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상선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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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노상선우는 기원전 174년 묵돌선우의 뒤를 이어 흉노의 선우가 되었다. 그는 한나라와 화친을 맺고, 환관 중항열을 중용하여 흉노의 국가 발전에 기여했다. 기원전 166년에는 한나라를 공격하여 피해를 입혔으며, 월지를 공격하여 그 왕의 머리로 술잔을 만들었다. 재위 기간 동안 흉노의 세력을 확장했고, 기원전 161년에 사망하여 아들 군신선우가 뒤를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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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상선우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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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작위 | 탱리고도선우 |
재위 | 기원전 174년-기원전 161년 |
전임자 | 묵돌선우 |
후임자 | 군신선우 |
휘 | 계육 |
왕조 | 흉노 |
가문 | 연제씨 |
아버지 | 묵돌선우 |
자녀 | 군신선우 이지사선우 |
칭호 | |
칭호 | 선우 |
재위 기간 | 기원전 174년 ~ 기원전 161년 |
생애 | |
아버지 | 묵돌선우 |
후계자 | 군신선우 |
2. 생애
묵돌 선우의 아들로, 이름은 지주(稽粥)이다. 아버지의 지시에 따라 기원전 177년 또는 기원전 176년에 월지를 공격하여 간쑤 지역에서 몰아냈다.[2]
기원전 174년, 아버지 묵돌 선우가 사망하자 그 뒤를 이어 선우로 즉위했다. 《사기》에 따르면, 즉위 후 전한의 문제는 화친 정책에 따라 황족 여성을 노상선우에게 보내 연지로 삼게 했으며, 이때 환관 중행설이 공주를 따라왔다가 흉노에 투항하여 노상선우의 주요 조력자가 되었다.[3] 중행설은 노상선우에게 흉노 고유의 문화를 유지하고 통치 체제를 정비하는 데 조언했다.
노상선우는 재위 기간 동안 적극적인 군사 활동을 펼쳐 흉노의 세력을 크게 확장했다. 기원전 166년과 기원전 165년에는 대규모 기병을 이끌고 전한을 침공하여 수도 장안 근처까지 진격하며 한나라를 위협했다. 비록 전한과 다시 화친을 맺기도 했으나, 이후에도 매년 전한의 변경 지역을 침입하여 약탈을 자행했다.
또한 서쪽으로는 월지에 대한 공세를 지속하여 기원전 164년경 간쑤와 타림 분지를 완전히 장악했다. 이 과정에서 월지의 왕을 죽이고 그의 두개골로 술잔을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흉노의 압박으로 월지와 사카족은 중앙아시아 및 서쪽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기원전 161년에 사망하였으며, 아들 군신 선우가 뒤를 이어 선우가 되었다.
2. 1. 즉위와 한나라와의 관계
기원전 174년, 아버지 묵돌 선우가 사망하자 그 뒤를 이어 선우가 되었다. 아버지 대에 전한과 맺은 화친 조약에 따라, 문제가 보낸 전한 종실의 옹주(제후왕의 딸)와 혼인하여 연지로 삼았다. 이때 공주를 호송하던 환관 중항열이 흉노에 투항하자 그를 중용하였다.중항열은 노상선우에게 한나라의 비단이나 음식 대신 흉노 고유의 의복과 식문화를 중시하도록 조언했다. 또한 백성과 가축 수를 조사하여 세금을 부과하는 제도를 시행하도록 했으며, 한나라에 보내는 외교 문서인 목독(木牘)의 규격을 한나라 것(한 자 한 치)보다 1치 더 큰 한 자 두 치로 늘리고, 문서의 내용도 흉노의 위상을 더 높이는 방식으로 바꾸도록 제안했다. 이는 흉노의 문화적 정체성을 강화하고 통치 체제를 정비하는 데 영향을 주었다. 이외에도 중항열은 선우에게 여러 유용한 조언을 하였다. 《사기》 권110에는 문제 황제가 황족 공주와 환관 중행열(중항열)을 보냈으나 중행열이 흉노에 귀순했다는 기록이 있다.[3]
기원전 166년, 노상선우는 14만 명의 기병을 이끌고 한나라의 조나현(朝那縣)과 소관(蕭關)을 침공하여 북지군의 도위 손앙(孫卬)을 살해하고 수많은 백성과 가축을 약탈했으며, 팽양현까지 진출했다. 또한 회중궁(回中宮)을 불태우고, 척후병을 수도 장안 인근의 감천궁(甘泉宮)까지 보내 한나라를 위협했다.
이에 문제는 중위 주사(周舍)와 낭중령 장무(張武) 등을 장군으로 삼아 전차 1,000승과 기병 10만 명을 동원하여 장안 부근에 배치하는 한편, 노경, 위속, 주조, 장상여, 동적 등을 각 군의 장군으로 임명하여 대규모 토벌군을 편성했다. 그러나 흉노군은 장성 안쪽에 한 달 남짓 머무르다가 양측의 큰 교전 없이 물러났다.
