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른스트 놀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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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에른스트 놀테는 독일의 역사가이자 철학자로, 파시즘, 역사, 철학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저술 활동을 펼쳤다. 1963년 저서 《파시즘의 시대》에서 파시즘을 분석했으며, 1980년대에는 홀로코스트에 대한 논쟁적인 견해를 제시하여 "역사학자 논쟁"을 촉발했다. 그는 20세기를 독일, 소련, 이스라엘의 세 "특이한 국가"의 시대로 보았으며, 특히 나치즘과 홀로코스트에 대한 그의 해석은 논란의 중심에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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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른스트 놀테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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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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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에른스트 놀테 |
원어 이름 | de |
인물 정보 | |
출생 | 1923년 1월 11일, Witten,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 |
사망 | 2016년 8월 18일 (93세), 독일 베를린 |
국적 | 독일 |
배우자 | 아네도레 모르티어 |
자녀 | 게오르크 놀테 |
학력 | |
학사 | 프라이부르크 대학교 |
박사 | 프라이부르크 대학교 |
기타 | 뮌스터 대학교 베를린 대학교 쾰른 대학교 |
경력 | |
직업 | 철학자, 역사가 |
고용주 | 마르부르크 대학교 (1965–1973) 자유 베를린 대학교 (1973–1991, 명예 교수 이후) |
주요 업적 | "초월에 대한 저항"으로서의 일반적인 파시즘 이론 정립 역사가 논쟁 참여 |
수상 | |
수상 내역 | 한스 마르틴 슐라이어 상 (1985) 콘라트 아데나워 상 (2000) 게르하르트 뢰벤탈 명예상 (2011) |
2. 생애
놀테의 모든 역사적 저술은 독일 철학의 전통에 큰 영향을 받았다.[26] 특히 놀테는 역사의 "메타정치적 현상"의 본질을 찾고, 역사의 모든 동기를 부여하는 위대한 아이디어를 발견하려고 했다. 따라서 놀테의 작업은 특정 시대의 특정한 속성과는 반대로 일반적인 속성에 지향되어 있다.[27]
1974년 저서 Deutschland und der kalte Kriegde (''독일과 냉전'')에서 놀테는 분할의 구체적인 역사를 살펴보는 대신, 역사를 통틀어 다른 분열된 국가들을 검토함으로써 1945년 이후 독일의 분할을 연구했다. 그는 독일의 분할을 경쟁 이념에 의해 야기된 분할이라는 "메타정치적" 아이디어의 최고 정점으로 취급했다.[28] 놀테의 관점에서, 독일의 분할은 그 국가를 소련 공산주의와 미국 민주주의 사이의 세계 중심 전장으로 만들었다. 이 두 가지는 모두 "초월"의 경쟁 흐름이었으며, 이는 "초월"의 궁극적인 적이었던 나치 독일을 정복했다.[29] 놀테는 냉전을 다음과 같이 불렀다.
> 1917년 이래 (사실 1776년 초부터 예상되었다) 여러 호전적인 보편주의자들이 무기한으로 수행하는 통일된 세계의 미래 구조를 위한 이념적, 정치적 갈등이며, 각자는 최소한 하나의 주요 국가를 소유하고 있다.[29]
놀테는 Deutschland und der kalte Kriegde을 통해 독일 제국의 가치로 돌아갈 것을 촉구했으며, 국가 사회주의 때문에 독일 민족주의에 대한 불공정한 낙인이 찍힌 것을 종식시킬 것을 요구했다.[30]
1978년, 미국의 역사학자 찰스 S. 메이어는 Deutschland und der kalte Kriegde에서 놀테의 접근 방식을 추상화에 대한 과도한 가치 부여라고 비판했다.[31] 놀테는 추상적인 "최종" 또는 "궁극적" 목적을 추구하는 데 있어 아이디어의 역사에 대한 구체적인 역사적 맥락을 거의 고려하지 않는다는 비판을 받았다.[28] 놀테에게 아이디어는 자체적인 힘을 가지며, 한번 세상에 도입되면 사회의 완전한 파괴 없이는 무시할 수 없다는 관점을 가졌다.[32] 1974년 저서에서 놀테는 "미국이 결국 베트남에서 실천하고 있는 것은 아우슈비츠의 기본적으로 더 잔혹한 버전"이라는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
Der Faschismus in seiner Epochede(''파시즘과 그 시대''), Deutschland und der kalte Kriegde(''독일과 냉전''), Marxismus und industrielle Revolutionde (''마르크스주의와 산업 혁명'')은 놀테가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발전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설명하는 3부작을 형성한다.
2. 1. 초기 생애와 교육
에른스트 놀테는 바이마르 공화국 시대 독일 베스트팔렌의 비텐에서 로마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났다. 놀테의 부모는 학교 교장이었던 하인리히 놀테와 안나(브룬스) 놀테였다.[3] 놀테는 1930년 7세 때 의사 진료실에서 소련 아동 도서의 독일어 번역본을 읽으면서 공산주의를 처음 접했는데, 이 책은 가톨릭 교회를 공격하는 내용이어서 그를 화나게 했다고 한다.[4]1941년 놀테는 손의 기형으로 인해 징집을 면제받았고, 뮌스터 대학교, 베를린 대학교, 프라이부르크 대학교에서 철학, 고전 언어학, 그리스어를 공부했다. 프라이부르크에서 마르틴 하이데거의 제자였으며, 하이데거를 주요한 영향을 미친 인물로 인정했다.[5][6] 1944년부터 하이데거 가족과 가까운 친구였으며, 1945년 교수가 프랑스에 체포될 것을 두려워하자 탈출을 시도하기 위해 음식과 옷을 제공했다.[7] 오이겐 핑크 역시 놀테에게 영향을 준 또 다른 교수였다. 1945년 놀테는 프라이부르크에서 철학 문학사 학위를 받은 후, 김나지움(고등학교) 교사로 일했다. 1952년, 프라이부르크 대학교에서 Selbstentfremdung und Dialektik im deutschen Idealismus und bei Marxde (《독일 관념론과 마르크스에서 자기 소외와 변증법》)으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 후 놀테는 Zeitgeschichtede (현대사) 연구를 시작했다. 그는 쾰른 대학교에서 수여된 Habilitationsschriftde (교수 자격 논문)인 Der Faschismus in seiner Epochede를 1963년에 책으로 출판했다. 1965년부터 1973년까지 마르부르크 대학교의 교수로, 1973년부터 1991년까지 자유 베를린 대학교의 교수로 재직했다.
놀테는 안네도레 모르티에와 결혼하여 아들 게오르크 놀테를 낳았으며, 그는 현재 훔볼트 대학교 베를린의 국제법 교수로 재직 중이다.
2. 2. 학문적 경력
놀테는 바이마르 공화국 시대 독일 베스트팔렌 비텐에서 로마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났다.[3] 1941년 손의 기형으로 징집을 면제받은 놀테는 뮌스터 대학교, 베를린 대학교, 프라이부르크 대학교에서 철학, 고전 언어학, 그리스어를 공부했다.[5] 프라이부르크 대학교에서 마르틴 하이데거와 오이겐 핑크의 제자였으며, 특히 하이데거를 주요한 영향을 준 인물로 꼽았다.[6] 1944년부터 하이데거 가족과 가까운 친구가 되어, 1945년 교수가 프랑스에 체포될 것을 두려워하자 탈출을 돕기도 했다.[7]1945년, 놀테는 프라이부르크에서 철학 문학사 학위를 받은 후 김나지움(고등학교) 교사로 일했다. 1952년에는 Selbstentfremdung und Dialektik im deutschen Idealismus und bei Marxde (《독일 관념론과 마르크스에서 자기 소외와 변증법》) 논문으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Zeitgeschichtede (현대사) 연구를 시작하여, 1963년 Der Faschismus in seiner Epochede (교수 자격 논문)를 출판했다. 1965년부터 1973년까지 마르부르크 대학교 교수로, 1973년부터 1991년까지 자유 베를린 대학교 교수로 재직했다.
놀테의 모든 역사적 저술은 독일 철학의 전통에 큰 영향을 받았다.[26] 그는 역사의 "메타정치적 현상"의 본질을 찾고, 역사의 모든 동기를 부여하는 위대한 아이디어를 발견하고자 했다.[27] 1974년 저서 Deutschland und der kalte Kriegde (''독일과 냉전'')에서 놀테는 분할의 구체적인 역사를 살펴보는 대신, 역사를 통틀어 다른 분열된 국가들을 검토함으로써 1945년 이후 독일의 분할을 연구했다. 그는 독일의 분할을 경쟁 이념에 의해 야기된 분할이라는 "메타정치적" 아이디어의 최고 정점으로 취급했다.[28] 놀테는 Deutschland und der kalte Kriegde을 통해 독일 제국의 가치로 돌아갈 것을 촉구했으며, 국가 사회주의 때문에 독일 민족주의에 대한 불공정한 낙인이 찍힌 것을 종식시킬 것을 요구했다.[30]
1978년, 미국의 역사학자 찰스 S. 메이어는 놀테의 접근 방식을 추상화에 대한 과도한 가치 부여라고 비판했다.[31] 놀테는 추상적인 "최종" 또는 "궁극적" 목적을 추구하는 데 있어 아이디어의 역사에 대한 구체적인 역사적 맥락을 거의 고려하지 않는다는 비판을 받았다.[28] 놀테에게 아이디어는 자체적인 힘을 가지며, 한번 세상에 도입되면 사회의 완전한 파괴 없이는 무시할 수 없다는 관점을 가졌다.[32] 1974년 저서에서 놀테는 "미국이 결국 베트남에서 실천하고 있는 것은 아우슈비츠의 기본적으로 더 잔혹한 버전"이라는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
Der Faschismus in seiner Epochede, Deutschland und der kalte Kriegde, Marxismus und industrielle Revolutionde (''마르크스주의와 산업 혁명'')은 놀테가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발전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설명하는 3부작을 형성한다.
