이언 커쇼는 나치 독일의 역사 서술에 관한 연구로 유명하다. 1985년 출판된 ''나치 독재: 해석의 문제와 관점''에서 나치 시대 역사 서술의 문제점을 다루며,[18] 나치 시대에 대한 상반된 견해와 논쟁점들을 제시했다.[19]
- 나치 시대를 ''도이치툼''(독일주의)의 정점으로 보는 관점과 마르크스주의적 관점 간의 논쟁
- ''존더베크''(독일의 중세 이후 발전의 독특한 길)에 대한 찬반 논쟁
- 나치즘을 전체주의로 보는 관점과 파시즘으로 보는 관점 간의 논쟁
- 홀로코스트를 ''임시변통'' 과정으로 보는 "기능주의적" 해석과 아돌프 히틀러에 초점을 맞추고 홀로코스트가 계획된 것이라고 주장하는 "의도주의적" 해석 간의 논쟁[19]
커쇼는 이러한 해석들이 쉽게 조화될 수 없으며, 복잡한 역사 서술을 설명하기 위한 지침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19] 그는 "역사철학적", "정치-이념적", 도덕적 문제들을 고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18] 2015년 판 ''나치 독재''에서 커쇼는 소련과의 비교는 정당하다고 주장했다.[20]
2008년 인터뷰에서 마르틴 브로자트, 한스 멈젠 등을 주요 영향으로 꼽았다.[21] 메이슨의 "정치의 우선성" 개념을 지지했지만,[21] "전쟁으로의 도피" 이론에는 회의적이었다.[22] 역사학자 논쟁에서 에른스트 놀테 등을 비판했다.[23] 나치즘은 급진적 파시즘으로, 존더베크 논쟁에서는 위르겐 코카를 지지한다.[24]
''나치 독재'' 2000년 판에서 게르하르트 리터와 프리드리히 마이네케를 비판했다.[25] 라이너 치텔만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었다.[26] 나치 외교 정책 논쟁에서는 "대륙주의" 입장을 취했다.[27][28] ''비더슈탄트'' (저항) 논쟁에서는 ''근본주의적'' 접근과 ''사회적'' 접근을 구분하고, ''레지스텐츠'' 개념을 비판했다.[31][32] 에델바이스 해적을 예시로 사용했다.[35]
커쇼는 "사람 없는 저항"을 언급하며,[37] 마르틴 브로자트와 사울 프리드랜더 논쟁에서는 중립적 입장을 취했다.[38] 1996년 "골드하겐 논란"에서는 다니엘 골드하겐을 비판했다.[39]
기능주의-의도주의 논쟁에서 커쇼는 나치 국가의 구조를 중요하게 보며, 나치 독일이 경쟁 관료주의의 혼란스러운 집합체였다는 마르틴 브로자트와 한스 모음젠의 견해에 동의한다. 나치 독재는 "권력 카르텔" 내 여러 블록의 불안정한 연합이었으며,[42] 1936년 이후 "급진적인" 블록이 우위를 차지했다.[43]
커쇼는 히틀러의 중요성을 독일 국민의 인식에서 찾았다.[44] 히틀러를 "비인물"로 묘사하며, 위인 사관을 비판했다.[45][46] 나치 독일 역사를 히틀러 중심으로 설명하는 것을 비판했다.[47] 히틀러의 결함으로 홀로코스트/제2차 세계 대전을 설명하는 "개인화된" 이론을 비판한다.[48]
커쇼는 히틀러의 리더십이 막스 베버의 카리스마적 리더십 이론의 사례라고 주장했다.[18][50] "지도자를 향해 일한다(Working Towards the Führer)"는 이론을 제시하며,[57] 나치 독일 관리들이 히틀러의 의도를 충족하거나 소망을 정책으로 바꾸려 했다고 주장한다.[57] 히틀러는 "게으른 독재자"였고,[59] 1938년까지 독일 국가는 경쟁 기관들의 혼란으로 전락했다.[64] 이러한 경쟁이 "누적적 급진화"를 야기했고, 독일 관료들이 "유대인 문제"에 대해 "급진적인" 해결책을 실행했다고 주장한다.[65]
히틀러의 권력 작동 예시로, 알베르트 포르스터와 아르투어 그라이저에게 폴란드 지역 "독일화"를 지시하고 "어떤 질문도 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한 것을 들었다.[66][67] 커쇼는 히틀러의 비전이 독일 관리들의 극단적 조치를 자극했고, 홀로코스트로 이어졌다고 본다.[68] 오토 도브 쿨카는 "지도자를 향해 일한다"는 개념을 칭찬했다.[69]
커쇼는 기능주의 역사학 배경에도 불구, 의도주의 역사학자들에게 빚을 지고 있음을 인정한다.[18] 1992년 에세이에서 아르투르 그라이저의 민족 청소 캠페인을 "즉흥적인 대량 학살"이라고 주장했다.[54] 홀로코스트는 계획이 아닌 과정으로, 1941년 후반기에 "최종 해결책"이 대량 학살을 의미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55]
3. 1. 바이에른 프로젝트와 '히틀러 신화'
