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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친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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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의친왕 이강은 조선 고종의 다섯째 아들로, 대한제국 시기 의친왕에 봉해졌다. 1890년대 외교관으로 활동하며 미국 유학을 다녀왔고, 1905년 귀국 후 대한제국 육군 부장 등을 역임했다. 일제강점기에는 독립운동에 헌신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 망명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광복 후에는 한국독립당 최고위원을 지냈으며, 한국 전쟁 중 천주교에 귀의하여 비오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1955년 사망했으며, 현재 의친왕기념사업회를 통해 그의 독립운동과 삶이 재조명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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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친왕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제국 육군 중장 시절의 이강
이름이강
작위의친왕
다른 이름의왕, 의화군
로마자 표기I Gang
한자 표기義親王 李堈
출생일1877년 3월 30일
출생지한성부, 조선
사망일1955년 8월 15일
사망지서울특별시 종로구 안국동 안동별궁
묻힌 곳남양주 홍유릉
가문전주 이씨
아버지고종
어머니명성황후(법적), 장씨 부인(생모)
종교유교, 불교, 천주교
배우자
본부인김덕수, 의친왕비
후궁정씨 부인(숙완당)
김흥인(수인당)
정운석(수현당)
조병숙
이희춘(수덕당)
김정완(수완당)
박영희(숙일당)
송씨 부인
김창희(소경당)
함계봉
김혜수
홍정순
자녀
아들이건(모모야마 겐이치)
이우
이방
이해완
이창
이주
이곤 (이강의 후계자)
이광
이현
이갑
이석
이환
이중
이해원
이해춘
이해숙
이혜경
이해자
이혜란
이혜련
이창희
관직 및 경력
내의원 제조 겸 사옹원 제조1894년 7월 1일 ~ 1895년 4월 30일
대한제국 육군 부장(3성 장군)
군사 계급
최종 계급대한제국 육군 부장(총장급) 전역
학력
학교일본 게이오기주쿠 대학
미국 로노크 대학교
미국 오하이오 웨슬리언 대학교
기타 정보
초기 이름이평길
아호만오
세례명비오
거주지서울특별시 성동구 화양동 별궁
서울특별시 종로구 안국동 사동궁 안동별궁
서울특별시 종로구 성북동 성락원
서울특별시 종로구 운니동 운현궁
서울특별시 종로구 관훈동 사동궁
서울특별시 종로구 세종로 경복궁
관련 링크

2. 생애

1877년 고종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이름은 이강(李堈)이다. 초명은 이평길(李平吉)이었으나, 후에 강(堈)으로 개명하였다. 어머니 귀인 장씨명성황후의 미움을 사 밖으로 쫓겨났지만, 청년 시절 의친왕 이강은 적모 명성황후의 후견으로 궁으로 돌아와 총애를 받았다. 명성황후는 적자 순종에게 후사가 없자 의친왕의 아들을 순종의 양자로 삼으려 하였다.[84] 귀인 장씨1887년 10월 14일 사망했으며, 1900년 숙원(淑媛), 1906년 귀인(貴人)에 추증되었다. 1911년에 묘소를 이장했다는 기록이 있다.[84] 유년기에는 윤치소, 이종훈, 권동진 등과 필운학당에서 수학하였다.[85]

1891년 12월 28일 의화공(義和公)에 책봉되었으며, 1892년 1월 28일 의화군(義和君)에 개봉되었다. 1893년 12월 6일 김사준의 딸 김덕수(金德修, 아명(兒名)은 김숙(金淑))를 아내로 맞았다. 1894년 7월 내의원제조 겸 사옹원제조에 임명되었고, 같은 해 청일전쟁 승전 축하를 위해 보빙대사로 일본을 방문하였다. 이듬해 6개국 특파대사(特派大使)로 영국, 독일, 프랑스, 러시아,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등을 방문하려다가 중도에 귀국하였다. 이후 을미년 왕세자 작위 선양 파동 사건에 연루되었다가 일본 유학을 하여 게이오기주쿠 대학교를 거쳐 1899년 미국으로 건너가 1900년 미국 내 각지를 순행하였다.

