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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완 (160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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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완(1602년)은 조선 인조 때의 무신으로, 인조반정 공신 이수일의 아들이다. 1624년 무과에 급제하여 만포첨사, 평안도 병마절도사 등을 역임했으며, 병자호란 때 김자점의 별장으로 정방산성을 지켰다. 이후 북벌 계획에 참여하여 어영대장, 훈련도감 대장 등을 역임하며 군사 제도 개혁에 기여했다. 1674년 우의정에 오른 후 사망했으며, 경기도 여주에 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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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완 (1602년)

2. 생애

이완은 인조반정의 공신 이수일의 아들로 태어나, 1624년(인조 2년) 무과에 급제하면서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초기에는 이서의 추천으로 만포첨사가 되었고, 이후 여러 관직을 거쳐 1631년 평안도 병마절도사가 되었다.

1636년(인조 14년) 병자호란 때는 김자점의 별장으로 출전하여 정방산성을 지켰으며, 이후 함경도황해도 등에서 병사(兵使)를 역임했다. 1639년에는 최명길의 천거로 무신 출신으로는 드물게 동부승지가 되었다. 1640년 청나라명나라를 공격하면서 조선에 군사 지원을 요청했을 때, 임경업의 부장으로 참전했다. 그러나 이완은 배를 고의로 파손하고 풍랑을 만난 것처럼 꾸며 청나라에 피해를 과장하여 보고하고, 명나라에는 출전 사실을 알려 양국 간의 충돌을 피했다.

1649년 효종 즉위 후, 송시열과 함께 북벌 계획을 추진하며 핵심적인 역할을 맡았다. 포도대장과 어영대장을 역임하며 김자점의 모역을 처리하는 데 기여했다.

이완은 군사 제도 개혁에도 힘썼다. 어영청의 군제를 개편하여 병력을 2만 명으로 늘리고, 군병에게 지급하는 보(保)를 늘려 8만 명의 군보를 확보했다. 또한 안산 덕물도(德勿島)에 둔전(屯田)을 설치하여 군량미 확보에도 노력했다. 1653년(효종 4년)에는 정태화의 추천으로 훈련도감 대장에 임명되어 현종 대까지 16년간 재임하면서, 한성부 판윤, 공조 판서, 형조 판서, 포도대장 등을 겸임했다.

1669년(현종 10년) 훈련대장에서 물러난 후에도 관직을 사양했지만, 1674년 수어사를 거쳐 우의정에 제수되었고, 그해 사망했다. 그의 묘는 경기도 여주시 여주읍 상거리에 있으며, 이완장군묘 (경기도 기념물 제16호)로 지정되어 있다.

2. 1. 초기 생애

인조반정의 공신이자 무신인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 이수일의 아들로서 1624년(인조 2년) 무과에 급제한 뒤 이서(李曙)의 추천으로 만포첨사가 되었다. 1627년 영유현령, 1629년 상원군수, 1630년 숙천부사를 거쳐 1631년 평안도 병마절도사가 되었다.

1636년(인조 14년) 병자호란 때 도원수 김자점의 별장(別將)으로 출전하여 정방산성(正方山城)을 맡아 적을 무찔렀으며, 이후 함경도·황해도 등 여러 곳의 병사를 역임하였다.

1639년 최명길의 천거로 당시에는 드물게 무신으로 동부승지가 되었다. 1640년 청나라명나라를 치면서 전선(戰船) 120척과 공미(貢米) 1만 포(包)를 요구해왔을 때, 임경업의 부장(副將)으로 출전했다. 그러나 고의로 배를 파손하고 풍파를 만난 것처럼 꾸며 청에 피해를 과장하여 알리는 한편, 명나라에 출전 사실을 알려 충돌을 피했다.

2. 2. 관직 생활과 병자호란

인조반정의 공신이자 무신인 이수일의 아들로서 1624년(인조 2년) 무과에 급제한 뒤 이서(李曙)의 추천으로 만포첨사가 되고 1627년 영유현령, 1629년 상원군수, 1630년 숙천부사를 거쳐 1631년 평안도 병마절도사가 되었다.

1636년(인조 14년) 병자호란 때 도원수 김자점의 별장(別將)으로 출전하여 정방산성(正方山城)을 맡아 적을 무찔렀으며, 이후 함경도·황해도 등 여러 곳의 병사를 역임하였다.

1639년 최명길의 천거로 당시에는 드물게 무신으로 동부승지가 되기도 하였다. 1640년 청나라명나라를 치면서 전선(戰船) 120척과 공미(貢米) 10000포를 요구해왔을 때, 임경업의 부장(副將)으로 출전했다. 그러나 고의로 배를 파손하고 풍파를 만난 것처럼 꾸며 청에 피해를 과장하여 알리는 한편, 명나라에 출전 사실을 알려 충돌을 피했다.

1649년 효종 즉위 후 송시열과 함께 "명에 대한 은혜를 갚고, 청에게 받은 치욕을 씻는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북벌을 계획함에 따라 북벌과 관련된 요직을 두루 맡게 되었다. 포도대장을 거쳐 1650년에는 어영대장에 올랐으며 김자점의 모역을 다스리기 위해 포도대장을 거듭 맡았다.

또한 어영청의 군안(軍案)을 바꾸어 어영청에 소속된 원군(元軍)을 20,000명으로 대폭 확대하였고, 이들에게 지급되던 군보(軍保)도 종전 1보(保)에서 3보로 늘려 80,000명의 군보를 확보하는 한편, 안산 덕물도(德勿島)에 둔전(屯田)을 설치했다. 1653년(효종 4년) 영의정 정태화의 천거로 당시 공신이나 외척만이 임명되던 관례를 깨고 훈련도감의 대장에 특별히 임명되어, 현종대에 걸치도록 16년 동안 직책을 유지하는 한편, 한성부 판윤·공조 판서·형조 판서·포도 대장 등을 겸임하였다.

1669년(현종 10년)에 훈련대장에서 물러난 이래 관직을 계속 사양하였으나 1674년에는 수어사를 거쳐 우의정이 내려졌고, 그해에 사망하였다.

2. 3. 북벌 계획과 군사 제도 개혁

효종 즉위 후 송시열과 함께 "명에 대한 은혜를 갚고, 청에게 받은 치욕을 씻는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북벌 계획에 참여하여 관련 요직을 두루 맡게 되었다. 1650년에는 어영대장에 올랐으며, 김자점의 모역을 다스리기 위해 포도대장을 거듭 맡았다.

또한 어영청의 군안(軍案)을 바꾸어 어영청에 소속된 원군(元軍)을 2만여 명으로 크게 늘렸다. 이들에게 지급되던 군보(軍保)도 종전 1보(保)에서 3보로 늘려 8만여 명의 군보를 확보하고, 안산 덕물도(德勿島)에 둔전(屯田)을 설치했다. 1653년(효종 4년) 영의정 정태화의 천거로, 당시 공신이나 외척만이 임명되던 관례를 깨고 훈련도감의 대장에 특별히 임명되었다. 이후 현종 대에 걸쳐 16년 동안 훈련대장 직책을 유지하면서 한성부 판윤, 공조 판서, 형조 판서, 포도대장 등을 겸임하였다.

2. 4. 말년

1669년(현종 10년)에 훈련대장에서 물러난 이래 관직을 계속 사양하였으나, 1674년 수어사를 거쳐 우의정이 내려졌고 그해에 사망하였다.

이완장군묘(경기도 기념물 제16호)는 경기도 여주시 여주읍 상거리에 있다.

3. 등장 작품

3. 1. TV 드라마

3. 2.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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