1975년, 커쇼는 마르틴 브로자트의 "바이에른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브로자트는 커쇼에게 평범한 사람들이 히틀러를 어떻게 바라봤는지 조사하도록 권했다.[7] 이 연구를 바탕으로 커쇼는 나치 독일에 관한 첫 번째 저서인 《히틀러 신화: 제3제국의 이미지와 현실》(1980)을 집필했다.[7] 이 책은 독일의 "히틀러 숭배" 현상, 요제프 괴벨스에 의해 어떻게 발전했는지, 히틀러 신화가 어떤 사회 집단에 어필했는지, 어떻게 부상하고 쇠퇴했는지 등을 다루었다."바이에른 프로젝트"와 커쇼의 ''알타크스게쉬테''(일상사) 분야 연구에서 비롯된 또 다른 저서는 《제3제국의 여론과 정치적 반대》였다. 이 책에서 커쇼는 1983년 바이에른에서 나치 시대의 경험을 민중의 입장에서 고찰했다. 커쇼는 평범한 사람들이 나치 독재에 어떻게 반응했는지, 사람들이 정권에 순응하는 방식과 반대의 정도와 한계를 살펴보았다. 커쇼는 연구 대상에 대해 "나치에 전적으로 동조하지도, 노골적으로 반대하지도 않은, 혼란스러운 다수, 즉 나치의 이념적 침투의 징후를 보이면서도 선전 조작의 명확한 한계를 보여주는 사람들의 태도"라고 묘사했다.[9] 그는 서문에서 "만약 그때 내가 있었다면 지하 저항 투쟁에 참여한 확신에 찬 반나치주의자가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하지만 사실 나는 내가 글을 쓰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혼란스러워하고 무력감을 느꼈을 것이다."라고 적었다.[10]
커쇼는 괴벨스가 나치 선전의 ''민족공동체''(Volksgemeinschaft)를 창출하는 데 실패했으며, 제3제국 시대 동안 대부분의 바이에른 사람들이 정치보다는 일상생활에 훨씬 더 관심이 있었다고 주장했다.[11] 그는 바이에른 사람들의 대다수가 반유대주의자이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유대인에게 일어나는 일에 무관심했다고 결론 내렸다.[12] 또한, 유대인을 싫어하고 전통적인 가톨릭 편견에 물든 대다수 평범한 사람들의 반유대주의와, 유대인을 증오했던 나치당의 이념적이고 훨씬 더 급진적인 ''푈키쉬'' 반유대주의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고 결론 내렸다.[12]
커쇼는 대부분의 바이에른 사람들이 크리스탈나흐트 포그롬의 폭력을 비난했으며, 나치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바이에른 유대인 공동체의 구성원들과의 사회적 관계를 계속 유지했다고 밝혔다.[13] 그는 나치당이 반유대주의 증오를 증가시키기 위한 수많은 캠페인을 기록했으며, 바이에른의 반유대주의 활동의 압도적인 대다수가 소수의 열성적인 나치당원들의 소행이었다는 점을 지적했다.[13] 전반적으로, 커쇼는 유대인에 대한 대중의 분위기가 그들의 운명에 대한 무관심이었다고 언급했다.[13] 그는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대부분의 바이에른 사람들이 홀로코스트에 대해 희미하게나마 알고 있었지만, "유대인 문제의 최종 해결책"보다 전쟁에 훨씬 더 관심이 있었고, "아우슈비츠로 가는 길은 증오로 건설되었지만 무관심으로 포장되었다"는 주목할 만한 주장을 했다.[14][15]
커쇼의 이러한 평가는 이스라엘 역사가 오토 도브 쿨카와 캐나다 역사가 마이클 한스 케이터의 비판에 직면했다. 케이터는 커쇼가 대중적 반유대주의의 정도를 축소했으며, 나치 독일의 "자발적인" 반유대주의 행위의 대부분이 조작된 것이었음을 인정하면서도, 이러한 행위에 상당수의 독일인들이 관여했기 때문에 나치의 극단적인 반유대주의를 단지 위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는 것은 잘못이라고 주장했다.[16]
쿨카는 대부분의 독일인들이 커쇼가 《제3제국의 여론과 정치적 반대》에서 묘사한 것보다 더 반유대주의적이었으며, "무관심"보다는 "수동적 공모"가 독일인의 쇼아에 대한 반응을 설명하는 더 적절한 용어일 것이라고 주장했다.[17]
3. 2. 제3제국의 여론과 정치적 반대