1901년 3월 버지니아주 세일럼 로노크 대학교(Roanoke College)에서 수학하며 김규식, 서광범 등을 만나 친분을 쌓았다. 1901년 6월 매사추세츠주 노스필드 학생대회에 수행원 및 김규식 등과 함께 참석하였다.[86] 로노크 대학교 졸업 후 오하이오주 델라웨어 오하이오 웨슬리언 대학교하와이, 샌프란시스코 등지를 다니며 학업을 계속하였으며, 1900년 8월 대한제국 전례 개편에 따라 '''의화군'''에서 '''의친왕'''에 책봉되었다.

1905년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대한제국 육군 부장(3성 장군, 육군총장급)이 되었다. 1906년 대한적십자사 총재에 취임, 금척대훈장을 받았다. 순헌황귀비의 견제와 일본의 영향으로 황태자 자리에 오르지 못했으며, 이토 히로부미의 권유를 거절하였다. 1907년 부황 고종의 강제 양위와 이복형 순종 즉위 직후 잠시 대리청정을 맡았으나, 영친왕 이은을 황태자로 책봉하려는 순헌황귀비이완용의 정략으로 해임되었다.[87][88][89][90]

1910년 한일합방 이후 공(公)으로 강등, 이강 공이 되었다. 일제에 비타협적 태도를 보이며 독립운동가들과 비밀리에 접촉, 1919년 고종 독살에 분노하여 손병희와 3.1운동을 기획하고 민족대표 33인 모임을 태화관에서 주선하였다. 대동단과 연락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탈출을 시도, 상복 차림으로 만저우 안둥 현까지 갔으나 일본군에 발각, 강제 송환되었다. 《독립신문》에는 상하이 망명을 도모하며 임시정부에 밀서를 보냈다는 기록이 있다.

이후 여러 차례 일본 도항을 강요받았으나 거절, 일본을 배척하는 정신을 지켰다. 비밀 독립운동으로 일제로부터 '''공'''(公) 지위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1945년 8월 광복 후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이 환국하자 김구, 김규식 등은 사동궁의 의친왕을 먼저 면담하였다. 1947년 3월부터 1949년 8월까지 한국독립당 최고위원 겸 전임고문 직위를 역임하였으나, 그 외에는 정치적 의사 표현을 삼갔다. 남북한 통일 정부 수립과 총선거를 주장하였으나, 이승만 대통령은 남한 단독 정부 수립을 주장하여 대립하였다.

1948년 8월 15일 정부 수립 후 이승만의 황실 배척 정책으로 재산이 국유화되고 사동궁마저 민간에 불하, 한국 전쟁으로 피난 후 사동궁 별궁인 안동별궁(현 서울공예박물관)에서 거주하며 황족으로서의 예우를 받지 못했다.

1955년 8월 9일 천주교로 개종, 장면(부통령, 세례명 요한)을 대부로 하여 '''비오'''로 영세하였다.[95] 1955년 8월 16일 안동별궁에서 영양실조 후유증과 스트레스(화병) 등의 합병증으로 79세에 타계하였다.

2. 1. 초기 생애와 교육

1877년 고종과 귀인 장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이름은 이평길(李平吉)이었으며, 성장하면서 이강(李堈)으로 개명하였다. 어머니 귀인 장씨는 명성황후의 미움을 사 궁궐 밖으로 쫓겨났지만, 의친왕 이강은 성장하여 적모 명성황후의 총애를 받았다. 명성황후는 적자 순종에게 후사가 없자 의친왕의 아들을 순종의 양자로 삼으려 했기 때문이다.[84] 유년기에는 필운학당에서 윤치소, 이종훈, 권동진 등과 함께 수학하였다.[85]

