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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쿠타 조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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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쿠타 조코는 일본의 문학 평론가, 번역가, 소설가이자 사회사상가로, 1882년에 태어나 1936년에 사망했다. 그는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비롯하여 마르크스의 『자본론』, 호메로스의 『오디세이』, 단테의 『신곡』 등 서양의 주요 저작들을 일본어로 번역하여 일본 지식 사회에 서구 사상을 소개하는 데 기여했다. 또한, 여성 문학 진흥에도 힘썼으며, 사회주의와 무정부주의 사상에도 관심을 가졌다. 말년에는 한센병으로 고통받으면서도 문학 활동을 지속했으며, 그의 번역 작품들은 일제강점기 한국 지식인들에게도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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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쿠타 조코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1903년경 이쿠타 조코
본명이쿠타 고지 (生田弘治)
출생일1882년 4월 21일
출생지돗토리현 히노군 네우정
사망일1936년 1월 11일
사망지도쿄시 시부야구
직업평론가
번역가
소설가
극작가
활동 기간1906년 ~ 1936년
데뷔 작품오구리 후요론 (1906년)
배우자1907년, 가메다 후지오 (1883년 - 1917년)
자녀마리코 (1913년 - )
영향 받은 인물바바 고초
우에다 빈
나쓰메 소세키
모리 오가이
단눈치오
니체
영향 준 인물사토 하루오
이쿠타 슌게쓰
히라쓰카 라이초
웹사이트이쿠타 조코 현창회
안장 장소가마쿠라시의 하세데라 (가마쿠라시)
학력
학력도쿄 제국 대학 문과대학 철학과 졸업
로마자 표기
로마자 표기Ikuta Chōkō
일본어 표기
일본어 표기生田長江
기타
별칭이쿠타 조코 (生田長江)

2. 생애

이쿠타 조코는 1882년 돗토리현 히노정에서 태어나 오사카도쿄에서 교육을 받았다. 1906년 도쿄제국대학 졸업 후 요사노 데칸과 요사노 아키코 부부 옆집에 살면서 여성 대학에서 영어 강사로 일했다.

1909년부터 프리드리히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번역하기 시작하여 1911년에 완료했다. 같은 해 히라츠카 라이초의 문예지 『세이토(青鞜)』 창간을 도왔다. 1916년부터 1929년까지 니체 전집 번역에 힘썼다. 1922년 호머의 『오디세이』, 1924년 단테 알리기에리의 『신곡』을 번역했다.

사회주의사카이 도시히코, 무정부주의자 오스기 사카에와 교류하며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가졌다. 1919년 칼 마르크스의 『자본론』 제1분책을 번역했으나, 1923년경부터 사회주의와 멀어졌다.

1925년부터 1930년까지 가마쿠라 유이가하마에 살았다. 한센병이 악화되어[2] 1936년 시부야 자택에서 사망, 하세데라에 부인과 함께 매장되었다. 마지막 작품은 알렉상드르 뒤마 피스의 『춘희』 번역이었다.

2. 1. 초기 생애와 교육

1882년 돗토리현 히노정에서 아버지 기헤이지(喜平治)와 어머니 카츠(かつ) 사이의 3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본명은 쿠카이에서 따온 "코우지(弘治)"였다. 1895년 고향 히노군의 고등소학교를 졸업하고, 이듬해 형이 있는 오사카로 가서 1897년 모토야마가쿠인 중고등학교 2학년이 되었다.

1898년 개신교 계열 유니테리언 교회에서 세례를 받고 성경에 심취했다. 이듬해 상경하여 아오야마가쿠인 중고등학교 4학년이 되었고, 1900년 제일고등학교 문과에 입학했다. 1903년 도쿄제국대학 문과대학 철학과에 진학하여 미학을 전공했다.

제일고등학교 시절부터 잡지에 글을 투고하기 시작했고, 대학 시절인 1904년에는 우에다 빈·바바 코쵸의 『예원(藝苑)』지 동인이 되었으며[1], 우에다 빈으로부터 "나가에(長江)"라는 필명을 받았다.

1906년 도쿄대학을 졸업하고, 1907년 돗토리현의 카메다 후지오(亀田藤尾)와 결혼했다. 요샤노 텟칸·요샤노 아키코 부부 옆집에 살면서, 고지마치구 이이다초에 있던 세이비 영어여학교의 영어 교사로 1909년 폐교될 때까지 근무했다.

이 무렵 수년간, 여성 문학 진흥에 힘썼다. 1907년 여름, 제일고등학교 시절부터 알고 지낸 모리타 소우헤이와 세이비 영어여학교 경영주와 함께 구단 나카사카시타(현 치요다구 구단)의 유니버설리스트 교회에서 여성을 위한 문학 강습회인 '게이슈 문학회(閨秀文学会)'를 열었다. 바바 코쵸, 요샤노 아키코, 아카시 시로타로 등이 강의하고, 오카모토 카노코, 야마카와 키쿠에, 히라츠카 라이테우 등이 수강했지만, 같은 해 안에 폐강되었다.

2. 2. 문학 활동과 번역

이쿠타 조코는 1906년 도쿄제국대학을 졸업하고, 요사노 데칸 부부의 집에 기거하며 여성 대학에서 영어 강사로 일했다. 1909년부터 프리드리히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번역을 시작하여 1911년에 완료했다. 같은 해, 히라츠카 라이초의 여성 문예지 『세이토』(青鞜) 창간을 지원했다. 1916년부터 1929년까지 니체 전집을 번역하여 총 10권을 출판했다.

1919년에는 칼 마르크스의 『자본론』 제1분책을 번역 출판했고, 1922년에는 호머의 『오디세이』를 번역했다. 1924년에는 단테 알리기에리의 『신곡』을 번역했다.