1975년, 커쇼는 마르틴 브로자트의 "바이에른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브로자트는 커쇼에게 평범한 사람들이 히틀러를 어떻게 바라봤는지 조사하도록 권했다.[7] 이 프로젝트의 연구 결과로, 커쇼는 나치 독일에 관한 첫 번째 저서인 『히틀러 신화: 제3제국의 이미지와 현실』(원제: Der Hitler-Mythos: Volksmeinung und Propaganda im Dritten Reich, 1980)을 집필했다.[7]"바이에른 프로젝트"와 커쇼의 ''알타크스게쉬테''(일상사) 분야 연구에서 비롯된 또 다른 저서는 『제3제국의 여론과 정치적 반대』였다. 1983년 출간된 이 책에서 커쇼는 바이에른 지역을 중심으로 나치 시대의 경험을 민중의 입장에서 고찰했다. 그는 평범한 사람들이 나치 독재에 어떻게 반응했는지, 사람들이 정권에 순응하는 방식과 반대의 정도와 한계를 살펴보았다. 커쇼는 자신의 연구 대상에 대해 "나치에 전적으로 동조하지도, 노골적으로 반대하지도 않은, 혼란스러운 다수, 즉 나치의 이념적 침투의 징후를 보이면서도 선전 조작의 명확한 한계를 보여주는 사람들의 태도"라고 묘사했다.[9] 그는 서문에서 "만약 그때 내가 있었다면 지하 저항 투쟁에 참여한 확신에 찬 반나치주의자가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하지만 사실 나는 내가 글을 쓰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혼란스러워하고 무력감을 느꼈을 것이다"라고 적었다.[10]
커쇼는 요제프 괴벨스가 나치 선전을 통해 ''민족공동체''(Volksgemeinschaft)를 창출하는 데 실패했으며, 제3제국 시대 동안 대부분의 바이에른 사람들이 정치보다는 일상생활에 훨씬 더 관심이 있었다고 주장했다.[11] 그는 바이에른 사람들의 대다수가 반유대주의자이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유대인에게 일어나는 일에 무관심했다고 결론 내렸다.[12] 또한, 유대인을 싫어하고 전통적인 가톨릭 편견에 물든 대다수 평범한 사람들의 반유대주의와, 유대인을 증오했던 나치당의 이념적이고 훨씬 더 급진적인 ''푈키쉬'' 반유대주의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고 결론 내렸다.[12]
커쇼는 대부분의 바이에른 사람들이 크리스탈나흐트 포그롬의 폭력을 비난했으며, 나치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바이에른 유대인 공동체의 구성원들과의 사회적 관계를 계속 유지했다고 밝혔다.[13] 그는 나치당이 반유대주의 증오를 증가시키기 위한 수많은 캠페인을 벌였지만, 바이에른의 반유대주의 활동 대부분이 소수의 열성적인 나치당원들의 소행이었다고 지적했다.[13] 전반적으로, 커쇼는 유대인에 대한 대중의 분위기가 그들의 운명에 대한 무관심이었다고 언급했다.[13] 그는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대부분의 바이에른 사람들이 홀로코스트에 대해 희미하게나마 알고 있었지만, "유대인 문제의 최종 해결책"보다 전쟁에 훨씬 더 관심이 있었고, "아우슈비츠로 가는 길은 증오로 건설되었지만 무관심으로 포장되었다"는 주목할 만한 주장을 했다.[14][15]
커쇼의 이러한 평가는 이스라엘 역사가 오토 도브 쿨카와 캐나다 역사가 마이클 한스 케이터의 비판을 받았다. 케이터는 커쇼가 대중적 반유대주의의 정도를 축소했으며, 나치 독일의 "자발적인" 반유대주의 행위의 대부분이 조작된 것이었음을 인정하면서도, 이러한 행위에 상당수의 독일인들이 관여했기 때문에 나치의 극단적인 반유대주의를 단지 위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는 것은 잘못이라고 주장했다.[16]
쿨카는 대부분의 독일인들이 커쇼가 『제3제국의 여론과 정치적 반대』에서 묘사한 것보다 더 반유대주의적이었으며, "무관심"보다는 "수동적 공모"가 독일인의 쇼아에 대한 반응을 설명하는 더 적절한 용어일 것이라고 주장했다.[17]
3. 3. '지도자를 향해 일하다(Working Towards the Führer)'
마르틴 브로자트와 마찬가지로 커쇼는 나치 독일의 발전 방식에 대한 설명으로서 히틀러(또는 다른 누구)의 인격보다 나치 국가의 구조를 훨씬 더 중요하게 본다. 커쇼는 브로자트와 독일 역사학자 한스 모음젠이 주장한 견해, 즉 나치 독일은 끊임없이 서로 권력 투쟁을 벌이는 경쟁 관료주의의 혼란스러운 집합체였다는 견해에 동의한다. 커쇼의 견해에 따르면, 나치 독재는 전체주의적 단일체가 아니라, NSDAP, 대기업, 독일 국가 관료주의, 군대, 그리고 SS/경찰 기관으로 구성된 "권력 카르텔" 내 여러 블록의 불안정한 연합이었다(그리고 각 "권력 블록"은 분파로 나뉘었다).[42] 커쇼는 1936년 경제 위기 이후 SS/경찰 및 나치당과 같은 더 "급진적인" 블록이 다른 블록에 비해 점차적인 우위를 차지했으며, 이후 다른 블록을 희생하여 그들의 권력을 증가시켰다고 본다.[43]