고종의 아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초기 생애에 대한 공식적인 기록은 많지 않다. 이는 고종의 궁중 시녀였으나 생전에 왕의 정식 후궁이나 첩이 아니었던 장씨에게서 태어났기 때문일 것이다. 전통에 따르면, 왕세자의 이복형제들은 왕세자가 10세가 될 때까지 궁궐 밖으로 나가야 했다. 그 결과, 이강은 철종의 사위인 박영효와 함께 몇 년을 보냈다.[2] 1884년 갑신정변 당시 이강과 그의 어머니는 박영효에 의해 궁궐로 옮겨졌다. 당시 소문에 의하면 정변 세력이 이강을 왕으로 세우려 했다고 한다.[3] 하지만 정변이 끝난 후 이강은 다시 궁궐을 떠났다.

1891년 12월 28일 '''의화공'''(義和公)에 책봉되었으며, 1892년 1월 28일 '''의화군'''(義和君)으로 개봉되었다.[4] 1893년에는 명성황후의 주선으로 김사준의 딸인 김덕수(덕인당 김씨)와 혼인하였다.[7]

2. 2. 해외 유학

1894년 청일전쟁 승전 축하 사절단(보빙대사)으로 일본을 방문하였다. 이듬해 영국, 독일, 프랑스, 러시아,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6개국 특파대사로 임명되어 유럽을 순방하려다 중도에 귀국하였다. 1899년 일본 게이오기주쿠 대학교를 거쳐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1900년 미국 내 각지를 순행하였다.

1901년 3월 버지니아주 세일럼 로노크 대학교(Roanoke College)에서 수학하며 우사 김규식, 서광범 등과 교류하였다. 1901년 6월 매사추세츠주 노스필드에서 열린 학생대회에 수행원 및 김규식 등과 함께 참석하였다.[86]

로노크 대학교 졸업 후 오하이오주 델라웨어 오하이오 웨슬리언 대학교에서 학업을 이어갔으며, 하와이샌프란시스코 등지도 방문하였다. 1905년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였다.

2. 3. 대한제국 시기 활동

1900년 대한제국 시기에 의친왕에 봉해졌다. 1905년 귀국하여 대한제국 육군 부장(3성 장군)이 되었고, 1906년 대한적십자사 총재에 취임, 금척대훈장을 수훈받았다.[36] 순헌황귀비와 일본의 견제로 황태자 책봉은 좌절되었다. 1907년 고종 강제 양위 이후, 순종의 대리청정을 잠시 맡았으나 일제에 의해 해임되었다.

2. 4. 일제강점기 독립운동

1910년 한일병합 이후, 의친왕은 친왕에서 공으로 강등되어 이강 공이 되었다.[25] 그는 일제에 비타협적인 태도를 보이며 독립운동가들과 비밀리에 접촉하였다.

1919년 3·1 운동 당시, 고종 독살에 분노한 의친왕은 손병희와 함께 만세운동을 계획하고, 민족대표 33인의 모임을 사동궁과 담을 맞댄 태화관에서 주선하였다. 같은 해 11월, 대동단 사건을 통해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망명을 시도하였다. 그는 황족으로서의 예우를 버리고 '일개 신민'의 자격으로 임시정부에 참여하고자 하였다.[92] 상복 차림으로 변장하여 만주 안동현(현 단둥)까지 갔으나, 일본군에 체포되어 강제 송환되었다.[27]

망명 실패 이후, 의친왕은 일제로부터 도일을 강요받았으나 끝까지 거절하였다.[94] 일제의 감시 속에서도 비밀 독립운동을 지속하였고, 이로 인해 공의 지위에서 물러나 가택 연금 및 24시간 감시를 당하였다.[94]