3. 주요 연구 및 이론
놀테는 저서 《그 시대의 파시즘》에서 파시즘을 근대성에 대한 저항으로 규정하고, 현상학적 방법을 통해 나치즘, 이탈리아 파시즘, 악시옹 프랑세즈를 분석하여 파시즘이 자유주의, 반공산주의, 반자본주의, 반부르주아적인 반(反)운동이라고 결론지었다. 그는 파시즘을 현대 세계를 거부하는 부정적 현상으로 보았으며, 헤겔 변증법을 통해 ''악시옹 프랑세즈''를 정립, 이탈리아 파시즘을 반정립, 나치즘을 종합으로 해석했다.[10]
놀테는 파시즘이 정치, 사회, "메타정치적" 세계에서 작용하며, 특히 "초월"(근대성의 정신)에 대한 저항으로 나타난다고 보았다.[11] 그는 "초월"을 "실용적 초월"(물질적, 기술적, 사회적 진보)과 "이론적 초월"(낡은 제약에서 벗어나 새로운 미래를 추구하는 것)로 나누고,[13] 1961년 유리 가가린의 우주 비행을 "실용적 초월"의 예로 들었다.[16]
홀로코스트와 관련하여 놀테는 아돌프 히틀러가 유대인을 근대성과 동일시했기 때문에 나치의 유대인 정책은 항상 대량 학살을 목표로 했다고 주장했다.[19] 그는 "아우슈비츠는 과일 속의 씨앗처럼 나치 인종 이론의 원칙 안에 포함되어 있었다"라고 썼다.[20]
《파시즘의 세 얼굴》은 사상의 역사에 기초한 파시즘 이론을 제시하여 높이 평가받았지만,[9] 이언 커쇼 등은 사회경제적 조건 대신 사상에 초점을 맞추고 파시스트 저술에 의존하는 놀테의 이론을 비판했다.[13]
1970년대 후반, 놀테는 전체주의 이론을 수용하여 나치 독일과 소련을 비교하며 나치 독일을 소련의 "거울상"으로 보았다. 그는 대량 가스 처형이라는 "기술적 세부 사항"을 제외하면 나치가 한 모든 일이 이미 소련에서 일어났다고 주장했다.
3. 1. 《그 시대의 파시즘》
놀테는 1963년 저서 《그 시대의 파시즘》(독일어: Der Faschismus in seiner Epochede, 1965년 영어로 번역되어 ''파시즘의 세 얼굴'')으로 주목받았다. 이 책에서 그는 파시즘이 근대성에 대한 저항이자 반동의 형태로 나타났다고 주장했다. 놀테의 기본적인 가설과 방법론은 독일의 "역사 철학" 전통에 깊이 뿌리를 두고 있었는데, 이는 역사의 "메타정치적 차원"을 발견하려는 지성사의 한 형태였다.[8] "메타정치적 차원"은 사회의 모든 수준에 힘을 불어넣는 심오한 정신적 힘으로서 기능하는 거대한 사상의 역사로 간주된다.[9] 놀테는 철학 교육을 받은 사람만이 "메타정치적 차원"을 발견할 수 있으며, 일반적인 역사적 방법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이 시간의 차원을 놓친다고 생각했다.[9]놀테는 현상학의 방법을 사용하여 독일 나치즘, 이탈리아 파시즘, 프랑스의 ''악시옹 프랑세즈'' 운동을 비교 분석했다. 놀테는 파시즘이 위대한 반(反)운동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즉, 자유주의, 반공산주의, 반자본주의, 반부르주아에 반대하는 운동이었다. 놀테는 파시즘을 현대 세계가 제공하는 모든 것을 거부하는 본질적으로 부정적인 현상으로 보았다.[9] 놀테는 헤겔 변증법을 사용하여, ''악시옹 프랑세즈''가 정립, 이탈리아 파시즘이 반정립, 독일 국가사회주의가 앞선 두 파시스트 운동의 종합이라고 주장했다.[10]
놀테는 파시즘이 세 가지 수준에서 작용한다고 주장했는데, 정치적 세계에서는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반대 형태로, 사회학적 수준에서는 부르주아적 가치에 대한 반대, 그리고 "메타정치적" 세계에서는 "초월에 대한 저항"으로 작용한다고 보았다("초월"은 독일어로 "근대성의 정신"으로 번역될 수 있다).[11] 놀테는 파시즘과 마르크스주의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 파시즘은 적대적 이념을 발전시키고 거의 동일하지만 전형적으로 수정된 방법을 사용함으로써 적을 파괴하려는 반마르크스주의이다. 그러나 항상 국가의 자기 주장과 자율성의 확고한 틀 내에서 이루어진다.[12]
놀테는 "초월"을 두 가지 유형의 변화로 구성된 "메타정치적" 힘으로 정의했다.[13] 첫 번째 유형인 "실용적 초월"은 물질적 진보, 기술적 변화, 정치적 평등, 사회적 진보로 나타나며, 인류가 모든 남녀가 평등한 사회를 선호하여 전통적이고 위계적인 사회에서 벗어나는 과정을 포함한다.[13][14] 두 번째 유형은 "이론적 초월"로, 빈곤, 낙후, 무지, 계급에 의해 인간의 마음에 가해지는 전통적인 족쇄를 제거하면서 세상에 존재하는 것을 넘어 새로운 미래를 향해 노력하는 것이다. 놀테는 "이론적 초월"을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 이론적 초월은 마음이 존재하는 것과 존재할 수 있는 것을 넘어 절대적인 전체를 향해 뻗어나가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더 넓은 의미에서 이것은 일상 세계의 경계에서 인간을 해방시키는 모든 것, 그리고 '지평선의 인식'으로서 그가 세상을 전체로 경험할 수 있게 하는 모든 것에 적용될 수 있다.[15]
놀테는 1961년 유리 가가린의 비행을 인류가 기술 개발에 매진하고 전통적으로 신의 영역이라고 여겨지던 힘을 빠르게 얻고 있는 "실용적 초월"의 예로 들었다.[16] 놀테는 막스 베버, 프리드리히 니체, 카를 마르크스의 연구를 바탕으로 두 유형의 "초월"의 진보가 낡은 세계가 새로운 세계에 의해 쓸려나가면서 두려움을 생성하며, 이러한 두려움이 파시즘으로 이어진다고 주장했다.[17] 놀테는 다음과 같이 썼다.
> 모라스의 가장 핵심적인 사상이 이 수준까지 침투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일신교'와 '반자연'이 정치적 과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그는 이러한 용어들을 서양 철학과 종교의 전통과 관련시켰으며, 그 용어들이 루소의 자유 개념뿐만 아니라 기독교 복음과 파르메니데스의 존재 개념의 부속물이라는 것을 의심의 여지 없이 했다. 그는 또한 세계 경제, 기술, 과학, 해방의 통일을 단순히 '반자연'의 또 다른, 더 최근의 형태로 간주했다. 히틀러의 사상을 이 도식의 더 조잡하고 더 최근의 표현으로 자리 잡게 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모라스와 히틀러의 진정한 적은 '무한을 향한 자유'로 간주되었는데, 이는 개인의 내적 본질이며 진화의 현실로서 익숙하고 사랑스러운 것을 파괴할 위협을 가한다. 이 모든 것으로부터 '초월'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명백해지기 시작한다.[18]
홀로코스트와 관련하여 놀테는 아돌프 히틀러가 유대인을 근대성과 동일시했기 때문에, 유대인에 대한 나치 정책의 기본적 추진력은 항상 대량 학살을 목표로 했다고 주장했다.[19] 놀테는 다음과 같이 썼다.