2. 3. 사회주의, 무정부주의와의 관계

이쿠타는 이 무렵 사회주의사카이 도시히코(Toshihiko Sakai)와 무정부주의자 오스기 사카에(Sakae Ōsugi)와 서신을 교환하며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3] 1919년 칼 마르크스(Karl Marx)의 『자본론』(Capital: Critique of Political Economy)을 일본어로 번역하는 등 사회주의에 접근했으나,[3] 1923년경부터는 마르크스주의에서 멀어졌다.[3] 반면 무정부주의에 대한 관심은 더 오래 지속되어, 다카무레 이츠에(Takamure Itsue)와 수년 동안 서신을 교환하기도 했다.[3]

2. 4. 후기 생애

1925년부터 1930년까지 가마쿠라 유이가하마에 거주했다.[2] 이 시기에 한센병이 얼굴이 변할 정도로 진행되었다.[2] 1936년 시부야 자택에서 사망했다. 하세데라 고지대 묘역에 1917년에 사망한 부인 후지오의 유골과 함께 매장되었다. 마지막 작품은 알렉상드르 뒤마 피스의 『춘희』 번역이었다.

3. 주요 저작 및 번역

이쿠타 조코는 프리드리히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1911년), 칼 마르크스의 『자본론』(1919년), 호머의 『오디세이아』 (1922년), 단테의 『신곡』 (1924년) 등을 번역했다. 1936년 사망 직전에는 뒤마 피스의 『춘희』(1935년)를 번역했다.[3][4]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신초사에서 1911년에 출판되었으며, 이후 유마니 서방(ゆまに書房) 쇼와 초기 세계명작 번역 전집으로 재출간되었다. 또한, 『문어역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서사심수(書肆心水)에서 2008년에 출판되었다.[1]

1916년부터 1929년까지 니체의 모든 작품을 일본어로 번역했다. 『니체 전집』은 신초사에서 출판되었고, 이후 "신역 결정 보급판" 전12권이 일본평론사에서 출판되었다.[1]

그 외에도 플로베르의 『살람보』, 다눈치오의 『죽음의 승리』, 메리메의 『카르멘』, 호머의 『일리아드』, 괴테의 『파우스트 제1부』와 『파우스트 제2부』, 오스카 와일드의 『살로메』,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 게오르크 브란데스의 『니체 초인의 철학』, 줌더만의 『사라지지 않는 과거 전후편』, 투르게네프의 『사냥꾼의 일기』, 루소의 『고백록』 (오스기 사카에 공역),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 (이쿠다 슌겟츠 공역) 등 다수의 작품을 번역했다.[1]

3. 1. 평론

이쿠타 조코는 여러 평론집을 통해 문학, 사회, 사상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1912년에 출간된 『최근의 소설가』에서는 나쓰메 소세키, 모리 오가이 등 당대 주요 소설가들을 다루었다.[1] 1914년에는 『문예평론』을,[1] 1920년에는 『철저한 인도주의』를 통해 인도주의적 관점을 제시했으며,[1] 1925년에는 『초근대파선언』을 발표했다.[1]

3. 2. 소설 및 희곡

신초사(新潮社)에서 1920년에 출판된 『환경(環境)』은 원래 『범행(犯行)』이라는 제목으로 발표되었다. 이 작품은 1974년 세계문고(世界文庫) 부락문제 문예작품선집 15에 수록되었다.[3]

1922년에는 천우사(天佑社)에서 장편소설 『낙화처럼(落花の如く)』이 출판되었고,[4] 같은 해 취영각(聚英閣)에서 두 번째 희곡집 『찬탈자(簒奪者)』가 출판되었다.

3. 3. 번역

4. 평가 및 영향

이쿠타 조코는 서구 문학과 사상을 일본에 소개하는 데 큰 역할을 한 인물이다. 특히 프리드리히 니체와 칼 마르크스의 저작을 번역하여 일본 지성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1911년 프리드리히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일본어로 번역 완료했고, 1916년부터 1929년까지 니체의 저작을 계속 번역하여 결국 니체의 모든 작품을 일본어로 번역했다. 1922년에는 호머의 『오디세이』를 번역했다.

1919년 칼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일본어로 번역했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와의 관계는 짧았고, 1923년까지 마르크스주의적 이상에서 멀어졌다. 반면 무정부주의에 대한 관심은 더 오래 지속되어, 수년 동안 다카무레 이츠에와 서신을 교환했다. 1924년에는 단테 알리기에리의 『신곡』을 번역했다.

이쿠타는 여성 문학 진흥에도 힘썼다. 1911년 히라츠카 라이초가 여성 문예지 블루스토킹(『세이토』)을 창간하는 것을 지원하여 여성 문학 발전의 기반을 마련했다. 그의 문학 서클에는 오카모토 카노코, 야마카와 키쿠에, 히라츠카 라이초가 포함되었다.

사회주의사카이 도시히코와 무정부주의자 오스기 사카에와 서신을 교환하며 사회주의, 무정부주의 사상과의 관계를 맺었고, 이는 일본 사회사상 논의에 일정한 영향을 주었다.

5. 한국과의 관계

이쿠타 조코의 번역 작품은 일제강점기 한국 지식인들에게도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니체마르크스 저작은 한국의 근대 사상 형성에 간접적인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이쿠타 조코와 한국과의 직접적인 관계에 대한 내용은 확인되지 않는다.

참조

[1] 서적 コンサイス日本人名辞典 第5版 株式会社三省堂 2009-00-00
[2] 웹사이트 大江希望:「癩」 ノート http://www.ne.jp/asa[...]
[3] 웹사이트 国会図書館のNDL-OPAC検索
[4] 웹사이트 http://my.sanin.jp/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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