2. 5. 광복 이후

1945년 광복 이후, 11월 23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이 환국하자 김구, 김규식 등은 사동궁의 의친왕을 먼저 면담하였다. 해방 정국에서 그는 1947년 3월부터 1949년 8월까지 2년 5개월간 한국독립당 최고위원 겸 전임고문 직위를 역임하였으나, 그 외에는 별다른 정치적 의사 표현을 최대한 삼갔다. 의친왕은 남북한 통일 대한민국 수립과 총선거를 주장하였으나, 이승만 대통령은 남한 단독 정부 수립을 주장하여 둘은 대립하였다.[91][92][93]

1948년 8월 15일 정부 수립 후, 황실을 배척하던 이승만 대통령의 정책으로 인해 모든 재산이 국유화되었다. 의친왕은 살던 사동궁마저 민간에 불하되어 망국의 황자로서 고난의 세월을 보냈다. 1950년 한국 전쟁으로 피난을 갔다가 1953년 7월 27일 휴전 협정 후 다시 서울로 돌아와 사동궁 별궁인 안동별궁(현 서울공예박물관)에서 거주하였다. 그러나 황족으로서의 어떠한 예우도 받지 못했다.[94]

1955년 8월 9일 천주교로 개종, 병석에서 장면(부통령, 세례명 요한)을 대부로 하여 영세를 받았다.[95] 의친왕의 세례명은 '''비오'''이다.

1955년 8월 16일, 서울특별시 종로구 안동별궁에서 영양실조 후유증과 스트레스(화병) 등의 합병증으로 79세를 일기로 타계하였다. 의친왕은 사망하기 전 로마 가톨릭교회에 귀의할 것을 약조하였는데, 이는 조부 흥선대원군병인박해를 일으켜 천주교도 수만 명을 사형시킨 것에 대한 참회의 성격도 있었다.

3. 사후

1955년 8월 16일, 서울특별시 종로구 안동별궁에서 영양실조 후유증과 스트레스(화병) 등의 합병증으로 79세를 일기로 타계하였다.[95] 천주교로 개종한 직후였으며, 세례명은 비오이다.[95]

사후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 홍유릉 내에 위치한 의친왕묘(義親王墓)에 안장되었다.[94] 1975년에는 생모 김금덕(의친왕 이강의 측실)의 위독 소식을 듣고 귀국한 그의 다섯째 딸 이해경이 30년 넘게 아버지 의친왕의 복권운동을 추진했으나 실패하였다.

2000년대 이후 의친왕이 임시정부 요인, 대동단 등과 비밀리에 서신 연락을 주고받은 점 등이 발굴되어 연구가 진행 중이다.

2022년 대한황실의 직계후손들과 의친왕과 함께 독립운동을 했던 요인들의 후손들이 모여 [http://blog.naver.com/sadonggung 의친왕기념사업회]가 설립되었다. 의친왕기념사업회는 의친왕과 황실의 독립운동을 재조명하고, 전시회, 공연, 학술회 등을 통해 의친왕을 재조명하고 있다. 의친왕기념사업회의 초대 이사장으로는 의친왕 이강의 장손이자 사동궁 사손인 이준이 추대되어 활동하고 있다.

[https://web.archive.org/web/20091117111319/http://cafe.daum.net/daehan815 대한제국 의친왕 숭모회]는 2006년 설립되어 매년 양력 8월 15일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 홍유릉 내 의친왕묘에서 제향을 주관하였으나, 2013년 4월 공식 해체되었다. 이후 2022년 부터 의친왕가의 제4대 사동궁주 이준 황손을 중심으로 의친왕기념사업회가 발족되어 의친왕 숭모회와 공동주관으로 의친왕 기신제를 봉행하고 있다.