> 아우슈비츠는 과일 속의 씨앗처럼 나치 인종 이론의 원칙 안에 포함되어 있었다.[20]
놀테는 히틀러에게 유대인이 "역사적 과정 그 자체"를 나타낸다고 믿었다.[21] 놀테는 히틀러가 근대성을 혐오했고 유대인을 세상에서 가장 혐오하는 것과 동일시했기 때문에 유대인 대량 학살을 추구하는 데 "논리적으로 일관성"이 있었다고 주장한다.[22] 놀테에 따르면, "히틀러의 유대인 절멸에서 범죄자들이 범죄 행위를 한 것이 아니라, 원칙이 자멸의 광란 속에서 폭주하는 독특하고 끔찍한 행동이 있었다".[9] 근대성에 대한 거부로서의 나치 반유대주의에 대한 놀테의 이론은 이스라엘 역사가 오토 도브 쿨카가 국가 사회주의가 "서구 문명의 근본적인 뿌리, 기본 가치 및 도덕적 토대"에 대한 공격이라고 주장하도록 영감을 주었다.[23]
''파시즘의 세 얼굴''은 이전의 계급 기반 분석(특히 마르크스주의와 자유주의적 파시즘 해석의 특징이었던 "하위 중산층의 분노" 테제)과 달리, 사상의 역사에 기초한 일반적인 파시즘 이론을 창조하는 데 중요한 기여를 했다는 점에서 많은 찬사를 받았다.[9] 독일 역사가 옌-베르너 뮐러는 놀테가 1960년대에 "거의 혼자서" 전체주의 패러다임을 무너뜨리고 파시즘 패러다임으로 대체했다고 썼다.[24] 영국 역사가 로저 그리핀은 난해하고 모호한 언어로 쓰여졌지만, "초월에 대한 저항"으로서의 놀테의 파시즘 이론은 파시즘 이해에 중요한 발걸음을 내디뎠으며, 학자들이 파시즘에 대한 새로운 연구 분야로 나아가도록 자극했다고 썼다.
이언 커쇼 경과 같은 좌파의 비판은 파시즘의 동기 부여 요인으로서 사회경제적 조건 대신 사상에 초점을 맞춘 놀테의 이론과, 그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파시스트의 저술에 너무 많이 의존한다는 점에 집중되었다.[13] 커쇼는 "초월에 대한 저항"으로서의 놀테의 파시즘 이론을 "신비적이고 신비로운" 것으로 묘사했다.[13] 미국 역사가 프리츠 스턴은 ''파시즘의 세 얼굴''이 ''악시옹 프랑세즈''에 대해 "약하고", 파시즘에 대해 "강하고", 국가 사회주의에 대해 "탁월한" "불균형한 책"이라고 썼다.[25]
1970년대 후반에 놀테는 ''파시즘의 세 얼굴''에서 옹호했던 일반적인 파시즘 이론의 측면을 거부하고, 대신 나치 독일과 소련을 모두 설명하는 방법으로 전체주의 이론을 받아들이는 쪽으로 더 가까이 다가갔다.
3. 2. 홀로코스트에 대한 관점
놀테는 1963년 저서 《그 시대의 파시즘》(영어 번역 제목은 《파시즘의 세 얼굴》)에서 파시즘이 근대성에 대한 저항이자 반동의 형태로 나타났다고 주장했다. 그는 현상학의 방법을 사용하여 독일 나치즘, 이탈리아 파시즘, 프랑스의 액시옹 프랑세즈 운동을 비교 분석했다. 놀테는 파시즘이 자유주의, 반공산주의, 반자본주의, 반부르주아에 반대하는 운동이라고 보았다. 그는 파시즘을 현대 세계가 제공하는 모든 것을 거부하는 본질적으로 부정적인 현상으로 간주했다.[9] 놀테는 헤겔 변증법을 사용하여, ''액시옹 프랑세즈''가 정립, 이탈리아 파시즘이 반정립, 독일 국가사회주의가 앞선 두 파시스트 운동의 종합이라고 주장했다.[10]놀테는 파시즘이 정치, 사회, "메타정치적" 세계의 세 가지 수준에서 작용한다고 보았다. "메타정치적" 세계에서 파시즘은 "초월에 대한 저항"으로 작용하는데, 놀테는 "초월"을 "근대성의 정신"으로 정의했다.[11] 놀테는 파시즘과 마르크스주의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파시즘은 적대적 이념을 발전시키고 거의 동일하지만 전형적으로 수정된 방법을 사용함으로써 적을 파괴하려는 반마르크스주의이다. 그러나 항상 국가의 자기 주장과 자율성의 확고한 틀 내에서 이루어진다."[12]
놀테는 "초월"을 "실용적 초월"과 "이론적 초월" 두 가지 유형으로 구성된 "메타정치적" 힘으로 정의했다.[13] "실용적 초월"은 물질적 진보, 기술적 변화, 정치적 평등, 사회적 진보를 의미하며, "이론적 초월"은 빈곤, 낙후, 무지, 계급에 의해 인간의 마음에 가해지는 전통적인 족쇄를 제거하면서 새로운 미래를 향해 노력하는 것을 의미한다.
놀테는 1961년 유리 가가린의 비행을 "실용적 초월"의 예로 들었다.[16] 그는 막스 베버, 프리드리히 니체, 카를 마르크스의 연구를 바탕으로 두 유형의 "초월"의 진보가 낡은 세계가 새로운 세계에 의해 쓸려나가면서 두려움을 생성하며, 이러한 두려움이 파시즘으로 이어진다고 주장했다.[17]
홀로코스트와 관련하여 놀테는 아돌프 히틀러가 유대인을 근대성과 동일시했기 때문에, 유대인에 대한 나치 정책의 기본적 추진력은 항상 대량 학살을 목표로 했다고 주장했다.[19] 그는 "아우슈비츠는 과일 속의 씨앗처럼 나치 인종 이론의 원칙 안에 포함되어 있었다"라고 썼다.[20] 놀테는 히틀러가 근대성을 혐오했고 유대인을 세상에서 가장 혐오하는 것과 동일시했기 때문에 유대인 대량 학살을 추구하는 데 "논리적으로 일관성"이 있었다고 주장한다.[22]
《파시즘의 세 얼굴》은 사상의 역사에 기초한 일반적인 파시즘 이론을 창조하는 데 중요한 기여를 했다는 점에서 많은 찬사를 받았다.[9] 그러나 이언 커쇼 경과 같은 좌파의 비판은 파시즘의 동기 부여 요인으로서 사회경제적 조건 대신 사상에 초점을 맞춘 놀테의 이론과, 그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파시스트의 저술에 너무 많이 의존한다는 점에 집중되었다.[13]
1970년대 후반에 놀테는 나치 독일과 소련을 모두 설명하는 방법으로 전체주의 이론을 받아들이는 쪽으로 더 가까이 다가갔다. 놀테는 나치 독일이 소련의 "거울상"이었으며, 대량 가스 처형이라는 "기술적 세부 사항"을 제외하면 나치가 독일에서 했던 모든 것을 이미 러시아 공산주의자들이 했다고 생각했다.
철학자 위르겐 하버마스는 놀테가 홀로코스트와 크메르 루주 학살 사이에 도덕적 등가성을 제시한 것에 대해 비판했다. 하버마스는 캄보디아가 후진적인 제3세계 농업 국가이고 독일은 현대 산업 국가이므로, 두 학살 사이에는 어떠한 비교도 있을 수 없다고 보았다.[53]
3. 3. 전체주의 이론
놀테는 1963년 저서 《그 시대의 파시즘》(독일어: Der Faschismus in seiner Epoche, 영어 번역 제목은 '파시즘의 세 얼굴')에서 파시즘이 근대성에 대한 저항, 즉 반동의 형태로 나타났다고 주장했다.[8] 그는 독일의 "역사 철학" 전통에 기반하여 역사의 "메타정치적 차원"을 발견하려는 지성사의 한 형태를 제시했다.[9] 놀테는 철학 교육을 받은 사람만이 "메타정치적 차원"을 발견할 수 있으며, 일반적인 역사적 방법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이 차원을 놓친다고 생각했다.[9]놀테는 현상학적 방법을 사용하여 독일 나치즘, 이탈리아 파시즘, 프랑스의 ''악시옹 프랑세즈'' 운동을 비교 분석했다. 그는 파시즘이 자유주의, 반공산주의, 반자본주의, 반부르주아에 반대하는, 현대 세계가 제공하는 모든 것을 거부하는 본질적으로 부정적인 현상이라고 결론 내렸다.[9] 그는 헤겔 변증법을 사용하여 ''악시옹 프랑세즈''가 정립, 이탈리아 파시즘이 반정립, 독일 국가사회주의가 앞선 두 파시스트 운동의 종합이라고 주장했다.[10]
놀테는 파시즘이 정치적으로는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반대, 사회학적으로는 부르주아적 가치에 대한 반대, "메타정치적"으로는 "초월에 대한 저항"으로 작용한다고 보았다. 여기서 "초월"은 "근대성의 정신"으로 번역될 수 있다.[11] 그는 파시즘을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파시즘은 적대적 이념을 발전시키고 거의 동일하지만 전형적으로 수정된 방법을 사용함으로써 적을 파괴하려는 반마르크스주의이다. 그러나 항상 국가의 자기 주장과 자율성의 확고한 틀 내에서 이루어진다."[12]
놀테는 "초월"을 "실용적 초월"과 "이론적 초월" 두 가지 유형의 변화로 구성된 "메타정치적" 힘으로 정의했다.[13] "실용적 초월"은 물질적 진보, 기술적 변화, 정치적 평등, 사회적 진보를 포함하며, 인류가 전통적이고 위계적인 사회에서 벗어나 모든 남녀가 평등한 사회를 선호하는 과정을 의미한다.[13][14] "이론적 초월"은 빈곤, 낙후, 무지, 계급에 의해 인간의 마음에 가해지는 전통적인 족쇄를 제거하면서 세상에 존재하는 것을 넘어 새로운 미래를 향해 노력하는 것이다. 그는 "이론적 초월"을 "마음이 존재하는 것과 존재할 수 있는 것을 넘어 절대적인 전체를 향해 뻗어나가는 것"으로 정의했다.[15]
놀테는 1961년 유리 가가린의 비행을 "실용적 초월"의 예로 들었다.[16] 그는 막스 베버, 프리드리히 니체, 카를 마르크스의 연구를 바탕으로 두 유형의 "초월"의 진보가 낡은 세계가 새로운 세계에 의해 쓸려나가면서 두려움을 생성하며, 이러한 두려움이 파시즘으로 이어진다고 주장했다.[17]
홀로코스트와 관련하여 놀테는 아돌프 히틀러가 유대인을 근대성과 동일시했기 때문에, 유대인에 대한 나치 정책의 기본적 추진력은 항상 대량 학살을 목표로 했다고 주장했다.[19] 그는 "아우슈비츠는 과일 속의 씨앗처럼 나치 인종 이론의 원칙 안에 포함되어 있었다"고 썼다.[20] 놀테는 히틀러가 근대성을 혐오했고 유대인을 세상에서 가장 혐오하는 것과 동일시했기 때문에 유대인 대량 학살을 추구하는 데 "논리적으로 일관성"이 있었다고 주장한다.[22]
《파시즘의 세 얼굴》은 사상의 역사에 기초한 일반적인 파시즘 이론을 창조하는 데 중요한 기여를 했다는 점에서 많은 찬사를 받았다.[9] 독일 역사가 옌-베르너 뮐러는 놀테가 1960년대에 "거의 혼자서" 전체주의 패러다임을 무너뜨리고 파시즘 패러다임으로 대체했다고 썼다.[24]
이언 커쇼 경과 같은 좌파의 비판은 파시즘의 동기 부여 요인으로서 사회경제적 조건 대신 사상에 초점을 맞춘 놀테의 이론과, 그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파시스트의 저술에 너무 많이 의존한다는 점에 집중되었다.[13] 커쇼는 "초월에 대한 저항"으로서의 놀테의 파시즘 이론을 "신비적이고 신비로운" 것으로 묘사했다.[13]
1970년대 후반에 놀테는 《파시즘의 세 얼굴》에서 옹호했던 일반적인 파시즘 이론의 측면을 거부하고, 대신 나치 독일과 소련을 모두 설명하는 방법으로 전체주의 이론을 받아들이는 쪽으로 더 가까이 다가갔다. 그는 나치 독일이 소련의 "거울상"이었으며, 대량 가스 처형이라는 "기술적 세부 사항"을 제외하면 나치가 독일에서 했던 모든 것을 이미 러시아 공산주의자들이 했다고 생각했다.