커쇼에게 있어 히틀러의 진정한 중요성은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독일 국민이 그를 어떻게 인식했느냐에 있다.[44] 히틀러의 전기에서 커쇼는 그를 궁극적인 "비인물", 즉 요아힘 페스트가 그에게 부여한 "부정적 위대함"조차 결여된 지루하고 평범한 사람으로 묘사했다.[45] 커쇼는 위인 사관을 거부하며 나치 독일에서 일어난 모든 것을 히틀러의 의지와 의도의 결과로 설명하려는 사람들을 비판했다.[46]
커쇼는 히틀러에 대한 과도한 집중의 문제에 대해 "최고의 전기조차도 때로는 1933년에서 1945년 사이의 독일 역사가 독재자의 의지의 표현에 불과한 수준으로 히틀러의 개인적 권력을 격상시키는 위험에 처한 것처럼 보였다"라고 썼다.[47] 그는 홀로코스트 및/또는 제2차 세계 대전을 히틀러의 어떤 결함, 의학적 또는 기타 결함으로 인한 것으로 설명하려는 "개인화된" 이론에 대해 낮은 평가를 내린다.[48]
커쇼는 벨러의 의견에 동의한다. 히틀러의 의학적 상태에 대한 그러한 이론은 입증하기 매우 어려울 뿐만 아니라, 나치 독일에서 일어난 모든 것을 한 결함 있는 개인에게 더 많은 책임을 돌림으로써 나치 독일의 현상을 개인화하는 결과를 낳기 때문이다.[48]
커쇼의 히틀러 전기는 히틀러의 권력, 즉 그가 어떻게 권력을 얻었고 어떻게 유지했는지에 대한 연구이다.[49] 1991년 히틀러에 대한 책에서 처음 제시한 아이디어를 따라, 커쇼는 히틀러의 리더십이 막스 베버의 카리스마적 리더십 이론의 모범적인 사례라고 주장했다.[18][50]
커쇼는 히틀러가 나치 독일에서 비교적 중요하지 않은 인물이었다는 모음젠의 "약한 독재자" 테제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히틀러가 나치 독일 정부의 일상적인 행정 처리에 큰 역할을 하지 않았다는 아이디어에는 동의한다. 커쇼는 이러한 역설을 설명하기 위해 "지도자를 향해 일한다(Working Towards the Führer)"는 이론을 제시하는데, 이 문구는 1934년 프로이센 공무원 베르너 빌리켄스의 연설에서 따온 것이다.[57]
커쇼는 나치 독일에서 독일 국가와 당 관료의 관리들이 일반적으로 히틀러의 의도를 충족하기 위해 정책을 시작하거나, 또는 히틀러가 종종 애매하고 모호하게 표현한 소망을 정책으로 바꾸려고 시도했다고 주장해 왔다.[57] 커쇼는 히틀러가 노먼 리치와 카를 디트리히 브라허가 옹호하는 "제3제국의 지배자" 테제가 시사하는 권력을 소유했다는 데 동의하지만, 히틀러는 "게으른 독재자", 즉 나치 독일의 일상적인 운영에 거의 관여하는 데 관심이 없는 무관심한 독재자였다고 주장했다.[59] 유일한 예외는 히틀러가 1930년대 후반부터 점점 더 관여하게 된 외교 정책과 군사적 결정 분야였다.[59]
커쇼는 1938년까지 독일 국가는 히틀러의 호의를 얻기 위해 서로 경쟁하는 라이벌 기관들의 희망 없는 다원적 혼란으로 전락했고, 그 당시 호의만이 정치적 정당성의 유일한 원천이 되었다고 주장한다.[64] 커쇼는 이러한 경쟁이 독일의 "누적적 급진화"를 야기했다고 보고, 히틀러가 어떤 문제에 대해서도 항상 가장 급진적인 해결책을 선호했지만, 대부분의 경우 히틀러의 승인을 얻으려는 독일 관료들이 히틀러의 지시를 받기보다는 스스로 주도하여 "유대인 문제"와 같은 인식된 문제에 대해 점점 더 "급진적인" 해결책을 실행했다고 주장한다.[65]
히틀러의 권력 작동 방식에 대한 예시로, 커쇼는 히틀러가 알베르트 포르스터와 아르투어 그라이저에게 1939년 독일에 병합된 폴란드 북서부 지역을 향후 10년 안에 "독일화"하라는 지시를 내린 것과, 이 과정에 대해 "어떤 질문도 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한 것을 들었다.[66][67] 포르스터와 그라이저는 그들의 "가우"를 "독일화"하기 위해 다른 방식을 사용했는데, 포르스터는 단순히 자신의 "가우"에 있는 현지 폴란드인들이 "독일 혈통"이 있다고 서명하게 했고, 그라이저는 그의 "가우"에서 폴란드인들을 잔혹하게 민족 청소하는 프로그램을 실행했다. 이는 히틀러가 어떻게 사건을 시작했는지, 그리고 그의 "가울라이터"가 히틀러의 소망이라고 믿는 것을 추구하기 위해 어떻게 다른 방법을 사용할 수 있었는지를 보여준다.[66][67] 커쇼의 견해로는, 인종적으로 정화된 "민족 공동체(Volksgemeinschaft)"에 대한 히틀러의 비전이 독일 관리들이 그의 승인을 얻기 위해 점점 더 극단적인 조치를 취하도록 자극했고, 이는 홀로코스트로 이어졌다.[68]
