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건 (조선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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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종건은 병조판서 이규철의 아들로, 무관 출신이며, 대한제국 시기에 군부대신, 시종장 등을 역임했다. 1859년 무과에 급제하여 우포도대장, 총어사 등 군부 요직을 거쳤으며, 임오군란 관련자 처형 공로로 관직에 올랐다. 1910년 한일 병합 조약 체결에 협조한 공로로 남작 작위를 받았으나, 3·1 운동 이후 작위 반납을 시도했다. 2002년 친일파 708인 명단에 수록되었으나, 작위 반납 시도 등으로 인해 친일파로 간주되지 않았고,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 대상에서도 제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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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건 (조선귀족)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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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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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일 | 1843년 |
사망일 | 1930년 |
출생지 | 조선 |
사망지 | 일본 제국 한국 |
소속 | |
군 종류 | 육군 |
복무 기간 | 1897년–1907년 |
최종 계급 | 육군 부장 |
주요 보직 | |
주요 보직 | 궁내부 특임관 군부대신 (9대) 궁내부 특임관 군부대신 (27대) |
2. 생애
이종건은 병조판서를 지낸 이규철의 아들로 무인 가문에서 태어나, 1859년 무과 과거에 급제했다.[1] 임오군란 당시 쿠데타 관련자들을 처형한 공로로 1880년대 여흥 민씨 섭정 시기에 관직이 올랐다. 개화파의 일원으로서 박정양과 김홍집과 협력했으나 결국 갈등을 겪었다.[2]
고종의 러시아 공사관 환궁 이후 경무사, 한성판윤으로 권력을 잡았다.[2][3] 1897년 10월 1일 육군 부장으로 승진하여 심순택 내각의 군부대신으로 임명되었다.[4] 1901년 무관청 군무국장으로 임명되었으며,[5] 육군 의례에 관한 지침서를 저술했다.[6] 만주 침략에 대해 만주에 한국군을 파병하는 것이 지속적인 중국 산적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라고 정당화했다.[7]
1903년 궁내부 특진관으로 임명되었고,[8] 1905년 군부대신으로 임명되었다.[9] 1906년 7월 29일 중추원 부의장으로 임명되었으며,[10] 1907년 5월 31일 조동윤을 대신하여 시종장이 되었다.[11] 1907년 9월 13일 군에서 은퇴했다.[12]
1910년 10월 16일 일본 정부로부터 한일 병합 조약 체결에 협조한 공을 인정받아 남작 작위를 받았다.[2][13] 반면, 절친했던 한규설은 을사조약에 반대하고 조선귀족 작위도 받지 않았다. 1919년 3·1 운동을 계기로 조선총독부에 남작 작위 반납을 표명하면서 은사공채를 반환했지만 조선총독부는 요청을 거절했다. 그는 1930년까지 생존했으며 일제강점기에 사망했다.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에 수록되었다.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는 남작위를 습작한 이풍한이 포함되었지만, 이종건 본인은 포함되지 않았다. 작위 반납 시도 때문에 이종건은 한일 병합 이후 작위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친일파로 간주되지 않는다.
2. 1. 초기 생애 및 관직 생활
병조판서를 지낸 이규철의 아들로 무인 가문에서 태어났으며 본관은 전주이다. 무과에 급제한 뒤 우포도대장과 총어사 등 군부의 요직을 지냈다. 여흥 민씨의 수구 정권 아래서는 민씨 세력의 신임을 받고 순조로운 관직 생활을 했으나, 이후 개화파 득세로 몇 차례 굴곡을 거쳤다. 이종건은 같은 무신 출신으로서 개화파와도 가까웠던 한규설과 각별한 사이였다.심순택의 내각에 군부대신으로 입각했고, 민씨 세력과 친미파, 온건개화파가 연합하여 결성한 대한제국 성립 시 박정양의 내각에서는 의정부 찬정을 맡았다. 직제 개편 후 경찰과 감옥 업무를 맡은 경무사를 지내는 등 치안 분야를 담당했다.