이후에도 흉노는 매년 한나라의 국경 지역을 침입하여 약탈을 자행했으며, 특히 운중군과 요동군의 피해가 극심했고 대군에서도 1만 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기원전 165년에도 흉노는 다시 장안 근처까지 침입했다. 계속되는 침입에 한나라 조정이 사신을 보내자, 노상선우 역시 당호(當戶)[5] 겸 저거인 조거난(雕渠難)과 낭중 한료(韓遼)를 사신으로 파견하여 사과하고 화친을 제의했다. 한나라가 이를 받아들이면서 양국은 다시 화친 관계를 맺고 서로 국경을 침범하지 않기로 합의했다.
기원전 161년에 노상선우가 사망하고, 그의 아들 군신 선우가 선우의 자리를 계승했다.
2. 2. 군사적 활동과 흉노의 확장
기원전 177년 혹은 기원전 176년, 아버지 묵돌 선우의 지시에 따라 월지를 공격하여 그 왕을 죽이고 머리로 술잔을 만들었다. 이 공격으로 이미 쇠약해진 월지는 간쑤에서 쫓겨나 서쪽으로 이주하게 되었다.[2] 이후 기원전 164년, 노상선우는 간쑤와 타림 분지를 완전히 점령하여 월지와 사카족을 몰아냈다. 쫓겨난 월지와 사카족은 박트리아를 침략하고 소그디아를 점령했으며, 오손에 의해 다시 밀려나기도 했다. 사카족의 일부는 파르티아나 인도로 이동했다. 남부 간쑤로 피신한 월지의 일부는 '소월지족'이라 불리며 강족과 합쳐졌다.기원전 166년, 노상선우는 14만 명의 기병을 이끌고 한나라의 조나현(朝那縣)과 소관(蕭關)을 침공했다. 이 공격으로 북지군의 도위 손앙(孫卬)이 전사하고 수많은 백성과 가축이 약탈당했으며, 흉노 군대는 팽양현(彭陽縣)까지 진출했다.[3] 또한 회중궁(回中宮)을 불태우고, 정찰병은 옹주의 감천궁(甘泉宮) 근처까지 이르렀다. 이에 한나라 문제는 주사(周舍)와 장무(張武) 등을 장수로 삼아 전차 1,000승과 기병 10만 명을 동원하여 장안 부근에 배치하고 반격에 나섰다. 또한 노경, 위속, 주조, 장상여, 동적 등을 장군으로 삼아 대규모 군대를 투입하여 흉노 토벌을 시도했다. 노상선우는 장성 안쪽에서 한 달 남짓 머물다가 한나라 군대와 직접 충돌하기 전에 퇴각했다.
기원전 165년에도 흉노는 다시 장안 근처까지 침입했다. 이후에도 매년 한나라 변경을 침략하여 약탈을 자행했으며, 특히 운중군과 요동군의 피해가 극심했고 대군에서도 1만여 명이 피해를 입었다. 계속되는 침공에 한나라가 사신을 보내 항의하자, 노상선우는 당호(當戶)[5] 겸 저거(沮渠) 조거난(雕渠難)과 낭중(郎中) 한료(韓遼)를 사신으로 보내 사과하고 화친을 제의했다. 한나라가 이를 수락하면서 화친이 성립되었고, 양국은 서로 국경을 넘지 않기로 합의했다.
2. 3. 월지 정벌과 서역 진출
아버지 묵돌선우 대부터 시작된 월지에 대한 공세는 노상선우 대에 이르러 더욱 본격화되었다. 기원전 177년 또는 176년에 아버지의 지시로 월지를 공격하여 간쑤 지역에서 몰아냈다는 기록이 있다.[2]노상선우는 재위 중 월지에 대한 결정적인 공격을 감행했다. 기원전 164년, 흉노군은 간쑤와 타림 분지를 완전히 점령하였고, 이 지역에 있던 월지와 사카족을 서쪽으로 몰아냈다. 이 과정에서 노상선우는 월지의 왕을 죽이고 그의 머리뼈로 술잔을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이 해골 술잔은 흉노의 강력한 힘을 상징하는 전리품이 되었다.
흉노의 공격으로 서쪽으로 밀려난 월지는 박트리아를 침략하고 소그디아를 점령하는 등 새로운 근거지를 찾아 이동했다. 이후 오손에게 다시 공격받아 이동하기도 했다. 사카족 역시 흉노에게 쫓겨 파르티아나 인도 등지로 흩어졌다. 일부 월지 세력은 남쪽으로 이동하여 강족과 융화되기도 했는데, 이들을 소월지(小月氏)라고 부른다.