4. 역사학자 논쟁 (Historikerstreit)
에른스트 놀테는 1986년과 1987년에 발생한 이른바 '역사가 논쟁'(Historikerstreit|역사가 논쟁de)을 촉발시킨 인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 논쟁은 독일의 과거사, 특히 나치즘과 홀로코스트를 어떻게 이해하고 평가할 것인가에 대한 격렬한 논쟁이었다.
놀테는 1986년 6월 6일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에 "지나가지 않을 과거: 쓰여졌지만 전달될 수 없었던 연설"(Vergangenheit, die nicht vergehen will: Eine Rede, die geschrieben, aber nicht mehr gehalten werden konntede)이라는 제목의 기고문을 게재하면서 논쟁의 불씨를 댕겼다.[33] 그는 이 글에서 나치 시대의 범죄가 소련 볼셰비키 정권의 범죄, 특히 '굴라그'로 알려진 강제 수용소 시스템에 대한 일종의 '대응'이었다고 주장했다.
놀테는 나치즘과 홀로코스트를 소련 공산주의의 범죄와 비교하면서,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보다 더 낫거나 나쁘다고 말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아우슈비츠가 굴라그의 '복사본'이며, 나치의 '인종적 살인'은 볼셰비키의 '계급 살인'에 대한 '논리적이고 사실적인 선행자'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은 나치즘의 만행을 상대화하고, 그 책임을 소련으로 전가하려는 시도로 해석되어 큰 논란을 일으켰다.
놀테는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1920년대 초의 문헌들을 언급하며, 나치 사회주의자들이 저지른 행위들이 이미 그 문헌들에 묘사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는 '백색 테러' 역시 끔찍한 행위를 저질렀지만, '부르주아의 몰살'과 같은 유사점은 없었다는 점을 인정했다.
놀테는 또한 1917년 러시아 혁명이 20세기 유럽 역사의 결정적인 사건이며, 이후 유럽은 장기간의 내전에 휩싸였다고 주장했다. 그는 파시즘을 공산주의의 쌍둥이로 보고, "볼셰비키의 위험"에 대한 유럽 중산층의 필사적인 대응으로 해석했다.
놀테의 주장은 독일 사회와 학계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위르겐 하버마스와 같은 비판자들은 놀테가 나치즘의 범죄를 축소하고, 독일의 과거사 책임을 회피하려 한다고 비판했다. 반면, 놀테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그가 역사적 맥락을 고려하여 나치즘을 이해하려 했다고 주장했다.
역사가 논쟁은 독일의 과거사 극복 문제를 둘러싼 다양한 입장과 갈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 논쟁은 역사적 사실의 해석과 평가, 역사적 책임의 문제, 그리고 역사와 기억의 관계 등 복잡하고 민감한 문제들을 제기했다.
4. 1. 놀테의 주장
에른스트 놀테는 1986년과 1987년에 발생한 역사학자 논쟁(Historikerstreitde)을 시작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1986년 6월 6일, 놀테는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에 "지나가지 않을 과거: 쓰여졌지만 전달될 수 없었던 연설"(Vergangenheit, die nicht vergehen will: Eine Rede, die geschrieben, aber nicht mehr gehalten werden konntede)이라는 ''필로'' 기고문을 게재했다.[33]놀테는 이 글에서 독일의 과거에 "선"을 그을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며, 나치 시대에 대한 기억이 "현재에 자리 잡거나 마치 처형자의 칼처럼 현재 위에 매달려 있는 과거, 즉 유령과 같다"고 말했다.[37][38] 그는 나치 시대에 대한 지나친 관심이 베트남 전쟁이나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의 집단 학살과 같은 현재의 긴급한 문제로부터 관심을 돌리는 효과를 낸다고 비판했다.[38]
놀테의 주장은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 나치즘에 대한 문헌의 주목할 만한 단점은, 나치 사회주의자들이 나중에 저지른 모든 행위들(가스 처리를 위한 기술적 과정을 제외)이 이미 1920년대 초의 방대한 문헌에서 묘사되었다는 것을 알지 못하거나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대량 추방과 총격, 고문, 죽음의 수용소, 엄격히 객관적인 선택 기준을 사용하여 전체 집단을 몰살시키고, '적'으로 여겨지는 수백만 명의 무고한 사람들의 소멸을 공개적으로 요구하는 것이 포함된다.
> 이러한 보고서 중 많은 부분이 과장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백색 테러' 역시 끔찍한 행위를 저질렀지만, 그 프로그램에는 '부르주아의 몰살'과 같은 유사점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과 같은 질문은 허용 가능하고, 심지어 불가피해 보인다. 나치 사회주의자나 히틀러는 단지 그들과 그들의 부류가 '아시아적' 행위의 잠재적 희생자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아시아적' 행위를 저질렀는가? '굴라그 열도'가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보다 더 독창적이지 않았는가? 전체 계급에 대한 볼셰비키의 살인은 나치 사회주의의 "인종적 살인"의 논리적이고 사실적인 선행 사건이 아니었는가? 히틀러의 가장 비밀스러운 행위들은 그가 쥐덫을 ''잊지'' 않았다는 사실로 설명될 수 있는가? 아우슈비츠는 근본적으로 지나가지 않을 과거에서 기원한 것이 아닌가?
놀테는 자신의 작업을 나치 독일의 "부정적인 신화"를 끝내기 위한 수정주의적 접근의 시작으로 보았다.[39] 그는 나치 시대를 악의 극치로 묘사하는 것이 독일 역사의 주요 문제라고 주장했다.[40]
놀테는 1917년 러시아 혁명이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사건이며, 이로 인해 유럽 전체가 1945년까지 장기간의 내전으로 빠져들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파시즘을 공산주의의 쌍둥이이자, "볼셰비키의 위험"에 대한 유럽 중산층의 필사적인 대응으로 보았다. 그는 홀로코스트를 이해하려면 영국의 산업 혁명부터 크메르 루주의 통치까지 이해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1987년 저서 Der europäische Bürgerkrieg, 1917–1945de에서 놀테는 전간기 독일이 유럽 진보의 희망이라고 주장하며, 독일이 새로운 '유럽 연합'의 핵심이 되어야 유럽이 미국과 소련과 동등한 수준의 세계 강국으로 자리 잡을 수 있다고 썼다.[41]
놀테는 1987년 저서 Der europäische Bürgerkriegde(''유럽 내전'')과 그에 따른 발언들로 인해 홀로코스트 부정과 암묵적으로 관계를 맺은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73] 그는 프랑스 홀로코스트 부정론자 로베르 포리송의 저작을 비판하면서도, 포리송의 저작이 팔레스타인인에 대한 동정심과 이스라엘에 대한 반대라는 동기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74] 또한 홀로코스트 부정론자들의 의도가 "종종 존경할 만하다"고 주장하며, 그들의 주장이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다"라고 했다.