의친왕기념사업회는 대한제국 황실의 후손들과 독립운동가의 자손들, 황실독립운동의 중심 의친왕을 존경하는 국민들이 모여 2022년 설립한 단체이다. 의친왕가 종손 이준 황손이 회장으로, 황실의 가장 큰 어른인 이해경 왕녀가 명예회장으로 활동 중이다. 경기여고 경운박물관에서 2022년 10월부터 2023년 1월까지 [https://www.yna.co.kr/view/AKR20221016029900005 <의친왕과 황실의 독립운동:기록과 기억>] 전시를 진행했으며, 의친왕 관련 사료와 유물을 수집, 연구하고, 관련 서적을 출판, 간행하는 일을 진행하고 있다. 또한 매년 양력 8월 15일 의친왕 기신제를 봉행하는 주관단체이다.

4. 가족 관계

아버지고종
어머니귀인 장씨
배우자의친왕비 김씨(김덕수)
후궁13명
자녀12남 9녀


  • 조부: 흥선대원군 이하응
  • 조모: 여흥부대부인 여흥 민씨
  • 부황: 고종
  • 모후: 명성황후 여흥 민씨
  • 어머니(친모): 귀인 장씨
  • 배우자: 의친왕비 김씨(김덕수)[97]
  • 후궁
  • 제1후실: 수관당 정씨
  • 1왕자: 이건 - 일본 귀화
  • 제2후실: 수인당 김씨(김흥인)
  • 2왕자: 이우 - 운현궁으로 양자 출계
  • 5왕자: 이주 - 대궁으로 양자 출계
  • 6왕자: 이곤 - 의친왕 가문 차남으로 의친왕 가문 승계
  • 손자: 이준 - 의친왕가 종손, 의친왕기념사업회 회장
  • 제3후실: 수현당 정씨(정운석)
  • 제4후실: 조씨(조병숙)
  • 제5후실: 수덕당 이씨(이희춘)
  • 제6후실: 수완당 김씨(김정완)
  • 제7후실: 수길당 박씨(박영희)
  • 제8후실: 송씨
  • 제9후실: 수경당 김씨(김창희)
  • 제10후실: 김금덕[94]
  • 5왕녀: 이해경 - 의친왕비 호적으로 정식 편입
  • 제11후실: 함개봉
  • 9왕자: 이갑
  • 손자: 이원 - 황태손 이구의 양자로 출계
  • 제12후실: 김혜수
  • 제13후실: 홍정순 (남양 홍씨)
  • 10왕자: 이석


의친왕과 의친왕비 김씨 사이에는 자녀가 없었다. 공식적으로 확인된 의친왕의 자녀는 12남 9녀이다.[98] 의친왕비 김씨는 황손들을 친자녀처럼 양육하였다. 일부 황손들은 생모가 양육하였으나, 대부분은 사동궁에서 대가족 형태로 거주하였다.

순서황실명출생사망생모거주지출계
1남이건1909년1990년수관당 정씨-일본 귀화
2남이우1912년1945년수인당 김흥인-운현궁 이준용
3남이방1914년1951년수현당 정운석-자식 없음
4남이창1915년사망조병숙-은전군이헌용
5남이주1917년1982년수인당 김흥인-인평대군이인용
6남이곤1919년1984년수인당 김흥인-사동궁 종주
7남이광1920년1952년송씨-계동궁 이기용
8남이현1922년1996년수경당 김창희--
9남이갑1938년2014년함개봉뉴욕-
10남이석1941년생존홍정순전주-
11남이환1944년생존김혜수산호세-
12남이정1947년생존홍정순LA-
1녀이영1918년1981년수덕당 이희춘-계동궁 이기용
2녀이해원1919년2020년수덕당 이희춘-계동궁 이기용
3녀이해춘1920년2009년수완당 김정완-계동궁 이기용
4녀이해숙1920년사망수길당 박영희-계동궁 이기용
5녀이해경1930년생존김금덕뉴욕의친왕비 김씨
6녀이희자1940년2015년김혜수순천수도자 (여성)
7녀이해란1944년생존홍정순LA-
8녀이해련1950년생존홍정순서울-
9녀이창희1953년생존김혜수산호세-