1859년 이종건은 무과에 급제했다.[1] 임오군란 당시 이종건은 쿠데타 관련자들을 처형했다. 이 공로로 1880년대 여흥 민씨 섭정 시기에 이종건은 관직이 올랐다. 개화파의 일원으로서 박정양과 김홍집과 협력했으나 결국 갈등을 겪었다.[2]
고종의 러시아 공사관 환궁 이후 이종건은 경무사, 한성판윤으로 권력을 잡았다.[2][3] 1897년 10월 1일 이종건은 육군 부장으로 승진하여 심순택 내각의 군부대신으로 임명되었다.[4] 1901년 이종건은 무관청 군무국장으로 임명되었으며,[5] 육군 의례에 관한 지침서를 저술했다.[6]
2. 2. 대한제국 시기 활동
병조판서를 지낸 이규철의 아들로 무인 가문에서 태어났으며 본관은 전주이다. 무과에 급제한 뒤 우포도대장과 총어사 등 군부의 요직을 지냈다. 여흥 민씨의 수구 정권 아래서는 민씨 세력의 신임을 받고 순조로운 관직 생활을 했으나, 이후 개화파 득세로 몇 차례 굴곡을 거쳤다. 이종건은 같은 무신 출신으로서 개화파와도 가까웠던 한규설과 각별한 사이였다.심순택의 내각에 군부대신으로 입각했고, 민씨 세력과 친미파, 온건개화파가 연합하여 결성한 대한제국 성립 시 박정양의 내각에서는 의정부 찬정을 맡았다. 직제 개편 후 경찰과 감옥 업무를 맡은 경무사를 지내는 등 치안 분야를 담당했다.[2][3] 고종의 러시아 공사관 환궁 이후 이종건은 경무사, 한성판윤으로 권력을 잡았다.
1897년 10월 1일 이종건은 육군 부장으로 승진하여 심순택 내각의 군부대신으로 임명되었다.[4] 1901년 이종건은 무관청 군무국장으로 임명되었으며,[5] 육군 의례에 관한 지침서를 저술했다.[6] 만주 침략에 대해 이종건은 만주에 한국군을 파병하는 것이 지속적인 중국 산적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라고 정당화했다.[7]
1903년 이종건은 궁내부 특진관으로 임명되었다.[8] 1905년 군부대신으로 임명되었다.[9] 1906년 7월 29일 이종건은 중추원 부의장으로 임명되었다.[10] 1907년 5월 31일 이종건은 조동윤을 대신하여 시종장이 되었다.[11] 1907년 9월 13일 이종건은 군에서 은퇴했다.[12]
2. 3. 한일 병합 이후
1910년 10월 16일 일본 정부로부터 한일 병합 조약 체결에 협조한 공을 인정받아 남작 작위를 받았다.[2][13] 이와는 대조적으로, 이종건과 절친했던 한규설은 을사조약에 반대하고 조선귀족 작위도 받지 않았다. 1919년 3·1 운동을 계기로 이종건은 조선총독부에 남작 작위 반납을 표명하면서 은사공채를 반환했지만, 조선총독부는 그의 작위 반납 요청을 거절했다. 그는 일제강점기에 사망했다.3. 친일 논란 및 평가
이종건은 1910년 10월 16일 일본 정부로부터 한일 병합 조약 체결에 협조한 공을 인정받아 남작 작위를 받았다. 반면, 그와 절친했던 한규설은 을사조약에 반대하고 조선귀족 작위도 받지 않았다. 이종건은 1919년 3·1 운동을 계기로 조선총독부에 남작 작위 반납을 표명하면서 은사공채를 반환했지만, 조선총독부는 그의 남작 작위 반납 요청을 거절했다.[1]
3. 1. 민족문제연구소 친일인명사전 수록 문제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에 수록되었다.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는 남작위를 습작한 이풍한이 포함되었지만, 이종건 본인은 포함되지 않았다.4. 상훈
1901년에 팔괘장 3등급을 받았다.[14]
참조
[1]
웹사이트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시스템 - 한국학중앙연구원 [이종건(李鍾健) 인물 정보]
http://people.aks.ac[...]
2022-01-14
[2]
웹사이트
이종건(李鍾健)
https://encykorea.ak[...]
2022-01-10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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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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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1-29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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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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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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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예식(이종건, 1901) - e뮤지엄 소장품검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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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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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웹사이트
한국고전종합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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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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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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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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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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