놀테는 ''쇼아'' 논문의 특수성을 비판하며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 주장을 제시했다.
- 20세기에는 아르메니아인 학살, 소련의 크림 타타르족과 볼가 독일인 추방, 영국의 "지역 폭격", 베트남 전쟁에서의 미국의 폭력 등 끔찍한 폭력 행위들이 있었다.[75][76]
- 나치 대량 학살은 소련 대량 학살의 모방일 뿐이므로 독특하다고 간주될 수 없다.[76]
- 대다수의 독일인들은 홀로코스트가 진행되는 동안 그것에 대해 알지 못했다. 유대인 학살은 히틀러의 개인적인 사업이었고, 소수의 독일인들만이 관여했다.[76]
- 나치의 반유대주의 정책은 바이츠만의 1939년 독일 "선전포고"와 같은 유대인의 행동에 대한 정당한 대응이었다.[77]
- 반제 회의가 열리지 않았을 가능성을 암시하며, 대부분의 홀로코스트 역사가가 유대인이므로 편향되어 있다고 주장했다.[78]
1988년 2월 9일, 놀테의 차가 베를린에서 좌익 극단주의자들에 의해 불태워졌다.[79] 놀테는 이를 "테러"라고 부르며, Historikerstreitde에서 자신의 반대자들에게서 영감을 받은 공격이라고 주장했다.[79]
이안 커쇼, 고든 A. 크레이그, 리처드 J. 에반스, 사울 프리들랜더, 존 루카스, 마이클 마루스, 티모시 메이슨 등 많은 역사학자들이 놀테를 비판했다.
앤슨 라빈바흐는 놀테가 홀로코스트에 대한 독일의 죄책감을 지우려 한다고 비난했다.[81] 이안 커쇼는 놀테가 유대인들이 홀로코스트를 자초했다고 주장한다고 썼다.[82] 엘리 위젤은 놀테를 클라우스 힐데브란트, 안드레아스 힐그루버, 미하엘 슈튀르머와 함께 독일 역사학의 "4인조 악당" 중 하나라고 불렀다.[83]
찰스 마이어는 홀로코스트와 소련 테러의 도덕적 동등성에 대한 놀테의 주장을 거부했다.[84]
1987년, 오스트리아 출생의 이스라엘 역사학자 발터 그라브는 놀테가 나치 독일에 대한 "변호"에 참여하고 있다고 비난하며, 바이츠만의 편지가 독일인들의 유럽 유대인 "억류"를 정당화하는 "유대인의 전쟁 선포"였다는 놀테의 주장을 "끔찍한 논제"라고 불렀다.[86]
4. 2. 논쟁의 전개
에른스트 놀테는 1986년과 1987년에 발생한 "역사가 논쟁"(Historikerstreitde)을 시작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1986년 6월 6일, 놀테는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에 "Vergangenheit, die nicht vergehen will: Eine Rede, die geschrieben, aber nicht mehr gehalten werden konntede" ("지나가지 않을 과거: 쓰여졌지만 전달될 수 없었던 연설")이라는 기고문을 게재했다.[33]놀테는 기고문을 시작하면서 독일의 과거에 "선"을 그을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37] 그는 나치 시대에 대한 기억이 "현재에 자리 잡거나 마치 처형자의 칼처럼 현재 위에 매달려 있는 과거, 즉 유령과 같다"고 주장했다.[38]
놀테의 주장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 나치즘에 대한 문헌에서 주목할 만한 단점은 나치 사회주의자들이 나중에 저지른 모든 행위들(가스 처리를 위한 기술적 과정을 제외하고)이 이미 1920년대 초의 방대한 문헌에서 묘사되었다는 것을 알지 못하거나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 나치 사회주의자나 히틀러는 단지 그들과 그들의 부류가 '아시아적' 행위의 잠재적 희생자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아시아적' 행위를 저질렀는가?
- '굴라그 열도'가 아우슈비츠보다 더 독창적이지 않았는가?
- 전체 계급에 대한 볼셰비키의 살인은 나치 사회주의의 "인종적 살인"의 논리적이고 사실적인 선행자가 아니었는가?
놀테는 자신의 작업을 현대적 인식에서 지배적인 나치 독일의 "부정적인 신화"를 끝내기 위한 매우 필요한 수정주의적 접근의 시작으로 보았다.[39]
놀테는 1987년 저서 Der europäische Bürgerkrieg, 1917–1945de (''유럽 내전'')에서 전간기에 독일이 유럽의 진보를 위한 최고의 희망이라고 주장했다.[41]
놀테의 또 다른 논쟁거리는 1987년 저서 ''유럽 내전''과 그에 따른 몇몇 발언이었다. 이로 인해 놀테는 홀로코스트 부정과 암묵적으로 관계를 맺은 것처럼 보였다.[73]
''유럽 내전''에서 놀테는 ''쇼아'' 논문의 특수성을 비판하는 방식으로 다섯 가지 주장을 제시했다.
- 20세기에는 그만큼 끔찍한 폭력 행위들이 있었다.[75]
- 나치 대량 학살은 소련 대량 학살의 모방일 뿐이며, 따라서 어떠한 방식으로도 독특하다고 간주될 수 없다.[76]
- 대다수의 독일인들이 홀로코스트가 진행되는 동안 그것에 대해 알지 못했다.[76]
- 나치의 반유대주의 정책은 바이츠만의 1939년 독일 "선전포고"와 같은 독일에 대한 유대인의 행동에 대한 정당한 대응이었다.[77]
- 홀로코스트가 전혀 일어나지 않았을 가능성을 암시했다.[78]
영국의 역사가 리처드 J. 에반스는 놀테를 비판하며, 홀로코스트 부정론자들의 저작을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였다고 비난했다.[78]
1988년 2월 9일, 베를린에서 좌익 극단주의자들에 의해 놀테의 차가 불태워졌다.[79]
이안 커쇼, 고든 A. 크레이그, 리처드 J. 에반스, 사울 프리들랜더 등 해외 역사학자들의 비판이 제기되었다.
앤슨 라빈바흐는 놀테가 홀로코스트에 대한 독일의 죄책감을 지우려 한다고 비난했다.[81] 이안 커쇼는 놀테가 유대인들이 본질적으로 홀로코스트를 자초했으며, ''쇼아''에서 자신들의 불행의 원인이었다고 주장한다고 썼다.[82]
미국 역사학자 찰스 마이어는 홀로코스트와 소련 테러의 도덕적 동등성에 대한 놀테의 주장을 거부했다.[84]
1989년에 영국의 역사가 리처드 J. 에반스는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놀테의 반대자들은 독일을 상대로 한 유대인의 "전쟁"에 대한 그의 증거에 대해 격렬한 반대 의사를 표명했다.
역사가 논쟁 동안 그가 표명한 견해 때문에 놀테는 종종 나치 옹호자이자 반유대주의자라는 비난을 받아왔다. 놀테 자신은 이러한 혐의를 항상 강력하게 부인해 왔다. 놀테는 스스로 인정했듯이 열렬한 독일 민족주의자이며, 그의 목표는 1945년 이후로 사라졌다고 느끼는 독일인들의 역사에 대한 자긍심을 회복하는 것이다.
4. 3. 하버마스의 비판
에른스트 놀테는 1986년과 1987년에 발생한 "역사가 논쟁"(Historikerstreitde)을 시작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1986년 6월 6일, 놀테는 ''Frankfurter Allgemeine Zeitung''에 "Vergangenheit, die nicht vergehen will: Eine Rede, die geschrieben, aber nicht mehr gehalten werden konntede" ("지나가지 않을 과거: 쓰여졌지만 전달될 수 없었던 연설")이라는 ''feuilleton'' 기고문을 게재했다.[33]놀테는 이 기고문에서 독일의 과거에 "선"을 그을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37] 그는 나치 시대에 대한 지나친 현재의 관심이 "예를 들어 '태어나지 않은 생명'의 문제, 또는 어제 베트남과 오늘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집단 학살의 존재와 같은 현재의 긴급한 질문에서 관심을 돌리는 효과"를 낸다고 불평했다.[38]
놀테의 주장의 핵심은 다음과 같다.
> "나치즘에 대한 문헌에서 주목할 만한 단점은 나치 사회주의자들이 나중에 저지른 모든 행위들 (가스 처리를 위한 기술적 과정을 제외하고)이 이미 1920년대 초의 방대한 문헌에서 묘사되었다는 것을 알지 못하거나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량 추방과 총격, 고문, 죽음의 수용소, 엄격히 객관적인 선택 기준을 사용하여 전체 집단을 몰살시키고, '적'으로 여겨지는 수백만 명의 무고한 사람들의 소멸을 공개적으로 요구하는 것.