이스라엘 역사학자 오토 도브 쿨카는 "지도자를 향해 일한다"는 개념이 홀로코스트가 어떻게 발생했는지를 이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며, "기능주의자"와 "의도주의자" 이론의 장점을 결합하고 단점을 피한다고 칭찬했다.[69]
3. 4. 기능주의-의도주의 논쟁에서의 입장
마르틴 브로자트와 마찬가지로, 커쇼는 나치 독일의 발전 방식에 대한 설명으로서 히틀러(또는 다른 누구)의 인격보다 나치 국가의 구조를 훨씬 더 중요하게 본다. 커쇼는 브로자트와 독일 역사학자 한스 모음젠이 주장한 견해, 즉 나치 독일은 끊임없이 서로 권력 투쟁을 벌이는 경쟁 관료주의의 혼란스러운 집합체였다는 견해에 동의한다. 커쇼의 견해에 따르면, 나치 독재는 전체주의적 단일체가 아니라, NSDAP, 대기업, 독일 국가 관료주의, 군대, 그리고 SS/경찰 기관으로 구성된 "권력 카르텔" 내 여러 블록의 불안정한 연합이었으며, 각 "권력 블록"은 분파로 나뉘었다.[42] 커쇼는 1936년 경제 위기 이후 SS/경찰 및 나치당과 같은 더 "급진적인" 블록이 다른 블록에 비해 점차적인 우위를 차지했으며, 이후 다른 블록을 희생하여 그들의 권력을 증가시켰다고 본다.[43]커쇼에게 있어 히틀러의 진정한 중요성은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독일 국민이 그를 어떻게 인식했느냐에 있다.[44] 히틀러의 전기에서 커쇼는 그를 궁극적인 "비인물", 즉 요아힘 페스트가 그에게 부여한 "부정적 위대함"조차 결여된 지루하고 평범한 사람으로 묘사했다.[45] 커쇼는 위인 사관을 거부하며 나치 독일에서 일어난 모든 것을 히틀러의 의지와 의도의 결과로 설명하려는 사람들을 비판했다.[46] 그는 독일에는 6천 8백만 명이 있었고, 한 사람의 프리즘을 통해서만 6천 8백만 명의 운명을 설명하려는 것은 결함이 있는 입장이라고 보았기에, 나치 시대 독일 역사를 오로지 히틀러를 통해 설명하려는 것은 터무니없다고 주장했다.[47]
커쇼는 히틀러에 대한 과도한 집중의 문제에 대해 "최고의 전기조차도 때로는 1933년에서 1945년 사이의 독일 역사가 독재자의 의지의 표현에 불과한 수준으로 히틀러의 개인적 권력을 격상시키는 위험에 처한 것처럼 보였다."라고 썼다.[47] 그는 홀로코스트 및/또는 제2차 세계 대전을 히틀러의 어떤 결함, 의학적 또는 기타 결함으로 인한 것으로 설명하려는 "개인화된" 이론에 대해 낮은 평가를 내린다.[48]
커쇼는 한스-울리히 벨러의 의견에 동의하며, 히틀러의 의학적 상태에 대한 그러한 이론이 입증하기 매우 어렵다는 문제 외에도, 나치 독일에서 일어난 모든 것을 한 결함 있는 개인에게 더 많은 책임을 돌림으로써 나치 독일의 현상을 개인화하는 결과를 낳았다고 보았다.[48]
커쇼의 히틀러 전기는 히틀러의 권력, 즉 그가 어떻게 권력을 얻었고 어떻게 유지했는지에 대한 연구이다.[49] 1991년 히틀러에 대한 책에서 처음 제시한 아이디어를 따라, 그는 히틀러의 리더십이 막스 베버의 카리스마적 리더십 이론의 모범적인 사례라고 주장했다.[18][50] 커쇼의 1991년 저서 ''히틀러: 권력의 초상''은 사람들이 히틀러를 어떻게 보았는지에 대해 쓰는 것에서 히틀러에 대해 쓰는 것으로 그에게 변화를 가져왔다.[18] 1998년과 2000년에 출판된 히틀러의 2권짜리 전기에서 커쇼는 "내가 하려고 했던 것은 내가 이미 연구했던 사회적, 정치적 맥락 안에 히틀러를 포함시키는 것이었다"라고 말했다.[18] 그는 앨런 불록의 전기에서 히틀러를 "사기꾼" (기회주의적 모험가)으로 묘사한 것이 만족스럽지 않으며, 요아힘 페스트가 히틀러가 얼마나 "위대한" 인물이었는지를 결정하려는 시도는 무의미하다고 본다.[51]
기능주의와 의도주의 논쟁에서, 커쇼는 두 학파의 종합을 주장해왔지만, 기능주의 학파에 더 기울어져 있다. 몇몇 의견 불일치에도 불구하고, 그는 Mommsen을 "훌륭한 개인적인 친구"이자 "나치즘에 대한 내 연구에 중요한 활력을 불어넣는 자극"이라고 칭했다.[2] 커쇼는 2권으로 된 히틀러 전기에서 히틀러가 대량 학살 정책의 발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주장했지만, 또한 홀로코스트로 이어진 많은 조치들이 히틀러의 직접적인 명령 없이 많은 하위 관리들에 의해 취해졌으며, 그러한 조치가 그들에게 호의를 얻을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다고 주장했다.[53] 그는 나치의 급진적 반유대주의를 부인하지 않으면서도, 나치 엘리트 내의 끊임없는 관료적 권력 투쟁과 점점 더 급진적인 반유대주의로의 전환에 의해 야기된 나치 독일의 "누적된 급진화"로 인해 홀로코스트가 발생했다는 Mommsen의 견해를 지지한다.
