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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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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진무는 평안북도 정주 출신의 독립운동가이다. 3·1 운동 이후 만주로 건너가 광복군총영에 가입하여 무장 항일 투쟁에 참여했으며, 1920년 신의주 방면 폭탄 투척에 가담했다. 대한통의부와 정의부에서 활동하며 군자금 모집, 일제 경찰 살상 등의 활동을 벌였고, '흑선풍' 또는 '일목장군'으로 불렸다. 1928년 조선혁명군에 가담했으나, 이후 독자적인 활동을 펼치며 1931년 노농자위군을 조직, 재만조선인혁명군으로 개칭했다. 잦은 국내 활동으로 일제에 체포되어 1932년 사형 선고를 받고 순국했으며,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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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무
기본 정보
이진무 사진
이진무
본관경주 이씨
출생1941년 1월 2일
사망2022년 4월 10일 (81세)
직업대한민국 검사 출신 변호사, 기업인, 정치인
배우자박혜자
자녀2남
학력경기고등학교 졸업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졸업
종교천주교 세례명: 사도 요한
경력
경력제10회 고등고시 사법과 합격
법무부 검사
대검찰청 검찰연구관
서울지방검찰청 특수1부 부장검사
대검찰청 특수3과 과장
대검찰청 중앙수사부 수사기획관
서울지방검찰청 제1차장검사
부산고등검찰청 차장검사
법무연수원 원장
대검찰청 차장검사
제32대 법무부 차관
김&장 법률사무소 변호사
한국전력공사 사외이사
법무법인(유한) 태평양 고문변호사
학교법인 숭실대학교 이사장
재단법인 숭실대학교 이사장
수상
수상황조근정훈장
기타
로마자 표기I Jinmu

2. 생애

이진무는 평안북도 정주군 출신으로, 3·1 운동일제의 무력에 좌절되는 것을 보고 만주로 건너가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만주에서 여러 독립운동 조직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통합되는 과정에서 광복군총영에 가입하여 무장 항일 투쟁을 시작하였다. 1920년에는 국내 폭탄 테러 계획에 참여하여 신의주 방면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이후 자유시 참변을 겪은 뒤 1922년 대한통의부가 수립되자 이에 가입하여 최석순의 부하로 활동하면서 국내에 파견되어 일본 경찰과 총격전을 벌이는 등 어려운 임무를 수행했다. 1924년 정의부 결성 후에는 김석하의 부하로서 평안북도 철산군 경찰 주재소를 습격하는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흑선풍', '일목장군' 등의 별명으로 불릴 정도로 용맹하게 활동하였다.

1928년 조선혁명군에 가담하였으나, 국민부와 의견이 맞지 않아 1931년 노농자위군(재만조선인혁명군)을 조직하여 독자적인 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1932년 체포되어 평양형무소에서 사형이 집행되면서 순국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2. 1. 초기 활동 (만주 망명과 광복군총영)

평안북도 정주군 출신이다. 정주는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났을 때 남강 이승훈을 중심으로 적극 참여했던 지역으로, 그는 3·1 운동이 일제의 무력에 좌절되는 것을 목격하고 만주로 건너갔다.

당시 만주에 산개해 있던 여러 독립 운동 조직이 상하이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통합하면서 광복군총영(총영장 오동진)이 설치되었다. 이진무는 광복군총영에 가입하면서 무장 항일 투쟁에 뛰어들게 되었다. 1920년 광복군총영이 미국 의회 동양시찰단의 방문을 계기로 국내 폭탄 테러를 계획했을 때, 그는 신의주 방면을 담당하여 폭탄을 투척했다.

2. 2. 대한통의부와 정의부 활동

자유시 참변 이후 1922년 기존의 단체들이 새로운 통합 기구인 대한통의부를 수립하자 여기에 가입했다. 이진무는 대한통의부에서 최석순의 부하로 활동하면서 또다시 국내에 파견되어 평안북도 창성군에서 일본 경찰과 총격전을 벌이는 등 늘 위험하고 어려운 임무의 일선에 있었다. 국내 파견의 목적은 군자금 모집으로, 그는 부호의 집을 찾아다니며 반강제적으로 군자금을 걷고 밀정을 처단하는 등의 활동을 벌였다.

1924년에는 준정부적 성격을 지닌 정의부가 결성되자 여기에 가입했고, 김석하의 부하로서 이듬해 평안북도 철산군에 진입하여 경찰 주재소를 습격하고 일경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후로도 숱하게 국내에 침투하여 정주와 귀성군 등지에서 군자금을 모집했으며 일경의 검문이 있을 때마다 이들을 살상하는 등 수년간 일본 경찰을 괴롭혔다. 이진무는 작은 체구로 신출귀몰하는 대담한 활동을 벌여 '흑선풍'이라는 별명으로 불렸고, 애꾸눈이었기에 '일목장군(一目將軍)'으로도 불렸다고 한다.

2. 3. 조선혁명군과 독자 활동

1928년 국민부조선혁명당이 설립되었을 때, 이진무는 국민부의 군사 조직인 조선혁명군에 가담하였다. 그러나 점차 국민부와 의견이 맞지 않아 독자적인 활동을 하게 된다. 1931년 노농자위군을 조직하여 대장에 올랐으며, 노농자위군은 곧 재만조선인혁명군으로 개칭했다.

2. 4. 체포 및 순국

1931년 노농자위군을 조직하여 대장에 올랐으나, 국내에서의 활발한 활동으로 인해 일제의 집중 체포 대상이 되었다. 결국 1932년 김덕기에게 체포되어 사형 선고를 받고 평양형무소에서 사형이 집행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3. 사후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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