> 이러한 보고서 중 많은 부분이 과장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백색 테러' 역시 끔찍한 행위를 저질렀다는 것은 확실하며, 그 프로그램에는 '부르주아의 몰살'과 같은 유사점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과 같은 질문은 허용 가능하고, 심지어 불가피해 보인다: 나치 사회주의자나 히틀러는 단지 그들과 그들의 부류가 '아시아적' 행위의 잠재적 희생자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아시아적' 행위를 저질렀는가? '굴라그 열도'가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보다 더 독창적이지 않았는가? 전체 계급에 대한 볼셰비키의 살인은 나치 사회주의의 "인종적 살인"의 논리적이고 사실적인 ''프리우스''가 아니었는가? 히틀러의 가장 비밀스러운 행위들은 그가 쥐 덫을 ''잊지'' 않았다는 사실로 설명될 수 있는가? 아우슈비츠는 근본적으로 지나가지 않을 과거에서 기원한 것이 아닌가?
놀테는 자신의 작업을 현대적 인식에서 지배적인 나치 독일의 "부정적인 신화"를 끝내기 위한 매우 필요한 수정주의적 접근의 시작으로 본다.[39]
4. 4. 논쟁의 결론
에른스트 놀테는 1986년과 1987년에 걸쳐 독일에서 벌어진 이른바 '역사가 논쟁'(Historikerstreit|역사가 논쟁de)을 촉발시킨 인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1986년 6월 6일,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에 "지나가지 않을 과거: 쓰여졌지만 전달될 수 없었던 연설"(Vergangenheit, die nicht vergehen will: Eine Rede, die geschrieben, aber nicht mehr gehalten werden konnte|지나가지 않을 과거: 쓰여졌지만 전달될 수 없었던 연설de)이라는 제목의 ''feuilleton'' 기고문을 게재했다.[33] 이 기고문은 그가 1976년과 1980년에 했던 강연에서 처음 제시했던 아이디어들을 요약한 것이었다.놀테는 이 글에서 독일의 과거에 "선"을 그을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며, 나치 시대에 대한 기억이 "현재에 자리 잡거나 마치 처형자의 칼처럼 현재 위에 매달려 있는 과거, 즉 유령과 같다"고 표현했다.[38] 그는 나치 시대에 대한 지나친 관심이 다른 중요한 문제들, 예를 들어 "태어나지 않은 생명"의 문제나 베트남 전쟁,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과 같은 현재의 긴급한 문제에서 관심을 돌리는 효과를 낸다고 비판했다.[38]
놀테의 핵심 주장은 다음과 같다.
> "나치즘에 대한 문헌에서 주목할 만한 단점은 나치 사회주의자들이 나중에 저지른 모든 행위들 (가스 처리를 위한 기술적 과정을 제외하고)이 이미 1920년대 초의 방대한 문헌에서 묘사되었다는 것을 알지 못하거나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량 추방과 총격, 고문, 죽음의 수용소, 엄격히 객관적인 선택 기준을 사용하여 전체 집단을 몰살시키고, '적'으로 여겨지는 수백만 명의 무고한 사람들의 소멸을 공개적으로 요구하는 것.
> 이러한 보고서 중 많은 부분이 과장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백색 테러' 역시 끔찍한 행위를 저질렀다는 것은 확실하며, 그 프로그램에는 '부르주아의 몰살'과 같은 유사점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과 같은 질문은 허용 가능하고, 심지어 불가피해 보인다: 나치 사회주의자나 히틀러는 단지 그들과 그들의 부류가 '아시아적' 행위의 잠재적 희생자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아시아적' 행위를 저질렀는가? '굴라그 열도'가 아우슈비츠보다 더 독창적이지 않았는가? 전체 계급에 대한 볼셰비키의 살인은 나치 사회주의의 "인종적 살인"의 논리적이고 사실적인 ''프리우스''가 아니었는가? 히틀러의 가장 비밀스러운 행위들은 그가 쥐 덫을 ''잊지'' 않았다는 사실로 설명될 수 있는가? 아우슈비츠는 근본적으로 지나가지 않을 과거에서 기원한 것이 아닌가?"
놀테는 자신의 작업을 나치 독일에 대한 지배적인 "부정적인 신화"를 끝내기 위한 수정주의적 접근의 시작으로 보았다.[39] 그는 나치 시대를 악의 극치로 묘사하는 "부정적인 신화"가 독일 역사의 주요 문제라고 생각했다.[40]
놀테는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사건은 1917년 러시아 혁명이며, 이 사건으로 유럽 전체가 1945년까지 지속된 오랜 내전으로 빠져들었다고 주장한다. 그는 파시즘을 공산주의의 쌍둥이로 보았으며, "볼셰비키의 위험"에 대한 유럽 중산층의 필사적인 대응으로 나타났다고 주장했다. 그는 홀로코스트를 이해하려면 먼저 영국의 산업 혁명부터 시작하여 크메르 루주의 통치까지 이해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1987년 저서 ''유럽 내전''(Der europäische Bürgerkrieg, 1917–1945|유럽 내전de)에서 놀테는 전간기에 독일이 유럽의 진보를 위한 최고의 희망이었다고 주장했다.[41] 그는 독일이 "새로운 '유럽 연합'의 핵심"이 되어 유럽이 미국과 소련과 동등한 수준의 세계 강국으로 자리 잡아야 한다고 썼다.[41]
놀테의 또 다른 논쟁거리는 ''유럽 내전''과 그에 따른 몇몇 발언이었다. 이로 인해 놀테는 홀로코스트 부정과 암묵적으로 관계를 맺은 것처럼 보였다.[73] 그는 홀로코스트 부정론자들의 의도가 "종종 존경할 만하다"고 주장하며, 그들의 몇몇 주장이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다"라고 했다.
''유럽 내전''에서 놀테는 ''쇼아'' 논문의 특수성을 비판하는 다섯 가지 주장을 제시했다.
- 20세기에는 그만큼 끔찍한 폭력 행위들이 있었다.[75] (예: 아르메니아인 학살, 소련의 소위 "반역 국가"에 대한 추방, 제2차 세계 대전 중 영국의 "지역 폭격", 베트남 전쟁에서의 미국의 폭력)[76]
- 나치 대량 학살은 소련 대량 학살의 모방일 뿐이며, 따라서 어떠한 방식으로도 독특하다고 간주될 수 없다.[76]
- 대다수의 독일인들이 홀로코스트가 진행되는 동안 그것에 대해 알지 못했다.[76]
- 나치의 반유대주의 정책이 바이츠만의 1939년 독일 "선전포고"와 같은 독일에 대한 유대인의 행동에 대한 정당한 대응이었다.[77]
- 홀로코스트가 전혀 일어나지 않았을 가능성을 암시했다.[78]
놀테의 주장에 대한 극단적인 반응 중 하나는 1988년 2월 9일에 발생했는데, 그의 차가 베를린에서 좌익 극단주의자들에 의해 불태워졌다.[79]
놀테의 견해에 대한 비판은 이안 커쇼, 고든 A. 크레이그, 리처드 J. 에반스, 사울 프리들랜더 등 해외 학자들로부터 제기되었다. 앤슨 라빈바흐는 놀테가 홀로코스트에 대한 독일의 죄책감을 지우려 한다고 비난했다.[81] 이안 커쇼는 놀테가 유대인들이 본질적으로 홀로코스트를 자초했으며, ''쇼아''에서 자신들의 불행의 원인이었다고 주장한다고 썼다.[82]
미국 역사학자 찰스 마이어는 홀로코스트와 소련 테러의 도덕적 동등성에 대한 놀테의 주장을 거부했다. 미국 역사학자 도널드 맥케일은 연합군의 전략 폭격 공세가 홀로코스트만큼이나 학살 행위였다는 놀테의 발언을 비난했다.
1987년 에세이에서 이스라엘 역사학자 발터 그라브는 놀테가 나치 독일에 대한 "변호"에 참여하고 있다고 비난했다.[86]
영국의 역사가 리처드 J. 에반스는 놀테가 아우슈비츠의 비교 가능성을 확립하려는 시도가 '집단 학살'의 개념을 그럴듯하게 설명할 수 없는 행동으로 확장하는 데 기반을 두고 있다고 비판했다.