이 정벌을 통해 흉노는 타림 분지를 장악하며 중앙아시아로 세력을 확장하는 중요한 발판을 마련했다. 이를 거점으로 삼아 흉노는 전한에 대한 공세를 지속할 수 있었다.
월지 왕의 머리뼈로 만든 술잔은 이후 흉노에게 중요한 상징물로 여겨졌다. 시간이 흘러 기원전 43년, 호한야선우가 전한의 사신 한창 및 장맹과 노수(약수, 弱水) 강가에서 동맹을 맹세할 때 이 술잔에 피를 받아 마시며 맹약을 굳혔다고 한다.
2. 4. 사망
기원전 161년에 사망하였으며, 그의 아들인 군신 선우가 뒤를 이었다.3. 평가
아버지 묵돌 선우의 뒤를 이어 기원전 174년 흉노의 선우 자리에 올랐다.[3] 그는 묵돌 선우가 이룩한 흉노의 전성기를 이어받아 군사적, 외교적으로 뛰어난 역량을 발휘하며 흉노의 세력을 크게 확장시킨 군주로 평가된다.
즉위 초, 한나라 문제는 화친 정책의 일환으로 황족 여성을 공주로 삼아[4] 노상선우에게 보내 황후(알지)로 삼게 했다. 이때 공주의 시종으로 연나라 출신 환관 중항열이 함께 파견되었는데, 그는 흉노로 보내진 것에 불만을 품고 한나라를 등진 채 노상선우에게 충성했다.[3] 중항열은 당시 흉노 지배층이 한나라의 비단, 면화, 식량 등 사치품에 물드는 것을 경계하며 흉노 고유의 생활 방식을 지킬 것을 조언했다. 또한, 그는 흉노에게 문자 기록 방법과 세금 징수 방식 등을 전수하여 국가 체제를 정비하는 데 기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군사적으로 노상선우는 뛰어난 능력을 보였다. 선우가 되기 전인 기원전 177년 또는 기원전 176년, 아버지 묵돌의 명으로 서쪽의 월지를 공격하여 그 왕의 두개골로 술잔을 만들고 간쑤 지역에서 몰아냈다.[2] 선우 즉위 후인 기원전 164년에는 간쑤와 타림 분지를 완전히 장악하여 월지와 사카족을 서쪽으로 더욱 밀어내고 흉노의 서역 지배 기반을 공고히 했다. 이 과정에서 북부 박트리아의 하탈족을 격파하고 그 족장의 해골로 술잔을 만들기도 했다. 이러한 흉노의 서진은 중앙아시아 민족들의 연쇄 이동을 촉발하는 결과를 낳았다.
한나라에 대해서는 일관되게 군사적 압박 정책을 구사했다. 기원전 166년에는 14만 명에 달하는 대규모 기병을 이끌고 조나(朝那)와 소관(蕭關)을 넘어 북지군의 도위 손앙(孫卬)을 살해하고, 수많은 백성과 가축을 약탈하며 한나라의 수도 장안 근처인 팽양(彭陽)까지 진격했다. 심지어 별동대를 보내 황제의 별궁인 회중궁(回中宮)을 불태우고, 정찰병을 옹주의 감천까지 보내는 등 한나라 조정을 크게 위협했다. 이에 한 문제는 주사, 장무 등을 장군으로 삼아 10만 이상의 대군을 동원하여 수도 방어에 나섰고, 노경, 위속, 주조, 장상여, 동적 등을 장군으로 임명하여 흉노 토벌군을 편성했다. 흉노군은 장성 안쪽에 한 달 남짓 머무르다 물러났으나, 이후에도 거의 매년 한나라 변경을 침입하여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특히 운중군과 요동군, 대군 지역의 피해가 극심했으며, 대군에서는 1만 명 이상이 목숨을 잃거나 끌려갔다고 기록되어 있다.
한나라는 이러한 흉노의 침입에 고심하여 사신을 보내 관계 개선을 시도했고, 노상선우 역시 당호(當戶)[5]를 사신으로 보내 답례하고 사과하면서 양국은 다시 강화 조약을 맺고 우호 관계를 회복했다.
이처럼 노상선우는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한나라를 압박하여 외교적으로 우위를 점하고 많은 공물을 얻어냈지만, 그의 지속적인 침략 전쟁은 한나라 백성들에게 큰 고통과 피해를 안겨주었다는 점에서 비판받을 수 있다. 그는 흉노의 패권을 유지하고 확장하는 데에는 성공했으나, 그 과정에서 수많은 인명을 희생시킨 군주이기도 했다.
기원전 161년에 사망했으며, 그의 아들 군신 선우가 뒤를 이어 선우가 되었다.
4. 가족 관계
참조
[1]
서적
1979
[2]
서적
The Empire of the Steppes
https://archive.org/[...]
Rutgers University Press
[3]
서적
1993
[4]
문서
[5]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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