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민 (190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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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영민은 1905년 12월 1일 출생하여 1954년 사망한 일제강점기 및 광복 이후의 스포츠 선수이다. 계성고등보통학교와 경성 배재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연희전문학교에서 학위를 받았다. 축구, 야구, 육상 등 다양한 스포츠에서 뛰어난 기량을 보였으며, 특히 야구 선수로서 한국인 최초의 홈런을 기록하고 일본 야구 대표 선수로 활동했다. 광복 후에는 대한야구협회 초대 이사장을 역임하고, 1948년 런던 올림픽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아 대한민국 축구의 국제 경쟁력 강화에 기여했다. 1958년에는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이영민 타격상이 제정되었다.

이영민 (1905년)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이영민
한자 표기李榮敏
로마자 표기I Yeongmin
출생일1905년 12월 1일
출생지대한제국 경상북도 예천군
사망일1954년 8월 12일
사망지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직업축구 선수
육상 선수
야구 선수
축구 지도자
스포츠 행정가
수필가
저술가
스포츠 평론가
학력
배재고등보통학교 졸업
연세대학교 학사
스포츠 경력
종목축구
육상
야구
축구 포지션오른쪽 윙어, 센터 하프
야구 포지션투수, 외야수
야구 타격우타
야구 투구우투
축구 선수 경력
유소년 클럽배재고등보통학교 축구단
대학 클럽연세대학교
선수 클럽Joseon FC (1927–1928)
Yeonu Gurakbu (1929)
Gyerim FC (1932)
Kyungsung FC (1933–?)
축구 국가대표 경력
국가대표대한민국
축구 지도자 경력
클럽Kyungsung FC (1933–?)
국가대표대한민국 (1948)
육상 선수 경력
유소년 클럽배재고등보통학교 육상단
세부 종목남자 400m, 남자 1500m
야구 선수 경력
일본 야구 올스타1934
스포츠 행정 경력
직책대한야구협회 부회장
조선야구협회 초대 이사장
아시아야구연맹 한국대표
정치 경력
정당한국독립당 당무위원
수상 내역 (육상)
대회전조선중등학교육상경기대회
1923년 경성남자 1mi 은메달
1924년 경성남자 400m 은메달
수상 내역 (축구)
대회전국체육대회 축구 18세이하부
1924년 경성남자 금메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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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이영민은 1905년 12월 1일 경상북도 예천에서 태어나 안동에서 유년기를 보낸 후 대구에서 성장하였다. 계성고등학교에서 배재고등학교로 스카우트되어 전조선 축구대회와 경평축구대항전에서 활약하였다. 배재고등학교 졸업 후 연희전문학교로 진학하여 야구에 집중하였다. 1928년 경성 운동장에서 열린 경성의학전문학교(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주최 야구 대회에서 한국인 최초로 담장을 넘기는 홈런을 기록했다.

연희전문학교(연세대학교) 재학 시절 축구부 선수로 활동하며 전조선 축구대회에서 1927년과 1928년 우승을 차지했고, 1929년 졸업 후 조선식산은행 야구팀에 유일한 한국인 선수로 입단하여 조선 실업 야구 리그에서 활약했다. 1933년 조선축구협회(현 대한축구협회) 창립에 기여했으며, 1935년 경성 축구단의 선수 겸 감독으로 천황배 전일본 축구 선수권 대회 우승을 이끌었다.

8·15해방 후 조선야구협회 초대 이사장을 지냈으며, 1948년 제14회 런던 올림픽에 조사 연구원으로 파견되어 대한민국 체육계 활성화를 위한 기반을 다졌다. 런던 올림픽에서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아 1948년 하계 올림픽 1라운드에서 멕시코를 상대로 대한민국 축구 역사상 첫 국제 경기 승리를 달성하고 팀을 올림픽 8강에 진출시켰다. 1954년에는 대한야구협회 (KBA) 부회장과 아시아 야구 연맹 (BFA)의 대한민국 대표를 지내는 등 대한민국 야구 발전을 위한 기초 마련에 크게 공헌했다.

1954년 8월 12일 새벽, 서울 종로구 필운동 자택에서 셋째 아들의 친구 조용호가 쏜 총에 맞아 불의의 사고로 생을 마감한다.

2.1. 유년 시절 및 학창 시절

1905년 12월 1일 경상북도 예천에서 태어났으며, 안동에서 유년기를 보낸 후 대구에서 성장하였다. 계성고등학교에서 배재고등학교로 스카우트되어 전조선 축구대회와 경평축구대항전에서 활약하였다. 경평(京平)축구선수로 육상대회 400m에서 54초6의 신기록으로 우승하기도 했다.

배재고등학교 시절 교내 야구 선수로 활동하며 장타를 뽐내 4번 타자로 기용되기도 하였다. 배재고등학교 졸업 후 연희전문학교로 진학하여 야구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1928년 경성 운동장에서 열린 경성의학전문학교(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주최 야구 대회에서 한국인 최초로 담장을 넘기는 홈런을 기록했다.