역사가 논쟁de 동안 그가 표명한 견해 때문에 놀테는 종종 나치 옹호자이자 반유대주의자라는 비난을 받아왔다. 놀테 자신은 이러한 혐의를 항상 강력하게 부인해 왔다. 그는 스스로를 독일 민족주의자라고 인정하며, 그의 목표는 독일인들의 역사에 대한 자긍심을 회복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5. 후기 연구 및 활동
1989년, 영국의 역사가 리처드 J. 에반스는 놀테가 아우슈비츠의 비교 가능성을 확립하려는 시도는 '집단 학살' 개념을 무리하게 확장하는 데 기반을 두고 있다고 비판했다. 에반스는 연합국의 독일 도시 폭격은 독일 국민 전체를 멸절하려는 의도가 없었기에 집단 학살이라 할 수 없다고 반박했다.[87] 그는 드레스덴 폭격이 코번트리 폭격 이후에 일어났다는 점을 지적하며, 후자가 전자에 대한 대응이었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고 덧붙였다. 또한, 폴란드인이나 러시아인이 독일 국민 전체를 멸절할 의도를 가졌다는 증거는 없다고 주장했다.[87] 나의 투쟁de을 인용하며, 에반스는 히틀러가 1914년 이전부터 반유대주의자였으며, 그의 주된 적은 볼셰비키가 아니라 독일 사회민주당이었다고 강조했다.[87]
놀테의 견해에 대한 반박으로, 바이츠만이 챔벌린에게 보낸 편지는 전 세계 유대인을 대표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 시온주의 기구의 수장 자격으로 작성된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88] 또한, 모든 유대인이 유대인 조직의 지시를 받는 별개의 "국적"을 구성한다는 놀테의 생각은 잘못된 전제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비판이 있었다.[88]
역사가 논쟁de 동안 놀테는 나치 옹호자 및 반유대주의자라는 비난을 받았지만, 놀테 자신은 이러한 혐의를 부인했다. 그는 스스로를 독일 민족주의자라고 칭하며, 1945년 이후 사라진 독일인들의 역사적 자긍심을 회복하는 것이 목표라고 밝혔다. 1987년 인터뷰에서 놀테는 독일인들이 "한때 지배 민족(Herrenvolkde)이었으나, 이제는 '죄 있는 민족'(Sündervolkde)이다"라고 말했다.[89] 놀테의 옹호자들은 나치 독일과 홀로코스트를 비난하는 그의 진술들을 근거로 제시했다. 그러나 비평가들은 놀테가 특공대 명령을 옹호하고, 작전집단de의 소련 유대인 학살을 빨치산 공격에 대한 "예방적 안보" 대응으로 주장하며, 빅토르 수보로프를 인용해 바르바로사 작전이 "예방 전쟁"이었다고 주장하는 등 나치에 동정적인 주장을 펼쳤다고 비판했다.[90][91] 또한,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붉은 군대 병사들을 "아시아 무리"라고 지칭하는 등 나치 시대의 언어를 사용한 점도 지적되었다.[90][91]
1991년 저서 Geschichtsdenken im 20. Jahrhundertde(『20세기의 역사적 사고』)에서 놀테는 20세기가 독일, 소련, 이스라엘이라는 세 개의 "특이한 국가"를 만들어냈다고 주장했다. 그는 소련과 독일은 "정상" 국가가 되었지만, 이스라엘은 여전히 "비정상적"이며, 팔레스타인인에 대한 대량 학살을 저지를 수도 있는 파시스트 국가가 될 위험이 있다고 주장했다.
1995년부터 1997년까지 놀테는 프랑스 역사학자 프랑수아 퓌레와 파시즘과 공산주의의 관계에 대한 서신 교환 논쟁을 벌였다. 퓌레는 놀테의 비교 연구 공로를 인정했지만, 두 이데올로기가 동일한 기원을 가진 전체주의적 쌍둥이라고 주장했다. 반면, 놀테는 파시즘이 공산주의에 대한 반응이라는 kausaler Nexusde(인과적 연관) 견해를 유지했다. 퓌레 사후, 이 서신은 1998년 프랑스에서 책(Fascisme et Communisme: échange épistolaire avec l'historien allemand Ernst Nolte prolongeant la Historikerstreit프랑스어)으로 출판되었고, 2001년 영어로 번역되었다. 퓌레는 스탈린에게 중대한 범죄의 책임을 묻는 한편, 파시즘과 공산주의의 역사가 유럽 역사에 필수적이지만, 각 운동과 관련된 특별한 사건들이 두 운동을 차별화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놀테가 제안한 데쿨라크화와 홀로코스트 사이에 정확한 평행선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92]
놀테는 ''Die Welt''와 ''Frankfurter Allgemeine Zeitung'' 같은 독일 신문에 ''Feuilleton''(의견 기사)을 기고하며, "역사에 대해 가장 심사숙고하는 독일 사상가" 중 한 명으로 묘사되기도 했다.[93] 그는 서독을 "현대사에서 태어난 국가, 재앙을 극복하기 위해 세워진 재앙의 산물"[94]이라고 불렀다. 1999년 ''Die Welt'' 기고문에서 놀테는 리처드 J. 에반스의 저서 ''In The Defence of History''를 비판하며, 홀로코스트의 측면은 수정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95] 그는 다니엘 요나 골드하겐을 인용, 가스실의 효과가 과장되었고, 대량 총격으로 더 많은 유대인이 살해되었으며,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 사망자 수가 과대평가되었다고 주장했다(소련은 처음에 400만 명으로 과장했지만, 현재 합의는 110만 명이다).[9] 또한, 비냐민 빌코미르스키의 아우슈비츠 회고록이 위조되었다고 주장하며, 홀로코스트 역사가 재해석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9] 1999년 에반스는 놀테의 주장에 동의하지만, 이는 Historikerstreitde 동안 자신에 대한 비판을 회피하려는 시도라고 반박했다.[95]
2000년, 놀테는 콘라트 아데나워 상을 수상했다. Institut für Zeitgeschichtede(현대사 연구소) 소장 호르스트 묄러는 놀테의 학문적 업적을 칭찬했지만, 논란이 되는 주장은 피하려 했다.[96] 놀테는 수상 연설에서 "국가 사회주의 목표의 반대가 항상 좋고 옳다는 견해를 버려야 한다"고 언급하며, 공산주의에 대한 과도한 "유대인"의 지원이 나치에게 반유대주의의 "합리적인 이유"를 제공했다고 시사했다.[97]
2000년, 놀테는 Die Wochede 신문에 노먼 핀켈스타인의 저서 ''The Holocaust Industry''에 대한 긍정적인 서평을 썼다. 그는 핀켈스타인의 책이 홀로코스트의 기억이 유대인 단체에 의해 이용되었다는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독일 과거의 "정상화"에 대한 놀테의 요구를 핀켈스타인이 지지한 것과 관련 있을 수 있다.[98]
2004년 리처드 오버리의 ''The Dictators'' 서평에서, 앤 애플바움은 독일과 소련 독재 정권 비교가 타당하지만, 놀테의 주장이 불필요하게 비교 접근법의 신뢰도를 떨어뜨렸다고 비판했다.[99] 2005년 폴 고트프리드는 놀테가 홀로코스트를 정당화하려 했다는 애플바움의 비난을 반박하며, 놀테는 단지 나치가 유대인과 공산주의자 사이에 연관성을 만들었고, 홀로코스트는 공산주의 지지자들을 제거하려는 시도였다고 주장했을 뿐이라고 옹호했다.[100]
2006년 인터뷰에서 놀테는 이슬람 근본주의를 "초월에 대한 저항"의 "세 번째 변형"으로 지목하며, 『파시즘의 세 얼굴』에서 처음 제시했던 이론을 되풀이했다. 그는 이슬람 파시즘에 대한 완전한 연구를 할 시간이 없을 것이라고 유감을 표했다.[101] 그는 아우크슈타인이 힐그루버를 Historikerstreitde 동안 "헌법적 나치"라고 부른 것을 용서할 수 없다고 말했으며, 벨러가 1989년 힐그루버를 죽음으로 몰아넣는 데 일조했다고 주장했다. 놀테는 자신을 역사가가 아닌 철학자라고 칭하며, 역사학자들로부터 겪는 적대적 반응은 그가 역사를 쓰는 철학자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2005년 저서 『나치즘의 러시아적 기원: 백인 망명자와 국가 사회주의의 형성』에서, 마이클 켈로그는 국가 사회주의 기원에 대한 두 가지 극단적인 사고방식이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놀테는 러시아 공산주의와 독일 나치즘 사이에 "인과적 연관성"을 주장한 반면, 다니엘 골드하겐은 "제거주의적" 반유대주의의 독특한 독일 문화를 주장했다.[102] 켈로그는 자신의 저서가 놀테와 골드하겐 입장 사이의 중간 입장을 채택하려는 시도이지만, 1920년대 반볼셰비키적이고 반유대주의적인 러시아 망명자들이 나치 이데올로기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특히 유대-볼셰비즘에 대한 나치적 사고에 미친 영향이 주목할 만하다고 주장함으로써 놀테의 입장에 더 가깝다고 주장했다.
2006년 저서 『유럽 전쟁 1939–1945: 단순한 승리는 없다』에서 노먼 데이비스는 놀테의 이론을 지지하며, 제1차 세계 대전이 볼셰비키 혁명을 낳았고, 파시즘은 공산주의에 대한 "반혁명"으로 간주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파시즘이 공산주의를 연대기적으로 따랐기 때문에, 나치의 일부 기술과 관행이 소련의 것을 모방했다고 주장했다. 데이비스는 동유럽에서 공산주의 몰락 이후 밝혀진 소련의 범죄가 놀테 비판자들의 신뢰를 떨어뜨렸다고 결론지었다.[103]
6. 유산 및 평가
이안 커쇼, 고든 A. 크레이그, 리처드 J. 에반스 등 해외의 많은 역사학자들이 에른스트 놀테에게 비판을 제기했다.[80] 마이클 마루스, 티모시 메이슨등이 대표적이다. 특히 메이슨은 놀테 자신이 한때 옹호했던 일반적인 파시즘에 대한 이론을 요구하며 놀테에 반대했다.