기능주의 역사학의 배경에도 불구하고, 커쇼는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히틀러에 대한 자신의 설명이 게르하르트 바인베르크, 휴 트레버-로퍼, 루시 다비도비츠 및 에버하르트 잭켈과 같은 의도주의 역사학자들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음을 인정한다.[18] 그는 의도주의 역사학자들이 그린 히틀러의 모습, 즉 사회적 다윈주의, ''푈키쉬'' 반유대주의 (유대인을 다른 인류와 생물학적으로 다른 "인종"으로 간주하는 것, 종교가 아닌), 군국주의, 그리고 ''생존권''에 대한 인지된 필요성에 사로잡힌 열광적인 이데올로그라는 점을 받아들인다.[18]
1992년 에세이 "즉흥적인 대량 학살?"에서 커쇼는 1939년 폴란드에서 독일로 병합된 바르테가우 지역의 ''가울라이터'' 아르투르 그라이저의 민족 청소 캠페인이 1941년까지 어떻게 대량 학살 캠페인으로 이어졌는지 추적하면서, 그 과정은 마스터 플랜의 완성이 아닌 "즉흥적인 대량 학살"이라고 주장했다.[54] 그는 홀로코스트를 의도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계획이 아닌, 기능주의자들이 설명하는 나치 국가의 "누적된 급진화"로 인한 과정으로 본다. 히틀러 전기에서 미국의 역사학자 크리스토퍼 브라우닝의 연구를 인용하면서, 커쇼는 1939-1941년 기간 동안 "유대인 문제의 최종 해결책"이라는 문구가 "영토 해결책"이었으며, 니스코 계획 및 마다가스카르 계획과 같은 계획이 진지했고, 1941년 후반기에야 "최종 해결책"이 대량 학살을 의미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55] 홀로코스트를 계획이 아닌 과정으로 보는 이러한 견해는 히틀러가 1918년 11월 초에 대량 학살을 결정했고 그가 한 모든 일이 그 목표를 향해 향했다는 루시 다비도비츠가 옹호하는 극단적인 의도주의적 접근법의 정반대이다.[56]
3. 5. '역사학자 논쟁(Historians' Dispute)'에서의 입장
1985년, 커쇼는 나치 독일의 역사 서술에 관한 책인 ''나치 독재: 해석의 문제와 관점''을 출판하면서 나치 시대 역사 서술의 문제점을 고찰했다.[18] 그는 나치 시대에 대한 상반된 견해와 논쟁에서 나타나는 불일치를 지적했다. 이러한 논쟁에는 다음이 포함된다.[19]- 나치 시대를 ''도이치툼''(독일주의)의 정점으로 보는 관점과 나치즘을 자본주의의 정점으로 보는 마르크스주의자 사이의 논쟁
- ''존더베크''(독일의 중세 이후 발전의 독특한 길)를 주장하는 사람들과 반대하는 사람들 사이의 논쟁
- 나치즘을 전체주의 또는 파시즘으로 보는 관점 차이의 논쟁
- 독일 관료주의와 홀로코스트를 ''임시변통'' 과정으로 강조하는 "기능주의적" 해석과 히틀러에 초점을 맞추고 홀로코스트가 히틀러의 정치 경력 초반부터 계획된 것이라고 주장하는 "의도주의적" 해석 사이의 논쟁[19]
커쇼는 기능주의적 관점과 의도주의적 관점은 쉽게 조화될 수 없으며, 이러한 문제를 둘러싼 복잡한 역사 서술을 설명하는 지침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19]
나치즘을 자본주의의 정점으로 보는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은 나치 현상이 보편적이며 자본주의가 지배적인 경제 체제인 모든 사회에서 파시즘이 권력을 잡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반면, 나치즘을 ''도이치툼''의 정점으로 보는 관점은 나치 현상이 독일에만 국한된 지역적이고 특수한 현상임을 의미한다. 커쇼는 이 시기에 대해 글을 쓰는 모든 역사가들은 "역사철학적", "정치-이념적", 도덕적 문제들을 고려해야 한다고 보았다.[18]
''나치 독재'' 2015년 판에서 커쇼는 나치 독일과 소련 모두에 대한 일반적인 "전체주의" 패러다임 적용에 대한 비판을 인정하면서도, 히틀러 치하의 독일과 스탈린 치하의 소련의 통치 형태와 기술을 비교하는 것은 정당하다고 주장했다.[20]
2008년 인터뷰에서 커쇼는 마르틴 브로자트, 한스 멈젠 등을 자신의 주요 지적 영향으로 꼽았다.[21] 그는 정통 마르크스주의 "경제 우선" 개념에 반하여, 독일 대기업이 나치 정권에 봉사했다는 메이슨의 "정치의 우선성" 개념을 지지했다.[21] 커쇼는 1939년의 경제 위기가 나치 정권을 전쟁으로 몰아넣었다는 메이슨의 "전쟁으로의 도피" 이론에는 회의적이었다.[22]
1986-1989년의 ''역사학자 논쟁''(Historians' Dispute)에서 커쇼는 브로자트를 따라 에른스트 놀테 등의 저작과 견해를 비판했다.[23] 커쇼는 ''나치 독재'' 1989년 판에서 이들의 견해를 반박하는 데 한 장을 할애했다. 나치즘을 전체주의 또는 파시즘으로 보는 논쟁과 관련하여 커쇼는 전체주의적 접근 방식이 가치가 없지는 않지만, 나치즘은 매우 급진적인 유형의 파시즘으로 간주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23] ''존더베크'' 논쟁에 대해 커쇼는 위르겐 코카의 온건한 ''존더베크'' 접근 방식이 가장 만족스러운 역사적 설명이라고 생각한다.[24]
''나치 독재'' 2000년 판에서 커쇼는 게르하르트 리터가 "미치광이"(즉, 히틀러)가 제2차 세계 대전을 "혼자서" 일으켰다는 주장에 대해 비판했고, 프리츠 피셔의 역사적 접근 방식이 독일 역사를 이해하고 반성하는 더 나은 방법이라고 덧붙였다.[25] 커쇼는 프리드리히 마이네케가 나치즘이 단지 역사의 매우 불행한 ''베트리브운팔'' (산업 사고)일 뿐이라고 했던 1946년의 진술을 비판했다.[25]