5. 학력

1899년 미국으로 건너가 1901년 3월 버지니아주 세일럼의 로노크 대학교를 졸업하고, 오하이오주 델라웨어의 오하이오 웨슬리언 대학교에서 학업을 계속하였다. 이때 김규식 등과 동문수학하며 친분을 쌓았다.[86]

6. 상훈

7. 평가 및 논란

의친왕 이강은 일제강점기에 황족으로서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점이 높이 평가되지만, 초기 방탕한 생활과 빚 문제 등으로 비판받기도 한다.[94] 황실 재산 몰수와 관련하여 이승만과의 갈등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1894년 일본에 대사로 다녀온 후, 이듬해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6개국 특파 대사에 임명되었다. 1896년에는 미국 유학을 떠났으며, 1900년 대한제국 시기에 의친왕에 봉해졌다. 1905년 귀국 후에는 대한제국 육군 부장, 대한적십자사 총재, 순종 황제 대리청정 등을 역임했다.

한국 병탄 이후 일제에 비타협적인 태도를 보이며 독립운동가들과 가까이 지냈다. 1919년 고종 황제가 일제에 의해 독살당하자 손병희와 함께 3.1 만세운동을 기획했다. 또한 대동단의 주요 인물들과 연락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탈출을 시도했으나, 만저우 안둥 현에서 일본군에 발각되어 강제 송환되었다.

이후에도 일본의 계속된 귀국 강요를 거절하고, 일본을 배척하는 정신을 지켰다. 비밀 독립운동으로 인해 일제로부터 형식적인 '''공'''(公)의 지위에서 물려나게 되었다. 해방 후에는 김구, 김규식 등과 한국독립당을 창당하여 최고위원으로 활동했으며, 남북한 통일 대한민국 선거를 주장하였으나 남한만의 단독선거를 주장한 이승만 대통령과 마찰이 있었다.

한국 전쟁 이후 병고와 영양실조로 고생하다가 안동별궁에서 기거하던 중, 임종 직전 천주교에 귀의하여 '''비오'''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7. 1. 긍정적 평가

의친왕 이강은 일제강점기에 황족으로서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점이 높이 평가된다.[91][92][93][94] 특히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연계하여 1919년 상하이 망명을 시도하고, 대동단 사건에 연루되는 등 그의 민족의식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들이 있다. 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밀서를 보내, 망명 정부가 수립되면 황족의 예우를 버리고 '일개 신민'의 자격으로 정부를 받들겠다는 의지를 표명했다.[92]

비록 만주 안둥 현에서 일본군에 발각되어 강제 송환되었지만, 이 사건은 당시 대한제국 황족들에게 허용되었던 한반도 내 여행의 자유를 박탈당하는 보복으로 이어졌다.[91] 이후에도 그는 일본의 감시 속에서도 독립운동을 계속 지원하였으며, 1940년 창씨개명을 거절하는 등 민족의 자긍심을 지키려 노력했다.

7. 2. 부정적 평가

의친왕은 초기 방탕한 생활과 빚 문제 등으로 비판받았다.[94] 황실 재산 몰수와 관련하여 이승만과의 갈등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7. 3. 기타

의친왕은 사격술과 권총 사격술에 뛰어나 백발백중이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당시 화가 나면 울분을 참을 길이 없어 사격과 권총술로 화풀이를 했다고 한다.[100]

8. 대중 매체

의친왕은 아래와 같은 대중 매체에서 다루어졌다.


8. 1. 드라마

참조

[1] 간행물 덕수장씨족보 德水張氏族譜 https://www.familyse[...]
[2] 서적 Records of the Japanese Legation in Korea
[3] 서적 清季中日韓關係史料-第三卷 Institute of Modern History, Academia Sinica 1972-01-01
[4] 웹사이트 왕자인 강에게 의화군의 작위를 봉하다 http://sillok.histor[...] 2020-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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