앤슨 라빈바흐는 놀테가 홀로코스트에 대한 독일의 죄책감을 지우려 한다고 비난했다.[81] 이안 커쇼는 놀테가 유대인들이 본질적으로 홀로코스트를 자초했으며, ''쇼아''에서 자신들의 불행의 원인이었다고 주장한다고 썼다.[82] 엘리 위젤은 놀테를 클라우스 힐데브란트, 안드레아스 힐그루버, 미하엘 슈튀르머와 함께 독일 역사학의 "4인조 악당" 중 하나라고 불렀다.[83]
미국 역사학자 찰스 마이어는 홀로코스트와 소련 테러의 도덕적 동등성에 대한 놀테의 주장을 거부했다.[84] 미국 역사학자 도널드 맥케일은 연합군의 전략 폭격 공세가 홀로코스트만큼이나 학살 행위였다는 놀테와 안드레아스 힐그루버의 발언을 비난하며, 이는 놀테와 힐그루버와 같은 나치 옹호자들에게서나 기대할 수 있는 넌센스라고 썼다.[85]
1987년 에세이에서 오스트리아 출생의 이스라엘 역사학자 발터 그라브는 놀테가 나치 독일에 대한 "변호"에 참여하고 있다고 비난했다.[86] 그라브는 바이츠만이 체임벌린에게 보낸 편지가 독일인들의 유럽 유대인 "억류"를 정당화하는 "유대인의 전쟁 선포"였다는 놀테의 주장을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끔찍한 논제"라고 불렀다.[86]
놀테의 반대자들은 독일을 상대로 한 유대인의 "전쟁"에 대한 그의 증거에 대해 격렬한 반대 의사를 표명했다. 그들은 바이츠만이 챔벌린에게 보낸 편지는 전 세계 유대인 전체를 대표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 시온주의 기구의 수장 자격으로 작성된 것이며,[88] 놀테의 견해는 모든 유대인이 유대인 조직으로부터 지시를 받는 별개의 "국적"을 구성한다는 잘못된 생각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주장한다.[88]
역사가 논쟁de 동안 그가 표명한 견해 때문에 놀테는 종종 나치 옹호자이자 반유대주의자라는 비난을 받아왔다. 놀테 자신은 이러한 혐의를 항상 강력하게 부인해 왔다. 놀테는 스스로 인정했듯이 열렬한 독일 민족주의자이며, 그의 목표는 1945년 이후로 사라졌다고 느끼는 독일인들의 역사에 대한 자긍심을 회복하는 것이다.
1991년에 출간된 그의 저서 Geschichtsdenken im 20. Jahrhundertde(『20세기의 역사적 사고』)에서 놀테는 20세기가 독일, 소련, 이스라엘의 세 가지 "특이한 국가"를 만들어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 세 국가 모두 "한때 비정상적"이었지만, 소련과 독일은 현재 "정상" 국가가 된 반면, 이스라엘은 여전히 "비정상적"이며, 놀테의 관점에서 볼 때 팔레스타인인에 대한 대량 학살을 저지를 수도 있는 파시스트 국가가 될 위험에 처해 있다고 주장했다.
1995년부터 1997년까지 놀테는 프랑스 역사학자 프랑수아 퓌레와 파시즘과 공산주의의 관계에 대한 서신 교환으로 논쟁을 벌였다. 퓌레는 놀테의 주장이 서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반파시즘에 대한 개념을 비판하는 것이라고 언급했다. 이로 인해 두 사람 사이에 서신 교환이 이루어졌는데, 퓌레는 두 이데올로기가 동일한 기원을 공유하는 전체주의적 쌍둥이라고 주장했지만, 놀테는 파시즘이 공산주의에 대한 반응이었다는 kausaler Nexusde(인과적 연관)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유지했다. 퓌레가 사망한 후, 두 사람의 서신은 1998년 프랑스에서 Fascisme et Communisme: échange épistolaire avec l'historien allemand Ernst Nolte prolongeant la Historikerstreit프랑스어(『파시즘과 공산주의: 독일 역사학자 에른스트 놀테와의 서신 교환, 역사가 논쟁을 연장하다』)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고, 2001년 『파시즘과 공산주의』라는 제목으로 영어로 번역되었다. 스탈린에게 중대한 범죄의 책임을 묻는 한편, 퓌레는 파시즘과 공산주의의 역사가 유럽 역사에 필수적이지만, 각 운동과 관련된 특별한 사건들이 있었고, 이 사건들이 두 운동을 차별화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놀테가 제안한 대로 홀로코스트와 데쿨라크화 사이에 정확한 평행선이 있다고 느끼지 않았다.[92]
놀테는 ''Die Welt''와 ''Frankfurter Allgemeine Zeitung''과 같은 독일 신문에 ''Feuilleton''(의견 기사)을 기고했다. 그는 종종 "역사에 대해 가장 심사숙고하는 독일 사상가" 중 한 명으로 묘사되었다.[93]
2000년 6월 4일, 놀테는 콘라트 아데나워 상을 수상했다. 놀테는 수상 연설에서 "우리는 국가 사회주의 목표의 반대가 항상 좋고 옳다는 견해를 버려야 한다"고 언급하는 한편, 공산주의에 대한 과도한 "유대인"의 지원이 나치에게 그들의 반유대주의에 대한 "합리적인 이유"를 제공했다고 시사했다.[97]
2006년 저서 『유럽 전쟁 1939–1945: 단순한 승리는 없다』에서 영국 역사학자 노먼 데이비스는 놀테의 이론을 지지하며, 동유럽에서 공산주의 몰락 이후 밝혀진 소련의 범죄가 놀테의 비판자들의 신뢰를 떨어뜨렸다고 결론지었다.[103]
7. 저서
에른스트 놀테의 주요 저서는 다음과 같다.
출판 연도 | 제목 | 비고 |
---|---|---|
1963 | 《파시즘의 시대 - 악시옹 프랑세즈 - 이탈리아 파시즘 - 국가사회주의》[1] (Der Faschismus in seiner Epoche. Action francaise – Italienischer Faschismus – Nationalsozialismus) | |
1963 | 《그 시대의 파시즘: 아크시옹 프랑세즈, 이탈리아 파시즘, 국가사회주의》[7] (Der Faschismus in seiner Epoche: die Action française der italienische Faschismus, der Nationalsozialismus) | 1965년 영어 번역본 출간 (《파시즘의 세 얼굴; 아크시옹 프랑세즈, 이탈리아 파시즘, 국가사회주의》 (The Three Faces of Fascism; Action Francaise, Italian Fascism, National Socialism)) |
1968 | 《파시즘: 무솔리니에서 히틀러까지. 텍스트, 그림 및 문서》[14] (Der Faschismus: von Mussolini zu Hitler. Texte, Bilder und Dokumente) | |
1968 | 《자유주의 체제의 위기와 파시스트 운동》[15] (Die Krise des liberalen Systems und die faschistischen Bewegungen) | |
1968 | 《대학에서의 민주화의 의미와 무의미》[16] (Sinn und Widersinn der Demokratisierung in der Universität) | |
1969 | 《파시스트 운동, 1919년부터 1945년까지의 유럽》[17] (Les Mouvements fascistes, l'Europe de 1919 a 1945) | |
1974 | 《독일과 냉전》[20] (Deutschland und der Kalte Krieg) | |
1979 | 《무엇이 부르주아인가? 와 기타 기사, 논문, 논쟁》[27] (Was ist bürgerlich? und andere Artikel, Abhandlungen, Auseinandersetzungen) | |
1983 | 《마르크스주의와 산업 혁명》[30] (Marxismus und industrielle Revolution) | |
1987 | 《유럽의 내전 1917–1945》[2] (Der europäische Bürgerkrieg 1917–1945) | |
1987 | 《과거의 과오》[36] (Das Vergehen der Vergangenheit) | |
1991 | 《교훈극인가 비극인가?》[39] (Lehrstück oder Tragödie?) | |
1991 | 《20세기의 역사적 사고》[40] (Geschichtsdenken im 20. Jahrhundert) | |
1992 | 《마르틴 하이데거: 삶과 사상 속의 정치와 역사》[41] (Martin Heidegger: Politik und Geschichte im Leben und Denken) | |
1993 | 《논쟁점》[43] (Streitpunkte) | |
1998 | 《역사적 실존: 역사의 시작과 끝 사이에서?》 (Historische Existenz: Zwischen Anfang und Ende der Geschichte?) | |
2000 | 《유럽 시민 전쟁, 1917–1945: 국가사회주의와 볼셰비즘》[35] (Der europäische Bürgerkrieg, 1917–1945: Nationalsozialismus und Bolschewismus) | |
2000 | 《니체와 니체주의》[38] (Nietzsche und der Nietzscheanismus) | |
2002 | 《인과적 연결》[49] (Der kausale Nexus) | |
2006 | 《바이마르 공화국》[53] (Die Weimarer Republik) | |
2009 | 《세 번째 급진 저항 운동: 이슬람주의》 (Die dritte radikale Widerstandsbewegung: Der Islamismus) |
8. 수상
수상 내역 |
---|
한스 마르틴 슐라이어 상 (1985년) |
콘라트 아데나워 상 (2000년) |
게르하르트 뢰벤탈 명예상 (2011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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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urope at War 1939–1945: No Simple Victory
Penguin
[104]
웹사이트
Deutscher Historiker Ernst Nolte mit 93 Jahren gestorben
https://www.faz.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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