커쇼는 2003년 에세이에서 리터와 마이네케를 비판하면서, 그들이 ''베트리브운팔'' 이론을 옹호하거나 모든 것을 히틀러에게 탓함으로써 독일의 과거를 덮으려 했다고 말했다.[2] 독일 역사가 라이너 치텔만의 저작에 대해 커쇼는 치텔만이 히틀러의 발언에서 단지 부차적인 고려 사항이었던 것을 주요 수준으로 격상시켰고, "현대화"가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명확한 정의를 제시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26]
나치 외교 정책 논쟁에서 커쇼는 "대륙"의 입장을 취하는 경향이 있다.[27][28] 커쇼는 히틀러가 소련의 파괴를 달성하기 위해 영국과의 동맹을 기반으로 한 외교 정책 프로그램을 실제로 수립했다는 주장에 동의하지만, 영국의 무관심이 이 프로젝트를 망쳐 1939년에 히틀러가 영국과 전쟁을 벌이게 되는 상황으로 이어졌다고 주장했다.[29] 커쇼는 히틀러가 외교 정책에 대한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지 않았고, 대신 그의 외교 정책은 즉각적인 반응이었음을 주장하는 역사가들의 저작에 상당한 장점이 있다고 본다.[30]
''비더슈탄트'' (저항)에 대한 역사적 논쟁과 관련하여, 커쇼는 ''근본주의적'' 접근 방식과 ''사회적'' 접근 방식이 있다고 주장했다.[31] 커쇼는 브로자트의 ''레지스텐츠'' (면역) 개념은 ''알타스게쉬히테'' 접근 방식에서는 잘 작동하지만, 고위 정치 분야에서는 덜 효과적이며, 한 사람의 행동의 "결과"에만 초점을 맞추고 "의도"를 고려하지 못한다고 보았다.[32] 커쇼는 ''비더슈탄트''라는 용어는 나치 시스템의 완전한 전복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에게만 사용해야 하며, 정권을 전복하려는 의도 없이 정권의 바람에 반하는 행동을 하는 사람들은 반대와 반대로 포함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33] 커쇼는 반대에서 반대, 저항에 이르는 세 가지 밴드가 있다고 보았다.[34] 커쇼는 에델바이스 해적을 그 예로 사용했다.[35]
커쇼는 독일 사회 내부에 많은 반대와 반대가 있었지만, 노동 계급 외에는 저항이 거의 없었다고 보았다.[36] 커쇼는 ''레지스텐츠'' 개념이 많은 장점이 있지만, 나치 정권이 광범위한 지지 기반을 가지고 있었고 "사람 없는 저항"에 대해 말하는 것이 옳다고 결론지었다.[37]
1980년대 후반 마르틴 브로자트와 사울 프리드랜더 사이의 논쟁에서, 커쇼는 프리드랜더가 나치 시대가 역사의 "정상적인" 시기로 취급될 수 없다는 것에 동의했지만, 역사가들은 나치 시대에 다른 시대와 마찬가지로 접근해야 한다고 느꼈다.[38] 커쇼는 나치 범죄를 간과하지 않는다는 조건하에 독일 역사에 대한 ''알타스게쉬히테'' 접근 방식이 그러한 범죄가 어떻게 발생했는지 이해하는 데 많은 것을 제공한다고 썼다.[38]
1996년 "골드하겐 논란" 동안 커쇼는 한스 멈젠이 독일의 "제거주의적 반유대주의" 문화에 대한 다니엘 골드하겐의 주장을 "파괴"했다고 생각했다.[39] 커쇼는 에버하르트 예켈의 ''히틀러의 자발적 처형인''이 "단순히 나쁜 책"이라는 평가에 동의한다고 썼다.[40] 커쇼는 골드하겐에 대해 긍정적인 말은 거의 하지 않았지만, 노먼 핀켈슈타인의 골드하겐에 대한 공격은 과도했고 역사적 이해에 거의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 느꼈다.[41]
4. 저서 및 출판물
출판 연도 | 제목 및 출판 정보 |
---|---|
1969 | 볼턴 수도원 임대 및 성직자; 계정, 1473–1539 (편집) (리즈) |
1973 | 볼턴 수도원. 북부 수도원의 경제 (옥스퍼드) |
1973 | 1315-22년 영국 대기근과 농업 위기 in 과거와 현재, 59 |
1981 | "제3제국의 유대인 박해와 독일 대중의 여론" pp. 261–289 from 레오 배크 연구소 연감, 제26권 |
1983 | 제3제국의 여론과 정치적 반대. 바이에른, 1933–45 (옥스퍼드, 2002년 개정) |
1985 | 나치 독재. 해석의 문제와 관점 (런던, 2000년 4판) |
1987 | "히틀러 신화": 제3제국의 이미지와 현실 (옥스퍼드, 2001년 개정) |
1990 | 바이마르. 왜 독일 민주주의는 실패했는가? (편집) (런던) |
1991 | 히틀러: 권력의 프로필 (런던, 2001년 개정) |
1992 | "임시 학살? 최종 해결의 등장 in argenthau" pp. 51–78 from 왕립 역사 학회 회보'', 제2권 |
1993 | "지도자를 향해 일하다: 히틀러 독재의 본질에 대한 성찰", pp. 103–118 from 현대 유럽사, 제2권, 2호 |
1997 | 스탈린주의와 나치즘: 비교 독재 (편집, 모셰 레빈) (케임브리지) |
1998 | 히틀러 1889–1936: 오만 (런던) |
2000 | 히틀러 1936–1945: 네메시스 (런던) |
2001 | 볼턴 수도원 콤푸투스 1286–1325 (편집, 데이비드 M. 스미스) (런던) |
2004 | 히틀러와 친구 만들기: 런던데리 경과 영국이 전쟁으로 가는 길 (런던) |
2005 | "유럽의 두 번째 30년 전쟁" pp. 10–17 from 오늘의 역사, 제55권, 9호 |
2005 | 벙커에서의 죽음 (펭귄 북스) |
2007 | 운명적 선택: 세상을 바꾼 10가지 결정, 1940–1941 (런던) |
2008 | 히틀러, 독일인, 그리고 최종 해결 (예일) |
2008 | 히틀러 (히틀러 1889–1936 및 히틀러 1936–1945의 단권 요약; 런던) |
2009 | 악마의 행운 작전 발키리의 이야기 (런던: 펭귄 북스) |
2011 | 종말: 히틀러의 독일 1944–45 (앨런 레인) |
2015 | 지옥에서 돌아오다: 유럽, 1914–1949 (앨런 레인) |
2018 | 롤러코스터: 유럽, 1950–2017 (앨런 레인) |
2022 | 개성과 권력: 현대 유럽의 건설자와 파괴자 (펭귄 프레스) |
1973 | 볼턴 수도원: 북부 수도원의 경제, 1286-1325, 옥스퍼드 대학교 출판부 |