2.2. 선수 경력

연희전문학교(연세대학교) 재학 시절 축구부 선수로 활동하며 전조선 축구대회에서 1927년과 1928년 우승을 차지했다. 1929년 졸업 후 조선식산은행 야구팀에 유일한 한국인 선수로 입단하여 조선 실업 야구 리그에서 활약했다. 1930년부터 경성 축구단 선수로 경성과 평양 간 축구 경기에 참가했다.

1932년 경성에 거주하는 일본 야구 선수들의 선발팀인 젠케이조에 선발되었다. 1933년 조선축구협회(현 대한축구협회) 창립에 기여했다. 같은 해 젠케이조 소속으로 도시 대항 야구 대회(일본 전국 대회)에 출전하여 팀을 준우승으로 이끌었다.

1934년 일본 야구 올스타팀에 선발되어 미국 올스타팀과의 경기에 출전했다. 1935년 경성 축구단의 선수 겸 감독으로 천황배 전일본 축구 선수권 대회 우승을 이끌었다. 1936년 젠케이조와 식산은행 소속으로 마지막 야구 경기를 치렀다.

2.3. 은퇴 이후

8·15해방 후 조선야구협회 초대 이사장을 지냈으며, 1948년 제14회 런던 올림픽에 조사 연구원으로 파견되어 대한민국 체육계 활성화를 위한 기반을 다졌다. 이때 초대 감독이었던 박종휘가 개막 3일 전에 돌연 사퇴하면서 올림픽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부임, 1948년 하계 올림픽에 참가하여 국제 대회에서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을 이끈 최초의 감독이 되었다. 1948년 하계 올림픽 1라운드에서 멕시코를 상대로 대한민국 축구 역사상 첫 국제 경기 승리를 달성하고 팀을 올림픽 8강에 진출시켰다. 1950년 일본에서 열린 넌-프로 (Non-Pro) 야구 회의에 대한민국 대표로 참가했으며, 1954년에는 대한야구협회 (KBA) 부회장과 아시아 야구 연맹 (BFA)의 대한민국 대표를 지내는 등 대한민국 야구 발전을 위한 기초 마련에 크게 공헌했다.

2.4. 말년과 사망

그러나 그의 사생활은 1941년 전 부인 이보패 여사와 이혼하는 등 순탄치 못했고, 자녀들에게 악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1954년 8월 12일 새벽에 서울 종로구 필운동의 자택에서 셋째 아들의 친구 조용호가 쏜 총에 맞아 불의의 사고로 생을 마감한다.

이영민은 문란한 사생활을 보냈으며 가족에게 무관심했다. 같은 날, 가출했던 이영민의 셋째 아들 이인섭이 친구들과 함께 강도 행위를 하려고 집으로 돌아왔으나, 이인섭의 친구 중 한 명이 강도 행위 중 이영민을 살해했다.

4. 이영민 타격상

대한야구협회(현 대한야구소프트볼협회)는 이영민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1958년 이영민 타격상을 제정했다. 매년 9개의 전국 고교 야구 대회 중 5개 대회 이상, 15경기, 60타석 이상을 기록한 선수 중 가장 높은 타율을 기록한 선수에게 수여한다.

5. 수상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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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목소속대회수상비고
축구연희전문전조선 축구대회1927, 1928
연희전문전조선 축구대회준우승1929
연희전문전조선 축구대회준우승1932
경성 FC전조선 축구대회준우승1933
천황배 전일본 선수권 대회1935
전선신궁경기대회, 메이지 신궁 경기 대회1935
육상전조선중등학교육상경기대회남자 약 1.61km 준우승
전조선중등학교육상경기대회남자 400m 준우승

경평(京平)축구선수로 육상대회 400m에서 54초6의 신기록으로 우승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5.1. 축구

이영민은 계성고등보통학교에서 경성 배재고등보통학교로 스카우트되어 축구를 즐겼다. 그는 재학 중 전조선 축구대회와 경평축구대항전에서 활약하였다. 경성축구단의 일원으로 1935년 천황배 전일본 축구 선수권 대회 우승의 주역이기도 했다. 또한 조선축구협회 창설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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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속대회비고
연희전문전조선 축구대회1927, 1928
연우구락부전조선 축구대회준우승: 1929
경림 FC전조선 축구대회준우승: 1932
경성 FC전조선 축구대회준우승: 1933
천황배 전일본 선수권 대회1935
전선신궁경기대회, 메이지 신궁 경기 대회1935

5.2. 육상

이영민은 1923년 전조선중등학교육상경기대회에서 남자 약 1.61km 종목 준우승을, 1924년 전조선중등학교육상경기대회에서는 남자 400m 종목에서 준우승을 차지하였다. 경평(京平)축구선수로 육상대회 400m에서 54초6의 신기록으로 우승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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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즌대회수상
1923전조선중등학교육상경기대회남자 약 1.61km 준우승
1924전조선중등학교육상경기대회남자 400m 준우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