1983 | 제3제국의 여론과 정치적 반대, 바이에른 1933-1945, 클래런던 출판부 |
1985 | 나치 독재: 해석의 문제와 관점, E. 아놀드 |
1987 | "히틀러 신화": 제3제국의 이미지와 현실, 클래런던 출판부 |
『히틀러 신화 — 제3제국의 허상과 실상』(시바타 게이지 번역, 토스이쇼보, 1993년) | |
1991 | 히틀러, 롱맨 |
『히틀러 권력의 본질』(이시다 유지 번역, 하쿠스이샤, 1999년) | |
1998 | 히틀러, 1889-1936: 오만, 앨런 레인 |
『히틀러 상 1889-1936 오만』(가와키타 아츠코 번역, 이시다 유지 감수, 하쿠스이샤, 2015년) | |
2000 | 히틀러, 1936-45: 네메시스, 앨런 레인 |
『히틀러 하 1936-1945 천벌』(후쿠나가 미와코 번역, 이시다 유지 감수, 하쿠스이샤, 2016년) | |
2005 | 벙커에서의 죽음, 펭귄 북스 |
2005 | 히틀러와 친구가 되기: 런던데리 경과 영국의 전쟁으로 가는 길, 펭귄 |
2007 | 운명적 선택: 세계를 바꾼 10가지 결정, 1940-1941, 펭귄 프레스 |
『운명의 선택 1940-41 — 세계를 바꾼 10가지 결단』 상・하 (카와우치 타카야 번역, 하쿠스이샤, 2014년) | |
2009 | 악마의 행운: 발키리 작전의 이야기, 펭귄 |
2011 | 종말: 독일 1944-45, 앨런 레인 |
『나치 독일의 종언 1944-45』(미야시타 료오 번역, 하쿠스이샤, 2021년) | |
2015 | 지옥에서 돌아오다: 유럽, 1914-1949, 앨런 레인 |
『지옥의 늪에서 유럽사 1914-1949』(미우라 모토히로・타케다 야스 타카 번역, 하쿠스이샤, 2017년) | |
2018 | 롤러코스터: 유럽, 1950–2017, 앨런 레인 |
『분단과 통합을 향한 시련 유럽사 1950-2017』(미우라 모토히로 번역, 하쿠스이샤, 2019년) | |
1970 | 볼턴 수도원 임대 및 장관 계정, 1473-1539, 요크셔 고고학회 |
1990 | 바이마르: 독일 민주주의는 왜 실패했는가?, 와이덴펠트 앤 니콜슨 |
1997 | 스탈린주의와 나치즘: 비교 독재, 모셰 레빈과 공동 편집, 케임브리지 대학교 출판부 |
5. 수상 및 영예
- 영국 학사원 회원
- 독일 연방 공화국 공로 훈장 수훈 (1994년)[72]
- 울프슨 역사상 수상 (2000년, 저서 《히틀러, 1936–1945: 네메시스》)
- 영국 학사원 도서상 공동 수상 (2001년)[73]
- 왕립 역사학회 회원
- 역사 협회 회원
- 베를린 학제연구원 회원[74]
- 기사 작위(Knight Bachelor) 서임 (2002년, 역사 발전에 기여한 공로, 2002년 생일 기념 서훈)[75]
- 이언 커쇼 경 기념 헌정 논문집 출간 (2004년)[76]
- 엘리자베스 롱퍼드 역사 전기상 수상 (2005년, 《히틀러와 친구되기: 런던데리 경, 나치, 그리고 전쟁으로 가는 길》)
- 티모시 D. 스나이더와 함께 유럽 이해를 위한 라이프치히 도서상 공동 수상 (2012년)[77]
- 카롤루스 대제 메달 수상 (2018년)[78]
참조
[1]
뉴스
Sir Ian Kershaw: Dissecting Hitler
http://news.bbc.co.u[...]
BBC News
2002-06-14
[2]
웹사이트
Beware the Moral High Ground
http://hsozkult.gesc[...]
H-Soz-u-Kult
2009-05-05
[3]
뉴스
Ian Kershaw: Casting light on the shadows
2008-10-19
[4]
서적
Burke's Peerage, Baronetage & Knighthood
Burke's Peerage & Gentry
[5]
문서
See Contemporary Authors, Vol. 137, p. 246f.
[6]
뉴스
Ian Kershaw: 'My inspiration
https://www.theguard[...]
theguardian.com
2000-12-12
[7]
간행물
Ian Kershaw
2001-07
[8]
웹사이트
Hitler 1889-1936 by Ian Kershaw
https://www.thebaill[...]
2023-06-04
[9]
서적
The Holocaust in History
KeyPorter
[10]
서적
The Holocaust in H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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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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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Holocaust in H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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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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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Holocaust in H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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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Hitler's Shadow
Pantheon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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